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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과 교차문화적 선교(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8/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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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5-08-15 01:59 조회9,0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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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6분

 

기억절 :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마 12:18).

 

연구 범위 : 요 4:4~30, 마 8:5~13, 막 5:1~20, 마 15:21~28, 눅 17:11~19, 요 12:20~32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 “이방의 갈릴리”(마 4:15)란 아마도 비유대교적인 영향이 강한 탓에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대부분의 시절을 이곳의 나사렛에서 보내셨다. 감사하게도 나사렛은 로마 군대뿐 아니라 상인들의 수레가 지나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애굽에 있었던 시절은 물론이고 어린 시절부터 비유대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시고(눅 4:16~31) 예수님은 갈릴리의 국제도시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사역을 펼치셨다. 이방인들과의 접촉은 그분의 사역과 가르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록 이스라엘에 초점을 맞췄지만 온 세상이 그분의 관심사였다. 침례를 받으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3년 이상의 공생애 기간에 그분은 외국인과 적어도 여섯 번 직접 접촉하셨다. 이번 주에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이런 기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교차문화적 선교의 지침이 되는 성경의 핵심 원칙들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복음에 대해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 동정의 마음을 느낀다.

➌ 행하기 : 기도, 재정, 개인적인 참여 등 교차문화적 선교를 후원할 방법을 찾는다.

 

A. 

❷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중에 어떤 외국인들에게 봉사하셨습니까?

※ 사마리아인, 로마인, 거라사 지방 사람, 가나안인, 헬라인, 나환자 사마이라인 등등. 

❸ 외국인들을 위한 주님의 봉사는 선교적으로 어떤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합니까?

※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❹ 우리는 해외 선교 또는 다문화선교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마음의 선교사로서 봉사할 수 있다. 기도, 선교헌금, 선교사 파송 등등.

 

B. 

❷ 예수님은 왜 사마리아와 거라사인, 두로와 시돈 지방을 여행하며 봉사하셨을까요?

※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고 구원에 참여하도록 가르치기 위하여서.

❸ 그리스인들의 방문은 예수님에게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까요?(요 12:20~30)

※ 십자가 후에 모든 사람을 이끌 것을 보여준 전조(前兆)로서 중요하다. 

❹ 세계 선교를 위해서 우리는 무슨 일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요?

※ 삶이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하고 가장 하기 쉬운 복음의 봉사부터 시작할 것이다. 

 

결론 : 구원의 복음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권유하십니다.

 

 

첫째날(일) 사마리아 여인

8월 16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7).

 

예수님 시대에 고대 이스라엘은 세 지역 즉 갈릴리, 사마리아, 유다로 나눠져 있었다. 사마리아는 갈릴리와 유다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사마리아인들도 유대인들과는 다른 방식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겼다. 지정학적으로 가까웠기 때문에 사도들에게 사마리아는 이상적인 첫 선교 현장이었다.

 

1. 요 4:4~30을 읽어 보라. 비유대인에게 복음을 증언하는 예수님의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전통의 경계 밖으로 발을 옮기셨는가?

[요4:4~30]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서 전도하고 사마리아인들에게 전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답: 성도들은 어떤 사람이든지 접촉하는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외간 여자와 단 둘이 있지 못한다는 전통 규례와 더욱이 사마리아인과는 상종하지 못하게 한 유대의 전통을 무시하고 혼자 있는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서 복음을 전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대해서 박식했다. 그녀는 지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질문을 던지며 대화를 주도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영적으로 유익이 될 만한 것들을 가지고 그녀의 질문과 진술에 반응하셨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심으로써 단번에 대화의 흐름을 바꾸셨다. 그분은 그녀가 그 동안 여러 명의 남자와 지냈으나 결혼하지 않은 사실을 아셨다. 예수님의 요구는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나 이로써 그분은 효과적으로 그녀에게 복음을 전하실 수 있었다.

우리는 요 4:27에서 설명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이방 여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수님은 몇 가지 유대 관습을 어기고 있었다. 첫째는 그녀에게 마실 물을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고, 둘째는 그녀와 단둘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가족의 일원이 아닌 이상 남자가 여자와 단둘이 있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는 유대 관습을 따르셨다. 그러나 유대 지역 밖이었던 사마리아 지역에서 그분은 유대인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전통과 하나님의 계명과 교훈을 구분하셨다.

 

<부가설명>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죄인을 불러 회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눅5:32)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이 있을 때에 주저 없이 찾아가셨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하지 않으셨다. 그가 속한 사회의 전통과 규범의 경계고 허무셨다. 그리고 진리와 의의 원칙이 아닌 이상 그들과 접촉하시고 그들의 풍속을 인정하시면서 접촉하셨다.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서 하신 모습이 이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도 유대인처럼 상당히 규율에 매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자유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리와 의의 원칙과 인간의 규율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유대인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또 그런 눈으로 서를 판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와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의 방법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고 실제적인 방법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보이신 방법을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교훈 : 예수님은 세계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유다와 가장 가까운 사마리아를 방문하셨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귀중한 복음의 씨를 심으셨다.

 

【교차문화적 선교는 다른 나라로 이동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뿐 아니라 동일한 지역이라 할지라도 인종, 언어, 문화, 사회적 계층 때로는 세대의 경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한다는 개념을 포함합니다. 대도시가 발달하고 다문화적 특성이 강해지는 오늘날에는 지역 교회라 할지라도 교차문화적인 선교를 절대로 간과할 수 없습니다.】

 

 

둘째날(월) 로마 백부장

8월 17일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

 

1. 마 8:5~13과 더불어 눅 7:1~10을 읽어 보라. 이 일화는 가장 큰 문화적 차이가 복음으로 인하여 어떻게 사라지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마8:5~13]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눅7:1~10]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4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5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8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9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10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답: 유대인과 이방인이 생명을 살리는 일에 간격 없이 협력하였다. 우리는 복음을 소개하는 일에 인종과 문화와 지위를 막론하고 일해야 한다. 

 

가버나움에 주둔해 있는 로마군 백부장(100명의 군사를 거느린)은 예수님을 찾았다. 유대인들은 로마 주둔군을 증오했고,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을 혐오했다.

문화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이렇게 큰 간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로마 백부장과 유대인들 사이의 관계가 가까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의 기사에서 그 백부장은 유대 장로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모셔 오도록 부탁했다(눅 7:3). 흥미롭게도 그들은 예수님께 백부장의 종을 치유해 주시도록 요청했다. 이 장로들은 누구인가? 성경은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님과 관련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백부장은 확실히 믿음의 사람이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라고 했던 그의 말은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나타내는 훌륭한 증거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아 되심을 주장한 예수를 받아들이는지를 보고자 기다리지 않았다.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요 1:9)이 그를 비추었을 때에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식별하였다”(시대의 소망, 317).

그 백부장은 유대교의 민감성을 이해하고 존중했다. 유대법에 따르면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거리에서 사역해 주시도록 요청하였다. 그 종은 치유를 받았다.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 로마 백부장이 메시아의 잔칫날에 유대인 부조들과 함께 참석하게 될 수많은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말씀하셨다.

 

<부가설명> 백부장의 하인이 중한 병을 앓게 된 것 같다. 의원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났기 때문에 백부장은 예수님을 찾았을 것이다. 백부장이 한낱 하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유대인 랍비를 청한다는 것은 대단한 겸손이고 믿음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장교의 신분도 정복자의 국민이라는 자긍심도 다 버리고 식민지의 선생을 초청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식민지의 사회적 규율을 인정하였다. 유대인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겸손히 인정하였다. 그래서 유대인의 사회적 규율을 자기로 인하여 파괴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아울러 그는 말씀만 하셔도 하인이 나을 것을 믿었다. 그가 상관의 말을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과 부하들이 자기 말을 순종할 수밖에 없는 경험으로 예수께서 말씀만 하셔도 병이 나을 것을 믿었다. 그것은 경험으로 체득한 확실한 믿음이었다. 거기에 생명을 살리려는 사랑의 마음이 가득하였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모든 일 중에 최우선적인 일이다. 재림성도들은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사랑하는 종의 치유를 요청한 로마 백부장은 메시아의 큰 날에 이스라엘의 부조들과 함께하게 될 수많은 이방인들을 상징했다.

 

 

셋째날(화) 마귀를 다룸

8월 18일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눅 8:27).

 

1. 눅 8:26~39과 마 15:21~28을 읽어 보라. 이 일화들을 통해서 볼 때 예수님은 비유대인들을 어떻게 상대하시는가? 예수님이 가나안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언약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었는가?

[눅8:26~39]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27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28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29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32 마침 거기 많은 돼지 떼가 산에서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게 허하심을 간구하니 이에 허하신대 33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에게로 들어가니 그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거늘 34 치던 자들이 그 된 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하니 35 사람들이 그 된 것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36 귀신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37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새 38 귀신 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39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마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답: 비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살려주시려는 정신을 친절히 대하셨다. 가나안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비 그리스도인들을 그런 정신으로 대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당연히 예수께서 구원의 복음을 누구에게나 전해야 한다는 기별 주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거라사인 땅은 이전에는 그리스 통치 지역이었으나 로마에 의해 유다 지역의 일부가 되었다. 무덤가에 있던 남자는 확실히 마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상태는 험악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했고 마침내 그 도움을 붙잡을 수 있었다.

마귀로부터의 해방이 일어난 곳에 돼지가 있다는 것은 그곳이 이방인 지역임을 확증한다. 돼지들이 몰사해서 발생한 경제적 손실에 대한 반응이 흥미롭다.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 지역을 떠나시도록 요청했다. 반대로 예수님은 치유를 받은 남자에게 그곳에 머물라고 하셨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증언해야 했다. 당연히 그의 말보다 그의 변화된 생애가 강력한 증거가 될 것이었다.

마 15:22에는 “흉악하게 귀신들린” 두로와 시돈 지방의 한 아이의 사건이 나온다. 가나안 사람이었던 아이의 어머니는 그 지역이 문화의 용광로임을 예증했다.

그녀의 조상들은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차지했을 때 그들의 땅에서 쫓겨났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그들을 찾아 가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대화 중에 그녀의 백성을 개로 비유하면서 조금 거친 언어를 사용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했고 도움을 받고자 하는 그녀의 겸손과 간절함을 드러냈다.

제자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생각과 달리 복음이 단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전해져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야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악착같이 방해하는 세력의 배후는 바로 사단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통하여 율법적 관점으로 예수를 공격하게 하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붙어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괴롭혔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을 당장 알아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루시퍼의 실체를 드러내는 사건들이었다.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는 마귀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들이다. 오히려 선한 모습으로 율법을 준수하는 모습으로 예수님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끼쳤다. 요즘도 이런 사정을 동일하다. 지금은 귀신들린 사람들일지라도 정신병으로 보기 때문에 정신병원으로 간다. 그들이 교회를 찾아와서 고쳐달라고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처럼 교회에 잘 다니고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이 참된 복음 진리를 무시하고 깨닫기를 거부하는 일이 문제이다. 이런 문제는 재림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교회 안에 엄연히 있다. 이것이 더 무서운 방해꾼들이다. 우리는 스스로 진리에 굳게 서 있는지 시험하고 확증해야 할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가 다 베뢰아 사람처럼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 이것이 그런가 살피고 오직 진리 안에서 바른 길을 걷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이 거라사인 땅과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귀신 들린 자들을 구원하신 사건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넷째날(수) 열 명의 나병환자

8월 19일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눅 17:18).

 

1. 눅 17:11~19을 읽어 보라. 우리의 국적이나 출신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눅17:11~19]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답: 국적이나 출신지와 신분에 상관없이 우리는 예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구주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도록 구주를 똑바로 보여주어야 한다. 

 

먼저 이 불운한 이들이 모두 예수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들은 도움을 간청하면서 그분의 이름과 지위를 외쳤다. 그들이 그곳에서 바로 정결하게 되지 않은 점도 흥미롭다. 단지 그들은 레 14:2에 명시된 대로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바로 길을 떠났다는 것은 병을 고치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를 표현했다. 아홉 명은 제사장에게 가야 한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지만 치료자에게 드려야 할 감사는 게을리했다. 말씀에 따르면 심지어 그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던 길에서 돌아왔다. 다른 아홉 명이 유대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역을 고려했을 때 그럴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누가가 그를 사마리아인이라고 언급했고, 예수님도 그를 ‘이 이방인’이라고 부르셨던 점에서 미뤄볼 때 다른 아홉 명이 유대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사마리아인을 상대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질병은 그러한 장벽을 초월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고통의 사귐’이라고 불렀던 공통적인 불행과 비극은 민족적 장벽을 허물었다. 정결과 치유와 구원이 필요한 그들의 공통점은 그들을 모두 예수님께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사마리아인들과 다른 외국인들은 예수님의 최우선적인 사역의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그분은 먼저 유대인 사이에서 강한 선교의 바탕을 구축하려고 계획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역을 펼치시면서 제자들에게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증거를 보여주셨다. 비록 그분의 부활 이후에 이 점이 확실해졌지만 예수님은 세계 선교가 그들의 주된 임무라는 개념에 대해 제자들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미리 작업을 해 두셨다.

 

<부가설명> 자기의 기득권을 우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신분이 낮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은혜를 입고 감사하는 정신이 부족한 것을 드러내기가 쉽다. 9명의 병 나은 사람들은 어쩌면 유대인의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 나병 고침을 받은 시몬이 예수님을 초대하고도 죄인 마리아가 향유 붓는 장면을 보고 예수님을 의심한 것도 그가 바리새인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나병이 걸렸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심리가 깊이 배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도 그것을 잘 알지 못한다. 이런 질병은 우리들도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에게 아주 천시당하는 사람인데 그 유대인 예수께서 자기를 받아 병을 고쳐주신 사실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감사했던 것이다. 그에게 예수님은 구원을 확인해 주셨다. 그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주로 믿었던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정신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선교적 열정으로 나타게 될 것이다. 

 

교훈 : 고침을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 중에 예수님께 감사를 표하기 위해 돌아온 사마리아 사람은 구원이 모든 민족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다섯째날(목) 예수님과 헬라인들

8월 20일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0~23).

 

1. 이 사건은 예수님에게만 있는 구원과 소망과 해답을 찾으려는 세계 전역의 절실한 부르짖음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답: 헬라인들이 예수를 찾은 것은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행하신 일들이 인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인간을 초월한 인간의 구주를 세계가 열망하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이 그리스인들은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 같다. 왜냐하면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기 때문이다. 주석가들은 그들이 호감이 갈 만한 그리스식 이름을 가진 빌립에게 갔다는 점을 주목해 왔다. 기독교 개척 사업은 문화적 세심함과 그들이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어린 이해심이 있는 해외 선교사들에 의해 성취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이면서 획기적인 선교 사업은 대상 집단과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그리스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 왔다. 그들은 고난과 죽음, 최후 승리에 대한 그분의 말씀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하늘의 음성도 그들에게 뭔가 생각할 거리를 주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보려는 그들의 소망은 그분께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방문은 세계 복음화의 시작을 알렸다.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며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요 12:19)라고 외쳤다.

우리는 여기서 유대교 밖으로부터 예수님께로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본다. 그것은 세상이 그분의 대속적 죽음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신호였다. 나라와 민족과 백성을 대표하는 이 그리스인들은 그분께로 이끌리고 있었다. 구주의 십자가는 곧 모든 시대마다 온 땅의 백성들을 이끌 것이었다(32절). 제자들은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었다.

 

<부가설명> 화잇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 탄생 시에 동방박사들이 찾은 사실과 십자가를 앞두고 서방에서 헬라인들이 찾은 사실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질 것을 보여주는 전조(前兆)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이미 이렇게 유대인 아닌 사람들에게 친히 복음을 전하여 제자들에게 복음이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제 우리는 우리와 같은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맡았다. 헬라인들이 빌립을 찾은 것이 바로 같은 문화와 풍속을 아는 사람을 찾은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는가. 외방에 선교사로 가지 못해도 동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자기 처지에서 충성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 그리스인들의 방문은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께 큰 용기가 되었으며 세계의 복음화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8월 21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 비록 이것이 특정 환경에서 특정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이지만 우리는 원칙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영적, 신학적 진리에 관하여 커다란 특혜와 특권을 누린 자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주어진 진리에 대해, 특히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은 전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은 특별한 진리에 대해서조차 안주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우리가 이러한 진리에 굳게 서 있는지 확신할 필요가 있다. 그다음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십자가는 온 인류의 절대적인 보편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이며 구원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집단이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봅니다. 이는 현재와 과거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민족,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우월감을 갖습니까? 그러한 태도는 무엇이 잘못됐습니까? 십자가 아래서 그런 태도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나라, 민족, 인종에게 싶게 무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예수의 피로 새로 난 그리스도인이라는 민족이 된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죄로 물든 세상의 인종 계급 신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져야 한다. 

 

➋ 우물가에 있던 여인은 마을로 돌아가 예수님에 대하여 자기 백성에게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특정 문화에 속한 사람을 활용해 그 문화에 속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 방식의 중요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 우리는 우리와 같은 언어, 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➌ 그리스인들은 예수님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에 대해 들었거나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이 땅에서는 교회와 그분의 백성들이 그분을 대표합니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고 어떤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뜻일까요?

※ 우리의 존재와 삶을 보고 예수님을 알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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