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과 복음과 교회(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9/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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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9-16 07:09 조회6,506회 댓글0건본문
9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28분
● 연구 범위 : 갈 6:1~10, 마 18:15~17, 고전 10:12, 롬 15:1, 요 13:34, 눅 22:3
● 기억절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감자 농사를 짓는 어떤 농부들이 큰 감자는 먹고, 작은 감자는 씨로 남겨 두었다가 심기로 작정했다. 그 후에 그들은 밭을 몇 개 추수해 보더니 감자의 씨알이 구슬 크기만큼 줄어든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농부들은 불행으로부터 중요한 생명의 법칙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극상품을 얻지 못했을 뿐더러, 남은 것을 씨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작은 감자를 심고 있다. 우리는 큰 것은 취하고 남는 것은 심는다. 영적인 법칙이 비정상적으로 왜곡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기적인 것을 심고 이타적인 것으로 보상받기를 기대한다.”-International Student Fellowship Newsletter, March 2007.
바울은 갈 6:1~10에서 이 원리를 적용하였다. “서로 물고 먹는”(갈 5:15) 대신,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나보다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겸손과 인내와 동정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하여야 한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이들과 관련을 맺으며 사는 방법을 이해한다.
느끼기 : 유혹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자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자만심의 위험성을 인식한다.
행하기 :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
➊ 교회란 어떤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는 사랑의 기관이어야 한다.
➋ 교회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어떤 정신과 목적으로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회복하고 풍성히 누리게 하는 목적으로 권고하고 용납해야 한다.
➌ 교회는 어디까지 서로 짐을 나눠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필요한 대로 나눠 져야 한다.
➍ 나누어 질 수 있는 짐과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짐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 나누어지는 짐은 혼자 지기 벅차고 도울 수 있는 짐이고 스스로 감당할 짐은 남이 져 줄수 없는 집이다.
결론 : 그리스도의 법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성취될 때,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넘어져 있는 자들을 돌볼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영적으로 교만해지거나 눈멀지 않도록 모든 진리의 증거를 겸손하게 제시할 것입니다.
첫째 날(일) 넘어진 자들을 일으킴
9월 17일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바울은 기독교적인 삶의 본질에 대해 높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갈 5:16) 갈 6:1에서 신자들에게 전하는 그의 권면은 참신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으며 심지어 가장 신실한 그리스도인조차 과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갈 5:16을 원어로 보면 바울은 교인에게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바울은 그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실제적인 조언을 주고 있다.
1. 동료 신자가 악한 행위에 빠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갈 6:1, 마 18:15~17)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마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답: 자신도 시험에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형제를 바로잡도록 신앙양심으로 기도하며 온유하게 권고해야 한다.
바울의 조언으로부터 유익을 얻으려면 우리는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갈 6:1). 이 상황은 문장의 전반부에 사용된 두 단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첫째 단어는 ‘드러나다’이다.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감지되다’, ‘탄로가 나다’, ‘놀라게 하다’이다. 이 단어와 관련된 문맥과 어감 상 바울은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한 신자가 다른 신자의 범죄 사실을 ‘포착’했다. 또는 한 신자가 좋은 상황이었다면 능히 회피할 수 있는 행위에 ‘휘말린’ 사실을 자각했다.
바울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볼 때 그가 말하는 범죄는 고의성이 없는 성격일 가능성이 있다. “범죄”로 번역된 말은 그리스어 ‘파라프토마’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뜻은 고의적인 죄라기보다는 실패나 넘어짐에 가깝다. 성령에 따라 행함에 관한 바울의 이전 권면에 비춰 볼 때에 후자의 의미가 매우 합리적이다. 물론 이것이 그 사람의 실수에 대한 핑계가 될 수는 없지만, 바울이 반역적인 죄를 다루고 있지 않은 것임에는 틀림없다(고전 5:1~5).
그 같은 경우에는 처벌, 정죄, 절교보다는 회복의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바로잡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타르티조’는 ‘고치다’, ‘회복시키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말은 신약 성경에서 어망을 수리할 때 사용되었고(마 4:21), 그리스 문학에서는 부러진 뼈를 맞추는 과정을 묘사하는 의학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함께 걷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친 형제자매들을 버려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으로서 정성껏 돌보아야 한다.
<부가설명> 범죄하는 형제와 실수하는 형제는 그 상태가 서로 다르다. 실수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고 죄의 세상이며 어두움의 세력이 주장하는 세상이다. 성도들이 넘어질 가능성은 어디든지 있다. 넘어질 계획을 하고 넘어지는 것이 아니다. 넘어질 계획하고 넘어지는 것은 범죄이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다. 범죄한 형제라도 권고하고 돌이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온유한 마음으로 접근하고 설득해야 한다. 정죄하지 않아야 한다. 욥의 세 친구는 위로와 권고를 위하여 왔으나 끝까지 욥을 정죄하였다. 욥은 절규했다. 너희는 나를 번뇌하게 하는 위로 자들이라고.(욥16:2) 비록 계획하고 범죄한 형제에게도 번뇌하게 하는 위로자가 되면 안 된다. 그렇거든 하물며 실수한 형제이겠는가?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상태를 잘 아신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목욕한 자라도 발은 씻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발은 내가 씻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씻어주신다고 하셨다.(요13:8~10) 정말 우리는 실수한 형제나 범죄한 형제를 온유한 마음으로 돌아오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며 권고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신실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누구나 실수는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넘어져 있는 동료 신자를 붙잡아 일으키고 회복의 기회를 주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둘째 날(월) 유혹을 조심하라
9월 18일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우리는 갈 6:1에서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잘 살펴보라는 바울의 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울의 권고에 스며있는 위기의식과 염려가 그의 호소 방식 속에 드러나 있다. ‘살펴보다’로 번역된 말의 문자적 의미는 ‘자세히 보다’ 또는 ‘주의를 기울이다’이다(롬 16:17, 빌 2:4 참고). 따라서 바울이 말하려는 바는 어느 순간 죄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잘 살피라’는 것이다. 이 경고를 강조하기 위해 바울은 전반부에 사용했던 2인칭 복수형을 후반부에는 2인칭 단수형으로 바꾸었다. 이는 모든 회중 전체에게 말하는 일반적인 경고가 아니라 각자에게 전하는 개인적인 경고였다.
바울은 어떤 유혹 때문에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이토록 강력하게 경고하는지 명백하게 밝히지 않았다. 어쩌면 특정한 범죄라기보다는 범죄한 자를 바로잡으려는 사람이 자신도 동일한 죄를 저지를 위험성을 말하려는 것 같다. 그와 함께 “투기하지 말라”(갈 5:26)는 말은 범죄한 자를 바로잡아 주는 자가 영적인 우월성을 갖지 말라는 경고인 듯하다.
1. 왜 바울은 영적인 교만에 대하여 갈라디아 신자에게 경고해야 했는가?(고전 10:12, 마 26:34, 삼하 12:1~7 참고)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마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삼하12:1~7]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2 그 부한 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하나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저와 저의 자식과 함께 있어 자라며 저의 먹는 것을 먹으며 저의 잔에서 마시며 저의 품에 누우므로 저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4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5 다윗이 그 사람을 크게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6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답: 사단은 언제나 자신이 잘 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때를 틈타서 그 잘한 것으로 넘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나 다윗의 경험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기독교 신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위험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어떤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영적 교만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악한 성향이 있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영께서 막아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우리는 어떤 죄를 지을지 모른다. 자신의 정체에 대한 이런 자각은 자기가 의로운 줄 아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며, 실수를 저지르는 자들에게 더 큰 동정심을 갖도록 이끌어 준다.
<부가설명> 바울은 남에게 전한 후에 자기는 넘어질까 봐 언제나 조심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하며 날마다 죽는다고 고백한다.(고전9:27, 15:31) 이런 바울의 신앙정신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바울이 되게 하였다. 물론 예수께서 성령으로 그렇게 이끄셨다. 우리도 자아를 굴복시키고 성령의 인도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으면 넘어지게 된다. 다윗처럼, 베드로처럼 넘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의 허물에서 자기 허물을 찾아보며 다른 사람이 실수할 때 자기의 실수인 것처럼 느끼며 자아를 주님께 굴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넘어지고 있는 자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느끼는 사람의 고질이 바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잘 캐내고 지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기가 의롭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신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자랑하고 감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세리를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하셨다.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시인하고 굴복하면 주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이고 든든히 세우실 것이다.
교훈 : 우리는 다른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를 보고 자신은 안전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조심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 날(화) 짐을 서로 지라(갈 6:2~5)
9월 19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1. 넘어진 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는 것 외에 바울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무엇을 당부하고 있는가?(갈 6:2~5)
[갈6:2~5]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답: 짐을 서로 지고 자기의 일을 살펴서 자랑하지 말고 자기 짐을 자기가 질 것을 당부했다.
갈 6:2에서 “짐”으로 번역된 그리스말은 ‘바로스’이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먼 거리를 짊어지고 옮겨야 할 무거운 짐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말은 더운 날 하루 종일 계속되는 노동의 고충이나 시련에 대한 은유로 자주 사용되었다(마 20:12). “짐을 서로 지라”는 바울의 명령의 배경에는 앞 절에서 언급한 동료 신자의 도덕적 실수도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지만, 바울은 그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바울의 명령은 그리스도인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몇 가지 영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첫째, 티머시 조지(Timothy George)가 지적한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짐이 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 짐의 크기와 모양과 종류는 다양할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1절에 나오는 것처럼 유혹과 도덕적 실수의 결과가 짐이 될 수 있다. 또 어떤 이에게는 육체적 질병, 정신 질환, 가정 문제, 실업, 귀신들림, 기타 여러 문제들이 짐이 될 수 있다. 신자라고 예외는 아니다.”—Galatians, p. 413.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홀로 모든 짐을 짊어지도록 계획하지 않으셨다. 불행히도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짐을 덜어 주는 것을 허용하기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짐을 덜어 주려고 한다. 우리도 도움이 필요하며 약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자만이다(갈 6:3). 그와 같은 자만심은 우리에게서 다른 이의 위로를 빼앗아 가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사역을 성취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도록 부르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런 개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다.
고후 7:6이 좋은 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하나님의 위로는 바울의 은밀한 기도를 통해 바울에게 직접 임한 것이 아니라 동료를 통하여 또는 동료가 가지고 온 좋은 소식을 통하여 임하였다. “서로 짐을 나눠 질 수 있는 우정은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일부이다.”— John R. W. Stott, The Message of Galatians, p. 158.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몸 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이다. 짐을 서로 지라고 했을 때 우리 몸의 지체들이 협력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걷다가 돌부리에 세게 걸렸을 때 발이 아프면 손이 곧장 가서 아픈 발가락을 어루만진다. 신체의 어느 부위든지 이런 경우가 되면 다른 부위에서 협력한다. 교회에서 성도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상호간에 협력과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런 정신없이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옳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니 틀렸다는 비판이나 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자라고 지적한다. 자시를 올바르게 살피면 자랑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5절에 자기 짐을 지라고 한 것은 자기만이 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나를 대신해서 밥을 먹어줄 수 없다. 남이 나를 대신하여 밥을 먹어서 내 배가 부르지 않다. 내가 아픈데 남이 대신 아파줄 수 없다. 이처럼 자기만이 감당해야 할 짐들이 있는 것이다. 2절은 협력해서 질 수 있는 짐이고 5절은 자기밖에 질 수 없는 짐에 대한 것이다. 교회의 지체로서 교인들은 서로 협력해서 감당해야 할 공동 짐이 있고 교인 각 개인 자신만이 감당할 짐이 있다. 짐은 책임과 임무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과 온유로 이렇게 짐을 지면 교회는 발전하고 평안하고 행복한 곳이 될 것이다.
교훈 :모든 사람에게는 짊어져야 할 짐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교회로서 서로 짐을 나눠 지도록 계획하셨다.
넷째 날(수) 그리스도의 법 (갈 6:2~5)
9월 20일
1. 바울은 짐을 지는 것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명령을 연결시켰다.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법”이란 무엇인가?(갈 5:14, 6:2, 요 13:34, 마 22:34~40)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마22:34~40]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답: 그리스도의 법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방법 중에 짐을 서로 지는 것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짐을 져주는 것과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연결되었다.
유사한 표현이 고전 9:21에 한 번 나올 뿐 “그리스도의 법”이란 구절은 성경에서 이곳 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해석도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이 그리스도의 법으로 대체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법’이라는 낱말은 일반적인 원리(롬 7:21 참고)이며 다른 이의 짐을 짊어짐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모본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후자의 해석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보이지만, 문맥과 갈 5:14의 비슷한 용례를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사랑으로 도덕적인 율법을 성취하라는 또 다른 표현이다. 바울은 앞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도덕적 율법이 철폐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오히려 사랑으로 해석된 도덕적인 율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와 죽음을 통해 실천하셨던 가르침의 전형적인 본보기이다. 우리는 다른 이의 짐을 담당함으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를 뿐 아니라 율법을 성취하기도 한다.
그런데 갈 6:2과 6:5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바울이 두 개의 다른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두 개의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쉽게 해결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2절의 짐(바로스)은 멀리 옮겨야 할 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5절의 짐(포르티온)은 선박의 화물칸, 병사의 군장, 심지어 태아를 의미한다. 전자의 짐은 내려놓을 수 있지만, 후자의 짐은 그럴 수 없다. 임신한 여인은 아이를 안고 다녀야 한다. 이는 다른 사람이 덜어 줄 수 있는 짐도 있고, 죄책감, 고통, 죽음의 짐처럼 그럴 수 없는 짐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경우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해야 한다(마 11:28~30).
<부가설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그리스도인들은 새 계명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100% 맞는 생각도 아니다. 우리는 성경본문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은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가 알아야 새 계명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3:16) 이 말씀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성질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것이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는 것이 새 계명이다. 요한은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이렇게 할 때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사랑하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도 형제를 죄와 허물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애를 쓸 때 새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된다. 짐을 서로 지는 것은 상대방인 형제가 신령한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되도록 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이 없는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다. 정말 짐을 서로 지면서 예수님의 법을 성취하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스스로 속지말자.
교훈 : 우리에게 있는 짐 가운데는 믿음의 동료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짐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여 내가 꼭 감당해야 하는 짐도 있다.
다섯째 날(목) 심고 거둠(갈 6:6~10)
9월 21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갈 6:7에 ‘업신여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무크테리조’는 칠십인역(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에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신약에서는 이곳에서 단 한 번 나온다. 이 말은 원어적으로 ‘경멸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선지자를 멸시하는 상황에서 사용되었고(대하 36:16, 렘 20:7) 단 한 번 하나님을 향한 반역적인 태도를 회화적으로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겔 8:17).
바울의 요점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그의 명령을 어길 수는 있지만, 하나님 머리 위에 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최후의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결국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1. 갈 6: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육체를 위해 심거나 성령을 위해 심었던 성경 인물에는 누가 있는가?(행 5:1~5, 눅 22:3, 단 1:8, 마 4:1 참고)
[갈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행5:1~5]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눅22:3]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단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마4: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답: 그리스도인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선택한 결과에 대하여서는 선택한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가르친다. 육체를 위하여 심은 자들은 성구들이 가룟유다. 아나니아솨 삽비라, 성령을 위하여 선택한 자들은 다니엘, 예수님을 예로 들었다.
파종과 추수에 대한 바울의 은유는 독특한 것이 아니다. 그런 비유는 고대의 격언에서 흔히 나타난다. 그러나 바울이 육체와 성령에 관한 언급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은유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는 있지만 선택의 결과를 선택할 자유는 없다.” - James D. G. Dunn, Galatians, p. 330.
하나님이 죄 때문에 벌어진 지상의 결과에서 항상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좌절감에 빠질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입양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하늘의 수확을 낳는 그런 일들에 지금 투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기독교 윤리에는 두 개의 초점이 있다. 하나는 포괄적으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잘하는 것이다. 바울의 일반적인 호소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궁극적으로 존귀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성경적인 사실을 잊을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종차별, 성차별, 계급주의, 그 밖의 수많은 편견의 주역이 되었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 공동체를 파괴시켜왔다.”—Timothy George, Galatians, pp. 427, 428.
<부가설명>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창조주께서 선택해 놓으신 범위 안에서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뿐이다. 지극히 제한된 선택의 자유이다. 그러나 생명과 출생과 인종에 대하여서는 선택의 자유도 없다. 사람들은 그런 경우를 운명이라고 한다. 운명이라는 표현과 자유라는 표현은 서로 융화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창조주께 자아를 굴복시킬 때 가장 바른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다. 그러면 영생을 거둘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기호를 충족시키려고 하나님이 선택해 준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면 사망을 거둘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중립이 없다. 출생부터 사망으로 출생한다. 이것은 자기의 선택이 아니다. 시조 아담의 선택 안에 있는 것일 뿐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여셨다. 이제 우리는 사망에 머물러 있든지 아니면 생명으로 나아오든지 할 수 있다. 사망이나 생명을 선택할 수 있는 중립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사망에 빠져 있다. 그러나 거기서 나와서 생명을 갈 수 있다. 생명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대로 사망에 있는 것이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은 사망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생명을 심어야 할 것이다. 아멘.
교훈 : 결국 심은 대로 거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믿음을 가지고 선한 일을 행하며 영적인 것에 투자해야 한다.
여섯째 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9월 22일
“하나님의 영은 악을 양심의 지배하에 둔다. 사람이 성령의 감화보다 자신을 높일 때 그는 죄악의 결과를 거둔다. 그러한 사람에게 성령의 감화는 점점 약해져서 불순종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막지 않으신다. 그에게는 경고가 끼치는 힘도 점점 약해진다. 점차로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게 되고 육체를 위하여 심고 썩어질 것을 거둘 것이다. 그가 직접 뿌려온 씨앗의 결과가 무르익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에 대한 멸시를 품고 있다. 그의 육의 마음은 돌같이 딱딱하다. 진리를 거절해 왔기 때문에 그는 죄 가운데 굳어져 버린다. 그것은 사람들이 악의 씨앗 곧 불법, 범죄, 홍수 전 시대에 편만했던 강포를 뿌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약 그의 판단력을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증거를 거절하고, 한 번 악을 택하면 두 번째에는 더욱 쉽게 이것을 행할 것이다. 세 번째에는 더욱 열렬히 하나님에게서 물러나와 사탄의 편을 택하여 그의 편에 설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계속 가다가 마침내 죄 가운데서 굳어져서 그가 마음에 품고 있는 거짓 것을 진리라고 믿기에 이른다. 진리를 거절한 그의 거절이 그 열매를 내는 것이다(원고 126, 1901)”(화잇주석, 갈 6:7~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죄에 빠진 동료 신자를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입니까? 그가 저지른 죄악은 회복의 과정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됩니까? 회복이란 모든 것이 이전과 같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까?
※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성령의 역사에 굴복하여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회복은 거듭난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요10:10)
➋ 우리가 나누어 질 수 있는 짐과 스스로 감당해야 할 짐을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과 개인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할 때에 도우는 것은 서로 짐을 지는 것이 된다.
요약: 하나님의 임재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심령 속에 나타나고 잘못을 저지른 자를 용서하며 회복시키거나 시험 중에 있을 때 신자들이 서로를 돕고, 신자들 뿐 아니라 비신자에게까지 의도적으로 친절을 행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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