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과 거룩한 사랑의 진노(질문, 대답, 설명) 02/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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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5-01-24 11:06 조회2,491회 댓글0건본문
제5과 거룩한 사랑의 진노
(2월 1일 안식일 / 일몰: 오후 5시 55분)
연구 범위: 시편 78; 요나 4:1-4; 마 10:8; 마 21:12, 13; 렘 51:24, 25; 롬 12:17-21
기억절: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시 78:38).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높이 찬양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많은 사람이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결코 진노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분은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한 분으로 나타난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그분이 참으로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도 악에 대한 깊은 분노를 표현하셨고, 신약은 하나님의 의롭고 합당한 진노에 대해 여러 곳에서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분노는 항상 악과 불의에 대한 그분의 의와 사랑에서 나오는 반응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완전한 선과 사랑에서 비롯된 의로운 분노이며, 모든 피조물의 복락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분명히 악과 불의에 대한 사랑의 합당한 반응이다. 악은 죄악의 피해자를 돌보시며, 가해자를 응징하시는 하나님의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의 진노는 피조물의 복락을 위하는 그분의 사랑의 합당한 표현이다.
느끼기: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죄를 정당화하지 않으시며 십자가로 대속하신다.
행하기: 그분이 진노하며 심판하는 뜻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한다.
TMI 위로
2.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마 21:12)
*답: 하나님을 무시하고 힘없는 자들을 괴롭힐 때 사랑의 의분을 일으키신다.
3.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기에 요나는 그분에게 화를 냈습니까?(욘 4:4)
*답: 자비로 니느웨를 용서했기 때문이다.
4. 사랑을 막는 완악한 자를 예수께서 어떻게 대하십니까?(막 3:5)
*답: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신다.
5. 하나님께서 왜 택하신 백성에게 심판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까?(대하 36:16)
*답: 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서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6. 진노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은 그분의 속성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살전 1:10)
*답: 인내와 사랑이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10).
결론: 하나님의 진노는 악과 불의에 대한 그분의 의와 사랑에서 비롯된 반응이다. 하나님은 자비하시지만 죄를 정당화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통해 죄를 대속함으로 공의를 보이시며 용서하신다. 그분은 더 많은 이를 구원하기 위해 고통스럽지만 심판하시며 공의를 세우신다. 악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기에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분의 진노는 사랑의 다른 표현이며 피조물의 복락을 위하시는 사랑의 합당한 반응이다.
1월 26일(일) 죄악으로 슬퍼하심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신다. 따라서 죄와 악은 그분을 격분시키고,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그 열정을 표출하게 하며, 심지어 악이 그것을 행한 사람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미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는데, 그 이유는 악이 항상 그분의 피조물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이다. 성경을 보면 성경학자들이 반역의 악순환이라고 부르는 현상과 함께 하나님은 거듭 진노하신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주기를 반복한다.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악을 행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 심지어 자녀를 인신 제사로 드리는 끔찍하고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을 따라 물러나신다.
·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압제를 받는다.
· 백성들이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는다.
· 하나님께서 은혜로 백성들을 구원하신다.
·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하나님을 배반하고, 종종 이전보다 더 심하게 반역한다.
· 이런 지독한 악과 불신앙의 반복 속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의 불충실함을 다함 없는 신실하심과 오래 참으시는 인내와 놀라운 은혜 그리고 깊은 긍휼로 백성들을 변함없이 대하신다.
시편 78편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백성들의 반복되는 반역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시78편은 길다. 각자가 읽기 바란다.] 78:38,39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 39 그들은 육체이며 가고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라.”
*답: 여러 번 돌이키시고 가르치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셨다.
성경에 따르면 사랑과 정의는 서로 얽혀 있다. 악은 항상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누군가를 해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는 악에 대한 사랑의 당연한 반응이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또는 부당하게 진노하거나 화를 내는 경우는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복해서 그분을 버리고 배반했지만 하나님은 그 오랜 시간 동안 모든 마땅한 응보를 뛰어넘는 긍휼을 베풀어 주심으로(느 9:7-33) 당신의 오래 참으시는 자비와 인애하심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보여주셨다. 실제로 시편 78:38에 따르면,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다.
<교훈> 하나님이 악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하심은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해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충하나 그분은 변함없는 신실함으로 언제나 도와주신다.
<부가설명>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조상들과 한 언약을 기억하시고 애굽에서 불러내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9:5). 하나님께서 그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들 조상과 맺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인도하셨다. 이것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 인류가 의롭게 사는 것에 기초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 이것은 창세전에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언약을 집행하시는 것이다(롬16:25~27).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믿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 징계하시고 형벌하셨으나 그 민족은 없애지 않으셨다. 반역하는 개인들이 망했으나 그 백성을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불순종으로 살 때 그런 개인은 망하지만 남은 자손의 교회는 마침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을 것이다. 우리는 개인이 다 진정한 남은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월 27일(월)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악에 대해 진노하신다. 하나님은 한량없이 사랑이 많고 자비하시기에 성경의 한 선지자는 하나님이 너무 자비하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요나 4:1-4에 기록된 니느웨 사람들을 자비하게 용서하신 하나님에 대한 요나의 이야기와 반응을 생각해 보라. 이 구절은 요나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마 10:8)
[욘4:1~4]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마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답: 요나는 잠못한 도시는 벌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요나의 마음은 완악했다. 그는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한 짓 때문에 그들을 너무 미워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 베푸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교훈인가! 아무리 납득할 만한 상황이더라도 우리는 이와 같은 태도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모든 사람은 값없이 받은 은혜를 인정하고 그 은혜를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요나의 반응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그분의 성품에서 얼마나 중심이 되는지를 강조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욘 4:2)기 때문에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거두실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과 나라를 공의롭고 자비롭게 대하신다.
“노하기를 더디하”심 또는 “오래 참으”심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코가 길다’로 번역할 수 있다. 히브리 관용구에서 분노는 은유적으로 코와 연관되어 있는데, 사람이 화를 드러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코의 길이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께 “코가 길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분이 노하기를 더디하고 오래 참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화를 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은혜를 아낌없이 풍성하게 베푸시면서도 죄를 정당화하거나 불의에 눈 감지 않으신다. 그 대신, 십자가를 통해 죄와 악을 속하심으로 하나님은 공의롭게 행하시며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분이 되신다(롬 3:25, 26).
<교훈>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를 풍성하게 베풀면서도 죄를 정당화하거나 불의에 눈 감지 않으신다. 대신 십자가를 통해 죄를 속함으로 공의를 보이시며 용서하신다.
<부가설명> 악한 일과 악한 자에 대하여 소위 착하다고 보이는 사람들이 악인들을 벌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자기는 악인에서 제외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아담 안에서 다 죽었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일뿐이다(고전15:22, 엡4:22). 엄격하게 말하면 아무도 다른 사람을 악하다고 벌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교훈이 성경의 교훈이다. 그래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한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12:19).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판단을 하고 정죄한다. 그렇게 해야 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 같은 마음은 버려야 한다. 최선을 다해 자비와 은혜를 구하고 넓고 포용하는 정신으로 사람을 대하도록 성령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재판장이 아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약4:11,12).
1월 28일(화) 의로운 분노
부적절한 분노의 형태가 많지만, 성경은 “의로운 분노”가 있음을 가르친다.
세 살짜리 딸이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엄마가 지켜보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아이를 공격한다고 상상해 보라. 어머니가 화를 내지 말아야 하겠는가? 당연히 화를 내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분노는 사랑의 마땅한 반응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마태복음 21:12, 13과 요한복음 2:14, 15을 읽어 보라. 성전을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마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요2:14,15]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답: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볼 때 의분을 사용하셨다.
이 경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의 거룩함을 짓밟고, 과부와 고아, 가난한 사람들을 편취하는 방편으로 삼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합당한 분노인 '거룩한 진노'를 보이신다(마 21:13, 요 2:16 비교).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와 죄인을 정결케 하심을 나타내야 할 성전과 예배가 오히려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속이고 착취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가증한 일에 대해 예수께서 분노하지 않으셨어야 했는가?
마가복음 10:13, 14과 마가복음 3:4, 5은 예수님의 의로운 분노에 대한 예를 더 보여준다.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왔을 때 “제자들이 꾸짖”자 예수님은 크게 못마땅해하시며 말 그대로 “분노”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막 10:13, 14)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곳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에 대해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하려 하자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다(막 3:4).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막 3:5) 그 사람을 고치셨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분노는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슬퍼하시기 때문이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분노가 사랑의 공의로운 진노인 것과 같은 사랑의 의분이다. 사랑이 악에 대해, 특히 그 악이 사랑의 대상을 해할 때 어떻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교훈> 악이 사랑의 대상을 해칠 때 사랑이 악에 대해 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완악함에 슬퍼하며 사랑으로서 죄에 대해 공의롭게 진노하신다.
<부가설명> 타락하기 전에 분노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사망의 존재가 되어 썩어지는 삶을 살 때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일을 경험하면 화를 낸다. 자기가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사랑의 대상이 사망의 길로 달려갈 때, 또 원수가 사망의 길로 가도록 유혹하고 핍박할 때 나타난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한 지노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과 은혜로 돌보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 참다참다 마침내 그 얼굴을 그에게서 돌리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신31:16,17).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애3:43). 하나님의 진노는 친히 형벌하는 것이 아니고 얼굴을 돌리고 보호의 손길을 거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오해하지 말자.
1월 29일(수) 고난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억눌린 자와 억압받는 자를 위한 격정과 괴롭히는 자와 압제자에 대한 의분을 반복해서 보이신다. 악이 없다면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진노는 언제나 그리고 오직 당신의 피조물을 해치는 악을 향한다.
예레미야애가 3:32, 33에 따르면, 하나님은 일부러 우리를 근심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분은 악인에게 심판 내리기를 원하지 않지만 사랑은 결국 정의와 별개일 수 없다.
이 진리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시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로 회개하고 당신과 화해할 기회를 반복해서 주셨는지를 통해 잘 나타난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부르고 또 부르지만 그들은 듣기를 거절했다(렘 35:14-17, 시 81:11-14 참조).
에스라 5:12을 읽고 예레미야 51:24, 25, 44과 비교해 보라. 이것은 바벨론 사람들을 통해 예루살렘에 임한 심판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대하 36:16 참조)
[스5:12]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렘51:24,25,44] 너희 눈 앞에서 그들이 시온에서 모든 악을 행한 대로 내가 바벨론과 갈대아 모든 주민에게 갚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5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온 세계를 멸하는 멸망의 산아 보라 나는 네 원수라 나의 손을 네 위에 펴서 너를 바위에서 굴리고 너로 불 탄 산이 되게 할 것이니/ 44 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그의 입에서 끌어내리니 민족들이 다시는 그에게로 몰려가지 아니하겠고 바벨론 성벽은 무너졌도다.
[대하36:16]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답: 이스라엘의 반역으로 바벨론을 통하여 징계하셨으나 그 바벨론이 지나치게 이스라엘을 학대했기에 그들을 벌하고 자기 백성을 구할 것이다.
에스라 5장에 따르면 백성들이 끈질기게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노하게 하여 하나님께서 떠나신 후에 백성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에 5:12)겨졌다. 하지만 하나님은 “백성을 바로 잡을 길이 전혀 없”(대하 36:16, 새번역)게 된 후에 그렇게 하셨고 이후에 하나님은 유다에 가한 지나친 횡포에 대해 바벨론을 심판하셨다(렘 51:24, 25, 44; 슥 1:15 비교).
성경은 하나님이 내리신 것으로 묘사하는 다른 많은 심판도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의 “신들”을 섬기기로 한 결정에 따라(삿 2:13, 14, 시 106:41, 42) 하나님께서 그들을 적들에게 “넘기”(삿 10:6-16, 신 29:24-26)신 것으로 설명한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모두를 위한 당신의 사랑과 우주의 영구적 유익을 위하는 하나님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죄와 반역과 악의 모든 문제에 빠진 우주를 위해 모든 악을 단번에, 그리고 최종적으로 근절하실 때에 당신의 분노는 그칠 것이다.
<교훈> 하나님이 심판을 원치 않으시기에 계속 용서하시고 뉘우칠 기회를 주시지만 뉘우치지 않는 죄와 반역과 악은 우주의 영구적 평화를 위해 심판하실 것이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진노는 도움의 손길을 거두는 것이다. 화요일 부가설명에서 말했다. 하나님의 진노는 친히 형벌하시는 것이 아니다. 호시탐탐 노리는 원수들의 숲에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얼굴을 드시고 보호하시는 얼굴을 숨기시고 그 손길을 거두시는 것이다. 보호막이 없어지자 원수의 공격이 방어없이 밀려들어온다. 당연히 고통을 겪고 포로가 되고 살육을 당한다. 그래서 신명기 31:17에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까지 예언하셨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 할 것이라”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해서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보호의 손길을 거두셨는데,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진노해서 친히 형벌하시는 것처럼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도 이런 경우가 없을까? 말씀에 전적으로 굴복하자. 말씀이 생활이 되도록 주님의 능력을 간구하자.
1월 30일(목) 긍휼을 보이심
하나님의 진노는 '무서운' 것이지만, 결코 부당하거나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악에 대해 진노하신다. 하나님의 진노가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선하심, 영광과 대조되는 악의 교활한 본질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지만 진노는 그렇지 않다. 악이나 불의가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도 없다. 결국 우주에서 악을 뿌리 뽑는 것으로 나타나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은 더 이상의 노하심과 진노도 없게 만들 것이다. 이는 불의나 악이 다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랑의 관계 속에서 행복과 정의만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하나님이 노하실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하나님의 진노는 없을 것이다. 정말 멋진 일이 아닌가!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노하심이, 의도와 달리 인간의 복수심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신명기 32:35, 잠언 20:22, 잠언 24:29, 로마서 12:17-21, 히브리서 10:30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 어떻게 권면하고 있는가?
[신32:35]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잠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잠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롬12:17~21]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히10: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답: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인내로 그날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 바르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하나님께 심판하실 권리가 있으며, 심판하실 때는 언제나 완전한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말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하나님께서 결국에 불의와 악을 심판하시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길을 마련해 주셨다.
실제로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살전 1:10; 롬 5:8, 9 비교) 분은 예수님이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하나님의 진노가 분명 이를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로 인해 그 진노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교훈>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지만 진노는 아니다. 악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노도 없다. 그분은 긍휼로 우리를 진노에서 건지시며 심판을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신다.
<부가설명>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진노는 그 대상이 하나님의 보호를 계속해서 거절할 때 얼굴을 숨기시고 보호의 손길을 거두는 것일 뿐이다. 사망의 세상에서 생명 싸개를(삼상25:29) 거두니까 사망의 모든 속성이 벌 떼처럼 덤벼드는 것이다. 그때 그것을 피할 다른 길이 없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께서 숨긴 얼굴을 돌이켜 그들을 보시고 다시 보호의 손길을 펴신다. 회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중보로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돌아온 탕자를 감싸안으시듯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진노는 사랑을 배반한 자들이 돌아와 사랑 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회복의 방법이다. 감사할 것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14:4)라고 외치신다. 그리고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허물을 대신 지시고 형벌을 받으셨다. 그분을 믿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아멘.
1월 3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28장 “시내에서의 우상 숭배”를 읽어 보라.
엘렌 화잇은 금송아지를 숭배한 죄와 관련해서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에게 은혜를 넉넉히 주시고 그들이 자진하여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겠다고 서약한 하늘 왕께 대역죄를 범하였다. 하나님의 정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역자들에게 형벌을 집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분의 긍휼이 나타났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율법을 옹호하시는 동시에 선택의 자유와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 고집스럽게 반역을 계속한 사람들만 끊어졌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인근 민족들에게 증거하기 위하여 이 죄는 반드시 처벌될 필요가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범죄한 사람들에게 형벌을 집행함으로써 그들의 범죄에 대한 엄숙하고도 공공연한 책망을 기록으로 남겨야 했다. 이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근 족속의 우상숭배를 정죄할 때에 그들의 원수들은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백성들이 호렙산에서 송아지를 만들어 예배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것이었다. 그런 때에 비록 수치스러운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범죄자들이 당한 무서운 운명을 가리켜 그들의 죄가 용인되거나 용서받지도 않았다는 증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었다.
공의 못지않게 사랑도 이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 집행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 수백만에게 불가피하게 내릴 심판을 막기 위하여 수천명이 고통을 당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소수를 벌하셔야 했다"(부조와 선지자, 324).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것이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답: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2.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와 달리 사람의 복수/보복에는 어떤 문제가 항상 발생하는가?
*답: 자기의 손해를 갚으려는 정신이 지배한다. 상대가 또 보복하게 된다.
3.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심판은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는가? 하나님의 심판조차 사랑의 행위임을 보여주는 성경의 다른 예는 무엇인가?
*답: 심판으로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사사기 사건은 이것을 드러낸다.
4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 하더라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고린도전서 4:5에 비추어 이에 대해 토의해 보라.
*답: 심판과 보복은 같은 사건을 연속해서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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