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믿음으로 얻는 의(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2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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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10-21 06:20 조회7,594회 댓글0건본문
10월 28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9분
연구 범위 : 롬 3:19~28
기억절 :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우리는 이번 기에서 로마서의 기본 주제이자 그 어느 진리보다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던 ‘믿음으로 얻는 의’를 다룬다. 교황 레오가 루터와 그의 가르침을 정죄하는 칙서를 발행했던 1520년 이후로 이 신념에 대한 로마 교회의 변화는 더 이상 없었다. 루터는 그 칙서의 사본을 불태워 버렸다. 왜냐하면 세상에 절대로 타협할 수 없는 한 가지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믿음으로 얻는 의’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라는 표현 자체는 율법을 둘러싼 하나의 비유이다. 범법자는 심판자 앞으로 나아와 자신의 범법으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러자 대속자가 나타나서 그 범과를 자신이 감당하고 그 범죄자를 깨끗하게 한다. 대속이 인정되자 그 범죄자는 이제 죄에서 깨끗해졌을 뿐 아니라 마치 전혀 죄를 지은 사실이 없는 것처럼 재판장 앞에 선다. 왜냐하면 범죄 기록이 전혀 없는 그 대속자가 완전한 법 준수의 자격을 용서받은 그 죄인에게 양도했기 때문이다.
구원의 계획 속에서 우리는 모두 범죄자이며, 그 대속자는 예수님이시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복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이해하며 롬 3:19~28의 의미를 파악한다.
느끼기 : 믿음으로 얻는 의의 중요성에 대하여 절실하게 공감한다.
행하기 : 칭의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성령 안에서의 풍성한 삶과 성화에 바르게 연결시킨다.
➋ 왜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 인간은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노력으로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➌ 그대가 알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입니까? ※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➍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방법으로 어떻게 자신의 의로우심도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죄를 처리하신 사실에 의해서 그렇다.
➎ 우리의 삶이 실제로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 구원 안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까?
※ 예수께서 우리를 사유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기 때문이다.
➏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큰 은혜를 얻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이 복된 기별을 증거하여 깨닫게 하는 봉사이다.
결론: 이번 주의 본문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한 바울의 주해로부터 시작합니다. 롬 3:21의 ‘이제는’이라는 표현에서 바울은 로마서의 핵심적인 전환점에 이릅니다.
첫째 날(일) 10월 22일 율법의 행위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1. 롬 3:19~20을 읽어 보라. 바울은 여기서 율법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율법의 기능은 무엇이며 그것이 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왜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토록 중요한가?
[롬3:19,20] 위에 적힌 구절이다.
답: 율법의 기능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며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바울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율법이라는 용어를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한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토라’라는 말을 들을 때에 특정한 의미로는 모세오경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명령을, 일반적으로는 구약 성경 전체를 떠올린다. 도덕법은 의식법과 함께 율법의 일부이며 도덕법에서 확장된 형태의 규례와 율례도 율법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율법을 유대교의 체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율법 아래에 있다는 것은 사법권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부족하며 죄가 있음을 드러낸다. 율법은 그 죄를 제거할 수 없다. 단지 죄인으로 하여금 그것에 필요한 해결책을 찾도록 이끌 뿐이다.
로마서를 현대에 적용한다면 유대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적인 법이라는 측면에서 율법을 고려해야 한다. 유대교 체계가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 법도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 아니다. 그것의 기능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 성품에 비추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 율법이 도덕법, 의식법, 공민법 혹은 그 모든 것이든지, 그것의 일부나 그 전체를 준수하는 생활로 인해 사람이 하나님의 시선에 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것은 율법의 목적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의 부족함을 지적하며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질병의 증상이 질병을 치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증상은 치료제가 아니다. 그것은 치료제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것이 율법의 기능이다.
<부가설명>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고 했는데 왜 그럴까? 공자나 석가 같은 세상에서 성인으로 추앙받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엄청난 선을 행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그들이 행한 그 선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을 때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했다.(막10:20) 바울 자신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다.(빌3:6)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다. 구원받는 것과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들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본질적인 상태가 사망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가 자기의 행위로 살아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성경은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죽었다고 분명히 계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행하는 도덕적 율법적 선한 행위가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게 하지 못한다. 살려줄 수 있는 누군가가 그들을 살려주지 않으면 결코 살아나지 못한다. 살려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다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 구원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요, 그렇게 살아난 것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말을 부가설명에서 자주 하게 될 것 같다. 로마서나 지난 기의 갈라디아서가 인간의 상태를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살아 있는데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하여 인간성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한것은 성경의 복음과 죄의 실상에 대하여 명확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훈 : 도덕법을 포함하여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을 드러내고 그리스도의 필요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둘째 날(월) 10월 23일 하나님의 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1. 위 성경절의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답: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외에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이 새로운 의는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율법의 의와 대조된다. ‘하나님의 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의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그분이 제공하시는 의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정한 의로 인정하시는 유일한 의이다.
물론 이는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로 계시는 동안 그분의 삶에서 이루신 의로서 그분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하는 자에게 주시되 그들이 그것을 가지기에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다.
“의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다. 율법은 의를 요구하는데 바로 이것을 죄인이 율법에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 그가 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얻는 것뿐이다. 그는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하나님께 가져갈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순종하심을 죄인의 계정에 두신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영혼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그를 마치 의인인 것처럼 취급하시고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를 사랑하신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67).
2.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런 놀라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롬 3:22 참고)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답: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작동할 때 믿음이란 지적 동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 관한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 그 이상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정한 믿음은 그분을 구주와 대속자이자 보증과 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그분의 계명에 따라 살기를 구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는 말의 헬라어는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인데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뜻이다. 교과 저자는 ‘예수의 믿음이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라고 하여 헬라어의 직역과 한글번역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이 설명이 틀린 것이 아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가르쳐주고 싶은 진리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확신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신분을 비우시고(빌2:6,7)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예수님께 없었으면 어떻게 육신이 되어 오셨겠는가. 예수님의 이런 확신으로 구원사업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을 주신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받으면 된다. 그래서 이 구절은 저자가 설명한대로 예수의 믿음이요 또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인은 예수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아멘. 우리가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되어 예수님의 생명을 내 생명으로 얻게 된다. 그런 다음 그 생명이 내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에 행하신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이다.(갈2:20)
교훈 : 우리가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뜻과 명령을 따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셋째 날(화) 10월 24일 그분의 은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1. 우리는 지금까지 율법이 무엇이며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해 공부했다. 그러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롬 3:24을 읽어 보라.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속량함이 예수님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롬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답: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
위의 말씀에서 ‘의롭다 하심’이란 어떤 뜻인가? 그리스어 ‘디카이오오’는 ‘의롭다고 하다’, ‘의롭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그 말은 의를 뜻하는 ‘디카이오수네’와 ‘디카이오마’와 어근이 같다. 그래서 ‘의롭다 함’과 ‘의’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번역 성경에서는 그 관계가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실 때에 우리는 의롭게 된다.
이와 같이 의롭다 함을 받기 전의 사람은 불의하며 하나님께 가납되지 않는다. 반면 의롭다 함을 받은 후에는 의로운 것처럼 간주되며 그분에게 가납된다.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일어난다. 은혜란 호의를 의미한다. 죄인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그 사람을 의롭게 여기거나 그렇게 선포하는 것은 은혜의 행위이다. 그것은 합당치 않은 자에게 베풀어지는 호의이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전적인 속절없음을 인정한 채 아무런 공로 없이,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려야 한다는 어떤 요구도 받지 않고 그냥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함 곧 그 죄인의 대속자와 보증이신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속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로마서는 칭의를 하나의 순간적인 행위로 설명한다. 즉 그것은 한 순간의 시점에서 발생한다. 직전 순간만 해도 그는 밖에서 의롭지 않고 가납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으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즉시 그는 안으로 들어와 가납되고 의로운 상태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칭의를 과거의 일 곧 자신이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굴복했을 때에 일어난 사건으로 간주한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롬 5:1)다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그때부터 의롭게 된 상태라는 뜻이다. 물론 의롭게 된 죄인이 타락한 다음 다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면 칭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또한 재회심이 매일의 경험으로 간주된다면 칭의 역시 반복적인 경험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이해도 있다.
<부가설명> 은혜는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를 뜻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그 호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이시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과 의논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인류에게는 은혜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속량하셨다. 속량(구속)은 노예나 죄인을 위하여 값을 지불하고 사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값을 하나님께 지불하셨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지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값을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셨다.(히9:14)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고하시는 것이다.(롬8:33,34)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도 의롭고 예수 믿는 사람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롬3:25,26)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에는 다 시체들일 뿐이다. 마치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 같은 상태에 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사람의 이 죽음을 예수께서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을 드러내신 후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자라고 인정하시고 그것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
교훈 : 구원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임을 믿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며, 그 순간 우리는 구원 안에 있게 된다.
넷째 날(수) 10월 25일 그리스도의 의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롬 3:25에서 바울은 구원의 위대한 복음을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화목제물이라는 화려한 용어를 사용한다. 그 말의 그리스어 ‘히라스테리온’은 신약성경에서 오직 이곳과 히 9:5에 등장하는데 히브리서에서는 그 말을 “속죄소”라고 번역하였다. 롬 3:25에서 화목제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칭의와 속량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듯이 히라스테리온은 구약 성소에서 속죄소로 표상되었던 모든 것의 성취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예수님이 희생적인 죽음을 통해 구원의 수단으로 제시되셨으며 속죄를 제공하는 존재로 묘사되신다는 뜻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일을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또한 롬 3:25은 ‘죄의 사면(간과)’에 대해 논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가납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 속에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죄들이 사면될 수 있는 길을 제공하셨다.
‘사면(간과)’이란 말의 그리스어 ‘파레시스’의 문자적인 의미는 ‘넘어감’ 또는 ‘지나감’이다. ‘넘어감’은 죄를 모른 체 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으로 모든 백성이 지은 죄의 값을 치렀기 때문에 과거의 죄들을 넘기실 수 있다. 따라서 그분의 피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하여 사면을 받을 수 있다(고전 15:3).
1. 롬 3:26~27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바울의 요점은 무엇인가?
[롬3:26,27]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답: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자기의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고 우리의 죄가 속량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간과하셔서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바울이 자신의 말을 듣는 모든 자에게 전하기를 열망하는 복음은 인류가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행위나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과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르러 온다. 하나님은 갈보리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실 수 있고 그러면서도 우주의 관점에서 여전히 정의롭고 공평하다고 여김을 받으실 수 있다. 하늘이 최상의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께 손가락질 할 수 없다. 사탄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비난했었다. 십자가는 이런 주장을 반박한다.
<부가설명> 우리는 의를 도덕적 행위와 관련하여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이지만, 다시 말하면 스스로 도무지 의를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행위로 모든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그분이 이루신 그 의를 우리가 이룬 것으로 여겨주신다고 이해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하나님의 의인가 하는 것은 성경을 깊이 관찰하는 중에 잘 생각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이다. 이사야 45장 8절에는 구원과 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창조에 인간이 보탤 것이 있겠는가? 결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완전히 지켰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없다. 그 의는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 창조된 의를 받는 길이 예수를 믿는 것인데,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새로 창조되는 것이다. 새로 창조되는 것은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새 생명을 얻는 것은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의는 곧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고 하셨다.(요5:24,25) 그래서 생명 있는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산 자가 된 것이 의를 얻은 것이다. 죽은 자가 예수를 믿음으로 산 자가 되어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 있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 문제가 아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속한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도 증명되었다.
다섯째 날(목) 10월 26일 율법의 행위 없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1. 이 말씀은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그대의 생각을 설명해 보라.
답: 이것은 율법 지킬 필요여부와는 상관없는 말이다. 의롭게 되는데 율법의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일 뿐이다. 오해하지 않아야 한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바울은 롬 3:28에서 유대교 체계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러한 체계 아래서 얼마나 양심적으로 살려고 노력했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지 않는다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다.
롬 3:28은 믿음의 법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그의 주장에 대한 결론이다. 만약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의해 의롭다 함을 얻는다면 그는 그것에 대해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그 공로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께 돌아간다.
엘렌 G. 화잇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 후에 “그것은 인간의 영광을 티끌 속에 내던지고,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인간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라고 답했다(목사와 복음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456).
율법의 행위는 과거의 죄를 속량하지 못한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속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희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의 행위는 칭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행위 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칭의를 얻을 만한 공로가 없이 의롭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성경절을 오해하고 잘못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행위와 순종 심지어 도덕법에 대한 순종마저 경시한다.
그들은 그렇게 바울의 의도를 완전히 잘못 읽고 있다. 로마서뿐 아니라 다른 서신에서도 바울은 도덕적인 율법의 준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예수님도 당연히 그러셨고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다(마 19:17, 롬 2:13, 약 2:10~11, 계 14:12). 바울의 요점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칭의의 수단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실상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율법의 요구를 절대 성취할 수 없다.
<부가설명> 칭의와 율법의 관계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종종 성경이 말하는 핵심을 벗어나서 전혀 다른 방향의 논란을 일으킨다. 의롭다함을 얻는데 율법의 행위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인데 사람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로 확대하는 것은 칭의와 관계하여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가 필요 없다는 설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율법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당연히 지켜지는 상황이라는 것을 바울은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얻는 데는 아무런 역할이 없고 오히려 그것을 지키는 것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창조영역이기 때문이다.(사45:8) 바울은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얻도록 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얻는 데는 사실 우리의 믿음도 별 역할을 하는 것이 없다. 월요일 부가설명을 다시 읽어보라.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전적인 은혜이다. 이것은 창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태초에 창조하실 때 창조되는 사람의 역할이 있었는가? 결코 없었다. 그러나 창조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했다. 재창조도 동일한 이치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데는 인간의 역할이 낄 자리가 결코 없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하나님의 계명이 새 피조물의 생활스타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와 율법의 최종적이 관계이다. 아멘.
교훈 :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율법을 지키려는 자기 의를 포기한 것이지, 율법을 온전하게 성취하신 하나님의 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여섯째 날(금) 10월 2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가려 뽑은 기별 1권>, 236~239 “율법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의”, 331~335 “와서 구하고 찾으라”, 373~374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완전한 순종”, <실물교훈>, 128~129 “새 것과 옛 것”을 읽어 보라.
“비록 율법은 죄의 형벌을 감해 주지 못하고 죄인에게 그의 모든 부채를 청구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고 당신의 자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회개하고 믿는 영혼에게 풍성하게 미친다. 영혼에게 찍힌 죄의 낙인은 오직 대속 제물의 피를 통해서만 지워 버릴 수 있다. 하늘 아버지와 동등하셨던 주님의 희생보다 덜한 제물로서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주님의 생애, 겸비, 죽으심 및 멸망 받은 인류를 위한 중재 등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율법을 높이고 존귀케 하는 것이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71).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할 때 사도는 믿음과 은혜의 행위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은혜의 일을 하는 자는 자신이 그런 일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의 행위를 행하는 동안) 신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를 구한다. 사도가 말한 ‘율법의 행위들’이란 사람들이 마치 그들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의로워지는 것처럼 자기 의와 신뢰에 빠져 행하는 행동들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선을 행하면서 의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 의를 획득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을 뿐이다.”—Martin Luther, Commentary on Romans, p. 8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에 관한 성경 가르침을 바라보는 종교개혁적인 관점의 상속자이자 건축자이며 보수자이고 사도적인 복음의 완전성과 선명성, 균형성을 설명하는 해석자로 여긴다.”—Ivan T.Blazen, “Salvation,” 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2000), p. 307. 여기에 적힌 말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근거로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믿고 있습니까?
※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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