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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유대인과 이방인의 주(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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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5-07 09:54 조회9,133회 댓글0건

본문

 

 

5월 1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4분

 

기억절 :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 42:6).

 

연구 범위 : 마 14:1~21, 출 3:14, 마 14:22~33, 사 29:13, 마 15:1~20, 마 15:21~28

 

예수님은 마 15:24에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육체를 입고 계셨던 날 동안 그리스도의 사역은 대부분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였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관심을 기울이시는 유일한 백성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지상의 모든 백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5~7).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에서 출현할 메시아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할 계획이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구원이 절실한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주시는 구원에 대해 좀 더 알아보려고 한다.

 

➊ 깨닫기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유의 주 되심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준다.

 

A.

❷ 제자들은 어떤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더 넓은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까?

※ 오벼이어(五餠二魚)와 바다 위를 걸으신 사실 등등을 통하여 점점 깨달아갔다. 

❸ 예수님이 이방인 사천 명을 먹이신 일화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 모든 이방인도 예수님께 와서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고 먹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❹ 현재 우리 교회가 위치한 환경에서 우리는 어떤 대상에게 구원과 사랑의 관심을 확장시켜 나가야 할까요?

※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할 수만 있으면 해야 한다. 

 

B. 

❷ 폭풍을 만난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주로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 그분이 창조주라는 사실과 천연계를 섭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❸ 가나안 여인의 경험에 따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모든 멸시와 조소를 감내하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참고 기다려 받아들이는 것이다. 

❹ 혹시 우리 가운데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모시고 믿음으로 견디며 이겨야 할 문제를 안고 있는 동료가 있다면 함께 위로하며 기도해 줍시다.

※ 아멘.

 

결론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유의 주십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께 시선을 고정하고 언제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분께 의지해야 합니다.

 

 

첫째날(일) 굶주린 자들을 먹이심

5월 8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 14:19~21).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행적 가운데 하나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마 14:21)을 먹이신 사건이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이 기사에도 예수님이 왜 그런 일을 행하셨는지를 짐작할 만한 배경이 있다.

 

1. 마 14:1~21을 읽어 보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이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 그 사건은 다음 사건이 일어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마14:1~21]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3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4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5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6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7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8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9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10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11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12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13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답: 침례요한이 헤롯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제자들이 크게 실망하고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겼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으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보이셨다. 

 

그대가 당시 제자들의 위치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침례요한이 막 참수를 당했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알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본문에는 없지만 그 사건은 제자들을 크게 낙담시켰을 것이고, 여지없이 그들의 믿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낙망 이후에 예수님의 다음 행적은 그들의 믿음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은 제자들의 믿음을 얼마나 고취시키셨는지와 무관하게 훨씬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유다 백성들을 먹이신 예수님의 행적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먹이셨던 만나를 떠올리게 했다. “유대교 내에는 메시아가 유월절에 올 것이며 그가 올 때에 만나가 다시 내리기 시작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월절 직전에 오천 명을 먹이셨을 때, 그분이 메시아일지 모르며, 만나를 내려서 모든 사람을 먹이는 더 큰 기적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군중들의 기대를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Jon Paulien, John: The Abundant Life Bible Amplifier (Boise: 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 1995), pp. 139, 140. 이는 정확히 백성들이 바라던 종류의 메시아였다. 즉 그들은 자신의 외적인 필

요를 돌보는 메시아를 바랐다.

군중들은 그때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으나 그분은 왕이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의 거절은 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편협하고 세속적인 기대 이상의 일을 행하기 위해 오셨건만 많은 이들은 그들이 기대하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자, 그분에게서 돌아서고자 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침례요한이 잡히신 사실을 듣고 유대지방을 떠나서 갈릴리고 가셨다. 제자들이 상당히 의아해 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하여 의심이 생겼을 것이다. 우리는 그 분명한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일이 침례요한과 공모한 것이 아님을 은근히 드러내신 것일 수도 있다. 한 번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너무 놀라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14장 사건은 요한이 순교당한 사건이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그 사실을 고하였다. 그들은 요한이 예수께 보냈을 때 예수님의 일을 보고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확인했고 요한은 그것을 확신시켰을 것이다. 기록상으로 그들은 담담히 예수께 사실을 전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때마침 유월절이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많은 군중에게 떡 다섯 개(오병) 생선 두 마리(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것을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셨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은 일을 하신 것이다. 여기 나타난 숫자는 실제이기도 하지만 또 상징성도 있는데 오천 명, 떡 다섯 개, 열 두 바구니 등의 5와 12라는 숫자는 ‘모세 오경’과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의미 있는 숫자로 이해된다. 결국 이러한 점들은 많은 학자들로부터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은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요한복음 6장에 의하면 이것은 예수께서 유월절 양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룟유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제자들과 백성들을 충동했다. 

 

교훈 : 백성들은 오천 명을 먹이는 사건을 보고 예수님이 왕이 되시기를 바랐지만 그분은 더 중요한 사명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그들의 계획을 거부하셨다.

 

 

둘째날(월) 만유의 주

5월 9일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마 14:22).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에 오르도록 명하셨다(마 14:22). 그분은 그들이 혼란과 압박에서 떠나기를 바라셨다. 훌륭한 스승은 제자들이 아직 다룰 수 없는 문제로부터 그들을 보호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당신이 백성들을 해산시키는 동안 배를 타고 즉시 가버나움에 돌아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들은 그 계획에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전에 결코 취하지 않으셨던 위엄으로써 말씀하셨다. 그들은 더 이상 반대할지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잠잠히 바다를 향하여 돌아섰다”(시대의 소망, 378).

 

1. 마 14:23~3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예수님과 구원의 본질에 관해 어떤 사실을 드러내는가?

[마14:23~3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답: 예수께서는 스스로 계시는 분(에고 에이미)이시면 창조주이시고 피조물을 섭리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셔서 당신께서 메시아이심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겁에 질린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 자신들에게 오는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해했다. 그때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4:27)고 말씀하셨다. ‘나니’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에고 에이미’로 이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기도 하다(출 3:14 참고).

성경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분으로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시편 104편에서 하나님은 창주조일 뿐 아니라 유지자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통해 세상이 계속 존재하고 천연계의 법칙이 작동한다. 거기에는 세상을 창조하고 내버려 둔다는 이신론적인 신에 대한 암시는 전혀 없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우리 모두는 호수를 잠잠하게 하셨던 동일한 주님의 유지하시는 능력 덕분에 존재하고 있다(히 1:3 참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마 14:30)라고 했던 베드로의 절규는 우리의 삶에서도 메아리친다. 주 예수가 아니면 누가 우리를 구원하겠는가? 그 상황에서 드러난 베드로의 무력함은 이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무력함을 반영한다.

 

<부가설명> 14장에 기록된 일련의 사건들은 침례요한의 순교와 관련되어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 마음에 확신을 주기 위한 주님의 사랑의 발로이다. 5천명을 먹이신 사건과 물위를 걸으신 사건은 예수님이 창조주이시고 천연계를 섭리로 돌보시고 주관하시는 여호와이심을 증거하는 표적이었다. 5천명 먹신 사건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인식했다. 아마도 옛날 엘리사의 이적을 생각했을는지 모른다.(왕하 4:42~44) 그러나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을 거쳐서 베드로가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이시며 메시아이심을 확신하기를 기대하셨다. 그리고 메시아 왕국이 이 세상이 아니라 부활의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영생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을 제자들이 깨닫기를 기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이 깨닫는데 너무 둔했고 성령께서 오신 다음에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미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충분히 듣는 시대에 있다. 우리의 믿음을 어떤가?

 

교훈 : 호수에서 폭풍을 만난 제자들은 만유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능력을 목격하고 그분이 무력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셋째날(화) 위선자의 마음

5월 10일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 29:13)

 

1. 비록 이것은 하나님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지만 여기서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기별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들에게 경고하시는 두 가지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동일한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답: 오늘날 교회도 외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내적으로 이기적인 사상과 생활에 젖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한다. 두 가지 문제점은 말로만 공경하고 마음은 멀고, 성경이 아니라 사람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기록한 뒤 수백 년 후에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이 말씀을 인용하셨다.

 

2. 마 15:1~20을 읽어 보라. 구체적인 쟁점은 무엇이며 예수님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셨는가?

[마15:1~20]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15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답: 쟁점은 유대인의 유전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 유전을 지키느라 성경의 교훈을 저버린다. 유전은 주로 외적인 것에 치우쳐 있고 성경은 사람의 마음에 대하여 가르친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신 후 어느 시점에 예수님은 무엇이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지에 대한 문제로 유대교 교사들과 토론을 벌이신다. 교사들은 외부적인 부정함에 관하여 율법에 온갖 규례를 덧붙였다. 예를 들면 그들은 특정 방식으로 손을 씻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규례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 문제를 지적하자, 예수님은 그와 같이 반응하셨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주 덫에 걸려들게 하는 ‘위선’을 강하게 정죄하신다. 실제로 동일한 잘못 심지어 더 심한 잘못을 저지르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말로나 마음으로 그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눈멀고 남의 잘못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위선자가 되기 쉽다.

 

<부가설명> 유대인들은 ‘미쉬나’를 가지고 있다. ‘미쉬나’는 조문(條文)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유대인의 탈무드에 중심 되는 부분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들이 할 것과 하지 말 것에 대하여 세세한 지침이 있다. 예수님 시대에 유전이라는 것은 주로 미쉬나와 관련된 것들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어떤 형식으로 씻어야 하는지도 규정이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손을 씻는 것과 다르다.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부정하다고 여겼다.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은 일 때문에 유전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논쟁이 생긴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 말을 가지고 사람들은 아무것이나 먹어도 된다는 주장의 근거를 삼으려고 한다. 이것도 유대인들이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폐하는 것과 같다. 씻지 않을 손으로 음식 먹은 것을 가지고 먹은 것 자체에 대한 것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르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 자기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하여 성경구절을 찾으면 그러 구절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그런 구절로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범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조심하고 말씀 자체에 자아를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위선이 빠지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우리 모두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비판함으로써 위선자가 될 가능성이 많다.

 

 

넷째날(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5월 11일

 

예수님은 유대 백성을 먹이시고 치유하시며 그들에게 설교하신 뒤에 큰 결정을 내리신다. 그분은 유다 지역을 벗어나 변방의 이방인 지역에 들어가셨다.

 

1. 마 15:21~28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답: 이방인 가나안 여인에게 구원이 유대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고육책이었다. 

 

여러 면에서 이것은 읽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의 억양과 얼굴 표정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처음에 그 여인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와 대화하실 때에 그분의 말씀은 매우 거칠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마 15:26).

그대가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어떨까? 어떤 사람들이 그대에게 과자를 좀 달라고 했는데 그대가 ‘나의 과자를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친구가 되자는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 취급하며 피부병에 걸려 거리를 배회하는 개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사용한 ‘작은 개’ 또는 ‘강아지’라는 의미의 그리스어는 훨씬 다정한 표현으로서 집에서 먹이고 키우는 개를 연상시킨다.

둘째로,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이는 예수님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았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훌륭한 교사처럼 아마도 대화로 그녀를 시험했던 것 같다. 크레이그 키너는 이렇게 말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분의 진정한 사명과 정체를 이해시킴으로 자신을 퇴마식을 행하는 떠돌이 마술사들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 않도록 요구하셨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분은 거룩한 계획 속에 이스라엘의 우선권을 인정하게 하셨고 그러한 인식은 그녀의 의존적인 상태에 대한 시인을 포함했다.… 혹자는 이것을 나아만에게 아람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 대신 요단강에 몸을 담그라고 했던 엘리사의 요구가 결국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땅을 인정하게 했던(왕하 5:17~18) 사실과 비교한다.”―The Gospel of Matthew: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p. 417.

마지막으로 이 여인은 아마도 “두로 인근에 거주하는 가난한 유대인들로부터 일상적으로 양식을 갈취하는” 계급에 속하는 그리스 상류층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은 그 권력의 관계를 바꾸셨다.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 속한 양식을 제공하시고…이 그리스인은 방랑하는 유대인으로부터 도움을 구해야 한다.”―The Gospel of Matthew: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p. 417. 이 기사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신뢰해야 한다. 이 여인과 담화를 나누면서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녀를 존귀하게 하셨다. 그녀는 치유를 받은 딸과 함께 다윗의 자손에 대한 불붙는 믿음을 가지고 자리를 떠났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소원을 멀리서 아시고 일부러 그 여인이 찾을 수 있는 곳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여인의 간청을 들으시고 냉정하게 들리는 대답을 하신 것은 제자들을 위시하여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드러내어 보이신 것이다. 제자들이 교육 받기를 기대하셨다. 또 여인의 간절한 마음은 죄의 치유를 기대하는 인류의 마음인 것을 제자들이 알기를 원하셨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시고 유대인이 개처럼 취급하는 이방인들도 유대인의 밥상으로부터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모른다. 예수님의 어조나 그 말을 들은 여자의 표정이나 제자들의 표정 등을 알지 못한다. 기록된 언어는 현장에서 듣고 보는 것과 많이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런 사건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침내 예수께서는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시면서 그가 믿음이 있다는 칭찬을 하셨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진심을 깨달았을 것이고 가나안 여인은 구원이 유대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두로 지역의 가나안 여인을 만나서 그분의 사명과 정체에 대한 그녀의 믿음을 고취시키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보여주셨다.

 

 

다섯째날(목) 이방인들의 주님

5월 12일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마 15:38).

 

1. 마 15:29~39을 읽고 마 14:13~21과 비교해 보라. 이 두 기사의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

[마15:29~3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31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33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5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36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37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38 먹은 자는 여자와 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9 예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배에 오르사 마가단 지경에 가시니라.

[마14:13~21]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15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17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8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19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20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답: 유사점은 적은 양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것이고 차이점은 5천명은 유대인이고 4천명은 이방인이며 떡의 수와 남은 양이 각각 다른 것이다. 

 

예수님이 군중을 먹이신 기적이 두 번 있었다. 그런데 첫 번째 기적에서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두 번째 기적에서는 이방인들을 먹이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예수님은 두 경우 모두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이 젊은 랍비의 가르침을 듣고 그에게서 사랑과 양식을 얻기 위해 수천 명의 이방인들이 나오는 장면을 생각하면 놀랍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를 보면서 복음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해하지만, 이같이 신기하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당시의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지는 간과하고 만다.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안전지대에서 끌어내셨다.

그러나 이것은 지상의 모든 백성을 그분께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구약성경의 한 놀라운 말씀이 이러한 진리를 증언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기르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암 9:7).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분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백성의 일에 관심이 있단 말인가? 그분이 블레셋인들에게 관심이 있단 말인가?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러한 진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수백 년 동안 이 진리가 너무 모호해졌지만 신약교회가 형성되면서 초기의 많은 신자들은 성경의 이 기본 진리를 깨달아야 했다.

 

2. 롬 4:1~1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복음과 그것의 보편성을 어떤 방식으로 담고 있는가?

[롬4:1~12]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2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답: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음을 맡기실 때 모든 사람이 너를 인해 복을 받으리라고 한 것은 할례자와 무할례자드를 다 포함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민족과 방언과 국가와 상관없이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을 아시고 예수님을 마지막 아담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의 죽음으로 십자가로 처리하셨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마지막 아담 예수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게 하셨다. 창세기부터 이 사실을 계시한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을 때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마엘 뿐이었다. 그 후에 이삭이 태어나고 8일만에 하례를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을 때에는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다 하례를 받았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언약이었다. 이때 벌써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만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집에 사는 이방인들도 할례로 하나님과 언약한 것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들이 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도 아브라함 안에서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4천명을 먹이신 것은 이방인이었다. 4는 세상 수이다. 7은 완전수이다.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으로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암시가 있다. 5천명 먹였을 때 바구니는 ‘코피노스’인데 도시락 정도의 크기라고 한다. 개인의 음식을 담는 그릇이다. 한 끼를 담는지 몇 끼를 담는지는 모르지만. 광주리는 ‘스피리스’인데 이방인들이 과일이나 물고기를 담기 위하여 갈대로 만든 큰 그릇이다. 5천명 때보다 더 많은 양이 남았다는 뜻인데 이방인이 풍성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두어질 것을 예표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런 이적을 통하여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가르치셨다. 

 

교훈 : 예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 군중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만민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시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13일

 

한 기독교 신자가 대학 캠퍼스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일반적인 논증을 다 동원한 뒤에 그는 방향을 바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여러분 나이였을 때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때로 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나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했습니다. 왜 그랬냐구요? 왜냐하면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음성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깊은 시름에 잠겼습니다.”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동시에 양심이 서로 부딪히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불편해진 얼굴들이 달아올라 실내 온도가 치솟는 것 같았다. 그는 정확히 아픈 곳을 건드렸다. 그 학생들은 기독교인들도 아니고 십계명에 전혀 관심이 없었겠지만 그들의 삶 전체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고, 신이 존재한다면 답해야 할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덕적인 표준에 너무도 익숙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도덕적인 하나님의 실존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우리의 죄악과 마주했을 때에 우리는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제공되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철저하게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롬 8:1).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이 없다. “연령, 계급, 국적 혹은 종교적 특권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은 예수께 나아가 생명을 얻으라는 초청을 받고 있다”(시대의 소망, 4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마 16:1~12을 읽어 보십시오.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6절)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마16:1~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 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7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 그릇된 교훈을 듣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분별할 줄 알면서 분별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주입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➋ 만민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기독교에서 가장 강조되어야 하는 기별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가 전하는 기별이 비판적이며, 거만하고, 우리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서 모든 사람에 대한 동정심을 더 잘 나타낼 수 있을까요?

※ 예수님 정신으로 생활하고 관용과 온유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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