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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엘리후의 분노(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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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11-25 16:34 조회8,7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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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일 안식일

일몰 : 오후 5시 14분

 

기억절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9).

 

연구 범위 : 욥 13:28, 욥 28:28, 욥 32:1~5, 욥 34:10~15, 겔 28:12~17, 욥 1장~2:10

 

욥과 세 친구는 때로 아름답고 심오하며 진실한 언어로 공방을 벌였다. 사람들은 자주 욥기를 인용하는데 심지어 엘리바스, 빌닷, 소발의 말까지 인용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에서도 언급할 수 있는 좋은 교훈들이 많기 때문이다. 단지 그들의 말이 시의적절하지 않았다는 단점이 있었을 뿐이다. 잠언 25:11~13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친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불행히도 욥이 친구들에게 들은 말은 이와 같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욥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세 친구 말고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희망적으로 시작했다가 절망적으로 마친 엘리후의 발언을 분석한다.

➋ 느끼기 : 불행의 본질적이고 설명 불가능한 속성을 이해한다.

➌ 행하기 : 다른 사람과 삶의 문제로 대화할 때에 겸손한 태도를 취하기로 결심한다.

 

A. 

❷ 욥과 욥의 친구들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계속 논쟁을 벌었습니까?

※ 욥은 죄를 지었고 하나님은 그의 죄에 벌하신다는 주제, 즉 인과응보 신상필벌의 논쟁이다.

❸ 마지막으로 논쟁에 뛰어든 엘리후의 주장은 문제의 해결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습니까?

※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른 세 친구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말을 반복했다. 

❹ 우리가 신앙적인 문제로 토론할 때에 더욱 겸손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우리는 신앙과 그 대상인 성경의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B.

❶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어떤 한계가 있을까요?

※ 자기주장이 옳은지 틀렸는지 증명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❷ 하나님을 방어하려던 엘리후에게 어떤 결정적인 잘못이 있었습니까?

※ 그가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이 그가 말하는 그대로의 하나님인지 확인할 수 없다.

❸ 하나님에 대하여 논쟁할 때 우리는 왜 그분이 아닌 우리의 주장을 방어하게 될까요?

※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옹호하려는 생각 때문에 결국 자기 생각을 방어하게 된다. 자기가 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인 것인 양 착각의 세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❹ 만약 토론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고 겸손하게 믿음으로 굴복하는 것이다. 

 

결론 : 엘리후가 등장하자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듯했습니다. 젊고 혈기왕성한 그는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겸손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그의 말 역시 다른 친구들의 말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행의 이유는 완전하게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겸손한 믿음만이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첫째 날(일) 11월 27일 가엾은 위로자들

 

욥의 놀라운 신앙고백(욥 13:15~16) 후에도 언어 공방은 계속되었다. 여러 장에 걸쳐 그들은 하나님, 죄, 죽음, 공의, 악인들, 지혜, 순간적인 삶의 본질에 대한 심오하고 중요한 문제들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다.

 

1. 다음의 성경절에는 어떤 진리들이 표현되었는가?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욥 13:28).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하늘이라도 그가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을 용납하시겠느냐”(욥 15:14~16).

“내 구속자가 살아 계시고 그분이 결국에는 이 땅 위에 서실 것을 나는 알고 있다네. 내 살갗이 다 썩은 뒤에라도 내가 육신을 입고서 하나님을 뵐 걸세.…”(욥 19:25~27, 우리말성경).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욥 28:28).

 

답: 현재 인간의 상태를 나타내고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욥기의 매 장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쟁이 계속된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각자의 방식과 전략을 가지고 인간은 심은 대로 거두며 욥도 자신의 죄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논리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반면 욥은 계속 자신이 부당한 고통을 당한다고 확신하며 그에게 임한 잔인한 운명을 한탄하였다. 주고받는 논쟁 속에서 이 위로자들은 공허하고 헛된 말로 욥을 비난하였고, 욥도 그들에게 그렇게 하였다.

하지만 욥을 포함하여 그들 중 아무도 모든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관점에서 말할 뿐이었다. 우리가 욥기에서 배워야 하는 교훈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행위에 대해 말할 때에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 또는 많은 진리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반드시 우리가 진리를 적용하는 최선의 방법을 아는 것은 아니다. 욥기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부가설명> 욥은 진정한 실상을 다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처지에서 인간의 실상을 고백했다.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욥 13:28).라는 말씀이다. 성경은 아담의 후손들을 썩어질 씨로 태어난 존재라고 계시하였다.(벧전1:23)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엡4:22)의 삶이다. 욥기 전체에 나타난 욥의 말을 들어보면 이런 이치를 바르게 깨달은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의 처지에서 인간의 실상에 대한 고백을 올바르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의 삶은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고 좀먹은 옷 같다. 존재 자체가 사망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유전병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병든 사람을 ‘환자’라고 하는 것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성경은 ‘죄인’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2:17) 이 말씀은 의인을 건강한 자로 죄인을 병든 자로 대비하여 가르친다. 갓태어난 어린아이도 죽음에 이르는 병을 유전으로 받아 태어난다. 그래서 죄인이다.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듣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고 하셨다.(요11:4)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는데(고전15:22)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죽음에 이르는 병자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그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영생의 생명의 건강으로 회복되고 하나님과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욥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될 것이다. 

 

교훈 : 욥과 그의 친구들은 부분적인 진실을 가지고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하다.

 

 

둘째 날(월) 11월 28일 엘리후의 등장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욥 32:2~3).

 

비극적인 주인공 욥은 욥기 26~31장에서 세 친구에게 마지막 연설을 한다. 그는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동안 유지해왔던 논조를 반복한다. 즉, ‘나는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당할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다.’

욥은 부당한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대표한다. 문제는 ‘왜인가?’이다. 고통의 원인을 찾는 것이 쉬울 때도 있다. 사람들은 때로 고통을 자초한다. 그러나 욥의 경우처럼 그렇지 않은 때도 너무 많다. 그래서 고통의 문제는 여전히 미결 상태로 남아있다.

욥 31장의 끝에 이를 때까지 욥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야기한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31장의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욥의 말이 그치니라”(욥 31:40).

 

1. 욥 32:1~5을 읽어 보라. 무슨 일이 있었는가?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들에게 어떤 잘못을 지적했는가?

[욥32:1~5]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의 대답이 그치매 2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노를 발하니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가 그들의 나이 자기보다 많으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노를 발하니라.

 

답: 그가 욥에게 노를 발함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또 세 친구에게 노를 발함은 그들이 능히 대답지는 못하여도 욥을 정죄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서 엘리후라는 인물이 처음으로 언급된다. 그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아마 나중에 도착한 것 같다. 왜냐하면 세 친구가 처음에 도착했을 때에 그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그 긴 논쟁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양쪽의 주장 어디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욥 32:1~5을 보면 그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분노했다는 표현이 다섯 번이나 나타난다. 이후 여섯 장 동안 엘리후는 욥에게 닥친 재앙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마주했던 문제들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설명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부가설명> 엘리후는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고 그의 아버지 바라겔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뜻이다. 그 가정이 대대로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충실히 경배하는 가정인 것을 짐작하게 한다.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의 말과 욥의 말을 다 듣고 그들의 말들이 사리에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후도 욥의 세 친구들처럼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옹호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욥을 훈계하려고 대들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폄하하거나 불경스럽게 할 때에 변호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갸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변호하는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신이 변호하는 그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묘를 다 모른다. 성경에 계시된 말씀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전4:6) 오직 말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엘리후도 욥이 하나님이 자기를 바르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것을 책망하고 하나님을 변호하지만 전부 올바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변호와 옹호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외쳐도 정말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시는지 올바르게 알고 말한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계시하였는데. 엘리후나 욥의 다른 세 친구나 동일하게 자신들이 믿는 그 하나님을 자신들이 이해한 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일부분은 성경적으로 옳고 또 다른 부분은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말할 때에 항상 겸손하게 조심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이 끝나자 그들의 불완전한 설명에 실망한 엘리후가 자신의 논리를 펼치기 시작했지만 그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셋째 날(화) 11월 29일 엘리후가 하나님을 방어함

 

그동안 엘리후와 그의 연설에 대해서 수많은 주석들이 기록되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엘리후의 연설이 대화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엘리후가 정말 대화의 질을 바꿀 만큼 새롭거나 획기적인 사상을 덧붙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고통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욥에게 맞서 하나님의 성품을 변호하려고 했던 세 친구들과 거의 비슷한 논증을 제시하였다.

 

1. 욥 34:10~15을 읽어 보라. 여기서 엘리후가 설명한 진리들은 무엇인가? 그 진리들은 이전의 세 친구가 했던 말과 어떻게 비슷한가? 그의 말이 표면적으로는 맞지만, 현 상황에 적합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욥34:10~15] 그러므로 너희 총명한 자들아 내 말을 들으라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11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나니 12 진실로 하나님은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시느니라 13 누가 땅을 그에게 맡겼느냐 누가 온 세계를 정하였느냐 14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15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

 

답: 엘리후도 인과응보적인 사상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른 친구들 말과 같다. 세 친구가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지 않은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가 이전의 세 친구에게서 보았던 것처럼 엘리후에게서도 엿볼 수 있는 정서는 불안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함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와 능력을 믿기 원했다. 그래서 엘리후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와 능력에 관한 진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행악자는 숨을 만한 흑암이나 사망의 그늘이 없느니라”(욥 34:21~22).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 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욥 36:5~7).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욥 37:23~24).

위의 말들이 모두 진실이라면, 우리가 내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논리적인 결론은 욥이 심은 대로 거두었다는 것이다. 다른 결론은 있을 수 없다. 엘리후는 욥처럼 선한 사람에게 임한 불행을 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방어하려고 했다.

 

<부가설명> 위의 말들이 일부는 진실이다. 그러나 진리는 아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으로 오해할만한 성경구절들이 있다. 그러나 근거를 알면 지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측면에서 그런 말씀을 한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면 복을 주시고 잘못하면 벌을 주시는 그런 관점으로 행한 대로 갚는다고 하지 않았다. 가장 쉬운 예로 왕자가 되기 위하여 왕자의 풍도를 노력으로 이룬다고 왕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왕자가 되는 방법은 간단하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야 한다. 또 왕의 양자가 되는 길도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왕이 행하는 일이지 왕자가 된 아들이 행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왕자가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롭게 살면 복을 받고 불의하게 살면 재앙을 받는 다는 생각의 저변(底邊)에 깔려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원사업으로 그분을 믿을 때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왕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활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활하지 않으면 징계하신다. 그 징계가 때로 고난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징계이다. 징계를 거절할 때 왕자의 신분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형벌이 아니다. 스스로 왕자의 자리를 버린 것일 뿐이다. 사단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는 것과 하나님의 징계는 본질이 다르다. 오해와 착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엘리후도 다른 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신의 주장과 다른 분이 아니기를 바라며 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옹호했다.

 

 

넷째 날(수) 11월 30일 불의의 비합리성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겔 28:15).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공의를 신뢰하는 이 네 친구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맞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욥의 상황을 설명하려다가 난관에 봉착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불행, 적어도 욥에게 임한 불행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잘못된 입장을 취했다.

엘렌 G. 화잇은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죄악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죄는 하나의 무단 침입자이다. 그것이 나타나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죄는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만일 죄의 원인과 그 존재 이유를 밝힐 수 있으면 죄는 죄가 될 수 없다”(각 시대의 대쟁투, 492~493).

그녀는 ‘죄’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그 말을 비슷한 의미의 ‘불의’로 대체한다고 가정해 보자. ‘불의의 시작은 그 존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다.… 불의는 하나의 무단 침입자이다. 그것이 나타나게 된 데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불의는 오묘한 것이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다. 만일 불의의 원인과 그 존재 이유를 밝힐 수 있으면 불의는 불의가 될 수 없다.’

종종 비극이 닥치면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또는 ‘영문을 모르겠다.’라고 생각한다. 이는 정확히 욥이 계속 불평하는 내용과 같다.

욥과 친구들이 불의를 납득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불의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거나 납득이 되거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에 적합하다면 그것은 불의일 수도 비극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목적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완전한 하나님께서 완전한 환경 가운데서 창조하신 완전한 피조물이 있다. 그는 존귀하고 지혜가 충족하였으며, 완전한 아름다움과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하나님의 성산에 머물렀던 기름부음 받은 그룹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특권을 부여받았음에도 그는 스스로 타락하여 불의가 자라도록 허용했다. 마귀를 오염시킨 불의만큼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부가설명>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은 이 세상 곳곳에 일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도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유는 이 세상은 사망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루시퍼의 사상에 왜 자기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생각을 했는지는 오묘한 일이지만 루시퍼로 인해 세상에 죄와 사망이 들어온 원인과 경로는 알고 있다. 일단 세상에 죄가 들어오자 세상은 사망의 세상이 되었고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영생의 생명을 잃었고 그렇게 되자마자 사람은 썩어지는 존재가 되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이”(욥13:28) 되어버렸다. 결과로 세상에는 재난과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재앙이 닥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죄가 왕 노릇하는 세상에(롬5:21) 죄의 하수인들이 일으키는 재난들이다. 의인이나 죄인이나 죄의 왕인 루시퍼가 자신의 입지를 튼튼하게 하는 일이라면 뭣이든지 한다. 배후를 모르고 세상이 이미 죄가 왕 노릇하는 세상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성경을 읽고 깨달은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사망의 세상의 일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란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사망이 닥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호흡이 있을 때 아직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의식이 있을 때 예수 안에 굳게 서야 한다. 확실한 믿음으로 이 세상이 끝나고 생명만이 충만한 세상이 올 때를 기다리면서 호흡하는 순간마다 신실한 믿음으로 생활해야 한다.

 

교훈 : 욥의 불행을 설명하려는 친구들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불의 또는 불행의 시초는 죄의 기원만큼 설명할 수 없는 오묘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섯째 날(목) 12월 1일 믿음의 도전

 

욥기의 주요 인물들은 진실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밖에 볼 수 없는 연약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은 제한적인 관점, 물리적인 세계의 본질에 대한 매우 제한적인 이해력, 게다가 매우 영적이지 못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들 중 아무도 욥에게 임한 불행에 대해 논쟁하면서 그 불행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마귀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확신했다. 엘리후는 특히 더 그랬다. 그러나 욥의 고통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그들의 노력에는 모두 부족함이 있었다. 욥도 그들의 시도가 실패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 우리가 욥기의 우주적인 배경을 안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욥에게 임한 불행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는가? 욥 1장~2:10을 읽어 보라. 이 모든 사실이 우리에게 계시되었을지라도 또 어떤 의문이 남게 되는가?

[욥1:1~2:10] 독자들이 성경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답: 왜 하필 욥인가? 욥이 의인이기 때문인가? 의인이기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런 의문들이 있을 수 있다. 사단이 욥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욥기의 서두에서 우리는 그들이 보지 못했던 실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남아있다. 알다시피 그에게 고통을 가져온 것은 그의 죄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를 가리켜 마귀의 관심을 끌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욥의 의로움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로움과 하나님께 신실하고자 하는 열망이 이런 일을 일어나게 한다는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만약 욥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았더라면 ‘하나님, 다른 사람을 찾으소서. 제 아이들과 건강과 재산은 돌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실험 대상이 되겠다고 자원하지 않았다. 누가 그러고 싶겠는가? 그렇다면 욥과 그의 가족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이 과연 공정한가? 물론 하나님은 마귀의 도전을 금방 물리치셨지만 마귀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계 12:12 참고).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궁극적인 유익이 무엇이든지, 그 모든 죽음과 욥이 겪은 고통은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도 이런 의문이 남는다면 욥에게는 얼마나 많은 의문들이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가 욥기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이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욥처럼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때에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실하게 그분 곁에 머물러야 한다. 만약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욥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순종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에서 믿는다는 것은 어떤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다 알지 못하지만 성경에 계시하셨고 예언하시고 그것이 역사에서 성취되었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며 봉사하시는 일을 믿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성경은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잠25:2)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다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빌닷의 말대로 하나님의 오묘를 우리가 다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믿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하여서도 성경은 “그 눈이 불 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계19:12) 다 알면 믿으라고 하기보다는 확실히 알았느냐고 물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 삼위일명에 대하여 다 아는 것이 없다. 그래서 믿는다. 그 믿음은 예수님 재림하실 때 확실한 결과를 목도할 것이다. 받을 것이다. 욥은 부활을 소망하면서 다 모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성경이 그럴 것이라고 분명히 계시하였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요16:33)고 하셨다. 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고 하셨다. 이 외에도 이런 말씀들은 성경에 많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15:18~20) 욥이 하나님께 신실했기 때문에 사단의 표적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신실하면 핍박을 받는다. 육체적 고난이 없을지라도 생활적으로 정신적으로 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용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다. 스스로 속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적으로 복을 받는다는 속임수에 속지 말기 바란다. 마귀는 자기에게 절하는 자에게 세상 영광을 주겠다고 제안하지 않았는가? 그는 아직도 세상 임금이다. 

 

교훈 : 욥기에 아무리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보이는 현실이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배운다.

 

 

여섯째 날(금) 12월 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존 헤들리 브루크는 신앙과 이성에 대한 문제로 논의하면서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대해 언급했다. 칸트는 특별히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 인간의 지적 한계를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칸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사용하시는 방법을 정당화시키는 문제는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관한 문제이다. 칸트는 역경에 대응하는 바람직한 태도의 예로 욥을 선택했다. 그는 깨끗한 양심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겼다. 그는 하나님의 선언에 순복하기까지 그의 불행을 합리화하려는 친구들의 충고를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 욥이 펼치는 주장의 장점은 하나님이 어떤 생각으로 그에게 불행을 더하고 계시는지에 대해 그가 알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데 있었다.”—Science and Religion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p. 207~208. 욥의 친구들과 엘리후는 인과관계라는 단순한 논리로 욥에게 일어난 일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원인은 욥의 죄이며 결과는 그의 고통이었다. 이보다 더 선명하고 신학적으로 건전하며 논리적인 설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논리는 틀렸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실제 세계와 그것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나님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욥의 가엾은 처지에 대해 그토록 긴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마귀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로 보건대 그들이 진리를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이해는 얼마나 제한적이었습니까? 우리에게 많은 지식이 있을지라도 그들의 무지를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 욥이나 그의 친구들이 사단의 활동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며. 또 신자들이 사단의 활동에 대해서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을 더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는 암시적 기별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➋ “해야 할 일들을 스스로의 손으로 처리하고 성공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지혜를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지 않으신 짐을 지며 그분의 도움 없이 그것을 나르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자 하신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을 때는 장래를 위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사랑하는 부모를 의지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산상보훈, 100). 이런 강한 믿음을 가지려면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 말씀을 확신하고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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