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시련(질문, 대답, 설명) 06/13/26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11과 시련(질문, 대답, 설명) 06/13/26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6-05 09:36 조회81회 댓글0건

본문

제11과 시련

(6월 13일 안식일/일몰:오후 7시 54분)

 

● 연구 범위 막 4:35–41; 막 5:21–34; 롬 5:3–5; 욥 19:23–27; 욥 23:8–12; 눅 24:13–27; 롬 8:18, 28

● 기 억 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

 

해가 지평선 너머로 저무는 어느 저녁 무렵,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 속으로 한 아이가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먼 것을 알기에 아이는 걸음을 재촉했다. 빗방울 한 방울이 뺨에 떨어졌고 또 하나가 이어지더니 어느새 온몸이 흠뻑 젖어버렸다. 아이는 집 현관을 향해 달려갔고 창문 밖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아버지가 아이를 맞이하려고 달려 나왔다. 아버지는 담요를 둘러주며 아이에게 물었다. “방금 빗속에서 너를 봤어. 그런데 왜 번개가 번쩍일 때면 달리는 것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니?”

아이가 말했다. “아, 하늘을 향해보려고 멈췄어요. 하나님이 제 사진을 찍고 계시잖아요!”

삶의 폭풍이 닥치거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침체된 것 같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쏟아지는 빗속에 고개를 떨구는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할 때 그분이 거기 계심을 믿고 신뢰하며 고개를 드는가?

이번 주에는 삶이 힘들 때 우리가 흔히 보이는 반응들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하면 삶의 어려움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관계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키도록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인생의 위기에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며 고난에는 숨겨진 더 큰 그림이 있다.

느끼기 : 사탄은 고난을 통해 주님을 원망하게 하지만 믿는 자는 그런 때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행하기 :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때 그분은 어두운 마음에 희망과 믿음을 주신다.

 

TMI 위로

➋ 인생의 위기를 경험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막 4:39)

*답: 우리를 위해 항상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과 용기를 얻는다.

➌ 주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입니까?(막 5:28)

*답: 그분을 믿고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머져야 한다. 여기까지 자기의 몫이다.

➍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고후 4:17-18)

*답: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➎ 인생의 골짜기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까?(눅 24:38-39)

*답: 옆에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➏ 믿음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이끌어 줍니까?

*답: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도록 한다.

➐ 인생의 어려운 때가 하나님을 더 굳게 의지해야 하는 때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더욱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결론: 인생의 위기에 하나님은 가장 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때도 그분은 함께 하시며 풍랑을 잔잔케 하신다. 고난 중의 여인이 나았던 것은 예수님의 옷에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손을 뻗은 선택 때문이다. 그녀는 멀리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가까이 나아갔다. 사탄은 고난을 통해 주님을 원망하게 만들지만 그보다 더 큰 그림이 있으며 믿는 자에게 주어진 도전은 막막한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고난 앞에 그분이 함께하심을 잊기 쉽지만 이면에 더 많은 것이 있으며 의심을 버리고 주께서 붙드심을 기억해야 한다. 고난 중에 예수님을 바라볼 때 희망과 믿음이 생기며 어두웠던 마음에 주님을 신뢰하는 맘을 갖게 해 주신다.

 

6월 7일(일) 인생의 풍랑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온 종일 수많은 군중에게 말씀하시며 그날을 보내셨다. 예수께서 그날 주신 말씀은 사람들의 마음에 오랫동안 그리고 영원에 이르도록 울려 퍼질 것이었다. 저녁이 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자”(막 4:35)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함께 가자고 부르셨다. 예수님은 폭풍이 올 것을 아셨지만 그래도 가자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중요한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다.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마 여러분도 알 것이다.

 

마가복음 4:35-41에서 이 광풍에 대해 다시 읽어보라. 이 구절에서 믿음에 대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막4:35~41]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답: 성경이 계시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에수님은 주무셨다. 그분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다음 사항들을 생각해 보라.

1. 예수님은 아마도 배에 있던 유일한 베게를 베고 잠이 드셨다. 어선에는 보통 베개가 하나 있는데 배의 운전자 곧 배 뒤쪽에 있는 사람이 깔고 앉았다. 뒤쪽에 앉은 사람은 목적지까지 배를 조종했다. 그날 예수님은 배의 운전자의 자리에 계셨지만 조종간을 잡은 채 거기서 잠이 드신 것이다.

2. 모든 제자가 항해에 서툴렀던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경험 많은 어부였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를 잘 알고 있었고 폭풍우를 헤쳐 나가는 방법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3. 이것은 예수께서 잠드신 것을 말하는 유일한 복음서의 기록이다. 제자들이 생애 최악의 폭풍우 가운데 두려움에 떨면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뒤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4. 위기 가운데 제자들의 반응은 “우리를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품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의심했다. 우리도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 이와 같은 반응을 보이기 쉽다.

절망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제자들처럼 스스로를 구하려 애쓰거나, 고통이나 상실을 겪으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하나님께서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셔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러나 제자들의 경험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때는 삶의 폭풍 가운데에서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시다. 비록 그분이 개입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여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분은 폭풍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가 다스릴 수 없는 풍랑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다.

 

교훈: 폭풍과 인생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은 가장 큰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할 때에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풍랑을 잔잔케 하실 수 있다.

 

<부가설명> 영어에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한문에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다. 모두 보고 확인할 때 믿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 보고 확인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듣고 믿는 것이다. 바울은 고후 5:7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인데, 그것은 보는 것을 행하지 않고(살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고 한 바울의 고백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의 부활을 보지 않고 믿는다. 그런데 제자들처럼 현재 거센 바도가 밀어닥치고 배는 파선할 것처럼 보일 때 보는 것을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지 스스로 물어보면 아멘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만큼 사망의 존재가 된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어렵다. 그래서 실패하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분노한다. 그래서 호흡마다 우리는 회개하고 순간마다 죽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그렇게 인도해 주시기 바란다.

 

6월 8일(월) 온전할 지어다

갈릴리 호숫가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그들은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이 건너오기만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배에서 내리시자 그분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고 가버나움 마을까지 따라왔다. 그때 갑자기 회당장 야이로가 나타나 예수께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다. 군중 가운데는 오랫동안 병들어 고생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의사들을 찾으며 모든 재산을 썼지만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막 5:26)질 뿐이었다. 그녀는 갈릴리의 이 위대하신 분에 대한 소문을 듣자 마음에 희망에 생겼고 그날 아침 남은 모든 힘을 짜내어 집을 나서서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예수께 한걸음씩 다가갈수록 빽빽한 군중 때문에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때 마침 밀고 당기는 인파 사이로 예수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속으로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막 5:28)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마가복음 5:21-34을 읽어보라.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막5:21~34]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33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답: 열두 해 혈루증 환자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을 때 나았다. 예수께서는 군중 앞에서 그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여자를 개인적으로 아신다는 사실을 공표하셨다. 

 

이 사건은 병들고 소외된 이들 그리고 군중 속에 묻혀버리기 쉬운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보여준다. 그날 많은 사람이 군중 속에 휩쓸려 예수님 곁으로 몰려들었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축복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만지기 위해 의도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나은 것은 만졌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막 5:34). “구주께서는 믿음으로 만지는 것과 무관심한 군중의 우연한 접촉을 구별하실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344). 예수님의 옷자락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여인의 믿음과 손을 뻗어 그분을 만지기로 한 선택이 그녀를 낫게 했다. 그 병약한 여인은 그날 아침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그저 집에 누워 있을 수도 있었지만 치유를 바라며 의도적으로 예수를 찾았다. 그녀는 멀리서 그분을 보는 것에 머물지 않았고 가까이 나아갔다.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기를 요청하며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 29).

 

교훈: 예수님의 옷에 특별한 능력이 있던 것이 아니라 여인이 믿음으로 손을 뻗어 만진 선택이 낫게 했다. 그녀는 멀리서 보는 것에 머물지 않고 가까이 나아갔다.

 

<부가설명> 여자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자기의 불치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의심없이 믿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 것이다(롬10:17).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온 왕의 신하를 향하여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4:48)라고 하셨다. 그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신하는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요4:49)라고 믿음을 나타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은 여자도 보지 않고 듣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도 기록된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복된 사람들이다. 적어도 도마보다 복이 있는 신자들이 아닌가? 이 여자처럼 믿음은 행동을 일으킨다. 이런 믿음이 삶에 드러나는 것이 롬5:3~5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는 듣고 믿고 행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 말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어떤가?

 

6월 9일(화) 욥

성경에서 시련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은 욥일 것이다. 그는 모든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욥 1:14-17) 자녀들(욥 1:18, 19)과 건강(욥 2:7)까지 잃었다.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그를 부추겼다(욥 2:9).

얼마 후 세 친구가 욥을 찾아왔다. 그들은 욥의 모습에 너무나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아 있었다(욥 2:13). 마침내 그들이 입을 열어 욥에게 닥친 이런 불행에 대해 인간적인 이유를 제시하려 했으나 그렇게 할수록 오히려 의도와 달리 그의 고통을 더할 뿐이었다. 세 친구는 욥을 비난하며 그가 회개해야 할 숨겨진 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욥 8, 11, 15). 심지어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욥 18:21)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욥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욥기 19:23-27과 욥기 23:8-12을 읽어보라.

[욥19:23~27]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욥23:8~12]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답: 욥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정한 음보다 그 말씀을 귀히여겼다고 고백한다. 

 

그의 주변에 닥친 비극적인 사건들과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욥은 여전히 신실했으며 믿음을 굳게 잡았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을 탓하고 싶은 유혹이 들 때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도 이와 같은 싸움 한 가운데 살고 있다. 사탄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하기 위해 고통, 괴로움, 상실, 역경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그런 때에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거부하거나, 온 힘을 다해 그분께 매달리는 것이다. 비록 우리 주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지금의 고난은 잠깐의 시련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고후 4:16-18).

우리가 여기서 지금 보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이 있으며 믿는 자에게 주어진 가장 큰 도전은 정말 막막한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사랑의 실체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셨다. 비록 당장은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이 중요한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한다.

 

교훈: 사탄은 고난을 통해 주님을 원망하게 만들지만 지금 보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이 있으며 믿는 자에게 주어진 도전은 막막한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을 왜 이렇게 고난의 세월을 보내도록 방관하느냐는 의문을 가진다. 그런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은 이 세상과 이땅에 사는 사람들의 실상에 완전히 무지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알려면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산다는 사람들의 실상을 먼저 알고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아무리 설명하고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믿으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르지만, 그릇된 것을 믿는 것은 가장 큰 재앙이다.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생각해야 할 명제다. 세상은 사망의 세상이고 그런 세상에 사는 사람은 사망의 존재들이다. 생명이신 하나님은 이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한다. 이 일을 하시는 것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세상으 그 자체가 사망이기 때문에 모든 환난과 고통은 사망의 본질이고 속성이다. 이 세상에 사망의 존재로 출생하여 생활하는 사람은 아무도 이 본질적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을 폐하시려고 하나님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취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사망의 세력을 끝낼 역사적 때가 아니다. 그때까지 불가불 우리는 사망의 세력 아래서 고난 당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완전히 끝낼 때가 예수께서 재림하신 후다. 믿음으로 그날을 사모하자. 

 

6월 10일(수) 엠마오로 가는 길

둘에게 지난 몇 주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사건들과 대화들을 되짚어 보았다. 예루살렘 입성과 환호, 성전 정결, 다락방에서의 유월절 만찬,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 유다의 추악한 배신, 재판과 조롱, 매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상처투성이의 몸 그리고 한낮의 하늘이 검게 물들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기 직전 하신 그분의 마지막 말씀, 성전 휘장이 찢어지는 큰 소리, 의인들의 무덤이 열리는 광경, 안식일 전에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서 조심스럽게 내려 무덤에 안치한 일, 제자들의 마음속에 밀려온 혼란과 낙담, 의문들, 이 둘은 어떻게 모든 것을 그렇게 잘못 이해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망하고 낙담했으며 혼란스러웠다. 이는 그들의 인생 최대의 좌절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은 이것이 단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의 한 단면일 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을 걷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누가복음 24:13-27의 대화를 읽고 두 제자와 예수님의 서로 다른 관점을 생각해 보라.

[눅24:13~27]

 

두 제자는 눈이 열리자, 길에서 겪은 일을 전하러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눅 24:33-35). 예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시자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새겨보라. “너희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염려하느냐”(눅 24:38, 흠정역).

예수께서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신다. 우리는 너무 자주 골짜기 길을 걸을 때 그분이 곁에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는다. 너무 자주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일의 이면에 더 큰 이야기가 진행중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우리는 너무 자주 불안해하며 의심에 마음을 뺏긴 채 예수께서 당신의 손으로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삶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예수님보다 우리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한다(눅 24:18).

 

교훈: 고난을 겪을 때 우리는 그 일의 이면에 더 많은 것이 있으며 그분이 함께하심을 잊는다. 의심을 버리고 주께서 삶을 안전하게 붙드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가설명> 여호와 하나님 우리 주님은 종말을 처음부터 보시는 분이시다(사46:10).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눈앞에 종이 한 장만 있어도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모든 것을 내대보실 뿐만 아니라 인도하시는 분이신 주님을 믿는다면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뢰로 더욱 굳게 붙어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욥의 결과가 그렇다. 요셉도 그렇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도들의 결과는 고난과 순교였다. 히브리서가 가르치는 대로 더 나은 본향, 하나님께서 설계하고 지으신 그나라,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나라를 보는 눈을 예수님께 받았기 때문이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 현재 이 세상은 광야요 지나가는 길이다. 길 안내자는 주님이시다. 그분이 인도하는 그 길이 영원한 생명과 영광의 길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성령님 붙드시는 은총으로 굳게 걸어가도록 하자. 제시한 성구들은 각각 읽어보기 바란다. 로마서 8:28; 빌립보서 4:4-13; 야고보서 1:2-4, 12; 고린도후서 12:9, 10.

 

6월 11일(목) 예수님을 보다

예수님을 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이 이야기를 보라. 역경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이 보이신 주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나는 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비참한 절망 가운데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일 예수님이 지상에 계신다면 내가 그분에게 가서 그 발치에 엎드려 나의 모든 고통을 말할 수 있을 텐데 …. 그렇게 하면 그분은 나를 외면하지 않고 자비를 베푸시겠지 …. 그렇게 되면 나는 항상 그분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을텐데 ….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형상을 지닌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동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예수를 보고자 하느냐? 그분이 여기 계시다. 네가 원한다면 너는 그분을 뵐 수 있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가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나는 이 말씀을 듣고 너무나 기뻐서 나의 얼마 안 되는 모든 소유물과 모든 장신구들을 챙겨 들고 나의 인도자를 따라갔다. 그는 나를 가파르고 약하게 보이는 계단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층계를 오르기 시작하자 아래를 보면 현기증이 나서 떨어지기 쉬우니 위만 쳐다보고 올라가라는 경고를 주었다. 층계를 오르고 있던 많은 다른 사람들이 꼭대기에 이르기 전에 떨어졌다. 마침내 우리는 마지막 계단에 이르러 문 앞에 섰다. 여기서 안내자는 나에게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온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명하였다. 나는 기꺼이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는 문을 열고 나에게 들어가라고 하였다. 순간 나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되었다. 그 아름다운 용모를 하신 분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토록 자비롭고 위엄 있는 찬란한 모습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분이 나를 보는 순간 나는 즉시 그분이 내 생애의 모든 처지와 내 속의 모든 생각들과 감정을 익히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분의 감찰하시는 눈길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분의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그분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가까이 오시더니 손을 내 머리에 얹으시고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부드러운 음성은 내 마음이 전에 결코 경험해본 적이 없는 기쁨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너무나 기뻐서 한 마디의 말도 할 수 없었으나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싸여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내가 힘없이 그렇게 있는 동안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장면들이 내 앞을 지나갔으며 나는 하늘의 안전함과 화평에 젖어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다시 힘이 생겨 나는 일어섰다. 예수님의 자애로운 눈이 아직도 나를 바라보고 계셨고 그분의 미소는 내 영혼을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그분의 임재가 내 마음을 거룩한 경외심과 형용할 수 없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했다. …이 꿈은 내게 희망을 … (그리고) 믿음을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아름다움과 분명함이 어둠에 싸였던 내 영혼에 떠오르기 시작하였다”(초기문집, 79).

 

교훈: 예수님을 바라볼 때 희망과 믿음이 생기며 어두웠던 영혼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신다.

 

<부가설명>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면 이 세상에서 생활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는 고난과 멸시의 가시밭길이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날을 바라보며 현실을 이기며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성경은 이 세상의 고난에서 눈을 돌려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라고 강권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 합력하여 이루는 선은 영생이다. 성경이 약속한 영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상태다. 두려움이 없다. 즐거움과 행복만이 있다. 거기가 영원한 천국 새 하늘, 새 땅의 상태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의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6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인생의 어려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을 가장 굳게 의지해야 할 때이다. 이번 분기 동안 살펴본 주제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굳건한 동행을 이어가거나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건강 문제, 재정적 어려움, 결혼생활의 붕괴, 가까운 이의 죽음, 또는 기쁨을 앗아가는 무거운 짐과 같은 역경을 직면했을 때 다음 질문들을 생각해 보고 지금까지 배운 교훈들을 되새겨 보라.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➊ 지금 겪고 있거나 경험했던 역경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겠는가?

*답: 각각 대답할 문제다.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실상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더 선명해질 것이다. (화요일 부가설명 참고)

➋ 당신이 삶 속에서 원수의 음성보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강력하게 들리기를 기도한 때는 언제인가?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오지만 하나님은 풍성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요 10:10).

*답: 날마다 말씀 읽고 듣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음성이 강력하게 들릴 것이다.

➌ 당신의 마음은 겸손한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여전히 당신의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겸손히 신뢰하는 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답: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선조들의 삶을 보면서 또 예수님의 삶을 보면서 배워야 할 것이다.

➏ 믿음이 약하다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하고 기도하라. 당신을 낙담시키기보다는 격려해 줄 수 있는 이들과 함께하라.

➐ 세상이 약하고 무지하며 상처받고 깨진 자를 항상 돌보는 것은 아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고후 12:9) 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말씀이다. 오늘 이 말씀으로 누구를 격려해 줄 수 있는 지 생각해 보라.

*답: 오늘의 질문은 전적으로 개인이 답해야 하는 것이다. 이번 교과의 특징이다.

 

요약

우리는 여전히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한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으며 우리 각자는 삶의 어느 시점에선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어려움을 직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이 삶의 역경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돌아볼 때 그런 시련 속에서 우리가 보이는 대응이, 변하지 않으시고(말 3:6) 그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동행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남수명 | 부서장: 채영석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