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에 맞게 봉사하셨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8/2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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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8-20 07:13 조회7,186회 댓글0건본문
8월 27일 안식일
일몰 : 오후 7시 8분
기억절 :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연구 범위 : 막 5:22~43, 막 10:46~52, 요 5:1~9, 시 139:1~13, 막 2:1~12, 행 9:36~42
아프리카 어느 나라의 한 재림신자는 은퇴한 뒤에도 사역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사는 지역은 에이즈로 인한 피해를 치유하는 것이 시급했다. 가장 시급한 필요는 제대로 영양공급을 받지 못하는 에이즈 고아들을 돕는 것이었다. 2002년에 그녀와 그의 교회는 일주일 중 6일을 지역의 어린이들에게 고형식을 먹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50명의 어린이들로 시작해서 2012년에는 하루에 300명의 어린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였다. 이 사업으로 인해 보육원이 시작되었고 45명의 어린이들 그곳에 다니고 있다. 또 그들이 직접 경영하는 농장에서 재배한 채소와 옥수수를 나눠주고 아드라에서 제공하는 의류도 보급한다. 그들은 또 여성 직업 훈련 프로그램을 개설하여 여성들이 소득을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결과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였다. 처음에 5명으로 시작한 이 교회는 2012년에 16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하나님은 2012년 고아원과 새 교회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셨다.
이는 지역사회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신자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지역사회의 필요에 반응했던 예수님의 사역에서 핵심 교훈을 배운다.
➋ 느끼기 :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접촉했던 예수님의 모본으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➌ 행하기 : 영적 은사를 가지고 지역사회에 복이 될 수 있는 길을 찾기로 결심한다.
A.
❷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며 끼어든 요청에 그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 그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❸ 우리가 남을 도울 때에 먼저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그들의 진정한 상태와 필요를 바르게 알기 위하여.
❹ 우리가 지역사회의 필요에 맞게 효과적으로 봉사하려면 먼저 어떤 일들을 해야 할까요?
※ 지역사회의 진정한 필요를 파악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B.
❷ 도르가의 봉사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으며 그의 일화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 교회 안팎에서 필요한 사람들을 도왔다.
❸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더 깊은 필요를 채우기 위해 어떻게 일할 수 있을까요?
※ 그들이 정신과 영적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하여 마음 문을 열도록 접근해야 한다.
❹ 지역 사회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 협력하여 최선을 다해 일해야 합니까?
※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서로 협력하며 헌신해야 한다.
결론 : 예수님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셨지만,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가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필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아셨습니다. 오늘날도 효율적인 사역을 펼치려면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돌보는 전인적인 접근방법을 추구해야 합니다.
첫째 날(일) 8월 21일 사역의 방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막 5:27).
예수님은 가버나움 근처의 호숫가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리셨다(막 5장 참고). 제자들은 데가볼리에서 귀신들린 사람과 마주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평소처럼 군중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분의 관심을 얻으려는 열망으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다가가고자 서로를 밀쳤다. 이내 한 사람의 요청이 접수되었는데 그는 회당장이었다.
1. 막 5:22~43을 읽어 보라. 회당장을 도우러 가는 길에 예수님을 가로막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분은 그런 방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사역이 지장을 받을 때에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하여 우리는 이 이야기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막5:22~43]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23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26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27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31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2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33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40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42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답: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는 중에 12년 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만나시고 치료해 주시고 그의 간절한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시고 구원을 확인해 주셨다.
솔직히 말해서 방해받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바쁘고 해야 할 일도 많고 가야할 곳도 많고 해야 할 업무도 많다. 우리는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때로 정해진 시간 내에 그 목표들을 이루기를 원한다. 하지만 끼어드는 일들이 지장을 초래한다.
누군가 적절하지 않은 때에 도움을 요청하러 오면 짜증이 난다. 때로 그대가 하던 일을 멈추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도울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아서 돕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런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는 대부분 방해로부터 찾아온다. 우리는 대부분 방해를 피하려고 하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 기분이 상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면 그분이 돌보신 어떤 요청들은 사실상 방해거리였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요청들에 다정하게 반응하셨다. 알고 보면 우리가 맞이하는 사역의 기회들은 방해의 형태로 온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렀을 때에 어디를 가고 있었는지 무엇을 할 예정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어쨌든 멈춰서 도움을 주었다. 그것도 방해였다.
<부가설명> 맡아놓은 것과 갑자기 해야 할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맡아놓은 것은 시간이 좀 지체되어도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2해 열루증 앓고 있는 여자들 고치는 것은 그 여자의 처지에서는 급한 일이었다. 그가 12년을 피를 흘렸다는 것은 그의 기력이 소진될 대로 소진된 상태로 볼 수 있다. 무리에 둘러싸여 오시는 예수님의 무리에 접근한다는 것은 그 여자의 체력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정말 일생의 기력을 다해서 예수님께 접근하려고 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 예수님은 그 여자가 자기에게 접근하려고 하는 방향으로 짐짓 움직이셨을 것이다. 그 여자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일부러 접근하는 줄 알지 못했을 것이지만 예수께서 자기의 손닿을 곳에 이르렀을 때 일생의 믿음을 손끝에 집중해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그때 그는 병이 나은 줄 몸으로 깨달았다.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슬그머니 떠나려고 했지만 예수께서 멈추어 서셔서 그 사실을 알리셨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믿음을 대중 앞에 칭찬하기를 원하셨다. 대중들에게 믿음의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믿음은 구원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확인해주셨다. 예수님은 어떤 경우든지 생명의 봉사를 할 기회가 생기면 즉시 봉사하셨다.
교훈 : 우리는 사역의 과정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도움 요청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유명한 예수님의 일화들은 사역 도중에 맞이한 방해에 반응한 결과들이었다.
둘째 날(월) 8월 22일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막 10:51).
1. 막 10:46~52과 요 5:1~9을 읽어 보라. 두 경우 모두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막10:46~52]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요5:1~9]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답: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그들이 깨닫는 기회를 주시고, 또 그들의 말을 통하여 예수께서 그들과 소통하는 기회를 만들어서 그들을 인정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하여 물으셨다.
두 경우에 모두 그들이 바라는 것은 뻔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원 하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묻지 않으셨을지라도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러한 질문을 통해 그들을 존중하고 계심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모습과 그들이 씨름하는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많은 사람들이 말할 상대와 그들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필요로 한다. 때로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큰 용기가 된다.
그대가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의사가 그대를 한 번 쳐다보더니 바로 처방전을 써주고 내보냈다고 생각해 보라.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분명히 '저 의사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말 알고 있을까? 내 느낌도 안 묻고 가슴에 청진기도 안 대고 혈압 검사도 안 하고...' 하며 의심할 것이다. '치료하기 전에 진찰하라!'는 것은 기본적인 진료 수칙 가운데 하나이다.
동일한 개념이 사람들의 건강과 그들의 전인적인 필요에 초점을 맞추는 의료 선교 사업에도 적용된다. 이미 다 아는 것처럼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그들의 지역 주민들을 섬기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추측한다. 우리가 사람들의 필요와 지역 사회의 필요에 관해 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때,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우리 역시 어떻게 지역 주민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섬길 수 있을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도 얻을 수 있다.
<부가설명>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담하러 온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자세히 경청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대화하시기를 좋아하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는 진지하고 길었다. 또 사마리아 여자와도 진지하게 대화하셨다. 병 고쳐주기를 원하는 사람들과도 대화하셨다. 필요를 들어주기 위한 대화는 힘이 있다. 재림성도들이 지역사회에서 올바른 봉사를 위하여서는 지역사회의 필요를 들을 필요가 있다. 영적인 필요는 대부분의 그들이 알지 못한다. 또 다른 교회들도 있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영적 필요를 말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실생활과 건강상 필요는 그들의 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재림교회에서 건강상 필요를 도우기 위한 시도를 많이 한다. 좋은 일이다. 그뿐이 아닐 것이다. 정신적 필요도 많을 것이다. 이렇게 필요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교회가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들의 필요를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실력 없이는 봉사가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 건강과 힘의 실력, 재정적 실력, 봉사의 실력 등등 이런 실력을 길러야 한다. 그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실력을 갖추도록 교회는 교인들을 교육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가 지역 사회를 섬길 때에 그들의 필요를 예측하여 사역을 전개하기보다 그들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일 때 더 인정받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다.
셋째 날(화) 8월 23일 더 깊은 필요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시 139:2).
주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아셨다. 복음서의 여러 기사를 보면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생각을 보실 뿐 아니라 그들의 과거도 아셨다(막 2:8, 요 4:18 참고).
1. 시 139:1~1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시139:1~1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13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답: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어제 보았듯이 예수님은 사람들의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를 도우셨다. 실제로 그분은 표면 아래에 있는 필요들도 아셨다. 중풍병자의 일화에서 이런 사실이 나타난다. 그에게 육체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이 자명했지만 거기에는 더 절실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기 전에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말씀하셨다.
2. 막 2:1~12을 읽어 보라. 이 사람에 관하여 표면 아래에서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었는가? 이런 깊은 필요는 우리가 도와야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
[막2:1~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답: 영생의 생명을 얻을 필요를 보신 사실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우리가 대회를 하는 중에 이런 것을 느낄 수 있다. 만남의 최종 목적이 바로 이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문제가 육체적인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러나 그가 바란 것은 육체적 회복이라기보다는 죄의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일 예수를 보고 용서와 하늘의 평강의 보증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267).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표면 아래까지 살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도우려는 자들이 죄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즉 그들의 표면적인 필요가 무엇이든지 그들 또한 은혜가 필요하며, 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고 오직 그들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그들도 깨닫고 확신할 필요가 있다.
<부가설명> 사단은 이 세상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영혼불멸을 믿게 해서 진정한 생명을 얻는 것을 얻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엄청 튼튼히 구축해 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진리를 조리 있고 합리적으로 제시해도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영적 필요를 제시하기 보다는 그들이 그 필요를 드러낼 수 있도록 대화하는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대화하고 당장 육신의 필요와 생활의 필요를 친절과 진정으로 봉사하면 마음이 열릴 것이고 영적 필요를 말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도움과 친절의 손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일은 성령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계속적인 임재와 도움이 없다면 말씀의 전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만이 거룩한 진리를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교사이십니다. 성령을 통해 마음에 수반되는 진리만이 양심을 일깨우고 생애를 변화시킵니다. 아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소개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명령과 약속에 익숙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진리를 각인시키지 않으면 반석 위에 떨어져 깨어질 심령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교육이나 유리한 지위가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님의 성령과 협력하지 않고는 아무도 빛의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씨앗이 하늘의 이슬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약동하기 전까지는 복음의 씨 뿌리기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소망 671 2016년 8월 9일 기도력)
교훈 : 우리는 사람들의 표면적인 필요 외에 더 깊은 필요를 살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깨달음과 확신이다.
넷째 날(수) 8월 24일 욥바의 도르가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1. 행 9:36~42을 읽어 보라. 도르가는 욥바에서 주변 사람들의 필요를 살피며 어떤 일을 했는가? 41절에서 "성도들과 (특히) 과부들"이라는 구절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행9:36~42]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37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38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39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41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42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답: 선행과 구제가 심히 많은 제자였다. 성도들과 과부들이라는 말은 신자와 불신자들을 포함하는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섬긴 것을 나타낸다.
도르가는 행동하는 제자였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행 9:36). '인천에 또는 강릉에 ~라 하는 교회가 있으니'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행 9:36)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성도들이란 교회 신자들을 말한다. 과부들 중에는 신자와 비신자가 모두 있었을 것이다. 도르가는 두 부류를 모두 섬겼던 것 같다. 그대의 '욥바'는 교회 안과 밖을 포함해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지속적으로 돌보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선교 전략이다(행 2:42~47 참고). 그러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저 재림신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는지 보라!"고 말할 것이다.
2. 요 13:34~35과 요 15:12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이 공통적으로 전하는 기별은 무엇인가? 우리는 교회로서 왜 그러한 기별을 따를 필요가 있는가? 왜 때로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가?
[요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답: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교회가 참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세상에 드러낸다. 이것이 어려운 것은 신도들이 예수님 중심이기 보다는 자기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을 섬기려고 계획할 때에 그대는 어떤 유형과 접근 방법을 사용할 것인지 심사숙고해야 한다.
애미 셔먼은 지역사회를 섬길 때에 교회가 사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1) '안정형'은 교회 주변의 지역 주민의 필요를 채우는 데 초점을 맞춘다. 에이즈 치유 사역을 벌였던 여인은 인근 지역사회를 그녀의 '욥바'로 선택했다. (2) '정원사형'은 정원사가 정원을 집의 연장선에서 보는 것처럼 교회 외부의 이웃과 연계된 사역을 발전시킨다. 때로 몇 교회가 공동으로 교회 밖에서 지역사회봉사센터를 운영한다. 어떤 도시에서는 몇 교회가 함께 건강식품점을 운영했고 그 결과 새로운 교회가 개척됐다. (3) '목자형'은 지리적으로 한정된 이웃보다는 목표로 하는 인구 전체를 섬긴다.―Ronald J. Sider et al., Churches That Make a Differece: Reaching Your Community with Good News and Good Works (Grand Rapids, Mich.: Baker Books, 2002), p. 146.
<부가설명> 인간성은 별로 변하지 않았으나 사회는 엄청나게 변하였다. 지금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 시대이다. 그들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오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회가 교회보다 더 좋아 보이는 시대가 되었다. 옛날 같지 않다. 교회들이 대형화하는 이유가 있다. 대형교회가 되어서 재정이 넉넉하게 돌아갈 때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를 위한 시설을 갖추고 전문 인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런 교회에 출석하며 육신적 정신적 필요를 얻어간다. 이런 추세에 옛날 사람들이 희소하고 도보로 다니고 문 열기가 쉬운 시대의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 정신을 취하고 방법은 오늘날 사회에 알맞도록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르가의 정신은 여전히 필요하고 예수께서 가르치신 서로 사랑하는 원칙은 여전히 원칙이다. 교인들이 자기중심적으로 교회를 이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일이 어렵다. 교인들은 이런 일을 하면 내게 어떤 영향이 올까하고 교회 사업에 임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을 할 때 교회가 어떤 유익을 받을까 하는 것을 첫째로 생각할 때에 서로 사랑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도르가처럼 봉사하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주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욥바라는 지역사회에서 교인뿐 아니라 이웃까지 섬겼던 도르가는 오늘날의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행동하는 신앙을 실천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다섯째 날(목) 8월 25일 일하는 교회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그대의 교회가 지역사회를 어떻게 섬길 것인지에 대하여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회의 모든 부서가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교회 지도자가 아닐지라도 모두가 각자 기여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또한 전 교인이 서로 협력하는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대의 교회가 지역 사회를 향해 완수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략은 적어도 세 가지 자료의 정보에 기초해야 한다. (1) 성경과 예언의 신의 권면, (2) 지역 사회의 필요에 대한 지식, (3) 회중의 의견. 어떤 교회들은 교인 전체를 불러서 외부 사역과 내부적인 개선을 위하여 생각과 꿈을 나누는 자유 토론 시간을 통하여 정보를 수집한다.
1. 눅 14:25~35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헌신 또는 계획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눅14:25~3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답: 해야 할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계획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 계획은 세상에 소금이 되는 계획이 되어야 한다. 희생과 봉사의 정신이 계획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대가 지역사회의 필요를 효과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요구되는 과정을 고려하면 '이것은 너무도 많은 헌신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우리는 지름길을 좋아한다. 위의 말씀에 나오는 두 비유는 선교와 제자도의 책임을 가볍게 지려는 우리의 태도를 경계하고 있다. 그것들은 선교 사명을 위해 분석과 계획 수립이 필수적임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선한 청지기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눅 14:34에서 소금의 맛은 헌신을 상징한다. 이러한 헌신이 없다면 우리의 봉사와 제자도는 쓸모도 없고 의미도 없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 열렬하고 성 실하게 헌신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 헌신한다면 사역에도 열렬하며 성실하게 헌신할 것이다.
<부가설명> 다윗은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131:1)라고 고백했다. 교회가 힘에 지나친 계획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일을 추진함에는 예산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한다고 말하지만 믿음으로 정도에 맞는 계획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 아니겠는가. 모든 것을 조사하고 합당한 사업계획을 세우고 거기에 필요한 예산과 방법을 세밀하게 세우는 것은 주님의 권고를 따라는 것이다. 일단 교회가 계획을 세우면 각 부분에 합당한 사람을 배치(配置)하고 그들이 목적에 맞도록 활동해야 한다. 그러나 일의 성취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16:1) 그래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16:3) 하나님께 일을 맡기려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배치(背馳)되는 일을 계획하고 하나님께 맡긴다면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교회는 기도하며 신중히 생각해서 일을 계획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교훈 : 교회는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단계에서 모든 부서와 신자들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그 과정에는 열렬한 헌신이 요구된다.
여섯째 날(금) 8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신 15:11, 욥 29:11~17, 잠 14:31, 19:17, 행 3:6, 약 1:27~2:5을 읽어 보라. <구호 봉사>, 327~338 "호주에서의 개척"을 읽어 보라.
예수님처럼 바울도 사람들의 명시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에 참여했다. 우리는 아테나 마스 힐에서의 유명한 일화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행 17:23을 보면 바울은 도시에서 목격한 우상에 격분하여 시장에서 지역 지식인들 또는 그와 대화하려는 모든 사람들과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들의 필요와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개념에서 그들의 삶에 참 하나님을 알 만한 틈이 있고 우상숭배를 중단할 여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유대인들과 경건한 이방인들이 다니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행 17:17). 즉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이점을 활용하여 복음을 전했다. 바울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려고 했다. 우리는 그가 회당에서 그리고 시장에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에게 바치는 제단을 세우고 모종의 신을 섬기고 있었다. 그러한 근거를 바탕으로 바울은 그들에게 그들이 "알지 못하고 위하는"(행 17:23) 분을 알려 주고자 했다. 그는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28)며 우연치 않게 진리를 표현했던 어느 시인의 시를 인용하기도 했다. 바울은 백성들이 있는 위치에서 시작했다. 그는 그들이 우상으로부터 떠나서 살아계신 부활의 하나님께로 인도되기를 원했다. 정리하자면 바울은 접촉하려는 자들의 필요를 탐색한 후에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가 외부 선교 활동을 고려할 때에 왜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까? 그 궁극적인 목적이란 무엇입니까?
※ 선교봉사 활동은 지역사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겠지만 그 목적은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빼면 봉사의 의미가 없어진다.
➋ 어떻게 하면 사역의 방해를 짜증나는 일이 아니라 사역의 귀중한 기회로 볼 수 있을까 요? 갈 2:20의 말씀은 이런 분야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 예수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을 깨닫고 방해가 아니라 예수께서 봉사할 기회를 주신 줄 확신할 때 바른 봉사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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