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말씀하시는 창조주(질문, 대답, 설명) 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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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6-09-25 09:14 조회31회 댓글0건본문
제1과 말씀하시는 창조주
10월 3일 안식일 / 오후 6시 13분
기억절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 2)
● 연구 범위 -창 1:27, 28; 3:1-8; 눅 15:11-32; 창 3:14-24; 출 19:16-22; 요 10:27-30
디지털 기술 덕에 멀리 떨어진 친구와 친척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직접 만나면 훨씬 더 좋다. 함께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 특별한 무언가가 일어난다. 이번 주에는 인간이 본래 창조주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 보는 관계로 지어졌다는 점을 되새기려 한다. 그런데 이 친밀한 관계는 죄 때문에 아주 오래전에 훼손됐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피조물과 나누던 교류를 회복하고자 우리에게 말씀을 전할 방도를 마련하셨다. 하나님이 인간과 소통하는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세심하게 선택된 대변인 즉 선지자를 세우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중에는 성경을 기록한 이도 많았는데 늘 그렇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죄로 훼손된 자신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하는 것이다. 구원의 계획이란 다름 아닌 회복이며 그 회복은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을 하나님이 지으실 때 온전히 성취된다. 그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며 그래서 선지자를 계속 사용하신다.
말씀 속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28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 28)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2또 여호와에게 가까이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출 19:21, 22)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 10:27, 28)
토의 질문
1.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언제인가요?
*답: 혼자 조용히 있을 때가 아닐끼?
2. 죄짓고 숨은 인간을 찾으신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느낄 수 있나요?
*답: 사랑과 자비와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은혜를 느낄 수 있다.
3.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한 문제를 처리할 때는 어떤 점들을 유의해야 할까요?
*답: 잘못을 나무라는 태도와 말을 삼가고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려는 의지를 나타낼 것이다.
4. 하나님을 더욱 잘 알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요?
*답: 성경 말씀을 숙독하고 날마다 상고하는 정신과 실천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핵심 교훈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과 교제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지만 죄로 인해 관계가 깨어졌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먼저 찾아와 구원과 회복의 길을 열어 주셨다. 하나님은 자연과 성경과 선지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사랑과 구원의 뜻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
9월 27일(일) 에덴에서 누린 교제
창세기 1, 2장에서는 창조 이야기를 전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지으시고 그 안에 창조의 절정인 아담과 하와를 두셨다. 인간이 지상의 모든 피조물과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창 1:27)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사람에게만 적용된 표현이다. 이처럼 그들은 온전히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갖은 형태의 사랑을 누리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며 지낼 수 있었다.
또 창세기 2장 18-23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 하와를 지으셨는데 이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기 때문이었다(창 2:18). 이렇듯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오늘날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상호 작용이 신체적·정신적 행복에 여러 유익을 가져다주는 반면 ‘고독은 살인자’라고까지 묘사한다.
그러므로 하와가 창조된 이후 아담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창 2:23)라고 외친 것은 놀라울 게 없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가족 체계는 인간이 완전한 관계와 교제를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최초의 사회 제도이다. 이 최초 가정의 원동력을 끊어 버리는 게 사탄의 주된 목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창세기 1장 27, 28절, 2장 15-17절, 3장 9절을 읽어 보라.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인간과 어떻게 소통하셨나?
[창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2:15~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답: 만나서 대면하여 소통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며 교류했다. 지성적 존재인 그들은 하나님과 만나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동산을 맡은 관리자로서 그들은 살아 있는 동식물을 돌보면서 지식과 기술을 익혔다. 매일 그들은 “날이 시원할 때”(창 3:8, 한글킹) 하나님과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특히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서 필수적 부분인 안식일은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가 교류하는 데 오롯이 바쳐진 시간이다(창 2:2, 3; 출 20:8-11). 이날 우리의 첫 조상은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경험했다.
나의 삶 속으로: 에덴 이후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죄 이전의 세상이 어떠했을지를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창조 당시의 세상은 지금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그럼에도 지금의 자연계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어떻게 느낄 수 있나요?
<부가설명>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 자체시다. 삼위일명(三位一名) 여호와는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가 된 즐거운 친교의 극치이셨다. 그 사랑은 우주를 창조하시는 것으로 드러내셨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랑이라도 창조 하시지 않으셨으면 그분이 사랑이라는 것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사랑은 대상을 만드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우주를 창조하실 때 엄마만큼 창조하실지 계획하시고 그 계획하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창조하셨다(사40:26). 태양계 창조를 마지막으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셨다(창2:1). 창조의 막내인 이 지구 방문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아담 부부와 친교를 즐기신 것이 확실하다. 아담 부부는 창조주와 얼굴을 대면하여 친교했다. 그러나 하늘에서 반역한 사탄은 하나님의 이 사랑의 친교를 파괴하여 하나님을 괴롭게 하려고 작정하고 아담 부부를 속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여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실과를 먹게 하여 하나님과 맺은 사랑의 언약을 어기게 했고 여자가 속아서 먼저 그 실과를 먹었고(딤전2:13,14) 여자는 남자에게 권해서 함께 사랑의 언약을 파기하게 되었다(호6:7). 그래서 즐거운 사랑의 친교는 두려움으로 변하게 했다. 이 두려움은 지금도 온 지구를 뒤덮고 있다.
9월 28일(월) 하나님을 피해 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요일 4:8)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사랑은 선택을 전제로 한다. 사랑할 수 있으려면 아담과 하와는 자유 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이 참된 사랑을 표현하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렇듯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에게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자유를 지녔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야말로 자유 선택권이 주어졌다는 방증이다(창 2:15-17). 애당초 먹을 자유가 없었다면 먹지 말라는 경고를 왜 하셨겠는가?
“우리의 첫 선조는 순결하고 거룩하게 창조되었지만 죄를 범할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품성이 지혜롭고 자애로우며 그분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순종하거나 하지 않을 온전한 자유를 지닌 존재로 지으셨다. 그들은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과 즐겁게 교제할 수 있었다.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 순종은 자원하는 순종이 아니라 강요된 굴종일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48, 49).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께 불순종한 뒤 왜 그분을 피해 숨었는가? 창세기 3장 1-8절을 읽어 보라(비교 렘 23:24; 히 4:13).
[창3:1~8]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답: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숨었다.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라는 무서운 장면이 묘사된다. 뱀(사탄)과 하와의 결정적인 대화에 이어 우리의 첫 조상은 선악을 알게 하는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도록 유혹받았다. 사탄은 말, 감정, 그럴듯한 매력을 이용해 하와를 유혹했고 또 하와는 아담을 설득해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게 했다. 하와가 보기에 그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창 3:6).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는 사탄의 약속은 거부하기 힘든 말처럼 들렸다. 사실 사탄의 주장은 오류투성이였다. 사탄은 불순종으로 닥칠 결과를 숨겼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직후 그들은 즉시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입혀 주신 빛과 영광으로 된 “옷”(시 104:1, 2),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던 그 옷은 사라지고 말았다. 더 이상 그들은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으로 덮여 있지 않았다. 아담과 하와는 당연히 창조주를 피해 숨을 수밖에 없었다(하나님을 피해 숨는 게 가능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들이 숨으려고 한 이유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죄를 지으면 죄책감이 생기고, 죄책감이 생기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어진다.
나의 삶 속으로: 죄를 지은 뒤 수치심에 하나님을 피해 숨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요?
사탄의 유혹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책들은 무엇인가요?
<부가설명> 요즘 미국 스텐포드 대학의 신경 내분비학자인 신경학 및 신경 과학 교수인 로버트 새폴스키 박사가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없다’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을 읽고 국립과천과학관장인 이정모 관장은 번역판 추천사에서 ‘분하다! 반박할 수가 없다’라는 말로 서평을 시작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것은 철학과 신학이 오래 주장한 명제다. 이 교과 저자의 말대로 선악과를 두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증거라고 했다. 나도 이 구절ㄹ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말했다. 교과에 인용한 대로 부조와 선지자에도 그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신명기 30장을 읽으면서 의문이 생겼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30:19,20). 만일 참으로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면 생명을 택하고 그에게 부종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창세기에도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실 이유가 있을까? 자유를 허락했으면 무엇을 먹든지 그의 자유에 맡겨야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자유의지가 아니고 루시퍼의 위험을 경고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내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사망으로 출생했고 내 의지가 아무리 살고 싶어도 죽는다. 여러분들은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이 말을 짚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히9:27). 내가 선택할 자유 의지 밖의 일이 아닌가?
9월 29일(화)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
창세기 3장 9, 10절을 보면 타락한 자녀를 먼저 찾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물음이 반어적 질문인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무슨 일을 저질렀으며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님이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첫 인간 부부가 나누었던 평소의 교류는 죄로 인해 단절됐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과 교류를 회복하고 그들을 만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주는 일에 그 즉시 관심을 쏟으셨다. 실제로 창세기 3장 9절의 히브리어 동사 ‘카라’(부르시며)는 자기 백성과 소통하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묘사할 때 자주 쓰인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을 읽어 보라. 이 비유에 창세기 3장 9, 10절 사건이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가?
[눅15:11~32]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답: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으나 아버지는 문앞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다가 돌아올 때 반갑게 만나시고 과거를 묻지 않으셨다. 조건없이 영접했다. 그러첨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 숨은 그를 불러내어 조건없이 구원을 약속하셨다.
아담과 하와를 찾으시는 하나님에게서 자녀를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눅 15장 참조). 그분은 우리와 교류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우리가 피해 숨더라도 말이다. 십자가 사건에 앞서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돌이켜 베드로를” 쳐다보셨다(눅 22:61). 아무 말이 없었어도 그분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이며 넘어진 친구에게 다가가고자 하신 것이다.
창세기 3장 11-13절에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죄로 인해 얼마나 급작스럽게 변했는지 보라!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대신 그들은 남을 탓하기 시작한다. 아담은 하와를 비난했고 자기에게 하와를 주신 하나님까지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한편 하와는 자신의 불순종을 뱀의 탓으로 돌렸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절). 적어도 맨 처음 자기 죄를 마주했을 때는 둘 중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6천 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죄는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쳤고 우리의 이런 형편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15-24절에서 잘 묘사했다. 옳은 일을 하고 싶지만 그 반대로만 행동하는 고통을 그는 상세히 진술한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여기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바울의 말은 심오하다. 우리는 모두 부서진 존재이며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한다. 이런 현실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유일한 희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이라고 바울은 말한다(롬 7:25).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를 예수께로 이끌고자 하시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예수만이 우리를 자기 형상으로 빚어내고 죄로 인한 파괴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나의 삶 속으로: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는 하나님의 물음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요?
그렇게 물으실 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부가설명> 나는 아담 부부가 숨었을 때 찾아오신 하나님 여호와를 인하여 감사한디. 또 그 하나님이 부르실 때 대답한 아담을 인하여서도 감사한다. 만일 아담이 대답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찾아내셨겠지만, 기록에는 없다. 잃은 양, 잃은 은전 비유에서 기어이 찾아내시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렇더라도 아담이 대답했다는 사실은 너무 감사하고 용납하신 하나님이 너무 감사하다. 그래서 여자의 후손(씨)으로 뱀의 머리를 상할 자가 오실 것이라는 구원의 약속을 듣고 그들에게 가죽 옷이 입혀졌다. 창조주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 지금도 여전히 찾으신다. 잃은 양을 찾듯이, 잃은 동전을 찾듯이 찾으신다. 더는 숨지말고 그분 앞에 겸손하고 담대하제 나아가서 생명을 회복하자.
9월 30일(수) 동산에서 추방당하다
아담과 하와의 죄로 야기된 가장 참담한 결과는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동산에서 내쫓겼고 더 이상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이야기할 수 없었다. 인간의 이 안타까운 처지를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 버렸다고 인상 깊게 서술했다(사 59:2). 사실 아담과 하와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럼에도 죄의 결과는 피할 수 없었고 그들은 에덴을 떠나야만 했다. 불순종한 뒤에는 그 무엇도 전과 같지 않았다.
죄 때문에 인간은 여러 면에서 달라졌다(창 3:14-24). 특별히 하나님과 나누는 교류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출 19:16-22 참조)
[창3:14~2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출19:16~22]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22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23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산 주위에 경계를 세워 산을 거룩하게 하라 하셨사온즉 백성이 시내 산에 오르지 못하리이다.
*답: 아담 부부는 사망이 선고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없게 되었다. 그후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만나뵙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은 죄로 물든 세상뿐이기에 인간의 삶이 죄로 인해 얼마나 철저히 바뀌어 버렸는지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죄의 결과로 땅은 “저주”를 받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 인간은 고통을 겪어야 하고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얻으며 결국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죄를 가장 뚜렷하게 일깨워 주는 것은 죽음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며 교류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죄의 참혹한 결과에 맞설 해결책을 약속받았다. 인류의 첫 조상은 이제 하나님과 직접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현재와 미래를 위한 희망을 안고 에덴을 떠났다. 하나님이 먼저 그들에게 구원의 계획을 설명해 주셨다.
“최초의 복음 약속”이라 불리는 창세기 3장 15절은 이런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들(그리고 우리)에게 희망을 한가득 선사한다. 구속자가 오시리라는 약속 덕분에 우리는 이제 죄를 대적하며, 다가올 인류의 구원에 희망을 걸 수 있다. 실제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이 입혀 주신 옷은 앞으로 있을 그들의 구속을 상징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힘입어 하나님과 다시 교제할 수 있게 될 것이다(요 14:1-3).
죄가 들어온 직후 인류는 죄 문제가 궁극적으로 해결되리라는 소망과 약속을 다름 아닌 에덴에서 얻었다. 죄가 들어오자마자 구주가 약속되었다.
나의 삶 속으로: 무언가 옳지 않은 일을 한 뒤에 드는 느낌은 무엇이었습니까? 죄책감? 수치심? 자기혐오? 그런 일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복음의 약속은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않게 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하나요?
<부가설명> 여자가 뱀에게 속아서 먹지말라고 명령한 열매를 먹은 것은 그리스도를 떠난 것이라고 신약은 해석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1:3).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1:4). 그리스도를 떠나니 생명이 없어졌고 빛의 옷은 사라지고 벌거벗을 상태가 드러났다. 먹는 날에는 정년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이렇게 성취되었다. 그들은 그 열매를 먹자마자 하나님의 생명, 곧 영생하는 생명이 떠났다. 죽은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죽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마8:21,22). 이것을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기록했다(고전15:22).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세상에 오시되 여자의 후손(씨)로 오셔서 남자 곧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사망을혜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바울은 이것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고(딤후1:11) 깨달았다면 우리도 일꾼이다.
10월 1일(목) 하나님의 대변인들
다음 성경 구절은 죄가 들어온 이후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방식과 관련해 무엇을 알려 주는가? 히 1:1, 2; 롬 1:19, 20; 민 12:6; 딤후 3:16, 17; 요 14:7-9; 10:27-30
[히1:1,2]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롬1:19,20]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민12: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딤후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요14:7~9]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0:27~30]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답: 선지자, 천연계, 기록한 말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와 소통할 다양한 방법을 찾으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한 가지 방법은 창조물을 통해서다. 자연은 그분의 놀라운 솜씨를 강력하게 드러낸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불가사의를 경이롭게 여기며 심지어 가장 단순한 생명체의 정교함에 감탄한다. 한편 자연은 타락의 결과도 드러내는데 가장 분명한 사례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죽음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또 다른 방법은 선지자 즉 자신이 대변자로 선택한 개인들을 통해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니엘에게 자신의 백성을 향한 자기의 뜻을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의 예언 기별에서 핵심은 그분이 자기 자녀를 잊지 않고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점이다. 이들 선지자 중에는 성경을 기록한 이도 있지만 성경의 어떤 책도 기록하지 않은 선지자도 있다.
수많은 선지자의 말이 성경을 통해 전달되었다(딤후 3:16, 17). 성경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배우고 그분의 다함 없는 사랑을 확인하며 삶의 지침을 얻는다.
또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성경을 통해 깨닫는다. 우리 삶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도 우리는 성경에서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다. 그분은 물론 성경에도 계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듯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눅 19:10).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예수는 선언하셨다(요 14:9).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약속을 이루셨다. 그분은 자기를 힘입어 우리가 영생을 얻도록 이 땅에 오시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뒤에는 성령께서 계속하여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장래 일”을 알려 주신다(요 16:13).
나의 삶 속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예수님, 그분의 사랑, 그분의 품성, 그분의 자기희생으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이 되나요?
잃은 자를 어떻게든 찾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배워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부가설명> 성경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린(엡4:18) 사람에게 다시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책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도덕적으로 선하게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거나 나타내라고 하는 책이 아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그 생명이 나타나는 썩지 않는 새사람의 삶을 살아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생명경전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성경 외의 모든 종교의 경전은 살아있는데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사후에 고난의 세계에서 고통의 삶을 살지 않도록 하라고 도덕을 강조한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로 드러낸 그 생명을 얻어서 그 생명이 나타내는 그 삶을 사는 것이 도덕이고 거룩함이고 사랑이라고 계시한다. 사람은 아담 안에서 다 죽은 자라는 것이 언제나 전제되어 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성경이 생명경전으로 보이고 깨닫게 된다. 천연계와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것이 바로 이 생명의 복음이다. 아멘.
10월 2일(금) 더 깊은 묵상을 위해
엘렌 G. 화잇
하나님은 성경 시대에만 말씀을 전하신 게 아니다. 몇 주에 걸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의 말씀은 현대적인 방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엘렌 굴드 하먼(화잇)과 쌍둥이 자매 엘리자베스는 1827년 11월 26일, 메인주 고램에서 태어났다. 두 자매는 로버트 하먼과 유니스 하먼 내외의 여덟 자녀 중 막내였다. 수년 뒤 가족은 메인주 포틀랜드로 이주했고 거기서 로버트 하먼은 자신의 모자 제작 사업이 확장되기를 기대했다. 엘렌이 9살 때 당한 부상은 신체적·정서적·사회적으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집 근처 공원에 있을 때 그는 성난 동급생 하나가 던진 돌에 얼굴을 맞아 몇 주 동안 반쯤 의식을 잃었다. 이 사고로 화잇은 정규 교육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었고 평생 건강 문제를 겪었다. 얼굴 부상 때문에 외모에 대한 자의식이 생겼고 사회 활동에도 제약이 따랐다.
이런 불안한 상황 가운데 젊은 엘렌 하먼은 자신의 영적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을 무서워했고 자신은 하늘에 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밀러의 가르침을 하먼 가족이 받아들이면서 이 공포감은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1842년 감리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나서도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여겼다. 그는 자신이 “영원히 잃어버려졌다.”고 생각했다(엘렌 G. 화잇 자서전, 20-31).
이와 같은 괴로운 생각에 시달리던 젊은 엘렌은 두 가지 꿈을 꾼 다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된 것은 감리교 목사 리바이 스토크먼을 만나고 난 뒤부터였다. 절망에 빠진 자신에게 마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훗날 엘렌은 “이제야 믿음이 내 마음을 차지했다.”라고 진술했다. “하나님을 향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느껴졌고 내 죄가 사해졌다는 성령의 증언을 얻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나에게 그분은 이제 맹목적 순종을 강요하는 가혹한 폭군이 아니라 자상하고 부드러운 부모로 보인다. 나는 깊고 뜨거운 사랑으로 그분께 마음을 드렸다”(엘렌 G. 화잇 자서전, 39). 그와 동시에 엘렌 화잇은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교리도 깨달았고 영원히 불타는 지옥은 없다는 가르침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을 새롭게 깨닫고 나서 그의 태도는 180도로 변했다. 앞으로 매주 금요일에 살펴보겠지만 엘렌 화잇은 예수님과 깊은 사랑에 빠졌고 일평생 그분을 섬겼다(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사이트를 참고하라. https://whiteestate.org/absg/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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