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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선지자의 기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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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폴쵸 작성일09-02-28 07:10 조회4,6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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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과 선지자의 기별
3월 7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1분)

도입)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쾌락을 찾는다. 왜 쾌락을 찾는가? 이 세상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마음에 없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뿐이기 때문에, 고전 15: 32절에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며 하나님을 또한 인간은 소망을 상실한다. 소망이 없으면 쾌락을 찾기 마련이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노나니’ 옛날에 한참 많이 부르던 노래이다. 사실 그렇다. 인간에게 이 세상뿐이면 그것은 아주 현명한 생각이다. 젊을 때 놀아야 지, 그러니까 쾌락을 찾는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는 영혼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육체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영적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육적으로도 병들고 말아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인류전체가 결국 하나님을 떠나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이런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인간의 죄된 상태를 알릴 선지자가 필요하고 죄로부터 구원과 희망의 기별을 가져올 선지자의 기별이 필요하다. 인간이 처하여 있는 죄의 위험과 영원한 멸망의 위험에 있음을 알려줄 선지자, 즉 이 땅에 희망의 기별을 가져올 기별자가 필요하다. 참된 선지자의 기별은 멸망의 기별이 아닌 구원의 기별이며 죄와 죽음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건져내시기 위한 희망의 기별이었다.

기억절: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5:)

연구범위: 출 20:1-17, 레 16장, 마 24:24-31, 롬 3:21-28, 히 8:1-2, 9:23.

학습 포인트: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왜 계명들을 지킬 필요가 있는가? 하늘 성소가 정결케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안식일 계명은 다른 계명들에 비해 어떤 면에서 특별한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며,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해 바르게 아는 것은 왜 중요한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광경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

안식일 오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리적인 틀은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작지만 헌신적인 모임을 통해 대부분 만들어졌다. 그들의 모임은 열렬한 성경 연구와 기도로 특징지어졌다. 재림운동이 있은 지 반세기가 훨씬 더 지난 1904년에도 엘렌 G. 화잇은 여전히 그 회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때때로 우리는 밤늦게까지 남아서 빛을 받기 위해 기도하였으며 말씀을 연구하였고, 때로는 밤을 꼬박 새울 때도 있었다”(가려 뽑은 기별, 1권, 206). 엘렌 화잇은 비록 교리를 체계화하는 일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그들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에 이상을 통하여 받은 해답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상은 믿음과 독창성과 열성적인 활동과 말씀 연구를 대신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 교회의 교리들은 오직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렌 G. 화잇의 글들이 어떤 가르침을 명확히 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교리들이 그 글들에 의존되어 있지는 않다.

일요일(3월 1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 3:21-28)

도입)
인간 모두에게 절대적인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이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죄짐을 걸머지고 허덕이고 있다. 그런데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 자신의 목을 조르며 짓누르고 있는 그 무거운 죄짐이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더 무거워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비극은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문제와 고통의 원인이 죄의 문제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토록 어리석은 존재이다. 자신에게 그토록 치명적인 죄의 심각성과 자신이 걸머진 그 무거운 죄짐을 어디에도 풀어 놓을 수 없는 불쌍한 존재임에도 자신의 문제와 원인을 전혀 모르고 있으면서 자기 팔을 벌려 허무한 안개를 잡아 자루 속에 넣으려고 허우적거리면서 죽어가는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고 가련한가? 인간은 죄로 인해 우리를 창조하신 만복의 근원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의식주인가?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의 문제다.

1.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숙명은 무엇이며,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처한 상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유일의 해결책은 무엇입니까?(왕상 8:46, 롬 3:21-28, 5:12)
답:
죄는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다. 애굽인들은 죽음이 인간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여, 미라를 만들고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 피라미드를 세웠다. 헬라 철학자들은 무지가 인간의 참된 행복의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여 교육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이다. 죄는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앗아간다. 현대 의학도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을 치료할 수 없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가기 시작한다. 유일의 치료제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뿐이다. “타락한 인간의 어떤 선행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은 아무리 열렬하게 강조하고 자주 되풀이하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아무리 각인시켜 주어도 지나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엘렌 G. 화잇, 믿음과 행함, 19)
헬라의 시인 호머(Homer)에 따르면, 메시나(Messina) 해협을 통과하는 배들은 스킬라(Scylla) 암석에 부딪치거나 반대쪽의 카리브디스(Charybdis) 소용돌이에 휘말릴 위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율법주의와 값싼 은혜 중 한 쪽에 치우칠 위험이 있다.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를 값싼 은혜로 이끌고 죄된 행위를 관용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반면 순종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삶을 말하는 것은 우리를 율법주의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동시에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애를 살 것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하신 자를 또한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그 믿음에는 선한 행위가 따른다. 비록 그 선한 행위 또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할 수는 없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우리를 위해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근거한다.

교훈: 우리는 율법주의와 무법주의 양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며, 참된 믿음에는 반드시 선한 행위가 따른다.

부가적용)
인생의 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외에는 해결할 길이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다른 문제가 풀릴 수 있다. 그 때 가서야 고난도 아픔도 오해도 죽음도 풀릴 수 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만이 우리들의 신앙을 구별하는 시금석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면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외형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실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것이 교회의 지체임을 판가름하는 시금석이다. 주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인류는 양분된다. 죽음이냐 삶이냐가 판가름 난다. 십자가를 자랑하느냐 아니면 외면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마귀의 종이 되느냐가 판가름 난다.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의해 선악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의해서 선악이 판가름 나는 것이다. 우리들을 구원하는 것은 부귀도 명예도 학식도 덕행도 종교행위도 십일조도 예배도 기적도 아니다. 교회의 중심은 십자가의 피며 믿음의 핵심도 십자가의 피다. 이것을 전하면 교회가 되고 이것을 전하지 않으면 교회 아니다. 십자가의 피도 전하고 다른 것도 전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생명은 오직 십자가의 피뿐이다. 십자가를 경험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게 되어있다.

월요일(3월 2일)
성소(히 9:1-8)

도입)
성소제도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의 놀라운 구속의 섭리가 있다.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 놓은 청사진이다. 성소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성소 제도는 인간들이 직접 그 의식에 참가하여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속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생생하게 보고 느끼도록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성소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은 우리들의 구원의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성소 제도 전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생애와 그 분의 사역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 가셔서 하실 봉사 사업까지를 상징하는 기구들과 예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소를 통하여 당신의 구원을 인간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도록 계획하심으로써, 인류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1. 구약 성소에서 어떤 봉사들이 행해졌으며, 그것들은 구원의 계획을 어떻게 예증해 주었습니까?(히 9:1-8)
답:
하나님께서는 죄인으로 하여금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소 봉사를 통해 시각적인 교훈을 베풀어 주셨다. 자백, 희생, 용서, 믿음, 화목, 성결 등 이 모든 것들이 지상 성소에서의 매일의 봉사와 매년의 봉사를 통해 생생하게 설명되었다.

2. 히브리서 8:1-2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봉사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왜 히브리서 9:23은 하늘 성소가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까?
답:
구약에서 죄인은 약속된 후손(창 3:15)의 속죄하는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용서를 받았는데, 그 약속된 후손은 성소 봉사의 동물 희생을 통해 예시되었다. 지상 성소의 봉사에서, 한 해가 마쳐질 때에 성소가 정결케 되는 속죄일 즉 심판의 날이 있었던 것처럼 하늘 성소의 봉사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심판의 날이 있다.
재림 전 심판은 그리스도를 따르노라고 고백한 자들이 참으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인지를 우주 앞에 드러낸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책들을 온 우주 앞에 펴실 때에 각 사람의 심판에 대하여 그분의 판결이 공정하고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심판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위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옹호해 준다(롬 3:4).

교훈: 지상 성소와 그 봉사는 우주에서 죄를 제하시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즉 하늘 성소의 정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실물교훈이었다.

부가적용)
성소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세 단계의 사역을 통하여서 이루신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위해 대속하신 지상봉사의 장면과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성소 뜰에서, 첫째 칸인 성소에서 죄인을 위해 중보하시는 중보의 사역과 마침내 심판을 통해 죄의 문제를 완결하시는 지성소에서의 죄인들을 위하여 속죄 사업을 마치시는 것으로 표상 되어 있다. 성막에는 두 개의 휘장이 있다. 하나는 성막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역할을 하는 외부의 휘장이며, 또 하나는 성소와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지성소 사이를 구별하는 내부의 휘장이다. 이렇듯 성막은 휘장에 의해 안 뜰과 성소 그리고 지성소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므로 성막의 기본적 의미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성막은 그러한 거룩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의 문이기도 하다. 성소의 휘장은 죄인으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리는 것이었다. 지성소는 이스라엘의 대표자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하여 나아가는 곳이었다. 따라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은 죄악을 사함 받으러 들어가는 문이요,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휘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거룩한 곳을 모든 사람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성소의 휘장이었으며 그의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직접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다(요 10:7-9). 그 문을 젖히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며 그분과의 아름다운 교제에 접하게 된다. 지성소의 휘장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최종적인 관문이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곳이며 피조물인 인간과 만나는 장소이다. 지성소의 휘장은 피난처로 들어가는 길이다. 휘장을 걷어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보호아래 거하게 하시고 거친 세상 풍파 속에서도 보호 받으며 평안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시 27:5; 31:20). 또한 휘장은 거룩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휘장은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곳과 인간이 거하는 곳,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구분하였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휘장을 제치고 지성소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에 동참한다는 뜻이며 그리스도의 문을 통과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제거해야 하며 그 안에 거할 때에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성별되고 거룩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 성소와 안 뜰,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었던 휘장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휘장은 그리스도의 육체가 찢어짐과 동시에 모든 성도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생명의 길로 바뀌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그에게로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되며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약속하신 길이다.

화요일(3월 3일)
안식일(출 20:1-17)

도입)
레 19:2-3에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닮는 방식으로 제시되어있다: "...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 따라서, 안식일 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안식일 계명은 인간을 율법의 노예로 만들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 인간이 하나님을 닮게 봉사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즉 안식일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 인간에게 주어진 제도는 안식일과 결혼 제도뿐이었다. 그래서 이 두 제도는 낙원의 쌍둥이 자매라 불리기도 한다. 오늘날 세상을 바라볼 때 사단이 얼마나 이 제도들을 훼손시키고 더럽히려고 부지런히 일해 왔는지를 분명히 보게 된다.

1. 출애굽기 20:1-17은 다른 계명들에 비해 안식일 계명이 어떤 면에서 특별하다고 말해 줍니까?
답:
넷째 계명은 어떤 의미에서 시금석과 같은 계명이다. 이 계명은 인간의 영적 상태를 시험한다. 이 계명은 만질 수 없고 보이지도 않는 시간을 다루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를 측정하기에 아주 적합하다. 우리가 안식일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나타낸다. 이 계명은 사람이 그것을 어기고도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는 유일한 계명이다.
어떤 의미에서 안식일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일곱째 날은 왜 다른 날보다 귀한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도둑질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며, 탐내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한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비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한다.
그러나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어떤 자연 현상에 근거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믿음의 행동이다. 우리가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 아니고, 인기가 있기 때문도 아니며, 어떤 자연의 주기와 맞아떨어지기 때문도 아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고, 우리는 그분의 계명들에 순종함으로 믿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약 2:10-11, 요일 5:2-3, 계 14:12).
우리는 안식일에 쉼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쉼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쉼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이다(참조 히 4:1-11)..

교훈: 안식일 준수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열쇠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쉼을 밖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부가적용)
성경에서 복이란 개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한다. 복이란 물질적인 것이기 보다 하나님 자체가 복이시다. 그분이 복의 근원이시다. 따라서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안식일에는 일상적인 모든 활동을 떠나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위한 안식일은 있었으나 사람을 위한 안식일은 없었다. 의식과 형식에 매어 있는 안식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저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안식이 없었고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일 생각"(암 8:5)만을 하고 있었다. 이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안식일도 하나님을 위한 안식일도 아니다. 안식일을 위한 안식일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을 위한 안식일이 아니라 또한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안식일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관계의 날이요 그분 안에서 참된 쉼을 경험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수요일(3월 4일)
죽은 자의 상태(시 146:4)

도입)
‘죽은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존재의 소멸’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 한다. 그래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신(神)을 믿고 숭배하는 사람들을 향해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힐난하며, 저주하고, 미워하기까지 한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사전적 ‘죽음’의 정의는 살기위한 활동이 정지되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생물의 상태 즉 죽음이란 그 개체를 구성하는 전조직(全組織) 세포의 생활기능의 정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부적인 한 부분의 생활기능의 정지만으로는 죽음이라고 할 수 없다. 의학적으로, 특히 임상적 죽음은 심장의 박동과 호흡이 영구적으로 멈추었다는 확증이 있을 때를 말한다. 사람의 죽음을 판정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이 상태가 가장 모순이 적은 죽음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최근 의학의 발달에 따라 뇌의 기능이 회복될 전망이 아주 없는 환자를 기계적으로 유지·관리할 수 있는 경우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뇌사(腦死)>라는 새로운 죽음의 판정기준도 생겼다. 고등동물에서는 번식 능력을 잃어도 신경기능이나 기타 장기활동이 정지되지 않으면 그 개체는 살아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식물의 죽음’은 ‘죽은 자’라 하지 않는다. 혼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적 ‘식물의 죽음’은 ‘뿌리로부터 마른 상태’를 말한다. (식물은 가지나 잎이 말랐다고 죽은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루터기’(뿌리)가 살아 있으면 다시 자라고, 가지를 내고, 잎을 내며 열매를 맺는다. 잔디나 나무도 그렇다.) 그러나 죽은 자와 잠자는 자는 다르다. ‘죽은 자’의 ‘부활’은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이어야만 한다.

1. 다음 구절들은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시 146:4, 전 9:5-6, 요 11:11-14, 행 2:34)
답:
영감의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불멸하시며(딤전 6:16),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음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잠으로 가르치셨고 두 가지 부활 즉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요 5:28-29) 중 어느 하나로 귀결된다고 하셨다. 캔터베리의 감독인 템플(William Temple)은 이 사실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사람은 선천적으로 불멸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신 조건을 따름으로 영생을 받을 수 있고, 그분이 주시는 부활을 통해 불멸에 이를 수 있다.”(자연, 사람, 그리고 하나님, 1934년, 472)

2. 다음 구절들은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고 가르칩니까?(마 25:46, 계 14:9-11)
답:
인간의 불멸에 관한 개념은 모든 원시종교와 정령숭배와 다신교에서 발견된다. 그 개념은 또한 헬라 철학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어둑한 지하 세계인 하데스(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죄인은 생과 사의 중간 상태로 살아간다고 가르친다. 헬라인들은 인간이 영과 육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으며, 죽을 때에 영과 육이 분리되어 영은 육의 감옥에서 풀려나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과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영원히’ 또는 ‘세세토록’으로 번역된 말은 반드시 끝이 없는 시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헬라어의 아이온(aion)이나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그 물질의 본질이 허락하는 한의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유다서 1:7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영원한(아이오니오스) 불의 형벌을 받고 있다고 했으나, 베드로후서 2:6에는 이 도시들이 재가 되었다고 하였다. ‘영원히’ 또는 ‘세세토록’이라는 말이 불멸의 삶을 얻은 구속받은 자들의 생명을 언급할 때에는 끝없는 시간을 의미하지만, 그 말이 불멸의 삶을 얻지 못한 악인의 형벌을 언급할 때에는 제한된 시간을 뜻한다.

교훈: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진리는 사단에 의해 심하게 왜곡되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대로 죽음은 잠이며, 그 후에는 두 부활 중 하나에 참여하게 된다.

부가적용)
‘죽은 자’는 존재하지 않으니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하며, 복(福)과 화(禍)도 모르고, 즐거움이나 슬픔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한다. 또한 ‘잠자는 자’도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고, 꿈도 꾸지 못하며 ----’그러나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는 신령한 몸으로 깨어나서 ‘크고 많은 것으로 보상을 받으며, 즐거움에 참여’할게 될 것이다. 구약에서도 그림자 적으로 ‘잠자는 자’와 <부활>을 나태내고 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라 하셨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아 있을 때의 하나님이지 이들이 죽고 난 후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즉 ‘죽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죽은 이삭의 하나님, 죽은 야곱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성경은 ‘영이 없는 자’를 ‘죽은 자’라 하고, ‘영이 있는 자’를 ‘산 자’(살아있는 자)라 한다. ‘영이 있는 자’의 하나님, ‘산 자’의 하나님, ‘잠자는 자’의 하나님. <부활>을 하려면 살아 있어야한다. ‘잠자는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니 ‘깨우면 된다.’ ‘ 살아 있는 자’(산 자)가 되고자 하면 “성령을 받으라” 그러면 죽고 나서도 ‘잠자는 자’가 된다. 부활이 그의 삶에서 기다리게 된다.

목요일(3월 5일)
재림(마 24:5, 24-31)

도입)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마 24:30, 눅 21:27, 창 49:9-11,18,23,24, 민 23:23,24; 24:9,17,20-24, 신 32:33, 판 5장, 시 110,128,129장, 유 14, 사 26,27장, 단 7:13-15, 합 3장, 말 4장, 계 14:14, 스카랴서 1,14장 등). 그래서 성경은 이 주제를 여러 번에 걸쳐 분명하게 다루고 있다. 구약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재림에 맞춰진 구약의 예언들을 초림에 맞춰 사사로이 해석함으로써 엄청난 혼란을 야기 시키기도 했다. 신약에서도 평균적으로 열 구절 중 하나는 재림을 언급한다 (고전 11:26, 마 24장, 막 13장, 눅 17장, 살전 4장, 살후 1장, 요 14장 등).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주의 재림을 떠나서는 구원의 미래 적인 면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완성 없이는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의 진정한 의의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신구약 성경은 그리스도의 초림이 있은 후 재림이 있을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신약은 재림에 관해 318회나 언급하고 있으며, 재림의 약속과 기도로 끝나고 있다.(계22:20)

1970년대 초반에 핼 린지(Hal Lindsey)의 책, 대 유성 지구의 종말은 1500만 부 이상이나 팔렸다. 최근에 팀 라하예(Tim LaHaye)와 제리 젠킨스(Jerry B. Jenkins)가 쓴 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 역시 수백만 부나 팔렸다.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 교회 이름 가운데 나오는 재림교인(Adventist)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일 정도로 확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레프트 비하인드나 핼 린지가 주장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1.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모습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며,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왜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예수께서는 당신께서 오시는 광경에 관한 어떤 기만이 있을 것을 미리 경고하셨습니까?(마 24:5, 24-31, 계 1:7)
답:
19세기에 존 다비(John N. Darby)가 처음 소개한, 그리스도의 오심에 두 단계가 있다는 개념은 오늘날 많은 개신교인들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다. 가정적인 첫 번째 단계는 비밀 휴거인데, 이때에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끌려올라가며, 두 번째 단계는 7년 후에 그리스도께서 1,000년 동안 다스리시기 위해 강림하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휴거와 강림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신약에 의하면 예수님의 오심은 분할될 수 없는 단 한 번의 문자적인 사건으로서, 보고 들을 수 있게 일어날 것을 말해 준다(살전 4:16-17, 계 19:11-21).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오심에 관한 거짓된 주장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기만이 만연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마 24:24), 그분의 오시는 광경에 대하여 그처럼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교훈: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단 한 번의 실제적인 사건으로서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게 이루어질 것이다.

부가적용)
계시를 받은 요한은 주님이 오시는 모습과 그가 오셨을 때 그를 맞이하는 인류들의 모습을 심각하게 나타내고 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볼지어다'란 말은 '그때 볼 수 있을 것이다'란 뜻이다. 이 땅의 모든 인류들은 주의 재림에 관심이 있건 없건 그가 오시는 그 날,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에서 “각인의 눈”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 즉 “빠짐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인간의 눈이 다 그를 보겠다는 말이다.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며 이 말은 예수님을 불신앙하고 그에게 폭행을 가한 그런 자들도 볼 것이라는 말이다.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여기에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라는 이 말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불신앙 하는 모든 백성들, 즉 “오기는 뭐가 와” 이렇게 재림을 믿지 아니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임하시는 것을 인하여 애곡하리라는 것이다. 여기 “애곡한다.”는 표현은 무슨 말인가 하면 “목 놓아서 우는 것” 사람이 죽을 때 우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과 불신앙 하는 자기 가족들에게 영원한 죽음을 애도하는 그런 표현이 여기에 나와 있다.

금요일(3월 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각 시대의 대쟁투, 제34장 ‘죽은 사람들이 우리와 교통할 수 있는가?’(551-562), 제40장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635-652).

우리 교회의 초창기 선구자들은 율법에 관한 그들의 설교에 있어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1890년에 엘렌 화잇은 기록하기를, “우리는 한 백성으로서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는 길보아 산처럼 건조하게 율법을 설교해 왔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설교해야 한다”(리뷰 앤드 헤럴드, 1890년 3월 11일자)고 했다. 1888년 미네아폴리스 대총회 기간에 와그너(E. J. Waggoner)와 존스(A. T. Jones)가 바로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기별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의를 얻을 수 있는 유일의 방법은 오직 세상 죄를 속량하기 위해 갈바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을 통해서라는 진리를 확증하였다. 그리스도의 흠 없는 의의 두루마기를 입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 두루마기는 금이나 은으로 살 수 없고, 선행으로도 획득할 수 없다. 이 기별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우리 모두의 삶과 설교의 중심에 두라는 호소였다. 그것은 단순한 이론이기보다는 참된 개인적 경험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었다.”(A. V. 올슨, 위기를 통하여 승리까지: 1888-1901, 리뷰 앤드 헤럴드, 1966년, 35)
와그너 또한 인간의 순종이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의 입혀주시는 의(義)만이 하나님께 가납되는 기초가 되며, 단지 우리는 과거의 죄뿐 아니라 모든 것을 덮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했다. 엘렌 G. 화잇은 와그너를 강력히 지지하였다. 그녀는 그의 설교를 “지극히 소중한 기별”이라고 불렀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9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재림교회의 교리들 중에 성경이 아닌 엘렌 G. 화잇의 글에서 온 것이 있습니까? 비록 우리가 예언의 은사를 믿는다 할지라도, 왜 우리의 모든 신조가 성경, 오직 성경에서만 비롯되어야 합니까?

2.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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