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사랑과 자비의 하나님-(핵심Q&A)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4과-사랑과 자비의 하나님-(핵심Q&A)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봉주 작성일25-01-20 19:42 조회1,160회 댓글0건

첨부파일

본문

제4과 사랑과 자비(慈悲)의 하나님

             (1월 25일 (안) / 일몰: 오후 5시 48분)


<기억절(記憶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개요(槪要)>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 대한 깊은 연민(憐愍)으로 육체적(肉體的)으로나 감정적(感情的)으로 감동(感動)하십니다. 이번 주 제4과는 세 가지 기본요점(基本要點)을 강조(强調)합니다.


1. 우리의 열정적이고 연민(憐愍)이 많은 하나님은 성경에서 양육 이미지로 생생하게 표현됩니다. 

2. 우리의 열정적이고 자비(慈悲)로운 하나님은 성경에서 생생한 언어로 두드러지게 묘사됩니다. 

3. 우리의 열정적이고 자비로운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방식으로 질투하십니다. 


⑴.하나님의 사랑은 부모(父母)의 사랑과 유사(類似)하게 강(强)한 감정적(感情的), 정서적(情緖的)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⑵.신성한 사랑을 모성애(母性愛)로 비유(譬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기억(記憶)하고 연민(憐愍)을 베푸신다는 개념(槪念)을 전달(傳達)합니다. 


⑶.모성적(母性的) 이미지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연민(憐愍), 사랑의 보살핌, 그리고 그분 백성의 필요(必要)에 관한 관심(關心)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⑷.성경은 또한 사랑스럽고 자비로운 아버지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설명합니다.


⑸많은 성경구절(聖經句節)에서 생생한 언어(言語)는 하나님의 애정(愛情)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자비(慈悲)로 육체적(肉體的)으로나 감정적(感情的)으로 움직입니다. 


⑹.자비(慈悲)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單語)는 자궁(子宮)과 같은 모성애(母性愛)를 묘사(描寫)하며 어머니가 자녀(子女)에 대한 자비(慈悲)를 강조(强調)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百姓)에게 부드러운 애정(愛情)과 자비(慈悲)를 보이십니다.


⑺.하나님은 우리와 친밀(親密)하고 배타적(排他的)인 언약관계(言約關係)를 추구(追求)하시고 그분의 백성에게 신실(信實)함을 요구(要求)하십니다. 이런 의미(意味)에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열렬하고 질투(嫉妬)하시는 분으로 묘사(描寫)됩니다. 


⑻.변덕스럽다는 부정적인 의미 대신, 이 언어는 하나님께서 자해와 깨진 약속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신다는 생각을 전달합니다.


⑼결론(結論)으로 하나님은 깊은 감정(感情)을 보이시며 인간을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 절제(節制)되지 않은 감정(感情)은 문제(問題)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며 그분의 사랑은 인간의 어떤 사랑보다 크고 깊다. 


⑽하나님은 불붙는 듯한 마음으로 인간을 사랑하며 긍휼(矜恤)히 여기시고 필요(必要)를 채우신다. 그런 마음은 인간의 질투(嫉妬)와 다른 그분의 백성과의 배타적 관계(排他的關係)와 유익(有益)을 위하는 의(義)로운 열정이다. 우리는 이 사랑에 반응하고 그것을 세상에 나타내어야 한다. 


(01월 19일) (일)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한 사랑> 


(Q)~인간을 향(向)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훨씬 더한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깨달아 알 수 있습니까. ?


(A)~우리의 열정적(熱情的)이고 연민(憐愍)이 깊은 하나님은 성경에서 육아(育兒)의 이미지와 함께 생생하게 표현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생생한 하나님의 모습 중 하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자식(子息)에 대한 부모(父母)의 사랑으로 묘사(描寫)되는데, 이들은 이상적(理想的)으로 인간관계(人間關係)에서 사랑과 연민의 특별한 인물(人物)입니다. 그와 같은 인간이 나타내는 그 어떤 깊고 아름다운 감정(感情)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비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강조(强調)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⑴.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어떤 사랑도 비교(比較)할 수 없을 만큼 크기에 인간(人間)의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풍성(豊盛)한 사랑과 자비(慈悲)를 한없이 베푸신다. 


⑵.하나님의 자녀(子女)란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는 자(者)인 것이다(시 103:11절). 구약성경(舊約聖經)에서 하나님의 부성(父性)을 언급하고 있는 곳으로는 (출 4:22, 신 14:1, 32:6, 사 1:2, 45:11, 63:16, 64:8, 렘 3:4, 19, 31:9, 호 11:1, 말 1:6, 2:10, 3:17) 등이 있다.


⑶.자신이 숭배하는 신(神)(하나님)을 아버지로 보는 개념(槪念)은 고대적(古代的)인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民族)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근동 민족(近東民族)들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일례로 우가리트(Ugarit)에서는 ‘엘’(El) 이 신(神)들의 아비였을 뿐 아니라 인류의 시조(始祖)로 간주(看做) 되었다고 한다. 


⑷.구약성경(舊約聖經)에서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단순한 혈통적 관계(血統的關係)보다는 순종(順從)하는 자와 은혜(恩惠)를 베푸시는 분 사이의 관계(關係)를 강조(强調)한다. (Gray). 


⑸.시편(詩篇)에서도 부자(父子) 관계(關係)는 혈통(血統) 상, 민족(民族)상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순종(順從)의 문제에 역점(力點)이 두어져 있다. 


⑹.(시편 103:13)에서 저자(著者)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表現)하면서 그는 우주(宇宙)의 통치자(統治者)를 “우리 아버지”라는 새 이름으로 청중(聽衆)에게 가르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얼마만 한 사랑으로써 그들을 대하시는지 그것을 이해(理解)시키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잃어버린 영혼(靈魂)을 살피신다는 것을 가르치시면서 “아비가 그 자식(子息)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가 자기를 경외(敬畏)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느니라”라고 하셨다.


⑺.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개념(槪念)은 즉 “아비가 그 자식(子息)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가 자기를 경외(敬畏)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느니라”라고 하셨다. 성경의 진리(眞理) 이외의 다른 종교(宗敎)는 이처럼 부자(父子)지간으로 세상에 소개(紹介)한 일이 없다. 


⑻.이교(異敎)는 사람들이 지존(至尊)하신 자를 사랑하시는 자(者)로 보게 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제사(祭祀)를 즐겨 받으시는 악(惡)한 신(神)으로 보도록 한다.


⑼.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선지자(先知者)의 귀한 교훈(敎訓)에 대하여 그만큼 몽매(蒙昧)하였다. 부모(父母)의 사랑과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은 한 근본적(根本的) 문제이니 이것이 세상에 보내는 새로운 선물(膳物)이었다. (보훈 74).


⑽.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떤 환경(環境)도, 어떤 거리도, 우리를 구주(救主)와 분리(分離)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분께서는 우리 우편(右便)에 계셔서 우리로 쓰러지지 않게 해주시고, 옹호(擁護)해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위로(慰勞)해 주신다.


(01월 20일) (월) <애끓는 사랑>  


(Q)~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은 인간을 대할 때 어떤 감정(感情)으로 사랑하시며, 호세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感情)의 깊이를 어떻게 묘사(描寫)합니까? (호 11:8)


(A)~호세아 선지자가 음란(淫亂)한 여인(女人)을 사랑한 것처럼, (호세아 11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나는 그를 사랑했다"(호세아 11:1)라고 말씀하시고 "나는 에브라임에게 걷는 법을 가르치고, 그들의 팔을 잡았다"(호세아 11:3)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내게서 물러가려고 한다."(호세아 11:7)라고 지적(指摘)하십니다. 


⑴.부모(父母)님 아이에게 필요(必要)를 제공(提供)하고 양육(養育)하는 부모의 사랑과 같이 그들을 향해 느끼는 불붙는 것 같은 마음을 통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의 강도(剛度)를 나타내신다. 


⑵.그래도 하나님께선 "에브라임아, 내가 어떻게 너를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떻게 너를 넘겨줄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선언(宣言)하십니다. "(호세아 11:8). 그분의 연민(憐愍)은 더 정확(正確)히는 "마음의 변화(變化)"(타나크 참조)를 묘사(描寫)하기 위해 내장적(內藏的) 언어(言語)를 사용(使用)하면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내 마음이 내 안에서 요동(搖動)하고, 내 동정심(同情心)이 격동(激動)한다."(호세아 11:8)라고 말씀하십니다.


⑶.히브리어 (동사 hpk)는 또한 애가서에서 인간의 고통(苦痛)을 묘사(描寫)하기 위해 마음과 관련하여 나타납니다. 다시 한번, 신체적(身體的) 내장적 언어(內藏的言語)가 사용됩니다: "주님, 보십시오. 저는 괴로움에 처해 있습니다. 제 배가 요동(搖動)합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삐걱거립니다. 

[동사 hpk]"(애가 1:20 ESV).


⑷.따라서 ‘예레 미아 애가서’에서 인간의 마음을 언급(言及)하고 ‘호세아서’에서 신성(神聖)한 마음을 언급하는 내장적 언어(內藏的言語)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향(向)한 열정(熱情)과 연민(憐愍)의 깊이를 감정적(感情的)으로 묘사(描寫)합니다.

⑸.많은 신약성경(新約聖經) 구절(句節)에서 동정심(同情心)이나 연민(憐愍)이라는 단어(單語)가 문자적(文字的)으로 "몸의 내부(內部) 부분(部分)"을 가리킵니다. (빌립보서 1:8, 참조). 특히 "장기 내장(臟器內臟)"을 인용(引用)합니다.


⑹.신약성경(新約聖經)은 여러 곳에서 신체내부(身體內部)가 움직이는 내장적 언어(內藏的言語)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연민(憐愍)을 감정적(感情的)으로 묘사(描寫)합니다. 더 구체적(具體的)으로 말하면, 그분은 사람들에 대한 깊은 사랑의 연민(憐愍)으로 육체적(肉體的)으로나 감정적(感情的)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舊約聖書)에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깊은 연민(憐愍)에 대한 묘사(描寫)와 양립(兩立)할 수 있습니다.


⑺.(호세아 11:4) “내가 사람의 줄” 이는 말이나 노새 등 짐승을 제어하여 끄는 줄과 반대(反對)되는 말로서 사랑과 은혜(恩惠)로 이끄는 줄이라는 뜻을 암시(暗示)한다. (시 32:9). 한편 카일(Keil)은 이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이고 인간적(人間的)인 인도(引導)를 상징(象徵)하는 표현(表現)으로 보며, RSV는 ‘연민(憐愍)의 줄’(cords of compassion)로 번역(飜譯)했다.


⑻.(호세아 11:9)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하나님께서는 거짓 하거나 변개(變改)치 아니하시고 한번 선택(選擇)하시고 목적(目的)하신 바를 끝까지 이루시는 분이심을 암시(暗示)한다(민 23:19, 삼상 15:29, 말 3:6).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애굽에서 인도(引導)하사 구원(救援)하셨으므로 끝까지 멸망(滅亡)치 않도록 보호(保護)하실 것임을 보여준다.


⑼.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그들을 인자(仁慈)히 대하셨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내가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이 처음에 애굽에서 한 민족(民族)으로 성장(成長)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택(擇)하심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신 7:7, 8). 그들이 어린아이들처럼 약(弱)하고 무력(無力)하며 어리석고 패역(悖逆)했을 때, 그들이 의지(依支)할 데 없이 추방(追放)당한 아이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다.


⑽.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자기의 호의(好意)를 그들에게 알리셨다. 그는 유모(乳母)가 젖먹이를 기르듯 그들을 양육(養育)하시며 그들의 버릇없는 태도에도 관용(寬容)을 베푸셨다. 성인(成人) 아니 노인(老人)들이라도 어릴 때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선(善)하게 베푸신 일들을 가끔 회상(回想)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銘心)하자.


(01월 21일) (화) <예수님의 긍휼(矜恤)> 


(Q)~우리를 돌보는 하나님 사랑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곤경을 어떻게 느끼셨다고 생생하게 가르치셨습니까? (마태복음 9:36, 마태복음 14:14, 마가복음 1:41, 마가복음 6:34, 누가복음 7:13을 읽어 보라. 마태복음 23:37, 신명기 32:11)


(A)~<다양(多樣)한 비유(譬喩)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연민(憐愍)을 묘사(描寫)하기 위해 반복적(反復的)으로 내장적(內藏的)이고 가슴 아픈 감정(感情)의 용어(用語)를 사용(使用)하셨다. (마 18:27, 눅 10:33, 눅 15:20). 그리고 구약성경(舊約聖經)과 신약성경(新約聖經)에서 신성(神性)한 연민(憐愍)을 묘사(描寫)하는 동일(同一)한 언어(言語)가 복음서(福音書)에서도 고난(苦難)에 처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연민(憐愍) 어린 반응(反應)을 묘사(描寫)하는 데 사용되었다.>


⑴.세 번째 갈릴리 선교 여행에서 열두 제자들은 둘씩 짝을 지어서 나가야 했으며 예수의 봉사에서 목격한 원칙을 적용하여야 했다. 그러나 제자들이 기진맥진(氣盡脈盡)하여 돌아오는 모습을 보시고 민망(憫惘)히 여기시니 (마 9:36) 이는 ‘민망(憫惘)히 여기다’는 말의 뜻을 더욱 상세히 설명하자면 ‘내부(內部)의 창자에서부터 동정심(同情心)이 우러나와 마음이 움직이다’로서 이 말은 격(格)한 동정심(同情心)에 대한 강조적(强調的) 표현(表現)을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다.


⑵.인류(人類)의 고난(苦難)이 늘 그리스도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동정(同情)과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심령이나 혹은 육체(肉體) 가운데 고난(苦難)을 겪는 자들을 위하여 동정하시고 민망(憫惘)히 여기셨다. 고생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는 자들을 취급하시는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모본(模本)은 그의 피조물(被造物)들이 당하는 고통(苦痛)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동정해야 하며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TMK 43)


⑶.(그리스도께서 긍휼히 여기셨음) 그리스도께서 군중(群衆)들이 당신 곁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민망(憫惘)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牧者) 없는 양(羊)과 같이 고생(苦生)하며 유리(流離)함이라” (마 9:36). 


⑷.그리스도는 당신의 발 앞에 몰려드는 무리 중에서 병(病)든 자와, 슬퍼하는 자와, 가난한 자와, 궁핍(窮乏)한 자와, 타락(墮落)한 자들을 보셨다. 온 세상 전역(全域)에 있는 인류의 필요와 불행(不幸)이 그분에게 제시(提示)되었다. 높은 자와 가장 낮은 자, 가장 영광(榮光)을 받는 자와, 가장 비천(卑賤)한 자들 가운데서, 그분은 당신께서 주시고자 오신 바로 그 축복(祝福)들을 갈망(渴望)하고 있는 영혼들을 보셨다. (WM 54.2)


⑸.주님의 사랑의 마음은 우리의 슬픈 일을 보거나 그 슬픈 일에 대한 말만 들어도 민망(憫惘)히 여기신다. 우리의 마음을 번뇌(煩惱)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에게 내어놓으라. 그가 감당(堪當)하시기에 너무 과대(過大)한 것은 없나니 대개 그는 세계들을 붙드시고 우주(宇宙)의 모든 사건을 관리하시는 이심이다. (Pr 285)


⑹.다소(多少)라도 우리의 평강(平康)에 관계(關係)되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些少)할지라도 그가 주목(注目)하지 않으시는 것은 없다. 우리의 경험(經驗) 중에 어떠한 사건이 너무나 흉악하다고 하여 그것을 보지 않으시는 것이 없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問題)라도 그가 풀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없다. (Pr 기도 285)


⑺.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을 바라보실 때 고난(苦難)과 불행(不幸)을 목도(目睹)하셨다. 그분은 사람이 사단의 잔인무도(殘忍無道)함 희생(犧牲)이 되는 것을 민망(憫惘)히 보셨다. 그분은 타락(墮落)되고 살상(殺傷)당하고 잃어버림을 당하는 자들을 동정(同情)의 눈으로 보셨다……. 인간(人間)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향상(向上)할 수 없다는 사실이 우주(宇宙) 앞에 실증(實證)되었다. 세상을 창조(創造)하신 자가 생명과 능력의 새 요소를 나누어주셔야만 하였다. (AG 11)


⑻.우리의 천부(天父)께서 그것들을 못 본 체하시거나 거기에 직접(直接)으로 관심(關心)을 두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상심(傷心)한 자(者)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傷處)를 싸매시도다”(시 147:3). 하나님과 각 사람과의 관계(關係)는 그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나 외(外)에 다른 사람을 위(爲)하여서는 주시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명료하고도 완전하다. (Pr 285)


⑼.“아비가 자식(子息)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敬畏)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體質)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塵土)임이 기억(記憶)하심이로다. 

(시편 103:13~14. (YHH 222)


⑽.신구약(新舊約)에서 하나님의 긍휼(矜恤)을 묘사(描寫)하는 표현(表現)이 고통(苦痛)받는 자를 대하는 예수의 마음을 묘사(描寫)하는 데 사용(使用)된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保護)하고 기르는 것으로 비유(譬喩)하셨다.


(01월 22일) (수) <하나님이 질투(嫉妬)하시다니> 


(Q)~시기(猜忌)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질투(嫉妬)하시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意味)합니까? (고후 11:2)


(A)~<열정적(熱情的)이고 연민(憐愍)이 많은 하나님에 대한 구약성경(舊約聖經)의 그림 일부로서, 주님은 질투(嫉妬)/열렬(熱烈)하다고 묘사(描寫)된다. 

(참조 출애굽기 20:5; 출애굽기 34:14; 신명기 4:24; 신명기 5:9; 신명기 6:15; 신명기 32:16, 21; 여호수아 24:19; 열왕기상 14:22; 시 78:58; 겔 39:25; 나훔 1:2; 요엘 2:18; 스가랴 1:14; 스가랴 8:2)>


⑴.진정(眞正)한 사랑을 불륜(不倫) 한 아내에게 나타내는 심정(心情)을 표현(表現)한 것이다.

창조(創造)의 기념일(記念日)의 명예(名譽)를 위해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다(리뷰 1902. 10. 28)


⑵.결혼관계(結婚關係)에서와같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배타성(排他性)과 신실(信實)함을 요구(要求)한다. 이 언약관계(言約關係)를 고려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偶像)을 만들고 그것을 경배(敬拜)/섬김으로써 그분의 계명(誡命)을 어길 때, 그 백성은 성경적(聖經的) 언어(言語)에 따르면 하나님을 움직이거나, 그분을 질투(嫉妬)와 진노(震怒)로 자극(刺戟)한다. (신 32:16, 21; 수 24:19; 왕상 14:22, 23; 시 78:58; 나 1:2, 14). 


⑶.거룩한 하나님(수 24:19, 겔 39:25)으로서, 그분의 백성(百姓)과의 관계(關係)에 열심히 시다. ( 스가랴 1:14~15. 스가랴 8:2), 그의 질투(嫉妬)하는 반응(反應)은 실제로 그의 백성의 불충실(不忠實)함과 우상 숭배(偶像崇拜)에 대한 거룩한 반응(反應)입니다.


⑷.하나님의 질투(嫉妬)에 대한 이 구약성경의 묘사는 분명히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교회 구성원들 사이의 질투에 대해 경고한 것과는 다릅니다(고전 13:4, 고후 12:20, 갈라디아 5:20 참조). 바울은 "경건한 질투"에 대해 긍정적(肯定的)으로 말하며, (고린도후서 11:2)에서 교회를 위해 질투(嫉妬)한다고 강조(强調)한다. 


⑸.피(避)해야 할 부정적(否定的)인 질투(嫉妬)와 하나님의 긍정적(肯定的)인 질투(嫉妬) 사이의 이러한 구별(區別)은 그리스어로 분별(分別)할 수 있지만, 신약성경(新約聖經)에서 질투(嫉妬)에 대한 두 가지 가능(可能)한 정의(正義)를 통해 알 수 있다.


⑹.하나님은 당신의 영광(榮光)에 대하여 질투(嫉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존중(尊重)히 여기지 않는 자를 존중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빛 가운데 사는 자들은 저들이 빛을 받은 후에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경험(經驗)이 미숙(未熟)한 영혼(靈魂)들에 이런 것들을 가르쳐야만 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좀 더 충분(充分)히 설명할 시간을 갖기 원(願)하나 나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서신 58, 1893년. (1 SM 131) 


⑺.우리의 하나님은 질투(嫉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마음의 생각과 상상과 음모를 아신다. 그대는 자신의 판단을 따랐으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 때도 서글프게 실패하고 말았다. 태만하거나 부주의하게 일을 처리하기에는 이러한 노력에 너무 많은 것이 위기에 처해 있다. 영혼들은 중요하고 영원한 진리로 시험을 받고 있으며, 그대가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그들에게 진리 편에 설 것이냐, 혹은 진리를 반대할 것이냐를 가늠하는 일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⑻.하나님의 품성(稟性)은 변(變)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시내 산에서 율법(律法)을 주시고 그것을 당신의 친수(親手)로 돌판에 새기셨던 때와 다름없이 오늘날도 질투(嫉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律法)을 무시(無視)하는 자들도 “나는 성화(聖化)되었노라”라고 할 수 있으나 진실로 거룩하게 된 것과 거룩하다고 주장(主張)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別個)의 것이다. (SL 68) 


⑼.사랑에 반대(反對)되는 질투(嫉妬)의 종류가 있지만(고전 13:4), (고린도후서 11:2)에 따르면 선(善)하고 의(義)로운 "질투(嫉妬)"가 있다. 바울은 그것을 "경건(敬虔)한 질투(嫉妬)"라고 부르다(고후 11:2). 하나님의 질투(嫉妬)는 오직 그리고 항상(恒常) 의(義)로운 종류(種類)이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더 잘 표현(表現)될 수 있다.


⑽.하나님의 질투(嫉妬)(또는 "열렬한 사랑")에는 인간의 질투(嫉妬)의 부정적(否定的)인 의미(意味)가 없다. 그것은 결코 시기심(猜忌心)이 아니라 항상 그분의 백성과 배타적(排他的)인 관계를 맺고 그들의 선(善)을 위해 올바른 의(義)로운 열정(熱情)이다.


(01월 23일) (목) <사랑과 자비(慈悲)의 하나님>  


(Q)~사랑과 자비(慈悲)의 하나님께서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자비(慈悲)롭고 놀라운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關係)에 반영(反映)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까? (고린도전서 13:4~8, 살전 3:12~13)


(A)~<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연민(憐愍)과 열렬(熱烈)한 사랑을 적극적(積極的)으로 보여주시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勸)하신다. 공의(公義)는 그분의 초석(礎石)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사단의 목적(目的)은 진리(眞理)와 공의(公義)로부터 자비(慈悲)를 분리(分離)시키려 한다.>


⑴.성경(聖經)에서 하나님의 긍휼(矜恤)을 묘사(描寫)하는 표현(表現)이 고통(苦痛)받는 자를 대하는 예수의 마음을 묘사(描寫)하는 데 사용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矜恤)히 여기시고 필요(必要)를 채워주셨다. 


⑵.우리 구주(救主)께서 가르치시고 친(親)히 모본(模本)을 보이신 사랑과 자비(慈悲)와 친절(親切)의 원리(原理)는 하나님의 품성(稟性)과 의지(依支)의 사본(寫本)이다. 


⑶.우리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하여 사랑과 자비(慈悲)의 봉사(奉仕)를 잊어버리게 하고 우리를 보호(保護)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能力)에 대한 지식(知識)을 끊어버리며 하늘에서 비치는 모든 광선(光線)을 가로막기 위하여 마치 하나님과 인간(人間) 사이에 드리운 사망(死亡)의 장막(帳幕)처럼 지옥(地獄)과 같은 그늘을 던지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다. (1 SM 264)


⑷.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하는데 나는 주님께서 저들의 모든 타락(墮落)한 상태(常態)에서 저들을 회복(回復)하시고 고쳐주시기 위하여 사랑과 자비(慈悲)의 뜻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2 SM 67)


⑸.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서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저들이 바벨론이라고 불려서는 안 될 것이며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불려야 할 것입니다. 저들은 이 마지막 시대(時代)에 산 기별(奇別)을 선포(宣布)해야 할 산 사자(使者)들이 되어야 한다. (2 SM 67)


⑹.그리스도의 마음속에 그처럼 풍성(豊盛)하게 거(居)했던 사랑과 자비(慈悲)의 결핍(缺乏) 때문에 교회에 시련(試鍊)이 닥칠 때 완전히 실패(失敗)한다. 


⑺.그리스도의 친절(親切)과 동정(同情)이 결핍(缺乏)되어 있기 때문에 혹시 실제적(實際的) 손해(損害)는 없다 할지라도 선(善)을 행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努力)은 거의 언제나 실패(失敗)로 끝나게 된다. (5T 349)


⑻.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交際)를 하도록 요구(要求)하고 계시며, 이런 관계(關係)를 통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形狀)으로 변화(變化)될 수가 있다. 그러할 때 사랑과 자비(慈悲)의 원칙(原則)이 그의 본성(本性)의 한 부분(部分)이 될 것이다. 


⑼.이 목적을 방해(妨害)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사단은 사람을 의존(依存)하도록 격려(激勵)하고 사람들을 사람들의 노예(奴隸)로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활동한다. 그가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데 성공(成功)할 때, 그는 그 자신의 이기심(利己心)과 증오(憎惡)와 투쟁(鬪爭)의 원칙(原則)을 교묘(巧妙)하게 불어넣는다. (7T 176)


⑽.우리는 하나님의 자비(慈悲)롭고 놀라운 사랑을 다른 사람과의 관계(關係)에 반영(反映)하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이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만이 성령(聖靈)을 통해 가능(可能)하게 하신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