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제자들을 가르치 심-1 (질문, 대답, 설명) 08/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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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24-08-08 21:18 조회2,207회 댓글0건본문
제7과 제자들을 가르치 심-1
(8월 17일 안식일 / 일몰: 오후 7시 21분)
연구 범위: 막 8:22~38; 마 20:29~34; 요 12:25; 막 9:1~50; 말 4:5, 6; 눅 9:30, 31
기억절: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마가복음 전반부는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분의 능력 있는 가르침과 기적은 한 방향으로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복음서의 중요한 전환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믿는지 물으신다.
베드로는 이 질문에 분명하게 대답하고, 예수님은 즉시 메시아로서 자신이 무엇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지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로 향하시는 것을 알고 있다.
마가복음 8장 마지막 부분부터 마가복음 10장의 끝까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는 길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추신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해서 예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제자도에 대한 특별한 가르침이 이어진다. 이 강력한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가복음의 이 부분은 8장의 중간과 10장의 마지막에 각각 맹인을 고치신 사건으로 시작하고 마쳐진다. 기적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이 경계점 사이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한 영적 통찰력이 제자도에 포함되는 과정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약 2천년 전 예수의 가르침이 열두 제자들에게 쉽지 않은 도전을 주었듯이, 이것은 오늘날의 제자인 우리가 그분을 따를 때 치르게 될 진정한 대가와 상급을 바라보게 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하시며 제자들에게도 자신을 버리고 작은 자를 섬기라고 말씀하신다.
느끼기: 그리스도인의 길은 세상의 길과 다르며 어려움이 있지만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게 한다.
행하기: 어린아이처럼 말씀을 따르며 죄악을 제거하고 겸손히 타인을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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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예수께서 맹인을 두 번 만지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느끼게 합니까?(막 8:25)
*답: 진리를 단번에 밝게 깨닫지 못해도 계속 배우면 밝히 깨닫게 된다.
3. 생명을 버리는데 어떻게 생명을 얻게 됩니까? 이것은 세상을 얻고 영생을 잃는 것과 어떻게 다릅니까?(막 8:35)
*답: 아담 안에서 죽은 생명(목숨)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참 생명을 얻는 것이다.
4. 예수님의 변화산의 경험은 이후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막 9:9)
*답: 부활과 재림의 확신을 주었다.
5. 가장 작은 아이가 큰 자가 되고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막 9:37)
*답: 작은 아이는 의지하는 믿음이 있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
6. 예수님의 가르침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막 9:43)
*답: 유모어와 반어가 있다. 심각한 주제에 대한 이런 유머는 예수님이 과장된 비유로 요점을 선명하게 드러내시는 것이다.
결론: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심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 길은 세상의 생각과 다르고 분명하게 보기 위해서 시간이 걸린다. 하늘나라에서는 큰 자가 섬기는 자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 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는가가 중요한데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신다. 제자도의 길은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게 한다.
8월 11일(일) 분명하게 보기
마가복음 8:22~3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소경을 고치기 위해 두 번 만지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막8:22~30]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26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침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답: 진리를 깨닫는데는 단번에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은유적 교훈이다.
예수님은 많은 시각 장애인을 치료해 주셨다. 마가복음 8장의 이야기 외에 마가복음 10:46~52에는 맹인 바디매오를 치유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는 두 명의 맹인을 이야기하고(마 20:29~34), 요한복음 9장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을 예수께서 실로암에서 씻어 고치신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마가복음 8장의 이야기는 독특하다. 이것은 마가만 기록하고 있으며, 온전하게 회복하게 만들기 위해 예수께서 두 번 행동 하셔야 했던 유일한 기적이다. 그중에서 예수께서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인도하시는 세심한 장면은 감동적이며 그의 고통에 대한 예수님의 동정심이 느껴진다.
그런데 왜 두 번 만지셔야 했는가? 다른 모든 기적에서는 단번에 치유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영적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때때로 시간이 걸리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시는 비유일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마가복음 8:22~10:52은 맹인을 고치시는 것으로 시작하여 맹인의 치유로 끝난다. 이 부분에서 예수님은 특히 제자들에게 다가올 당신의 죽음에 대해 가르치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이야기 속의 맹인처럼 그들도 분명하게 보기 위해 두 번째 손길이 필요하다. 그의 경험은 예수님의 길을 밝히 볼 때까지 겪는 제자도의 경험에 대한 은유인 것이다.
훌륭한 선생은 질문만으로도 학생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마가복음 8장의 이 부분은 이 책의 전환점이다. 세 가지 특징이 이것을 보여준다. 첫째, 예수님은 이 시점 이전에는 하지 않으셨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제자들에게 질문하신다. 둘째, 귀신 들린 사람이 아닌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선언한다. 셋째, 예수님이 누구이신지가 드러난 직후에 그분은 당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계신지, 즉 십자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 마음을 꺾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메시아'라는 말은 로마의 통치를 전복한다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런 종류의 메시아가 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기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셨다.
<교훈> 그분의 능력이 부족해서 맹인을 두 번 만져서 고치신 것이 아니다. 이는 영적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때때로 시간이 걸림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비유이다.
<부가설명> 예수께사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기적들이 여러번 기록되었는데 요한 9장의 나면서 맹인된 사람 외에는 단번에 고쳐주셨다. 마가복음의 이 장면과 요한 9장의 이 사건은 특별한 영적 교훈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맹인이 처음에는 사물을 분명하게 보지 못했다. 다시 예수께서 손을 대셨을 때 비로소 사물을 분명하게 보았다. 우리도 성경을 배울 때 단번에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계속 배우면 마침내 밝히 깨닫게 된다. 또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는 것이 아주 희미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대답했으나 그가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기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예수님과 거의 3년을 함께 하고 배워도 아직 맹인이 처음 예수님의 손길을 겪고 사물을 희미하게 본 것 보다고 더 희미하게 예수님을 알았다. 그들이 욕망이라는 눈꺼풀이 씌어서 밝히 보지 못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께서 오셨을 때 비로소 밝히 깨달았다. 우리도 진리의 말씀을 밝히 깨닫지 못해서 낙담할 이유는 없다. 믿고 따르고 배우면 마침내 밝히 깨달을 것이다.
8월 12일(월) 제자도의 대가
마가복음 8:31~38절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시는가?
[막8:31~38]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3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답: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제 그들은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마가복음의 시작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막 1:1) 어려움이 없었지만 제자들은 때때로 우왕좌왕했다.
처음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막 1:17) 고난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이제 제자들이 그분이 누구신지 알게 되자 당신이 가셔야 하는 길을 공개하셨다. 그분은 많은 고난을 받고, 거절당하고, 죽임당한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충격적인 소식이다. 방금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 말에 대해 항의한다. 마가는 여기까지는 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식으로 기록했지만, 이제는 베드로가 들었을 때 분명히 뜨끔했을 그분의 말씀을 직접 전한다. 그분은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부르시며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으니 뒤로 물러나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말은 큰 고난을 앞두고 계신 예수께 도움과 위안이 되는 말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목적에 일치하지 않았으며, 예수께서 친히 모본을 보이심으로써 가르치러 오신 자기희생의 교훈과도 일치하지 않았다"(시대의 소망, 415).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과 동일한 목표 즉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도록 부름받았다. 십자가형은 로마 시대의 가장 잔인하고 굴욕적이며 위협적인 사형 집행 방법이었다. 모두가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했다. 그러니 과연 누가 예수님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싶어하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도의 대가뿐만 아니라 그 위대한 가치에 대해서도 설명하신다. 생명을 버리는 것이 바로 생명을 찾는 길이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역설이다. 반대로 온 세상을 얻었지만 영생을 잃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남미 선교 중 순교한 미국 침례교 선교사 짐 엘리엇(Jim Elliott)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사라져 버릴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
<교훈> 베드로의 고백 이후 그분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가야 하는 십자가의 길을 공개하셨다. 제자들은 당황하지만 그분은 하나님을 따르는 가치에 대해 설명하신다.
<부가설명>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으나 그가 기대하는 메시아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아는 전혀 달랐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기대하는 것과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자에게 기대하는 것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사탄의 정신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자문(自問)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지금 가진 목숨을 버리라는 뜻이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쉬운가?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사라져 버릴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라는 말은 새겨들을 말이다. 여기 목숨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푸쉬케’다. 많은 경우 ‘영혼’이라고 번역한 단어다. 신약성경에 영혼이라는 말이 37회 나오는데 간혹 ‘프뉴마’를 영혼으로 번역한 경우가 있지만, 거의가 ‘푸쉬케’를 번역한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다 ‘조에’라고 썼다. 물론 ‘조에’도 목숨을 나타낸 경우가 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의 말대로 참 생명(조에)을 얻기 위하여 아담에게서 받은 목숨(푸쉬케)는 죽고 주님만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을 진실로 깨달을 때 맹인이 분명히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8월 13일(화) 변화산 그리고 산 아래 사람들
마가복음 9:1~13을 읽어 보라. 그날 밤 예수님과 함께 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무엇을 보았는가?
[막9:1~13]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과 산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변형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루실 메시아 왕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보여주신 것이다.
마가복음 9:1에서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가 있으리라 예언하신다. 그 예언은 며칠 후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따로 높은 산으로 데려가셨을 때 성취된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변화되어 하늘 왕국의 영광을 입으셨다.
엘리야와 모세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다. 누가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셔야 할 죽음(Exodos, 떠남, 헬라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기록한다(눅 9:30, 31, 쉬운). 그렇게 이 영광의 광경은 다가오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연결된다(막 9:9). 이 장면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볼 때 소망을 줄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산을 내려오면서 세 제자는 예수님께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는 것에 대해 묻는다. 이 사상은 메시아에 앞서서 엘리야가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말 4:5, 6).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말씀하시며 엘리야가 이미 왔다고 대답하신다. 요한이 죽임당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들의 손에 죽으실 것이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었다.
영광의 밤이 지나고 맞이한 산 아래의 광경은 비참한 혼돈이었다(막 9:14~29). 남아 있던 아홉 제자에게 귀신 들린 아이를 데려왔지만, 그들은 고칠 수 없었다. 예수님이 그곳에 도착하자 온 무리가 예수님께 달려간다. 아이를 사로잡은 귀신의 힘이 어떤지에 대한 보고가 이어진다. 예수께서 귀신 들린 일을 자세히 묻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듯 하자 아이 아버지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불쑥 말한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
예수님은 그 말에 담긴 의심의 표현을 즉시 알아차리신다. 주님은 "‘할 수 있거든’ 이란 말은 무슨 뜻이냐"라고 말씀하신다(막 9:23). 불현듯 하늘에서 내리는 번개처럼 아버지는 아들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신앙에도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의 불신앙으로 아들이 치유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절박한 아버지는 자신을 예수님의 자비에 의탁하며 시대를 넘어 오늘도 메아리치는 간구를 남긴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 예수님은 소년을 고쳐주신다.
<교훈> 변화산의 그분의 모습은 이후 십자가의 때를 겪을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산 아래에는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믿음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다.
<부가설명> 베드로가 예수님이 자신이 죽으실 것을 말할 때 강하게 항의하고 꾸짖듯이 말했을 때 그것은 사탄의 생각이라고 나무라셨다. 우리는 때때로 예수님을 위한다는 것이 사탄의 일을 할 때가 많지 않았는지? 교회가 주님의 사업을 한다는 것이 사탄의 일을해서 예수님을 못 밖는 사업을 하지 않았는지 심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영의 눈을 더 밝혀서 진리를 바르게 깨닫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그럴 때 재림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이 장면을 예수님의 재림광경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편지서에 썼다(벧후1:16~18). 낙심한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눈을 치료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산 아래는 제자들이 사탄에게 조롱당하고 있었다. 그들도 아직 영안(靈眼)이 어두웠다. 그렇게 교육했어도 제자들이 반 장님이니 세상은 말할 것이 없다. 오늘날 재림교회가 반 장님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하신일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대로 깨닫기 위하여 자아가 죽어야 한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럴 때 진리를 깨닫는 마음의 눈이 밝아질 것이다.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경험을 우리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버지 도와주소서.
8월 14일(수) 누가 가장 크냐
마가복음 9:30~41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언은 마가복음 8:31과 무엇이 다른가? 또 제자들은 무엇에 대해 논쟁하였으며, 예수님은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
[막9:30~41]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8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답: 8: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첫 번째 예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고 죽일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두 번째 예언에서는 자신이 배신당할 것이라고만 하신다.”
첫 번째 예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고 죽일 자들에 대해 말씀하셨다. 두 번째 예언에서는 자신이 배신당할 것이라고만 하신다. 예언은 배신자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지만, 독자들은 그것이 유다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막 3:19). 주님은 죽임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다시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예언에 유의하지 않는 것 같다. 반갑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갈 일이 있겠는가.
마가복음 8:27에서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 갈릴리 바다 북쪽에 계셨고, 9:30에서는 갈릴리를 지나시며, 9:33에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신다. 따라서 그분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행하셨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열두 제자는 뒤처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홀로 들어가신다. 제자들이 도착하자 예수께서는 오는 길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으신다. 제자들은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들킨 아이들처럼 그 질문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들은 누가 가장 큰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주제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생각이 거꾸로 뒤집히게 된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두 단계로 설명하신다. 먼저,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자 한다면(가장 위대하려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행동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근처에 있던 한 아이를 무리 가운데 세우셨다. 아이에게는 떨리는 순간이었을 것이지만 예수님은 그 아이를 품에 안으시며 긴장을 풀어주신다. 그분은 이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당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내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장 비천한 아이가 위대한 하나님과 연결된다.
요한은 외인에 대해 질문하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적하지 않는 자들은 우리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가르치신다. 주님은 그리스도인 봉사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하늘에서 상급이 있을 것이라고 확언하신다.
<교훈> 모든 사람이 큰 자가 되고 싶어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생각이 뒤집힌다.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되고 싶으면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 세 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는데 9장의 기록은 두 번째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죽을 자들이 누군지 말씀하셨다. 두 번째는 암시로 배신자가 제자들 중에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세상적으로 군림하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군중이나 제자들에게는 이해가 될 수 없었다. 길가는 중에 제자들이 누가 크냐라고 논쟁한 것은 예수께서 곧 세상을 지배할 왕이 될 것이라는 헛된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왕이 되면 12 제자 중에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는 입씨름이었다. 교과 저자의 기록대로 제자들은 이런 논쟁이 선생님 귀에 들리지 않도록 하려고 뒤에 처져서 따라갔다. 늘 온유와 겸손과 섬김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이 들으면 반드시 꾸짖을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 귀에 자기들의 말이 들리지 않으면 모를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집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은 그 논쟁에 대하여 물으셨다. 다 듣고 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말씀하셨다. 오늘날 교회에도 세상 질서가 들어와서 지배하고 있다. 카톨릭의 교권주의는 개신교에 그대로 들어와 있다. 그것은 재림교회에도 행세한다. 부디 작은 자가 되고 섬기는 자가 되고 배우고 삶으로 증거하는 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8월 15일(목) 지옥에 떨어진 멀쩡한 사람
마가복음 9장 42~50절을 읽어 보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막9:42~50]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4 (없음) 45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6 (없음) 47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답: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 구절은 순서나 이유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것저것 한데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각각의 연속적인 가르침이 이전 가르침과 중심 단어를 공유하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본문은 "죄를 짓게 하는 것," "불," "소금"이라는 세 가지 주요 단어를 중심으로 단계별로 가르침을 전개하고 있다.
첫 번째 가르침은 새 신자를 가리키는 "작은 자"에 관한 것이다. 과부, 고아, 외국인 등 고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를 돌보았던 구약의 윤리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선생과 지도자는 새신자들을 특별히 잘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다. 예수님은 이 '작은 자' 중 하나가 죄를 짓게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고 과장법까지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이라는 중심 구절은 이 본문에서 가장 긴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독자들은 두 가지 난제에 직면한다. 첫째, 예수님은 정말 사람들에게 손이나 발을 자르거나 눈을 뽑으라고 가르치고 계신가? 둘째, 예수님은 영원히 불타는 지옥을 가르치고 계신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이다. 예수님은 유대교에서도 거부한 신체 절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신 14:1, 왕상 18:27, 28). 주님은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하신다. 손, 발, 눈을 잃는 것이 끔찍한 일이라면,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는 것은 얼마나 더 큰 재앙이겠는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도 ‘아니오’ 이다. 예수께서 영원히 불타는 지옥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이 구절에는 특정한 희극적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한쪽 눈이나 한쪽 발 또는 한쪽 손만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한편 지옥에 가는 사람들의 몸은 멀쩡한 것을 생각해 보라. 서로 반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온전한 사람이 지옥에 갔다는 것은 익살스러운 표현이다. 심각한 주제에 대한 이런 유머는 예수님이 과장된 비유로 요점을 선명하게 드러내시는 것이다. 죄를 짓는 것보다 손, 발, 눈을 잃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죄는 끔찍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옥이 영원하다는 말은 지옥의 불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영원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죄인은 영원히 불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멸망이 영원하다. 이것은 완전히 다르다.
<교훈> 예수님은 때때로 과장법을 사용하여 영원한 결과를 생각하고 작은 자를 실족게 하거나, 죄를 짓지 말 것을 강조하며 천국에 대해 생생하게 가르쳐 주셨다.
<부가설명>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격과 생활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배로운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 받는다(벧후1:1). 그 믿음은 지극히 거룩하다(유1:20). 이 믿음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보배롭고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그래서 이 믿음은 잘 지켜야 한다(딤후4:7). 이것이 보배롭기 때문에 빼앗으려는 존재가 있다. 거룩하기 때문에 더럽히려는 존재가 있다. 이런 자들에게서 믿음을 지켜야 한다. 예수께서 주신 믿음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이 믿음은 영원한 생명과 함께 주신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데, 믿음을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다. 요3:16은 참 중요한 진리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주의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해도 아무 문제 없는 문장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멸망하지 않고’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하고 믿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확실히 한 것이다. 멸망은 영생의 반대라는 말이다. 영혼 불멸 영원지옥은 영생해야 가능하다. 사탄은 엄청난 거짓을 너무나 당여하게 믿도록 거짓 믿음을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깊이 심어주었다. 세상은 그것을 굳게 지키고 있다. 그런데 성도는 예수님이 주신 믿음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고 황송하다.
8월 16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하여
시대의 소망 47장 "봉사," 48장 "누가 가장 크냐"를 읽어 보라.
"명예에 앞서 겸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침례 요한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꾼을 사람들 앞에서 높은 자리에 세우기 위하여 선택하신다. 가장 어린아이와 같은 제자가 하나님의 사업에서는 가장 능률적인 사람이다. 하늘의 천사들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고 영혼을 구원하고자 힘쓰는 자와 협력할 수 있다"(시대의 소망, 436).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받은 모든 것, 그것이 교육이거나 품위이거나 품성의 고상함이거나 그리스도인 훈련이거나 혹은 신앙의 경험이거나 간에 이 모든 것으로 우리보다 적게 받은 자들에게 빚지고 있다. 우리는 능력이 닿는 대로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여야 하며 우리가 강하다면 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 주어야 한다. 항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는 영광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작은 자들을 섬기는 것을 기뻐한다. 좋지 못한 품성의 특성 때문에 두려워하는 영혼들이야말로 천사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다. 천사들은 자아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하는 사람, 매우 절망적인 환경에 처한 사람, 즉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 곁에 언제나 함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은 이 사역에 협력할 것이다"(시대의 소망, 440).
함께하는 토의를 위하여
1. 마가복음 8:27~29을 다시 읽어 보라. 당신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가?
*답: 각각 대답해보자.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다. 잘못된 인식이니만.
2.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산 정상에서의 경험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는 산 아래의 경험 사이의 적절한 균형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답: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3. 위대함에 대한 세상이 보는 관점과 하나님이 보는 관점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관점의 차이에 따라 사람이 존중받기도 하고, 멸시받기도 하는 어떤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예를 들어보라. 이 차이는 세상의 기준이 실제로 얼마나 왜곡되고 뒤틀렸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답: 세상은 권력자들, 가진 자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점은 생명이 있어서 봉사할 수 있는 여부를 보신다. 봉사는 생명 없는자가 할 수 없다.
4. 예수님은 죄를 짓는 것보다 불구가 되는 것이 낫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는 자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답: 자신이 거듭나서 영생의 생명으로 생활할 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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