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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보이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4/3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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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4-23 07:51 조회9,0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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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30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1분

 

기억절 :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

라”(마 11:12).

 

연구 범위 : 마 11:11~12, 계 5:5, 마 12:25~29, 사 27:1, 마 11:1~12, 히 2:14

 

우리는 매일 우리의 생활방식, 관계, 직장생활, 우선순위, 여가, 우정에 대하여 중요한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을 확실히 알려면 그것들이 진정으로 무엇에 관한 것인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커튼을 젖히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의 관점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과학의 시대를 사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존재를 믿는 데 어려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엑스레이, 전파, 무선통신에 익숙한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함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통신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휴대폰 또는 영상을 볼 때 필요한 위성장비들은 우리가 무엇인가 보고 듣기 전에 보이지 않는 실체들을 전제로 작동한다.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대쟁투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보이는 세계에 보이지 않는 배경을 형성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러한 비가시적인 세력과 그것들이 우리의 삶과 선택에 미치는 영향을 밝히는 데 요긴한 마태복음의 몇 본문들을 연구하려고 한다.

 

➊ 깨닫기 :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어떻게 보증하시는지 이해한다.

➌ 행하기 : 대쟁투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승리를 경험한다.

 

A. 

❷ 성경이 제시하는 ‘투쟁의 세계관’이란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까?

※ 생명과 사망의 대쟁투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흔히 말하는 선악의 대쟁투이다. 

❸ 우리는 마 11:11~12에서 대쟁투의 실상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 천국은 사단에 의해서 침노를 당하며 또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는 열망으로 침노를 받는다. 

❹ 우리의 삶과 주변에 천국을 확장시키는 주님의 일에 우리는 어떻게 동참할 수 있을까요?

※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천국의 실상으로 생활하여 동참하게 이끌어야 한다.

 

B. 

❷ 침례 요한의 투옥과 그의 의심에서 우리는 대쟁투의 치열함에 대해 무엇을 깨닫습니까?

※ 사단은 예수님의 선구자라도 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이다. 요한은 이런 의심이 왔을 때 예수님을 직접 찾아 확인함으로 의심을 극복했다. 사단의 공격은 집요하다.

❸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선다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 예수께서 십자가로 이미 승리하셨고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다. 

❹ 우리가 가정 또는 교회에서 자주 부딪히는 선악의 투쟁은 무엇이며 그때마다 어떻게 하늘의 편에 서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 인간의 이기심과 편견으로 주님의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분쟁이 생길 때 기도와 말씀으로 승리해야 할 것이다.

 

결론 : 대쟁투가 우주적인 문제이며 전 우주에 공개된 사안이지만, 무엇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벌어지는 싸움입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설지는 여기서 결정되며 우리의 운명이 그 결정에 달려있습니다.

 

 

첫째날(일) 마 11:11~12

4월 24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1~12).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안에서 구원의 계획은 소상하게 밝혀진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우리는 천연계의 각 영역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을 만난다. 하물며 우리에게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진리와 실체를 계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왜 어려운 부분이 없겠는가?

엘렌 G. 화잇은 이런 개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아무리 하등한 형태의 생명체들이라도 가장 지혜로운 철학자들이 능히 설명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우리의 지식 범위를 초월한 미지의 세계가 도처에 있다. 하물며 신령한 세계에 우리가 헤아리지 못하는 신비가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인가? 문제는 순전히 인간의 생각이 좁고 약한 데 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분의 거룩한 성품에 대하여 충분한 증거를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니 우리가 그분의 섭리의 모든 신비를 깨달을 수 없다고 해서 그분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정로의 계단, 106~107).

 

1. 예를 들어, 마 11:11~12은 성경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본문 중 하나이다. 이 말씀을 차근히 읽어 보라. 그대는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마11:11,1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침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답: 침례요한에 대한 말씀을 이해할만한데 천국은 침노를 당하고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말씀을 쉽지 않다고 교과저자가 말했다. 누구든지 그렇지 않을까

 

어떤 번역 성경은 12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로부터 오는 나라는 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난폭한 자들이 그것을 공격하고 있다.” 또 어떤 성경은 이렇게 해석했다. “침례 요한이 설교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강하게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난폭한 자들이 그것을 공격하고 있다.” 

 

2.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은 무엇일까?

 

답: 이 구절의 구역은 침례요한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힘씀으로 얻나니 힘쓰는 자는 빼앗느니라. 라고 번역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천국의 양면성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된다. 사탄으로부터 침노를 당한다는 면과 사람들이 천국을 얻으려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면이다. 

 

<부가설명> 만나주석의 설명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에서 '침노를 당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비아제타이'는 수동태와 중간태 둘 다 해석이 가능하다. 이를 수동태로 이해하면 본문과 같이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는 의미로서 천국이 어떤 강력한 힘을 소유한 자에 의해 강탈당하거나 거칠게 다루어져 강점(强占)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천국은 습격에 의해서 정복된 성과 같이 빼앗아진다는 뜻이다. 이것을 중간태로 받아들이면 '힘으로 진격하다', '휘몰아쳐 오는 바람처럼 힘으로 떠밀려 제 갈 길을 가다', '격렬하게 빼앗다'등의 뜻으로, 이는 NIV 성경에서처럼 '하늘나라가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분명 중간태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실로 거룩한 능력과 막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이 세상에 기습적으로 도래한 천국은 단지 침략과 약탈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역동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열려짐으로서 열정적 신앙인들을 수용하게 된 것이다.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여기 '침노하는자'를 앞 구절의 '침노당하다'란 동사를 수동형으로 보아 '강탈자'나 '난폭한 자'등 부정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 어구를 '하늘나라는 맹렬한 공격을 당하고 있으며, 난폭한 자들은 그 나라를 강탈하고 있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 어구는 앞의 동사 '비아제타이'를 중간태로 보는 해석과 연결하여 '용기 있는 자' 또는 '강한 자'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적절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용기 있는 자들 또는 강렬한 집념을 지닌 강한 자들이 그 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므로 혹 소심하거나 쉽게 낙담한 자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실로 '침노하는 자'는 목적한 바를 쟁취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과 지혜를 아끼지 않는 강하고 용기 있는 자인 것이다. 본문의  '빼앗느니라'(하르파주신 아우텐)는 말은 마치 야수나 거친 도적들 마냥 무엇을 취하기 위해 자신의 사력(死力)을 다해 움켜잡는 상태를 뜻한다. 여기서는 순전히 선한 의미로서, 구원을 얻고 천국의 유업(遺業)을 얻기 위해 온 정열로써 애쓰며 심혈을 기울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고 단정 하고 멸시했던 세리나, 창녀, 각종 범죄자들 및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간절히 갈구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눅 7:28-30). 실로 그들은 의와 평화 그리고 기쁨의 나라를 얻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와 악한 동료들과의 단절(斷絶)이라는 수동적 변화와 더불어 난폭할 만큼 격렬한 신념과 용기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영혼들의 순수한 열정을 통해 천국은 더욱 역동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이해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주석이 성경의 사상과 조화된다고 생각한다.

 

교훈 : 구원의 계획을 밝히고 있는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둘째날(월) 어둠의 경계

4월 25일

 

오랜 세월 동안 성경 연구자들은 마 11:12을 가지고 씨름해 왔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라와 백성을 설명하는 단어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다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바스마티’는 ‘강하게 성장함’ 또는 ‘폭력에 시달림’의 두 가지 뜻이 있다. 또 그리스어 ‘비아스테스’도 ‘강한 사람들’이나 ‘적극적인 사람들’ 또는 ‘난폭한 사람들’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온유하고 부드러운 천국이 난폭한 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폭력에 시달린다는 뜻인가? 아니면 천국이 강하게 성장하며 그것을 소유하는 강한 자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라는 뜻인가?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나라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공격적이고 심지어 강압적일 수도 있는 것인가?

아래의 성경절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위의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어떤 빛을 비춰주는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계 5:5).

“길을 여는 자가 그들 앞에 올라가고 그들은 길을 열어 성문에 이르러서는 그리로 나갈 것이며 그들의 왕이 앞서 가며 여호와께서는 선두로 가시리라”(미 2:13).

어떤 이들은 마 11:12의 가장 바람직한 해석은 ‘비아조마이’(대개 긍정적인 의미로)와 ‘비아스테스’(대개 부정적인 의미로)의 일반적인 용례를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천국은 “어둠의 경계선을 밀어내는 거룩한 능력과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힘 있게 확장되고 있다.” 반면 이런 일이 있는 동안에 “난폭하고 탐욕스러운 자들은 그 나라를 탈취하려고 노력한다.”―D. A. Carson, The Expositor's Bible Commentary With 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Matthew, (Grand Rapids: Zondervan, 1995), pp. 266, 267.

이 해석이 마태복음 전체에 조화로운 것 같다. 사실 이 해석은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의 투쟁이라는 더 큰 그림 즉, 성경 전체에 스며있으되 신약성경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주제를 잘 포착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우리는 매일 어느 한 편에 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대쟁투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실상이다.

 

답: 이미 일요일의 부가설명에서 대답을 다 했다. 오늘 저자도 주석을 인용하여 일요일 부가설명의 내용과 동일한 뜻을 제시했다. 

  

<부가설명> 달리 부가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 구절은 생명과 사망의 세력들이 천국을 두고 투쟁한다는 사실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구절이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서 열심을 다할 것인가?

 

교훈 : 마 11:12은 현실의 배후에 벌어지는 대쟁투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동안 악의 세력은 그것을 빼앗기 위해 싸우고 있다.

 

 

셋째날(화) 투쟁의 세계관

4월 26일

 

우리가 어제 살펴본 마 11:12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이든지 그것은 대쟁투의 실상을 밝히는 데 일조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의 다른 곳으로부터 깨닫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일종의 싸움과 투쟁, 즉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묘사한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대쟁투의 실상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주는가?

마 12:25~29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 27:1 “…여호와께서…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요일 5:19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롬 16:20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

창 3:14~19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엡 2:2, 6:10~13 “그 때에 너희는…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답: 이 세상은 생명과 사망의 투쟁장소라는 것과 사람은 생명 편에 속하든지 사망 편에 속하든지 한다. 중립지역은 없다는 것을 잘 가르쳐준다. 

 

이 말씀들은 어떤 현대 신학자가 ‘투쟁의 세계관’이라고 불렀던 주제를 언급하는 구약과 신약의 많은 성경절 중 일부에 지나지 않다. 투쟁의 세계관이란 우주의 초자연적인 세력 사이에 전쟁이 있으며 우리 모두는 이편 또는 저편에 개입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재림 교회의 초기로부터 발전해 온 우리 신학의 일부분이다. 심지어 우리의 선구자들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조직되기 이전부터 그런 개념을 고수했다.

 

<부가설명> 역사관이 어떤가 하는 것은 사상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20세기 유명한 역사가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역사관으로 역사를 조명했다. 성경의 역사관은 신명기 역사관이다. 그것은 또한 재림교회 역사관이다. 그것은 대쟁투 역사관이다. 토인비의 역사관과 재림교회 역사관은 아주 유사하지만 재림교회 역사관이야말로 성경적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피조물 중에 루시퍼가 반역하여 우주를 전장(戰場)으로 몰아갔으며 지구가 그 최전선이 되었다. 창조주이신 말씀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지구에 오시고 루시퍼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승리하시고 지금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명과 사망의 투쟁이 있는데 성도들은 예수의 생명을 전파하고 루시퍼는 그것을 거절하게 하는 싸움이 지속되고 개인의 마음에는 예수를 거절하려는 정신과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는 정신 사이에 투쟁이 있다. 이것이 천국이 침노 당한다는 말씀이고 힘쓴다는 말씀이다. 선악의 대쟁투를 도덕적 시각으로 보면 성경이 가르치는 대쟁투를 모르게 된다. 그것은 생명과 사망의 대쟁투이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교훈 :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선과 악,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의 세계관을 제시한다. 우리는 이편 아니면 저편에 서서 이 투쟁에 개입하게 된다.

 

 

넷째날(수) 싸움이 치열해질 때

4월 27일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3).

 

우리가 어제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마 11:12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투쟁 또는 싸움 없이 수립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싸움이 곧 대쟁투이며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이라고 이해한다. 그것은 죄와 사탄과 악인들이 최종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마 11:12에서 친히 말씀하신 문맥에서 대쟁투의 실상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치열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1. 마 11:1~12을 읽어 보라. 우리는 여러 단계에서 전개되는 대쟁투의 실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는 대쟁투의 개념을 통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마11:1~12]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답: 참례요한의 마음에 예수님을 의심하도록 강하게 역사한 것은 사단이다. 침례요한 같은 사람도 사단의 공격에 일시 흔들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적을 행하셔서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는 구주이심을 증거하셨다. 그 결론에 이르러 사단이 천국을 공격한다는 것과 사람도 천국을 향하여 돌진할 때 천국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먼저 그대는 침례요한을 투옥시키도록 지도자들을 부추겼던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요한의 사역을 제지시킬 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낙담시키려는 사탄의 시도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선발주자였던 요한이 그와 같은 운명을 마주해야 한다면, 누가 예수님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사탄은 분명히 예수님과 요한의 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이러한 의문을 제기하도록 조장했을 것이다. ‘이 나사렛 예수가 그토록 큰 권세를 가지고 놀라운 기적들을 행할 수 있다면, 사촌이라면서 왜 요한같이 신실하고 선량한 사람을 감옥에서 썩도록 내버려두는 것일까?’

또한 그대는 요한의 생각에 의심을 심은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대체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뭔가? 그는 왜 나를 구하지 않는가?’ 결국 그는 이렇게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님께 침례를 베풀 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마 3:16) 그분에게 임하는 것을 보고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음성을 들은 동일한 요한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전에 일어난 모든 일을 목격했음에도 지금 그의 마음이 의심으로 가득하게 됐다는 것인가? 물론 요한의 처지가 나빴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의심의 싹도 점점 커질 수 있었다(막 6:25~28).

 

<부가설명> 사단은 사람의 생각에 작용한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는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 생각을 넣은 자가 마귀라고 분명히 가르친다. 성경의 바른 진리를 왜곡시키는 것은 마귀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그 말이 아무리 천금 같을지라도 성경 전체의 일관된 진리와 충돌한다면 마귀의 생각을 받은 것이다. 침례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증거한 선구자이다. 그러나 그 역시 아담의 후손인 사람이다. 에덴동산에서 죄가 전혀 없이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여자를 유혹한 그 솜씨로 요한의 마음에 영향을 행사했다. 일시적이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확인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확인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의심을 계속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요한은 확인하고 승리했다. 예수님은 요한이 자기 직무를 다 감당한 선지자라고 칭찬하셨다. 육체의 질병보다 무섭고 치명적인 것이 생각의 질병이다. 생각의 병이 드는 것은 뇌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겠는가. 성경으로 성도를 성경의 진리와 조화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것이고 치명적인 병이다. 우리는 진리를 옳게 분변하는 지혜를 구하고 대쟁투에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승리해야 할 것이다. 성령이 이 일을 위하여 우리 안에 거하신다. 

 

교훈 : 요한을 투옥시키도록 지도자들을 조종하고 요한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사탄의 활동은 대쟁투가 얼마나 치열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다섯째날(목) 실패한 명분

4월 28일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히 2:14).

 

역사적으로 인류는 전쟁을 벌여왔다. 인간 본성 속의 무엇인가가 일부의 무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수탈하고, 살육하게 했다. 캐서린 테이트는 그녀의 아버지인 영국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에 관한 책에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당시 독일과 전쟁을 앞두고 있는 영국의 거리에 흥분이 감도는 사실을 우려했던 아버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는 기술의 발전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적인 신념을 가지고 성장했다. 그는 때가 되면 전 세계가 고대의 야만성에서 벗어나 문명화된 자치의 시대로 진입한 영국인들의 현명한 길을 따르리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친애하는 애국시민들이 독일어를 말하는 상당수의 동료 인류를 살육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My Father Bertrand Russell (England: Thoemmes Press, 1997), p. 45. 역사를 통해서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와 동일한 생각이 확산되면서 우리는 가장 처절하고 비극적인 형태의 타락한 인간 본성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인류가 벌인 대부분의 전쟁에서 사전에 그 결과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승자의 편이 될지 패자의 편이 될지도 모르고 전쟁을 치르기 위해 나갔다.

이 세계에 대한 ‘투쟁의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어느 편이 이미 승리했는지 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다. 십자가 이후에 누가 승자이며 누가 승리의 열매를 나눌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탄의 명분은 실패한 명분이 되었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대쟁투의 결과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려주는가?(히 2:14, 고전 15:20~27, 계 12:12, 20:10)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고전15:20~27]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24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계12: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계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답: 대쟁투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이 완전히 승리한 사실을 알려준다.

 

사탄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것처럼 지상의 전쟁에서도 패했다. 하지만 증오와 복수심에 불타 그는 여전히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참고). 그리스도의 승리가 완전하다 할지라도 전투는 여전히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유일한 안전책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승리의 편에 두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선택을 통해 그와 같이 할 수 있다. 우리는 승리가 보장된 편에 서기로 선택하는가? 아니면 패배가 확실한 편에 서기로 선택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달려 있다.

 

<부가설명> 사단은 완전히 패배했다. 히브리서 2:14에는 예수께서 마귀를 없이 하셨다고 기록하였다. 개정판에는 ‘멸하시고’ 라고 번역했다. 원어는 ‘카타르게오’이다. 이 말은 ‘없이하다. 멸하다. 파괴하다.’ 등등의 뜻이 있다. 사단 마귀는 아직도 활동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없이하도록 결정되었다. 사단이 하늘에서 쫓겨 와서 아담부부를 유혹하여 지구를 자기의 아지트로 삼았지만 말씀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지구에 오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마귀를 없어지도록 하셨다. 마귀는 이제 우주의 장자 총회에 지구의 장자 자격으로도 참석할 수 없다. 지구의 장자 자격을 예수께서 탈환하셨기 때문이다. 사단은 사망 집행 때까지 이 지구에서 크게 분내어서 성도들을 괴롭힌다. 오늘날 성도들은 이미 패배한 마귀와 그의 동조자들과 싸우는데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완전히 패배한 존재들이며 완전히 없어지는 때까지 게릴라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 두려움 없이 대적하면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고 가르친다. 마귀는 이미 패배한 자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적하면 마귀가 우리를 피한다. 승리한 것이기 때문에 이 승리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지만 아직도 참혹한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매일의 결심을 통해서 승리가 보장된 편에 서야 한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29일

 

대쟁투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우리 안에서 그것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근심과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에서 살고 있다. 뱀은 동산의 나무 한 그루에 머물지 않는다. 온 동산에 뱀들이 득실거린다. 온갖 통로에 유혹의 속삭임이 도사리고 믿음과 기도에 충실하지 않은 자는 쉽게 덫에 걸려드는 세상이다. 예수님이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수많은 덫에 빠진다. 모든 덫 가운데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위험한 덫은 아마도 ‘네가 유혹에 굴복한다면 돌이키기 어렵게 된다. 팔을 벌리고 네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그런 은혜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 귀에 속삭이는 이런 음성을 누구나 한두 번은 들어봤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말이 맞다. 그대가 유혹에 넘어진 것이 한 번일지라도 그대는 스스로 돌이키기에는 너무 멀리 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가 실패했던 지점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승리하시고 우리에게 그분의 승리를 주시는 이유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하여 대쟁투 속에서 이루신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우리 자신을 그분의 편에 두기로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이 보장하는 승리의 약속을 주장하며 그분의 공로를 항상 우리를 위한 구원의 보증으로 의지해야 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 주변에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의 감각으로는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런 것들을 통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힘이나 세력에 대하여 또는 대쟁투에 대하여 어떻게 눈을 뜨게 됩니까?

※ 인력, 강력, 양력, 전자기력은 우주에 존재하는 물리적 힘이지만 일반적인 상태에서 우리는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 그렇거든 하물며 영적 세계의 힘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➋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는 대쟁투적인 세계관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그런 세계관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쟁투를 거부하는 그들의 주장은 무엇이며 그대는 어떻게 그들의 주장에 대답하겠습니까?

※ 기독교인들에게 대쟁투적인 세계관이 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그런 이유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 있는 것 같지 않다. 일반 개신교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정론을 믿고 있기 때문에 예정된 사람들은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 때문일 수 있다. 이런 사람에게 예정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으로 증거해야 할 것이다.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도록 예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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