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그리스도 안에서 쉼(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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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4-30 05:21 조회8,210회 댓글0건본문
5월 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7분
기억절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연구 범위 : 마 11:28~30, 마 12:1~2, 눅 14:1~6, 요 5:9~16, 마 12:9~14, 사 58:7~13
“그리스도는 율법의 산 표본이셨다. 그의 생애에서는 율법의 거룩한 명령을 범한 일을 찾아볼 수 없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정죄하려는 기회를 찾던 증인들을 바라보시면서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요 8:46)고 말씀하셨지만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시대의 소망, 287).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의 의미를 온전하게 반사하였다. 그분은 인성과 육체를 입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율법이셨다.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연구함으로 십계명을 준수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메마르고 생명력 없는 율법주의와는 다르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물론 그 계명 가운데는 제칠일 안식일도 포함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마태복음을 계속 공부하면서 몇 개의 안식일 논쟁을 살피고 예수님의 생애에서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율법이 진정 하나님의 품성을 반영하고 예수님이 그렇게 율법을 구현하셨다면, 우리는 그분이 넷째 계명을 어떻게 지키셨고 그것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무엇보다 그분의 성품을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반사할지 깨닫게 될 것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예수님 안에 구원의 안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안식일에 주어지는 구원의 쉼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안식일의 휴식을 기뻐하며 기념한다.
A.
❷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었습니까?
※ 안식일을 굴레 씌우는 날로 삼았다.
❸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우리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합니까?
※ 선을 행하는 날로 지키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의 구원의 생명을 증거하는 날이라로 지키라 하신다.
❹ 안식일을 진정한 행복과 기쁨의 날로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과 정신이 필요하다.
B.
❷ 예수님이 안식일 문제로 지도자들과 자주 갈등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유대 지도자들은 안식일 지키는 방법으로 예수님과 갈등했다.
❸ 특히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신 기사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 안식일은 회복하는 날이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❹ 어떻게 우리가 안식일을 준수함으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요?
※ 예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회복하게 하는 일을 실천할 때 가능하지 않겠는가.
결론 : 우리가 안식일의 진정한 정신을 알고 준수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창조와 구원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안식과 관계를 기념하는 놀라운 경험이 됩니다.
첫째날(일) 그리스도의 가벼운 멍에
5월 1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마 11:20~27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사역을 거절한 갈릴리 지역의 몇 성읍에 대하여 강하게 책망하신다. 예수님의 견책과 경고가 그토록 날카로웠던 이유는 그들이 진리를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진리 자체이신 분께서 육체를 입고 그들 중에 계셨다. 그것으로 모자라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마 11:20). 그런데도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했다. 그분은 자신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권능을 소돔에서 행했다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마 11:23)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소돔 백성보다 더 악했다.
그런 다음 25~27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기도드리며 그분께 감사하고 두 분 사이의 친밀한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음을 인정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읍들이 그분을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지 더욱 분명해진다.
1. 마 11:28~3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앞의 말씀 바로 다음에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답: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 등 마을들이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거절하였다는 것을 밝히시고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면 참된 쉼이 있다는 것을 선언하신 것이다. 참된 쉼은 죽음을 이길 때 있다. 죽지 않고 온전한 평화의 생명을 소유하면 진정한 쉼이 있다. 세상의 불안과 공포는 죽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가. 영생하는 사람은 참된 안식을 누린다.
불신을 나무라고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재천명하신 뒤에 예수님은 지쳐 있는 모든 자들에게 그분 안에 있는 안식을 누리라고 제안하신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자신을 거절한 자들이 저지른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분에게는 자신이 말한 것을 실행할 권세와 능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께로 가면 우리 심령에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어진 말씀에 따르면 그 안식 속에는 평화와 구원의 확신 그리고 그분을 거절한 자들에게는 없는, 그들은 가질 수도 없는 희망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이 게으름을 뜻하겠는가? 아니면 뭘 해도 좋다는 뜻인가? 물론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대한 매우 높은 표준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산상보훈에서 보았다. 예수님과 맺는 관계는 우리를 피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을 알고 그분의 삶과 그분의 성품을 모방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고통과 수고로부터 안식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러한 안식의 한 표식이 안식일을 지키는 데에 있다.
<부가설명>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 등은 갈릴리 지역의 마을들로서 예수님이 갈릴리 전도여행하실 때 자주 가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이적을 행하신 마을들이다. 고라신은 ‘나무가 많은’이라는 뜻이다. 신약성경에 이 구절과 누가복음 10:13에만 나오는 마을이고 벳세다는 ‘사냥의 집’이라는 뜻이다.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의 고향이다. 예수께서 어느 지역에서 복음 봉사를 했다는 기록을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구절의 말씀으로 볼 때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마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본부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두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한 마을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에 이 도시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다 멸망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창조주시면 진리이신 예수께서 친히 오셔서 생명의 복음을 전했는데도 믿지 않았다. 이런 상태는 이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얼마나 어려운 곳인지 암시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온 세상에 20억이 넘는 사람들을 교인으로 가지고 있지만 진정으로 복음을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적을 것이다. 역사의 종말에 남은 자손으로서 진정으로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는 재림기별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2천만이 체 안 된다. 그 2천만 중에 생명의 복음을 바르게 깨닫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복음사역자들은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전할까?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이 교과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부디 생명의 복음 안식의 기별을 바르게 깨닫는 기쁨을 맛보았으면 좋겠다.
교훈 : 예수님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의 사역을 거부했던 성읍들을 책망하면서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둘째날(월) 안식의 날에 쉬지 못함
5월 2일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 12:1~2).
기독교계의 다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됐거나, 대체됐거나, 어떤 형태로든 성취되었다면, 왜 예수님은 안식일을 준수하는 방법을 다루는 데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을까?
1. 아래의 성경절들을 읽어 보라. 논쟁 중에 있는 문제들은 무엇이며 문제가 아닌 것은 무엇인가?(마 12:1~2, 눅 14:1~6, 막 2:23~28, 요 5:9~16)
[마12:1,2]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눅14:1~6]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막2:23~28]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핍절되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27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요5:9~16]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 대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답: 안식일에 일한다는 것이 논쟁이고 안식일 날짜 자체가 논쟁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이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이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역사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안식일의 거룩성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엇이 안식일에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지에 대하여 장황한 규범과 규율을 만들었다. 그러한 규범 가운데 어떤 것이 있었는가?
만약 암탉이 안식일에 달걀을 낳았다면, 그것은 먹어도 괜찮은 것인가? 바리새파 다수의 의견은 암탉이 달걀을 낳는 닭이라면 안식일에 낳은 달걀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닭이 안식일에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그 닭이 달걀을 낳는 닭이 아니라 살을 찌워 잡아먹으려던 닭이라면 그것이 낳은 달걀은 먹어도 좋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닭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는 안식일을 범한 그 닭을 나중에 도살한다면 안식일에 낳은 그 달걀을 먹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안식일에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은 괜찮은가? 대답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대가 새치를 보면 그것을 뽑고 싶은 유혹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곡식을 뽑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
만약 안식일에 집에 불이 난다면, 옷가지를 가지고 나와도 괜찮은가? 대답은 한 벌의 옷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이미 한 벌의 옷을 입고 있다면 다른 한 벌을 들고 나올 수 있다. (반면, 그대의 집에 불이 났을 때에 이방인에게 불을 꺼달라고 요청해서는 안 되지만 이방인이 그냥 불을 꺼준다면 그것은 괜찮다.) 안식일에 침을 뱉는 것은 괜찮은가? 돌 위에는 뱉어도 되지만 땅에 뱉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흙 반죽을 만들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우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교인들이다. 우리가 안식일에 대한 바른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자주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고 예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안식일의 성경적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고 일을 쉬고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셔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복을 주신 날이다. 이 날을 거룩한 날이고 복이 있는 날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거룩하신 분에게 소속되었을 때의 상태이다. 날짜는 성품이 없다. 안식일에 감정이 없다. 날짜에 무슨 못된 감정이나 선한 감정이 있겠는가. 그래도 그 날이 거룩하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날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은 그 날짜를 창조주께서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창조주 여호와를 거룩하게 여기는 정신이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를 가르쳐주셨을 때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를 거룩하게 여기는 방법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임을 염두에 두셨다고 믿는다. 그 이름을 거룩히 여가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이름을 귀하여 부르고 간직하는 것 등등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유일한 방법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이 날에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할 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고 그분이 나의 창조주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며 결과 당연히 나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 모든 피조물이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을 기억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오직 창조주와 바른 관계에 의하여 살며 활동하며 존재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교훈 : 바리새인들은 과거의 민족적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안식일에 관한 장황한 규범들을 제정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안식일을 짐이 되게 했다.
셋째날(화) 예수님의 반응
5월 3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예수님은 너무 엄격하여 실천하기 불가능한 안식일 준수 강요로 말미암아 안식일의 본래 목적이 파괴되고 있는 풍조 속에서 봉사하셨다. 그날은 노동으로부터 휴식하는 날이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이며 다른 날에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동료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는 날이고 자녀들이 다른 날보다 더욱 그 부모와 함께 지낼 수 있는 날이며, 무엇보다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날이 되어야 했다.
1. 마 12:3~8을 읽고 바리새인들의 무거운 멍에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보라. 또한 삼상 21:1~6을 읽어 보라. 여기에 예수님께 익숙한 어떤 논리가 있는가?
[마12: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삼상21:1~6]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3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4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5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6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
답: 시장할 때 안식일에도 먹어서 기력을 회복해야 하고 성전 안에서 제사장이 봉사하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신 분이시다. 그분을 위하여 행하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나중에 이보다 훨씬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마 23:23~24). 예수님은 도망자 다윗이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성소의 떡을 먹었던 익숙한 이야기를 예로 드신다. 성소 제사에서 떡에는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그 상황에서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느끼는 굶주림이 더 중요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느낀 배고픔은 추수를 제한하기 위한 의도로 제정된 안식일 규정보다 중요하였다.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일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드셨다. 안식일은 봉사의 일을 허용했다. 마찬가지로 안식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역하는 것을 허용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그분의 사역이 성전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어디에서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안식일 준수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약화시키는 발언을 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안식일 자체가 아닌 그것의 본래 목적을 가리는 무의미한 규칙들로부터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노력하셨다. 안식일은 우리의 창조주와 구속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안식을 표출하는 방법이다.
<부가설명>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방법론에 대한 논쟁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의미를 대답으로 제시하신다. 안식일은 생명의 날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느헤미야가 또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느8:10) 안식일은 기뻐하는 날이다. 시장하면 기쁨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안식일에 일부러 음식을 준비하라는 말은 아니다. 미리 준비하고 함께 먹고 기뻐하는 날인데, 미처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준비한 사람들이 나누어 함께 먹고 기뻐하며 만물을 창조하여 사람들로 먹고 기뻐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의 뜻이다. 양식을 생명의 기력을 돕는 것이며 제사장의 성전 봉사는 속죄와 화목을 확인하는 봉사이다. 안식일에 창조주와 관계없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일은 하지 않아야 한다. 안식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날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일이라는 핑계로 인간적 이익을 도모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일과 인간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느낄 때가 있다. 우리가 예수께서 하시지 않을 일을 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 하실 그 일을 하면 다 형통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안식일의 본래 취지를 가리는 인간의 규율을 반대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누려야 할 진정한 안식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셨다.
넷째날(수) 안식일에 치유를 베푸심
5월 4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2).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기자들이 기록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매우 흥미로운 안식일 논쟁을 본다. ‘만약 안식일이 폐지될 운명이었다면 왜 사복음서의 모든 기자들은 수많은 기사들 중에 안식일 준수에 대하여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과 벌인 갈등을 포함시켰을까?’ 복음서가 예수님의 사역이 끝난 후 수십 년 뒤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런 의문은 더욱 부각된다. 학자들마다 의견이 갈리지만 복음서의 기록 연대는 대체로 예수님의 사후 20~30년 사이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주장처럼) 제칠일 안식일이 일요일로 대체되었다면 그때까지 이런 변화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영감적인 기록 어디에도 암시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칠일 안식일이 폐지, 변경, 대체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사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어떤 명령과 모본에서도 그런 변화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의 명령과 모본에 초점을 맞춘다면 복음서는 제칠일 안식일의 연속적인 유효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1. 마 12:9~14을 읽어 보라. 이곳의 쟁점은 무엇인가? 왜 그것이 또 다른 논쟁의 발단이 되었는가?
[마12:9~14]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0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답: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는 것으로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논쟁이 되었다.
“또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을 때에 그곳에 손이 마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무엇을 행하시는지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구주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범죄자로 여김을 받을 것을 잘 아셨으나 주저 없이 안식일을 가로막은 유전적 요구의 벽을 무너뜨리셨다.… ‘기회가 있었음에도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며 생명을 구출하기를 등한히 하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의 한 격언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랍비들이 견지하고 있는 입장에 서서 대항하셨다”(시대의 소망, 286).
이전의 안식일 일화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여기서도 백성들이 율법과 신앙생활의 더 높은 목적을 주목하게 하셨다. 백성들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소는 끌어올릴 테지만 고통당하고 있는 동료 인간을 구할 마음은 없었다. 그들은 이토록 왜곡된 안식일 규범을 범하느니 기꺼이 그 사람을 고통과 아픔 가운데 내버려두려고 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습관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신앙의 길을 방해하지 않으리라고 쉽게 확신해서는 안 된다.
<부가설명>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선이 무엇인가? 마가복음에는 좀 더 생동성 있게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3:3~5) 이 구절에서 교과 저자가 인용한 유대인의 격언의 내용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 질문으로 예수님은 선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뜻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셨다. 안식일에 행해야 하는 선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는 일이 바로 안식일에 행할 선이다. 이것은 도덕적 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으로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일, 곧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하는 일이다. 재림성도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선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고 그 선을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살리는 것에는 육신의 건강도 포함되지 않겠는가? 환자를 방문하고 격려하는 것도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 이후에 기록된 사복음서는 어디서도 안식일에 대한 폐지나 변경을 말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더 높은 목적을 주목하게 한다.
다섯째날(목) 안식일 준수
5월 5일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 58:12).
복음서에 분명하게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은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들이 그것 위에 올려놓은 무거운 짐으로부터 안식일을 회복시키셨다. 기독교도들은 그 이후로도 수백 년 동안 여전히 안식일에 쉬며 하나님께 예배하였다. 5세기 역사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교회가 매 안식일마다 거룩한 신비의식(성만찬)을 거행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기독교도들은 어떤 고대 전통으로 인해 이 일을 행하기를 거부하고 있다.”―Ecclesiastical History, book 5, p. 289. 복음서에 이 모든 기사가 기록된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것이 안식일을 부정하기 위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1. 마 12:12을 다시 읽되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는 구절을 주목하라. 예수님이 그것을 언급하셨던 당시의 상황뿐 아니라 안식일 준수에 대한 더 포괄적인 맥락에서 그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마12: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답: 안식일은 사람을 치유하고 살려주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비록 유대법도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에게는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예수님은 한 발 더 나가셨다. 그분에게는 다른 날에 제공할 수 있는 치료도 안식일에 허용되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 13:52)고하셨다. 물론 예수님도 새것을 꺼내고 계셨다.
2. 사 58:7~13을 읽어 보라. 여기서 설명하는 내용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하나님을 따르고 안식일을 포함하여 율법의 원칙대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가? 특별히 세 천사의 기별의 맥락에서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는 구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58:7~13]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답: 안식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달아 실현하는 것인데, 그것은 생명 회복과 창조주와의 관계 회복을 확실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치셨다.
<부가설명> 재림성도들은 오래 황폐된 곳과 역대의 무너진 것을 수리해서 회복하는 자들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수리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또 창조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래 황폐하고 역대에 무너진 진리가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오래 황폐한 진리는 부활 진리이다. 곧 생명의 진리이다. 사단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람이 정녕 죽는 것을 보고는 자기의 부하들을 동원하여 마치 사란의 육체는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증명하려는 듯이 죽은 자의 영혼이 활동하는 것처럼 사람을 속인다. 이 사상을 믿는 한 부활의 생명은 소망이 아니다. 그리고 창조의 기념일인 제7일 안식일 대신에 부활을 기념한다고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도록 했다. 실제적인 부활은 부인하게 하고 예수님 부활하신 그 날을 기념하여 오직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하면서 성도들의 부활은 결코 죽지 않은 영혼이 돌아와서 육체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오해하게 하였다. 이것은 부활이 아니다. 그냥 소생(蘇生)일 뿐이다. 이것은 생명의 도리가 아니다. 남은 자들이 전하는 세 천사의 기별은 이것을 회복하는 기별이다. 즉 생명과 창조의 기별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회복하라는 기별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고 그렇게 믿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다. 세 천사의 기별은 이렇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인 것이다.
교훈 : 이사야 58장이 안식일의 회복과 구속의 의미를 강조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안식일 준수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하셨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6일
어떤 사람은 “종교가 있든지 없든지 착한 일을 하는 착한 사람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악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1600년대 프랑스의 신비주의자 블레즈 파스칼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고를 남겼다. “사람은 종교적인 확신을 가지고 악을 행할 때처럼 철저하게 기쁜 마음으로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는 다소 과장된 주장이지만, 불행히도 진실을 일부분 내포한다. 이런 사실은 이번 주 교과에서 다룬 안식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시면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사악한 목적을 그들에게 들이대셨다. 예수께서는 생명을 구하시며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시는 반면에 그들은 심한 증오심을 가지고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행하신 바 고통당하는 자들을 고치는 것보다 그들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 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나았는가? 하나님의 성일에 인자한 행실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보다 마음에 살의를 품는 것이 더 의로웠는가?”(시대의 소망, 28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마 12:7)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다음 성경절들을 참고하여 답을 생각해 보십시오(마 9:10~13, 호 6:6, 사 1:11~17).
[마9:10~13]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사1:11~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 종교 행사와 종교적인 존재가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그 생명의 본질을 따라 생활하라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본질이 사랑이고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다.
➋ 성경의 확실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수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부정하는 데 그토록 확고부동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성경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 이외에 안식일 진리에 대해서 그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안식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가 예수님을 정죄하고 핍박하는 도구로 삼은 것이 문제이다.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인 유대인들 때문에 사단이 틈을 타고 교회가 유대주의를 배척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바로 사단이 노린 방법이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삶의 본을 드러내면 어떨까?
➌ 그대는 어떻게 안식일을 준수합니까? 안식일 준수로부터 더욱 깊고 풍부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각자가 대답해보자.
안식일이 창조와 부활, 즉 구원의 징표로서 창조주와 구원의 주님에게 연결된 증명으로 안식일을 기억하고 지킨다.
➍ 마 11:28~29의 말씀처럼 그대는 어떻게 멍에를 풀고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을까요?
※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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