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룻과 에스더(질문, 대답, 설명) 06/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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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6-06 10:29 조회2,036회 댓글0건본문
제11과 룻과 에스더
(6월 14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54분)
연구 범위: 룻 1:1-5; 룻 2:5-20; 욥 1:6-11; 마 4:8, 9; 에 3:1-14; 계 12:14-17
기억절: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에 5:2).
이번 주는 마지막 날의 사건을 예고하는 이야기를 계속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실제 사건과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도록 이끄시고, 우리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이후에 주어진 예언을 어떻게 해석할 지를 이해하도록 도와주신다.
우리는 세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두 명의 중요한 여성, 룻과 에스더의 이야기를 살펴볼 것이다. 한 사람은 친족이며 구속자인 친절한 보아스를 만나 희망을 되찾은 의지할 곳 없던 과부이다. 그들의 결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가장 좋아하는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이국땅에 사는 어린 소녀로, 자기 민족을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알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펼쳐지는 극적인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게 된다.
물론 예언에서 여자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돌보시는 지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영원히 남아있는 이 두 여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그들의 경험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귀한 교훈을 찾아보자.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실제 사건을 통해 하늘의 관점을 가지게 하고 예언의 해석을 이해하게 도우신다.
느끼기: 성경 인물의 고난과 경험은 인류의 고통과, 주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하심을 말해준다.
행하기: 사탄은 사람에게 시험을 주지만 주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때를 기다린다.
TMI 위로
2. 우리가 경험하는 고난은 실제 어떤 것의 결과이며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줍니까?
*답: 사람의 선택의 결과이고, 올바른 길을 찾아 가도록 가르친다.
3. 보아스는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까?(룻 2:20)
*답: 기업 무를자이며 생존자와 사망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 자이다.
4. 보아스가 마을 성문으로 올라가서 행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룻 4:1)
*답: 주님이 해결을 위하여 조사하는 심판을 표상한다.
5. 세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탄을 반박하는 존재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계 12:17)
*답: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남은 자로 나타난다.
6. 어려운 때에 대한 예언은 낙심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말하는 실상은 어떤 것입니까?(계 12:14)
*답: 성도들의 피난처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마10:23 참고).
7. 마지막 때에 사탄의 핍박이 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답: 자기 때가 얼마 안 남았다기 때문에 초조해서 그렇다. 그것은 성도의 승리가 가깝다는 것을 말한다.
결론: 하나님은 실제 사건을 통해 하늘의 관점을 가지도록 이끄시며 예언을 어떻게 해석할지 이해하게 하신다. 나오미의 고난은 인류의 고통과 주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하심을 말해준다. 보아스는 그리스도의 표상이며 주님은 우리의 영적 빈곤에도 대가를 지불하여 권리를 회복시키고 신부로 삼으신다. 하만은 사탄처럼 굴복을 요구하지만 주께 충성하는 사람은 그의 지배권을 반박한다. 주의 백성에게 마지막 때는 쉽지 않지만 어려운 때에 대한 예언을 믿을 수 있다면 구원의 약속도 신뢰할 수 있다.
6월 8일(일) “떡집"에 닥친 기근
기독교 신앙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종종 이 세상의 삶의 가혹한 현실을 증거로 (1)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신은 나쁜 일이 일어날 때 개입할 능력이 없다, (3) 신은 우리가 상처받을 때 돌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많은 이야기는 이러한 가정 중 어느 것도 옳지 않다는 풍부한 증거를 제공한다. 실상은 인류가 하나님을 반역한 결과를 거두도록 허용하고 계신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며, 항상 인간의 역사 가운데 일하시고, 죄와 고통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향해 우리를 이끄신다. 룻의 이야기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룻기 1:1-5을 읽어 보라. 나오미와 룻에게는 어떤 고난이 닥쳤으며 그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이것은 오늘날 인류 전체가 직면한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룻1:1~5]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답: 기근으로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모압지방으로 갔는데 거기서 남편, 두 아들이 다 죽었고 자부 둘과 나오미만 남았다. 모압은 죄가 된 세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모두 죽은 것은 생명이 없어진 사망의 세상을 상징한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의 첫 구절은 역설로 시작한다.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에 기근이 닥쳤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 대로 먹”(창 2:16, 새번역)으라고 말씀하신 에덴의 풍요로움을 생각하게 한다. 인류는 관대하신 창조주의 보살핌 아래 풍요롭게 그 삶을 시작했지만, 창조 세계의 관리자의 역할을 죄의 노예의 자리와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창 3:19)라고 말씀하셨다.
나오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기업을 상실한 후 삶은 고난으로 변했다. 에덴은 선물로 주어졌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인간에게 반역할 자유가 있었지만, 하나님을 거절하고 자유를 행사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래 우리는 하나님이 복 주신 타락하지 않은 온 세상을 다스려야 했지만, 이제는 타락한 세상을 정복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현실은 많은 고통과 슬픔을 초래한다.
비극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구는 여전히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강력하게 증거하지만, 인간의 탐욕과 죄의 폐해로 인해 우리가 세상을 다스리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의해 압도당하는 듯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올 것이다.
<교훈> 나오미에게 닥친 고난은 인류에게 닥친 문제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죄와 고통의 문제 가운데 있는 인류를 위해 일하시며 궁극적인 해결책을 보여주신다.
<부가설명>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복음 사업을 깨닫도록 하여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룻기의 이런 상황은 하나님의 섭리를 잘 드러내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자가 설명한 대로 베들레헴은 에덴동산을 기근은 죄로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의 상태를 모압은 죄의 세상을 기근으로 모압에 들어간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이 생명이 없는 사망의 세상에 빠진 것을 나타낸다. 오늘날 세상은 생명의 기근과 말씀의 기근으로 헐떡이는 곳이 되었다. 아담 자손들은 다 마치 탕자가 돼지 우리에서 쥐엄열매도 구하기 힘드는 현상에 빠졌다. 엘리멜렉 부부는 생육을 위하여 아들들 결혼히켰으나 그들은 생육하지 못하고 죽었다. 여자들만 남았다. 성경은 이 세상을 여자로 표상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나라들은 다 히브리어 여성명사로 기록된다. 이것은 생명의 씨가 없어진 상태를 아주 절묘하게 상징한다. 이스라엘도 여성을표현되고 교회도 여성으로 표현된다. 특히 여성으로 상징된 교회가 생명의 씨를 얻어서 세상을 다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6월 9일(월) 룻과 보아스
나오미는 삶에 닥친 비통함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마라”로 바꾸어 부르라고 요청했다(룻 1:20 참조). 우리와 창조주와의 관계는 죄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영적 빈곤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의 미래는 어둡고, 생계는 들판 귀퉁이에서 떨어진 것을 주어 담으며 이어나가고, 망가진 세상에서 어쩌다 발견하게 되는 부스러기 같은 기쁨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가 놀라운 발견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은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셨다.
룻기 2:5-20을 읽어 보라. 이 장면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나오미는 그 은인이 누구인지를 발견한 것이 왜 그렇게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는가?
[룻2:5~20]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18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19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답: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은 기근에서 떡집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잘 상징한다. 보아스를 만나서 룻은 생명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아담 후손이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상징하므로 중요한 사건이다.
나오미는 남편의 친족들의 도움 없이는 남편 엘리멜렉의 땅을 되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죽은 남편의 가까운 친척과 룻이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에서 그들의 유업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을 이스라엘에 마련해 두셨는데, 엘리멜렉의 유업을 되찾기 위해서는 가까운 친척의 도움이 필요했다. 보아스는 친절한 농장주였을 뿐만 아니라 땅을 되찾을 수 있는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다.
보아스가 친절하고 관대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친척이라는 사실은 두 여인의 가난이 영원히 지속될 필요가 없다는 최고의 소식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랫동안 보아스를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이해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족, 즉 육신을 가진 실제 인간이 되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거듭해서 자신을 “인자”(마 12:8, 막 8:31, 눅 22:22, 요 3:14)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엄격한 분으로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가 도덕적 목록의 모든 항목을 다 이룬다면 천국에 들여보내 주겠지만, 그것도 마지못해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부 조항을 근근히 따라갈 뿐이기 때문이다.
보아스에게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러한 생각을 완전히 뒤집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봐 주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깊은 영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삼기 원하신다.
<교훈> 보아스는 룻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농장주, 친족으로 그리스도의 표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빈곤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삼기 원하신다.
<부가설명>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이다. 솔로몬 성전 앞에 세운 두 기둥 중 하나의 이름이다. 다른 기둥은 이름이 야긴이다. 이것은 ‘그가 세우시리라’라는 뜻이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데 그렇게 하신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기둥으로 성전 앞에 높이 세웠다. 성전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과 그렇게 하시는 방법을 나타내는 상징적 기둥이다. 룻이 만난 사람이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사람이다. ‘유력한’이라는 말은 ‘기보르’인데 니므롯을 ‘영걸’이라고 한 것과 같은 말이고 이사야 9:6에 아기로 출생한 남자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전능한’이라고 번역한 말과 같은 단어다. 이런 이름은 보아스가 인류를 구원하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룻은 ‘친구’라는 뜻이 있다고 주석가들은 말한다. 예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을 친구라고 부르셨다(요15:14).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은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친구와 신부가 되는 것을 암시 표상하기 알맞은 것 같다. 이 이야기에 숨은 구원 복음의 섭리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6월 10일(화) 구속자 보아스
보아스는 룻을 깊이 사랑하고 결혼하기 원하지만, 그녀와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더 가까운 친척이라는 장벽이 있었다. 보아스가 그리스도의 표상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이 상황은 대쟁투의 쟁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더 “가까운 친척”(쉬운 성경)인 사탄이 권리를 주장한다.
인류에 대해 사탄은 무엇을 주장하는가?(욥 1:6-11; 마 4:8, 9; 유 1:9; 눅 22:31)
[욥1:6~11]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7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9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마4:8,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유1: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답: 사탄은 인류가 자기에게 속했고 세상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탄이 하늘 회의에 나타났을 때,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욥 1:7)다고 말했고, 하나님께서 의로운 욥을 보았느냐고 물으시자 사탄은 그를 자신의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욥의 마음이 실제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암시했다. 곧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시기에 따르는 것뿐이니, 그에게서 인자를 거둔 후에 과연 욥이 누구에게 충성하는지를 보자고 사탄은 도전한다.
유다서는 이스라엘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 즉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모세가 장사된 후(신 34:6) 그가 나중에 부활한 것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자세한 내용을 다 알 수 없지만, 미가엘이 마귀와 모세의 시체에 대해 변론했다는 본문은 사탄이 모종의 주장을 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하셨다. 생명의 왕과 빛나는 천사들이 그 무덤에 접근할 때에 사탄은 자기의 주권을 빼앗길까봐 염려하였다. 사탄은 악한 천사들과 더불어 스스로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한 영토의 침해에 대하여 항쟁할 태세를 갖추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종이 자기의 포로가 되었다고 자랑하였다. 그는 모세마저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었으며 사탄이 하늘에서 추방당하게 한 죄, 곧 여호와께 속한 영광을 스스로 취한 범죄를 모세도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의 지배 아래 들어왔다고 선언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78). 분명히 그리스도는 사탄의 주장을 반박하셨고 모세는 부활했다(마 17:3 참조).
룻기 4:1-12에서 보아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이 세상에 오실 베들레헴의 성문으로 향한다. 장로들이 모이고 마침내 소유를 상징하는 신을 벗어서 준다.
마을의 문은 송사를 결정하는 곳이다. 이것은 일종의 심판의 장면으로 다니엘서 7:13, 14, 22, 26, 27의 심판 장면을 반영한다. 우리는 이 심판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심판은 “백성 편을 들어”(단 7:22, 쉬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보아스가 신부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교훈> 보아스가 마을 문에서 공식적으로 친족으로서의 권리를 얻은 것처럼 우리의 친족 예수님은 심판에서 우리 권리를 회복하고 우리를 가족으로 맞으실 것이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룻기의 사건으로 구원 사업의 절차를 사건을 통하여 암시적 상징으로 잘 그려주셨다. 기록된 사건의 모든 절차가 인류의 타락으로부터 조사심판과 구원의 성취까지 잘 나타내었다. 이런 안목을 알게 한 저자의 설명은 참 복음적으로 아름답다. 룻기는 ‘기업 무를 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이다. 성경에는 고엘의 자격이 기록되어 있다. “기업을 무를 자”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고엘(laeGO)’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가알(la'G:)’의 분사형이다. ‘이스라엘의 고엘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그리고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할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이다. 고엘이 된 자는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다. 고엘이 감당해야할 일들은 이렇다. (1) 가난한 친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한다(레25:25,26). (2) 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져야한다.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민35:19,12,21). “보수하는 자”라고 번역된 말이 바로 “고엘”이다. (3) 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代)를 이어주어야 한다(룻4:5,6,10). (4) 그 친족의 죄 값을 대신 받아야 한다. [민5:8]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족이 없거든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 외에 돌릴 것이니라(민5:8). “친족”이라고 번역된 말이 “고엘”이다.
고엘의 자격은 이렇다. (1) 친족이어야 한다(신 25:5~7). (2) 자원해야 한다(룻 3:13). (3) 고엘로서의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레 25:25).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이런 자격을 갖추신 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 뿐이다. 감사합니다. 보아스는 이런 자격을 갖춘 베들레헴의 유력자였다.
6월 11일(수) 하만과 사탄
에스더서에서 우리는 지위와 권력에 목마른 하만을 만난다. 그는 제국에서 그 누구보다 훨씬 더 높은 지위를 얻었다(에 3:1).
에스겔 28:11-15과 이사야 14:12-15에서 루시퍼에 대해 살펴보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악한 대적이었던 하만과 하나님의 최상권에 굴복하기를 거절하는 사탄 사이에 몇 가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탄의 가장 궁극적인 의도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려가 세상 왕국을 보여 주며 유혹하는 이야기에서 드러난다(마 4:8-11).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속하고 당신의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오셨으며,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서 그 일을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족이신 구속자이시며, 그가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지불하신 대가는 넘치도록 크다.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는 권력과 숭배에 대한 사탄의 욕망이 이 세상을 최후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를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소수를 제외하고 세상은 그를 “놀랍게 여”기며 짐승을 따르게 된다(계 13:3, 4). 이 사람들에게 그는 무력을 행사한다.
하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으며 “경배”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매우 노하”(에 3:5, 6)여 모르드개의 민족 전체를 이 땅에서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에스더 3:1-14, 요한계시록 12:14-17, 요한계시록 13:1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어떤 유사점을 찾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남은 교회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하는 하만의 기록과 어떻게 유사한가?
[에3:1~14] 그 후에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니 2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니 3 대궐 문에 있는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하느냐 하고 4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개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 그들이 모르드개의 일이 어찌 되나 보고자 하여 하만에게 전하였더라 5 하만이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매우 노하더니 6 그들이 모르드개의 민족을 하만에게 알리므로 하만이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더라 7 아하수에로 왕 제십이년 첫째 달 곧 니산월에 무리가 하만 앞에서 날과 달에 대하여 부르 곧 제비를 뽑아 열두째 달 곧 아달월을 얻은지라 8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지방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9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그들을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맡겨 왕의 금고에 드리리이다 하니 10 왕이 반지를 손에서 빼어 유다인의 대적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에게 주며 11 이르되 그 은을 네게 주고 그 백성도 그리하노니 너의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라 하더라 12 첫째 달 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하만의 명령을 따라 왕의 대신과 각 지방의 관리와 각 민족의 관원에게 아하수에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되 곧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치니라 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14 이 명령을 각 지방에 전하기 위하여 조서의 초본을 모든 민족에게 선포하여 그 날을 위하여 준비하게 하라 하였더라.
[계12:14~17]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 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16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13: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답: 하만이 왕 다음 지위를 잡은 것과 날짜를 정하여 유대인을 몰살하라는 것과 그것이 율법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조건이라는 것이 계시록의 짐승 세력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과 그들을 경배하지 않으면 몰살시키라는 것과 날짜가 정해진 것이 유사하다.
마귀는 이 세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하나님께 충성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의 완전한 지배권을 반박한다.
“안식일이 모든 기독교국에서 특별한 쟁점이 될 때, 대중의 요구를 따르기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소수의 무리는 온 세계의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다"(Signs of the Times, 1910. 2. 22.).
<교훈> 하만이 굴복을 요구한 것처럼 마귀는 세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하나님께 충성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의 지배권을 반박한다.
<부가설명> 세상 마지막 투쟁은 하나님의 계명을 중심으로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는지 붉은 용으로 상징한 사탄과 바다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용과 바다짐승을 위하여 만든 우상을 경배하든지, 누구를 경배하는가 하는 것이 쟁점이 된다. 용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을 공격한다. 하만은 왕에게 그러게 말했다.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아뢰되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에3:8). 다니엘을 참소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계명을 두고 고발한 것을 우리는 안다. “그 사람들이 가로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그 틈을 얻지 못하면 그를 고소할 수 없으리라 하고”(단6:5). 이것이 마지막 대쟁투의챙점인 것을 성경을 분명히 계시했다. 특히 때와 관련한 법이다. 그것은 안식일 계명이다. 이것이 중심이 되어 사탄은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에스더에서나 다니엘서에서 성도가 이겼다. 승리자이신 예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6월 12일(목) 이때를 위하여
안타깝게도 어떤 그리스도인은 성경 예언의 고난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시련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면서, 예언에 약속된 해결책 대신에 고난에 초점을 맞추면 예언을 연구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된다. 하나님은 미래를 달콤하게 포장하지 않으시며 그 시작부터 대쟁투가 끝날 때까지 일어날 사건에 대해 솔직하시지만,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끝까지 읽는 것이다.
예언에는 일반적인 형태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반역이 초래한 혼란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시고 그 결과를 보여주신다. 하지만 그 후에 항상 소망을 제시하신다. 어떤 사람은 마지막 위기인 “야곱의 환난의 때”에 대한 예언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라본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다가올 마지막 순간이 결코 쉬운 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려운 때에 대한 예언을 믿을 수 있다면 구원의 약속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마귀는 증오에 가득한 복수심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를 쫓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녀를 구원하신다. 에스더서에서도 아름다운 왕비가 이야기의 중심 역할을 하며,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그녀를 크게 사용하신다.
에스더 4:13, 14, 에스더 5:1-3, 에스더 9:20-2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지구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경험할 우리의 곤경에 대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에4:13,14]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5:1~3] 제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 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2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 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 3 왕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며 요구가 무엇이냐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니,
[에9:20~28]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원근을 막론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21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22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23 유다인이 자기들이 이미 시작한 대로 또한 모르드개가 보낸 글대로 계속하여 행하였으니 24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모든 유다인의 대적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기를 꾀하고 부르 곧 제비를 뽑아 그들을 죽이고 멸하려 하였으나 25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의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의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 26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27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 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28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더라.
*답: 사형 명령이 내릴 것이지만, 결국은 하나님 백성들이 승리할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역사의 정하신 때를 위해 남은 교회를 일으켜 세우셨다. 1,260일의 암흑기가 끝나갈 무렵,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부를 숨겨 두셨던 곳에서 불러내어(계 12:14 비교) 마지막 자비의 기별인 세 천사의 기별을 세상에 전하게 하셨다. 우리는 “이런 때를 위”(에 4:14, 쉬운)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에스더는 하만이 동족에게 가하는 박해를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녀는 왕의 은총을 입었고, 그녀의 민족은 결국 구원받았다. 지구 역사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우리도 혼자가 아니다. 왕의 왕이 우리의 편이시며 하나님의 백성도 구원받게 될 것이다.
<교훈> 주의 백성에게 다가올 마지막 순간이 결코 쉬운 때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려운 때에 대한 예언을 믿는다면 구원의 약속도 분명히 신뢰할 수 있다.
<부가설명> 구약성경에 하나님이라는 말도 여호와라는 말도 없는 책이 두 권이다. 에스더서와 아가다. 아가에는 8:6에 여호와의 불이라는 말이 있어서 이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구역에는 번갯불이라고 번역해서 여호와라는 말이 없다. 원어는 ‘샬헤베트야’인데 마지막 ‘야’가 여호와의 약자라서 여호와의 불이라고 번역했다.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맹렬한 불을 뜻하는 말이다. 왜 이 두 책에 하나님이라는 말, 여호와라는 말이 없을까? 아가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사랑은 부부의 시각으로 노래했기에 아내가 남편 이름을 부르지 않는 예의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마지막 때 주님이 성소 중보를 마친 후의 상황에 대한 표상적 예언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때는 이미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계22:11)라는 선고가 끝났기 때문에 모든 것이 결정된 후이다. 그래서 굳이 환난을 위하여 간구할 필요없이 이미 하나님 백성의 승리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에스더서는 이 승리의 과정이 어떤 경로를 거치게 될 것인지 암시적 표상을 성도들에게 가르친다. 성도들의 싸움은 이겨놓은 것을 싸우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라고 선언하셨다. 주님께 날마다 굴복하고 매일 자아가 죽으면 예수님의 승리 안에서 평안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6월 13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59장 “이스라엘의 첫 왕” 605, 606쪽을 읽어 보라.
“사탄은 대중의 규범과 관행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소수의 무리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다. 지위와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려고 협의하는 일에 무법하고 비열한 자들과 연합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멸시로 뒤집어씌우려고 부와 재능과 교육이 연합할 것이다. 박해하는 통치자들과 목사들과 교인들은 그들을 대적하고자 음모를 꾸밀 것이다. 그들은 말과 글, 자랑과 위협과 조롱으로써 이들의 신앙을 무너뜨리고자 할 것이다. 거짓된 진술과 격한 선동으로 사람들은 백성의 감정을 자극할 것이다. 성경상 안식일의 옹호자들에 대하여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란 말을 할 수 없으므로 그 부족을 가리기 위하여 그들은 억압적인 법령에 호소할 것이다. 입법자들은 인기와 후원을 얻기 위하여 일요일 법령에 대한 요구에 응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십계명을 어기게 하는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전쟁터에서 진리와 오류가 논쟁하는 마지막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하여 의심 가운데 있도록 방치되지 않는다.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시대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와 당신의 백성을 옹호하실 것이다"(선지자와 왕, 605).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고난의 시기를 지나도록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답: 세상이 사망의 왕의 영토이므로 고난이 닥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적으로 예수님 안에 있도록 깨닫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인생이 사는 환경을 우리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
2. 신자는 그리스도께 충성하면서 겪을 수 있는 고난에 대비해 자신을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는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당신은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답: 오직 세상을 이기신 주님 안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3. 우리는 왜 예언의 고난에 더 집중하고 그것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예언에 담겨진 더 큰 그림을 가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답: 그것은 사탄의 방법이다. 심리학은 위협이 동기유발에 효과적이라고 가르치는 데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4. 요한계시록을 읽은 뒤 “무섭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당신은 어떤 방식을 사용하여 그것을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도록 도울 수 있겠는가?
*답: 예수께서 이기신 그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진행될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도록 도우는 것이다.
5. 누군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거나 받아주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해. 너도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안다면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있을거야”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룻과 에스더의 이야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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