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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선지자가 감당해야 할 고난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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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5-10-26 07:55 조회5,0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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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선지자가 감당해야 할 고난

 

 

기억절 :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렘 20:7)

 

 

첫째 날(일) 경건하지 않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

 

*도입질문: 남방 유다의 총체적 타락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나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남방 유다가 안고 있었던 문제들의 출발점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에 있었습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들의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인해 모든 백성들에게도 나쁜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잘 못된 길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한사람의 영향력으로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각성과 돌이킴의 역사를 이루어내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단 한 사람도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절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문제는 어떤 영의 영향력 속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기를 선택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영의 영향력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딤전4:1-2)

영적인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어야 그들의 지도를 받는 백성들도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게 됩니다.

 

 

둘째 날(월) 고랑을 찬 예레미야

 

*도입질문: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스훌로부터 고난을 받았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신 기별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기별은 백성들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에 백성으로부터 많은 저항을 받습니다. 예레미야이 기별도 당시의 백성들에게 저항을 받았는데, 특히 지도자였던 바스훌의 저항이 심했습니다. 바스훌은 예레미야의 기별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거짓 선지자의 기별로 생각하였으므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예레미야에게 매질을 하였고 예레미야의 몸에 나무 고랑을 채웠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떤 기별을 전하였기에 그런 고난을 당한 것일까요? 그의 기별은 예레미야 19장을 보면, 하나님이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3절)고 백성들이 칼에 쓰러지며 들짐승과 새들이 그들의 시체를 먹고(7절)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를 잡아먹게 하실 것이라는 기별이었습니다.(렘 19:9).

 

예레미야의 기별은 유다 백성들의 감정을 자극하였고, 특히 지도자였던 바스훌의 심한 반발을 가져왔습니다. 물론 예레미야의 기별은 하나님의 품성적 표현이었고, 남방 유다 전체가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을 함으로 인한 결과들을 마치 하나님께 처리하시는 것처럼 책임지시는 사랑의 표현법으로 전한 것입니다.

 

이런 기별을 전하는 목적은 남방 유다가 현재 처해져 있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드러냄으로, 하나님을 떠난 현 상황을 탈피하여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길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품성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품성적 표현을 사용하는 예레미야의 기별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방 유다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자신의 나라에 해가 오리라고 선언하는 선지자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과 함께 자신이 전하는 기별을 거절하고 반대하는 백성들과 지도자들로 인해 고난까지 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처럼 그 자신도 끝까지 기별을 멈추지 않고 증거하였습니다.

 

 

셋째 날(화) 골수에 사무친 불

 

*도입질문: 예레미야의 남방 유다 백성에 대한 불타는 사랑은 누구를 닮은 것인가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선지자의 길은 외롭습니다. 하나님의 심령을 이해하고 감동하지 않고서는 선지자의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기별이 정면에서 거부당하고 고난으로 돌아올 때 선지자는 의기소침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자신의 기별이 거부당하고, 고난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는 기별을 전하지 않으리라 결심도 했고, 왜 자신이 태어났는지 자신을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향해 원망의 말도 하였지만, 곧 바로 그런 부정적인 사단이 주는 전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성을 경험한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사망 속에 있는 백성들을 위해 더 큰 은혜와 사랑을 주고자 하는 심령으로 기별을 다시금 증거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다시는 기별을 전하지 않으리라는 결심과 자신이 태어나도록 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의 말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품성을 확신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선택의 자유를 주는 사랑을 알지 못했더라면 결코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선택의 자유를 주는 사랑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고, 그런 자신을 여전히 받아주시고 똑 같은 사랑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다시금 확신함으로 그는 하나님의 품성처럼(호11:8),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사랑으로 더 담대히 기별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끝까지 거절하지만, 그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넷째 날(수) 그 날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도입질문: 고난 속에 있었던 욥과 예레미야가 다르게 반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욥은 굉장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자녀들이 다 죽었고, 재산도 다 없어졌고, 자신도 악창으로 괴로웠고, 아내조차도 자신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와는 내용면에서는 같지 않지만 고난의 측면에서는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대하는 욥과 예레미야의 태도는 다르게 보입니다. 욥은 고난이 올 때 적어도 일주일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말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욥1:22, 2:10)

그에 비해 예레미야는 고난이 오자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 나의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이 복이 없었더라면”(렘 20:14) 이라고 말함으로 자신이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고, 이것을 결국 자신을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원망의 말이었습니다.

 

고난에 대처하는 욥과 예레미야의 모습이 왜 이렇게 다른 걸까요?

어떤 사람이 더 믿음 있는 자의 모습인가요?

언듯보면 욥이 더 믿음이 있는 것 같지만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예레미야의 믿음이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이 일주일간 고난 속에서도 침묵했었던 이유는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으로 인해 만들어진 고난임을 전혀 알지 못했던 욥은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욥1:21, 2:10)

 

욥이 알고 있던 하나님의 품성을 상대적 사랑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태도나 신앙에 따라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도 있고, 혹은 재앙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재앙 받을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재산과 자녀를 빼앗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했어도, 혹시 자신의 말로 실수를 하여 하나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면 더 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적어도 일주일간은 꾹 참고 인내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삶의 태도가 항상 바르고 거짓이 없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욥의 말에 담겨 있습니다.(욥3:25) 욥은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워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를 애쓰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재앙과 저주가 임한다고 생각하면서 긴장하고 두려움 속에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하나님께 표현할 수도 없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이야기 할 수도 없습니다. 내면을 생각하지 않고 겉모습과 들려지는 말만 생각하면 굉장한 믿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내면을 보면 욥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과 마음으로 하나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도 못했고, 억울해도 감히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욥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었습니다. 이 상태는 실제로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고, 하나님 보실 때는 죽어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답답하지만 감히 하나님이 두려워서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못한 채, 일주일을 견딘 욥이 일주일 후에 처음 한 말은 놀랍게도 예레미야가 말한 것과 같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욥3:1)하는 말이었습니다. 일주일간 고민했어도 자신이 하나님께 저주나 재앙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확신이 하나님께 말할 수 있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잘 못한 것이 없다는 확신이 하나님께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의 고민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말하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시는 분이시고,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는 솔직하게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확신이 하나님께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하나님은 바라십니다. 생각과 감정이 교류될 때 진정한 교감이 생기고 가까워집니다. 하나님을 그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품성을 믿고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대화하자고 초청하십니다.(사1:18)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우리는 듣는 입장이 아니라,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선택의 자유를 주신 분과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그 사랑에 끌리게 되고, 자신의 길을 바꾸고(회개) 하나님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계14:4)

 

 

다섯째 날(목) 선지자를 죽이려는 계획

 

*도입질문: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렘 18:7~8)의 말씀을 글자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품성대로 생각하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위의 글을 글자대로 보면 하나님께서 민족이나 국가를 부수거나 멸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리고 어떤 조건에 의해 하나님의 행하심이 달라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이어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그것과는 정 반대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한 편에서는 십자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 같고, 또 한 편에서는 조건적인 사랑을 행하시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어서 헷갈릴 수가 있습니다.

 

위의 글은 사실적인 표현이 아닌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사랑을 알고 있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품성적 표현으로 말한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국가가 멸망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는 선택을 함으로 인한 결과인데, 그것조차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창조주의 책임지시는 사랑으로, 마치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처럼 표현하신 것입니다. (렘2:17, 19; 시34:21)

 

또한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했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다는 말씀도 사실적 표현이 아닌 하나님의 품성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민족이 악에 빠져 있으면 재앙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은혜를 주셔서(롬5:20)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길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민족이 악에 빠져 있으면 그 결과가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해 사망이고 그것이 바로 재앙입니다.(렘2:19) 그들의 선택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민족이 자신의 선택의 결과가 사망임을 깨닫고 생명이신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은 그 민족에게 언제든 주고 싶었던 생명을 강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품성대로 합법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혹시 있을 수 있는 그들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인 재앙과 고통(렘2:19)도 그들이 선택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께서 주시는 것으로 말하고 싶으신 사랑의 표현법입니다.

 

이런 예레미야의 품성적 표현을 글자대로 받아들이는 남방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에 대하여 저주를 선포하는 것 같은 오해로 인해 그런 기별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미워했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계획까지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성을 확신할 때, 글자가 아닌 그 말씀의 생명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출34:27, 요5:39-40,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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