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인간의 상태(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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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10-13 07:46 조회7,144회 댓글0건본문
10월 21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7분
연구 범위 : 롬 1:16, 17, 22~32, 2:1~10, 17~24, 3:1, 2, 10~18, 23
기억절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바울은 로마서 초반에서 복음의 핵심적이고 중대한 진리 곧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규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진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타락 이후로 줄곧 죄로 심히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 눈의 색이 그러하듯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내재해 있다.
마르틴 루터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모두가 죄 아래 있다’는 표현은 영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눈이나 다른 이들의 눈앞에 나타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앞에 설 때를 말하려는 것이다. 사람들 눈에 범죄자로 드러난 자들뿐 아니라 자신의 눈과 타인의 눈에 의롭게 비쳐진 자들까지 그들 모두가 죄 아래 있다. 겉으로 선을 행하는 자들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 또는 이익과 명예에 대한 사랑의 동기로 그런 일들을 행하거나 아니면 어떤 목표에 대한 즐거움을 동기로 삼을 뿐 자발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은 겉으로는 계속 선을 행하지만 속으로는 선행을 거부하는 악한 정욕과 탐심에 철저하게 물들어 있다.”—Commentary on Romans, p. 69.
※ 학습 목표
깨닫기 : 인류가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음을 인정한다.
느끼기 : 우리의 속절없는 상태를 인식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소망을 품는다.
행하기 : 구주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인간의 선행과 진보에 대한 개념을 거부한다.
➋ 인류의 도덕적인 상태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롬 1:22~23 참고)
※ 심히 부패하다고 설명한다.
➌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실 수 있습니까?(롬 1:16~17)
※ 대속의 복음으로 그것을 믿을 때 구원하신다.
➍ 유대인들에게도 이러한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 그들이 율법을 가졌을지라도 구원은 율법에서 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➎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죄인임을 깨닫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➏ 구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그가 구주가 필요한 사망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다.
결론 : 인류가 자신의 총체적인 죄악의 상태를 부인하거나 과소평가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음을 깨닫거나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첫째 날(일) 10월 15일 하나님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1. 위의 말씀은 그대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대는 위 말씀에 나오는 약속과 소망을 어떻게 경험해 보았는가?
답: 복음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다는 약속과 소망을 확신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위의 말씀에서는 다음과 같은 핵심 단어들이 등장한다.
1. 복음. 이 말의 그리스어는 문자적으로 ‘좋은 소식’ 또는 ‘좋은 기별’이란 뜻이다. 그 말 자체는 어떤 좋은 기별을 가리키지만 이 성경절에서처럼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일 때는 ‘메시아에 대한 좋은 소식’이 된다. 복음이란 메시아가 오셨고 백성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하나님의 율법이 아닌 예수님과 그분의 완전한 의에서 구원을 찾을 수 있다.
2. 의. 이 말은 하나님께 바르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 말의 특별한 의미가 로마서에서 자세히 설명되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 책을 연구하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룰 예정이다. 우리는 롬 1:17에서 그 말이 “하나님의”라는 구절에 의해 의미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의이며 하나님이 친히 제공하시는 의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것은 우리를 영생의 소망으로 인도하기에 넉넉하고 뛰어난 단 하나의 의이다.
3. 믿음. 우리말로 ‘믿다’와 ‘믿음’으로 번역되는 말들은 그리스어로 각각 ‘피스튜오’와 ‘피스티스’이다. 구원과 관련한 믿음의 의미는 앞으로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밝혀질 것이다.
<부가설명>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복음에 인간적 사고방식과 사상이 들어갈 수 없다. 만일 들어간다면 그것은 이미 참 복음이 아니고 다른 복음이 된다.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은혜이다. 그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복음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요청했기 때문이 아니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하신 재창조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이다. 복음이 이런 성질의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의가 된다.(고후5:2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때문이다. 창조는 전적으로 창조주의 영역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끼어들 틈이 조금도 없다. 구원받기 위하여 우리가 보태야할 것이 전혀 없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창조주께서 창조하시는데 피조물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과 똑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설파한 것이다. 우리는 이 복음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교훈 :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소식이다.
둘째 날(월) 10월 16일 모두가 죄를 지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1.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기별을 쉽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반면 이 말씀의 진실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답: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 의문을 품는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선해질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일부의 사람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죄된 상태에 대한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문제는 진정한 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생긴다. 사람들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자신이 충분히 선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 자신과 비교하여 더 악한 누군가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해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또는 그분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우리와 비교한다면 압도적인 자기혐오 외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롬 3:23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한다. 그 구절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아마도 가장 단순한 번역은 고전 11:7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스어로 ‘영광’이란 말은 ‘형상’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이다. 죄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켰다. 죄 많은 인류의 상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2. 롬 3:10~18을 읽어 보라. 오늘날 달라진 것이 있는가? 이 묘사 중 그대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거나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그대의 삶을 가장 잘 그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롬3:10~18]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답: 오늘날도 인간 상태가 이 기록과 달라진 것이 없다. 내용 전부가 자아의 모습이다.
우리의 상황은 우리의 상태만큼 그렇게 절망적이지는 않다. 우선 우리는 자신의 총체적인 죄악상과 그것을 해결하는 데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같은 가책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께서는 죄인이 그분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로 하여금 자기방어, 가식, 자기 의의 가면을 찢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도록 이끄실 것이다.
<부가설명> 위에 열거한 인간상태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스스로 도덕적 수양을 하고 도덕적인 선을 성취한다고 해도 그 사람이 죄인이 안 것이 아니다. 죄는 도덕적인 상태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상태는 죄의 열매들일 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 사람이 죄인인 것은 도덕적 상태와 상관없다. 그것은 인간이 아담 안에서 죽은 사실이 죄이기 때문이다. 죄를 인간의 성품이나 도덕적 상태로 보는 것은 성경이 계시한 근본적인 죄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 근본적인 죄의 열매들인데, 도덕적으로 선을 행해도 그것이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지 못한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행하는 모든 도덕적 선도 하나님의 눈에는 선이 아니고 아담 안에서 죽어서 썩어져가는 구습에 방부제와 방취제와 향수를 뿌리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향수의 향기가 풍긴다고 해도 그는 여전히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존재일 뿐이다.(엡4:22) 사람이 예수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는 한 아무리 도덕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다고 해도 여전히 죄인이다. 즉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깨닫지 않으면 성경이 계시한 죄와 구원의 실상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비교하여 자기의 상태를 아무리 조명한다고 해도 그런 비교로 자기의 도덕적 상태 때문에 죄인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죄를 모르는 것이다. 죄는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오직 창조주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교훈 :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거룩함과 의로움에 비교하고 우리가 심각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첫 단계이다.
셋째 날(화) 10월 17일 진보?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사람들은 인류가 발전하고 도덕은 강화되며 과학과 기술이 인류 사회를 ‘유토피아(이상향)’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인류가 완전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올바른 교육과 도덕적인 훈련을 통해서 그들 자신과 사회를 상당히 개선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세기라는 찬란한 세계로 진입할 때에 이 모든 일들이 일제히 일어날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런 방식으로 변하지 않았다.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시대 중 하나였다. 역설적이게도 과학의 놀라운 발전 덕분에 과거의 가장 난폭한 광인들이 단지 꿈에서만 그릴 수 있는 수준의 대량살상이 가능해졌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1. 롬 1:22~32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1세기에 기록되었지만 지금 21세기에도 그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어떻게 목격하고 있는가?
[롬1:22~3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답: 이런 현상은 언제나 동일하다. 사회현상을 통하여 항상 목격하는 모습이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롬 1:28~30).
죽은 자의 부활, 재림, 새 하늘과 새 땅 등 기독교의 여러 가르침을 따르려 한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타락상을 확인하기 위해서 믿음까지 필요하지는 않다. 현재 우리 모두가 그렇게 타락한 상태의 결과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호흡하는 동안 나타나는 삶의 모습은 썩어져가는 구습이다.(고전15:22, 엡4:22) 아담 이후 어느 시댜 어느 지역 사람이든지 동일한 도덕적 상태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썩는 것은 어디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식자(識者)들은 정신적 진화가 되고 교육과 도덕적 진보로 사람들이 잘 다듬어져서 엄청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도 그런 사상을 표현했었다. 그러나 21세기가 되어 우리가 보는 모습은 정반대이다. 갈수록 도덕은 몰락하고 사회는 사나워지며 사람이 거리를 평안히 걸을 수도 없도록 두려움이 백주에도 도사리고 있다. 사람은 과학의 발달로 기술적으로 진보하는지 모르지만 그렇기 진보할수록 도덕적으로 더욱 악해지고 인성이 사라지고 동물적 성질이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난다. 진보가 아니라 엄청 퇴보하고 있다. 진화론은 사람들을 동물화 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우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이런 상태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교훈 : 20세기 초에는 인류의 진보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하는 인류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넷째 날(수) 10월 18일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롬 2:1~3).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오랫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해 가장 저급한 행위를 저지르는 상태로 타락한 이방인, 이교도들의 죄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민족마저 그런 집단에서 제외시킬 마음이 없다. 하나님이 주신 온갖 특권에도 불구하고(롬 3:1~2) 그들 역시 율법의 정죄를 받고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에 불과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거룩한 구원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다를 바가 없다.
1. 롬 2:1~3, 17~24을 읽어 보라. 바울은 무엇에 대해 경고하는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우리는 이러한 경고로부터 어떤 기별을 받아야 하는가?
[롬2:1~3, 17~24]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답: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외 없이 다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었다. 우리는 모두 구주가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정신을 버려야 한다.
“사도는 모든 이교도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후에 특별히 아주 강조하는 필체로 유대인들 역시 죄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엇보다 율법을 겉으로만 즉 그 정신이 아니라 문자적으로만 지키기 때문이다.”—Martin Luther, Commentary on Romans, p. 61.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지적하기란 어렵지 않지만 우리 자신도 동일한 혹은 더 심한 죄를 짓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문제는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악한 이들을 자신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만족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민족에게 성급히 이방인들을 정죄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택함을 받은 백성이었지만 그들 역시 죄인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교도들보다 그들의 죄가 더 컸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에게 더 많은 빛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부가설명>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다 죄인이다. 물론 율법의 정죄 아래 있기 때문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아담이 사망이 되면서 아담에게서 출생하는 모든 후손들은 다 아담 안에서 이미 생명이 없고 죽은 자로 태어나는 것이다. 죄는 사망이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고 사망이 또 죄로 말미암아 왕 노릇한다.(롬5:17,21) 사람들은 죄의 종이고 사망의 종이다. 죄와 사망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사람들은 사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엡4:22) 바울은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한다고 분명히 가르쳤다.(롬8:21)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바울은 힘주어 역설하고 있다. 유대인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람이 아담의 후손으로만 있을 때에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설파한 것이다.(롬3:20) 유대인에게 말씀을 맡긴 것은 그들도 죄를 깨닫고 그들을 통하여 온 세상이 죄를 깨닫고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일에 실패하였다. 오늘날 교회가 특히 재림교회가 이 일에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죄를 도덕적 행위로 이해하고 설명한다면 유대인과 다를 것이 별로 없을 것이다.
교훈 : 율법을 간수할 특권이 있었던 유대인일지라도 그것의 정죄에서 벗어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했다.
다섯째 날(목) 10월 19일 복음과 회개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1. 회개의 문제에 관하여 위의 말씀에서 주는 기별은 무엇인가?
답: 회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인도로 하게 되는 것이지 강제하시지 않는다 것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죄인을 회개하도록 이끌지만 강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은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오래 참으시며 모든 사람을 그분의 사랑으로 이끌고자 노력하신다. 강요된 회개는 회개의 목적성을 파괴한다. 만약 하나님이 회개를 강요하셨는데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일부에게는 회개하도록 강요하시고 다른 일부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겠는가? 회개는 우리의 삶 속에 임하시는 성령의 감동에 반응하여 나타난 자유 의지에 따른 행위여야 한다. 물론 회개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열고 기꺼이 그 선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오직 우리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선택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며 불순종의 상태에 머무는 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롬 2:5~10)
[롬2:5~10]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답: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롬 2:5~10에서뿐 아니라 로마서 전체를 통하여 바울은 선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율법의 행위 없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선행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로 오해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예를 들어 롬 2:7에서 구원은 “참고 선을 행”하면서 구원을 바라는 자들에게 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비록 인간의 노력이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그것은 구원의 전체 경험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성경을 읽고 행위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기란 불가능하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종류의 진정한 회개에는 우리가 회개할 것들을 극복하고 버리겠다는 결심이 뒤따른다.
<부가설명> 믿음과 행위 문제는 복음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바르게 깨닫지 않으면 조화 있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회개를 인간의 잘못한 행위를 뉘우치고 고백하고 버리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다면 회개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회개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이다.(히6:1) 아담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이 당연한 것이다. 죽은 자는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죽은 행실은 바로 썩어져가는 구습이다. 자기가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솔직히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나는 예수님 없이는 존재하지 않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하는 것이 근본적인 회개이다. 생명이 없어서 썩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모든 도덕적 성품적 죄들이다. 생명을 얻으면 썩는 것이 멈춘다. 나사로가 죽어서 부패할 때 냄새가 났지만 예수께서 살려내었을 때 그는 더 이상 썩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게 되었다. 회개하고 자기의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부도덕한 것들을 극복하고 버리겠다는 결심이 그것을 반드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가 생명을 얻지 못하고 결심만 한다면 수양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을 얻었다는 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동은 생명을 얻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열매일 뿐이다. 이것을 올바르게 깨달았으면 좋겠다.
교훈 :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회개하도록 이끄시며,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극복하며 선행에 참여하기를 소망하게 된다.
여섯째 날(금) 10월 2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따라서 그 성경 용어는 죄가 느닷없이 인간에게 임한 재앙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의 적극적인 태도와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더욱이 죄는 선함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이다. 그것은 인간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악한 방향이다. 그것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태도와 행위를 보면 인간은 하나님께 그리고 그분의 법을 범함에 있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는 길을 선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 실패한다. 죄는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들을 넘어가려고 시도한다. 요컨대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The 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2000), p. 239.
“비참한 상태에 빠진 세상의 광경이 내 앞에 제시되었다. 부도덕이 어디나 만연하고 있다. 방탕은 이 시대의 특별한 죄악이다. 악이 그 흉악한 머리를 오늘날처럼 대담하게 쳐든 때는 일찍이 없었다. 사람들은 마비된 듯이 보이며, 덕성과 참된 선을 사랑하는 자들은 죄악의 대담성, 힘, 편만함으로 거의 낙망하고 있다. 편만한 악은 불신자들이나 신앙을 비웃는 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한다.… 그들은 너무 오랫동안 정욕을 섬겨 왔으므로, 그들의 생각이 부정하고 그들의 상상이 부패한 것이 당연하다”(교회증언 2권, 34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진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그대의 논리는 무엇이며 그대는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경험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이 좋아지고 도덕이 고양된다고 해도 사망이 해결되지 않는 한 썩어져가는 현상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정도는 더 심해질 뿐이다.
➋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죄성과 타락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가 그러한 슬픈 현실을 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인간의 상태에 대한 오해는 우리를 어떤 오류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모르면 구원의 실상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노력으로 선을 행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종교 외의 모든 종교가 이것을 기초로 이루어져 있어서 인류를 오류의 늪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고 있다.
➌ 수많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신앙을 포기하기보다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강한 믿음이 있습니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을 만큼 강한 믿음이 있습니까?
※ 주께서 그렇게 붙들어 주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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