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과 거짓 교사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6/10/17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11과 거짓 교사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6/10/17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6-03 07:23 조회6,822회 댓글0건

본문

6월 10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3분

 

● 연구 범위 : 벧후 2:1~22, 요 8:34~36, 마 12:43~45, 유 4~19, 창 18:16~33

 

● 기 억 절 :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벧후 2:19).

 

첫 번째 서신에서 베드로는 열렬한 목회적인 관심을 가지고 박해로 고통을 받고 있는 신자들을 격려하기 원했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박해를 언급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날로 번져가는 소위 ‘그리스도인들’의 운동을 진화하려는 로마 제국으로 인하여 교회가 극심한 시련을 겪었던 것 같다.

사탄은 양면 공격을 전개했다. 외적인 박해는 잔인한 강압과 폭력을 수반하는 강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교회는 외적인 박해보다 더 위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위협, 곧 내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과거의 유대 나라가 거짓 선지자들의 문제를 다뤄야 했던 것처럼 베드로의 시대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교회 안으로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벧후 2:1)인 거짓 교사들의 문제를 다뤄야 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이 이러한 해로운 길을 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벧후 2:2).

베드로가 경고했던 거짓 가르침들은 무엇이었는가? 베드로는 그것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했는가? 오늘날 우리는 내부로부터 오는 위협에 직면할 때에 그의 경고로부터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학습 목표

 

깨닫기 : 우리에게 확실한 증언과 예언의 말씀이 있을지라도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 혼합된 기별에 기초한 해로운 이설을 소개할 것임을 인식한다.

느끼기 : 거짓 교사들이 가져올 해로움을 경계한다.

행하기 : 깨어서 참과 거짓을 분별한다.

 

➋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교회들은 내부적으로 어떤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까?

※ 거짓교사들이 진리를 왜곡하여 교인들을 흔들고 있었다.

➌ 거짓 교사들이 내놓는 가르침은 주로 어떤 특징들이 있습니까?

※ 자유를 준다면서 진리대로 생활할 필요가 없다는 인상을 주어 방종으로 이끌었다. 

➍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가르침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얼마나 해롭습니까?

※ 성소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2300주야는 이미 지나간 것이다. 등등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 

➎ 우리가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영적인 생활로 대체해야 합니까?

※ 진리가 생활이 되어야 한다.

➏ 우리는 어떻게 교회로 유입되는 오류에 대처하며 그것에 빠진 동료 신자들을 도와야 합니까?

※ 바른 진리를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결론 : 죄, 정욕, 탐욕, 기만, ‘권위를 무시함’의 특징을 가진 세상에서 하나님은 경건한 자들을 유혹으로부터 구원하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심판 때까지 저주 아래 두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 있습니다.

 

 

첫째 날(일) 6월 4일 거짓 선지자와 교사들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 2:1).

 

우리는 기독교 초기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사이에 완전한 평화와 조화가 있었던 시기라고 여길 만큼 초기 교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예수님의 시대에서조차 교회는 내부적으로 갈등하였다. (유다를 생각해보라.)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보듯이 많은 문제가 교회 내부의 거짓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초기 교회는 외부적인 박해뿐 아니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로 씨름했다. 베드로는 두 번째 서신에서 이러한 내부 문제 중 일부를 다룬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 이로 말미암아 진리의 도가 비방을 받을 것이요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1~3). 이것을 형제자매 사이에 완전한 평화와 내적 조화가 이뤄진 시대의 묘사로 보기는 어렵지 않은가?

 

1. 벧후 2:1~3, 10~22을 보라. 베드로가 경고하는 것은 무엇인가? 교회에 퍼진 거짓은 무엇인가?

[벧후2:1~3, 10~22]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답: 예수님과 그의 구속 사업을 부인하게 하는 것, 호색, 음란, 탐심, 비성경적인 지은 말을 주장하는 것, 연락을 사랑하는 것,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것 등등.

 

벧후 2:1은 주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이 서신을 기록하도록 영감을 주신 이유를 밝힌다. 그는 과거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미래에도 거짓 교사들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드로는 이들 교사들의 잘못을 꽤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거기에는 파괴적인 이설들을 끌어들인 죄로부터 시작해서(벧후 2:1) 방심한 자들을 속박으로 인도한 죄(벧후 2:19)와 수많은 오류들이 포함된다. 그들의 교훈은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같이 강경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베드로에게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은 통하지 않는다.

 

<부가설명> 베드로가 기록한 내용을 살피면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교인들이 당면한 이단들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단은 첫째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가볍게 여기거난 부인하는 자들이다. 다음은 방종하는 자들인데,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지어도 항상 용서받기 때문에 쾌락을 누려도 괜찮다고 한 것 같다. 또 그들은 가르치고 대가(代價)를 요구한 것 같다. 발람처럼 불의의 삯을 탐했다. 그들이 영적인 것을 전하니 육신의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를 편 것 같다. 이들은 교회에 들어와서 연락을 사랑하여 파티를 열고 육체의 정욕 중에 행한다고 했으니 부녀자들을 꾀어서 음란한 일을 저지른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진리를 가르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의의 도를 안 사람들을 미혹하여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도록 이끌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있다. 재림교회 안에서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냉철하게 진리를 따라야 할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에 묵상 부분을 잘 읽어보기 바란다. 

 

교훈 : 교회에서는 외부에서 오는 문제보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더 위험하다. 특히 거짓 교사와 이설들은 교회에 심각한 해를 가져오므로 주의해야 한다.

 

 

둘째 날(월) 6월 5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요?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벧후 2:18).

 

1. 위의 성경절에서 베드로는 무엇을 경고하는가? 벧후 2:19의 말씀에서 베드로의 염려는 무엇인가? 19절에서 사용된 ‘자유’라는 말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벧후2:18,19]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답: 예수 안에서 얻은 자유는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사상이다. 그것을 자유라고 표현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유는 죄에서 해방된 자유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율법과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라고 가르친 것이다. 

 

베드로는 최대한 강경한 어조로 거짓 교사들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했다. 벧후 2:18~21에서 그는 이 거짓 교사들이 비록 자유를 약속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을 속박으로 이끈다고 경고한다.

얼마나 완전한 복음의 왜곡인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란 죄의 종에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의미한다(롬 6:4~6). 우리를 죄의 속박에 내버려두는 자유의 개념은 무엇이든지 베드로가 경고하는 종류의 오류이다. 비록 그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설이 정확하게 무엇인지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 이설이 죄의 문제 그리고 속박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2. 요 8:34~36을 읽어 보라.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베드로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요8:34~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답: 자유는 죄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자유도 이것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거짓 교사들은 율법과 도덕적 삶을 벗어도 된다고 가르친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고 죄에 속박으로 빠지는 것이다. 

 

이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제 막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을 다시 과거의 죄악의 삶으로 돌아가도록 인도한다. 그것은 아마도 정결과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얼마 전에 탈출했던 매우 타락한 세상(벧후 2:19)에 다시 얽매이게 하는 값싼 은혜의 복음 같은 종류였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날카롭고 강력하게 그 교훈들을 비판하며 그것들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경고할 수밖에 없었다.

 

<부가설명> 복음을 오해하고 또 도덕적 관점에서만 말하면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분방하게 살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런 발상은 믿고 사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우리의 믿음을 믿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 있다. 그래서 믿음이 선물이라고 했고(엡2:8) 받은 보배로운 믿음(벧후1:1)이라고 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믿음을 주신 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다. 죄에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여기도 저기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는 없다. 죄의 종이면 죄의 말을 듣게 된다. 그때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다. 의를 따라 살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의 종이 되면 죄에 대하여 자유하다. 죄를 따라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롬6:17~23) 자유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자. 오해로 인해 방종을 자유로 착각하게 된다. 

 

교훈 : 교회 내에 존재하는 거짓 교훈들은 흔히 은혜나 자유를 빙자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전의 타락한 세상과 죄악 생활로 돌아가 그것들의 종이 되게 한다.

 

 

셋째 날(화) 6월 6일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감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벧후 2:20~21).

 

1. 벧후 2:17~22과 마 12:43~45을 읽어 보라.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이 다시 이전 삶으로 돌아가면 어떤 위험들이 존재하는가?

[벧후2:17~22]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마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44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답: 믿음을 받아들이기 전보다 더 나쁜 상태에 빠진다. 

 

베드로는 거짓 교사의 유혹에 넘어가 이전 죄악으로 돌아간 자들의 운명에 대해 특별히 염려하였다(벧후 2:18). 거짓 교사들은 자유를 약속하지만 실제로 그 자유는 예수님이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하는 자유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베드로의 엄중한 경고를 보라. 의의 삶을 알고 난 뒤에 다시 옛 삶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그것을 모르는 것이 낳다(벧후 2:21).

물론 그렇다고 그들에게 희망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자들의 이야기를 흔히 들을 수 있다. 그들이 돌아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그들을 즐겁게 맞이하신다(눅 15:11~32 참고). 단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매우 위험하며 행복하지도 못하다. 자신이 토한 것으로 돌아가는 개에 대한 표현은 그러한 상황에 대한 거칠고 냉정한 묘사이지만 베드로는 그러한 비유로 자신의 논점을 밝힌다.

벧후 2:20에서 사용된 예수님의 언어들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마 12:45, 눅 11:26 참고). 예수님은 더러운 영 하나로부터 벗어난 어떤 사람을 비유로 드셨다. 그 영은 있을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내가 나온 내 집”(마 12:44)으로 돌아갔다. 돌아와 보니 집이 비어 있고 정돈되었다. 그래서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번에는 자신보다 더 악한 다른 영들까지 데리고 왔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마 12:4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예증하시고 베드로가 묘사한 위험성은 실제로 존재한다. 새로운 신자는 이전에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것들을 영적인 사물들이 대체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만약 교회에 참여하여 새로운 믿음을 공유하는 활동으로 이전의 세속적인 활동을 대체하지 않는다면 그는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비유는 회개했으나 예수님을 집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비어 있는 집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면서 교회에 다닌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는다. 대신에 자기감정을 주인으로 모신다. 예수를 믿는 것은 감정적 뜨거운 경험이나 눈물 나는 경험이나 즐거운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말씀을 따라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생활 원칙이 예수님의 생활 원칙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게 되지 않으면 빈집으로 있는 것이다. 거기에 귀신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와서 성령처럼 행사한다. 이렇게 된 사람은 자기가 성령 충만하게 받았다고 믿는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경험들을 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말씀의 진리를 전해도 들어가지 않는다. 처음보다 훨씬 나쁘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도 이런 상태를 경고한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을 믿고 새로운 삶을 접한 뒤에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영적인 생활이 이전의 생활을 대체해야 한다.

 

 

넷째 날(수) 6월 7일 베드로와 유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유다서 4~19은 벧후 2:1~3:7의 기별을 거의 반복한다. 성경에서 반복되는 기별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전달하기 원하시는 어떤 중요한 사실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 두 본문에서 베드로와 유다는 상당한 길이를 할애하여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알리고 있다. 즉 하나님은 악한 자들의 운명을 쥐고 계신다. 베드로와 유다는 모두 하나님이 악을 면밀하게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불의한 인류든 타락한 천사들이든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특별히 주목하시며 심판의 날에 그들을 벌하실 계획이다(벧후 2:9, 17, 유 6).

 

1. 벧후 2:1~3:7과 유 4~19을 읽어 보라. 베드로와 유다는 하나님이 이전에 심판하신 어떤 사례를 들어 그분이 죄의 처리를 진지하게 취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가?

[벧후2:1~3:7] 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3:3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유 4~19]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12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답: 두 사람은 소돔의 심판과 노아의 홍수와 천사들의 타락을 예로 들어 심판이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유다는 홍수 대신에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넜으나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하게 된 사람들을 예로 들었다. 아무튼 심판을 분명한 것이다. 

 

베드로와 유다는 과거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3가지 사례 즉 노아 홍수 이전 세상의 멸망, 소돔과 고모라의 소멸, 타락한 천사들의 결박을 제시한다(벧후 2:4~6, 3:7, 유 6~7). 이 사건들은 모두 최종적인 특징을 띤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최종적으로 파괴할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같이 처절한 징벌을 유발한 죄들은 무엇이었는가? 해로운 이설을 들여오고, 권위를 무시하고, 그들이 주인으로 삼은 것들에 속박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곡해하여 부도덕을 허용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와 왕이 되심을 부인하고, 자신의 육체를 더럽히고, 헛된 자랑을 늘어놓고, 비방한 죄들이다(벧후 2:1, 10, 19, 유 4, 8, 벧후 2:18, 유 10).

흥미롭게도 이러한 설명은 종종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폭력 행위나 잔혹 행위를 포함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더 교묘한 죄들을 묘사한다. 그것들은 간혹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용서되는 죄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 안에서 지속적인 회개와 개혁이 가장 큰 필요임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부가설명> 솔로몬은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내가 정녕히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8:11~13)고 말했다.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즐겁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에는 망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교회에 나오면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않는 사람도 결과는 같은 것이다. 신앙은 사상만이 아니고 생활이다. 바른 생활은 바른 사상을 가지고 하는 것이지만 바른 사상을 가지고도 바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신앙도 그렇다. 그러나 생활이 되지 않고 가진 신앙사상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도 상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이 자기가 가진 사상대로 사는지 판단하는 일을 한다. 이런 일에 빠지지 않도록 신앙사상이 신앙생활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교회에 이설을 끌어들이고 원칙을 무시하며 부도덕을 용인하는 등의 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다섯째 날(목) 6월 8일 추가적인 구약의 교훈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 2:6).

 

1. 벧후 2:6~16을 읽어 보라. 죄악으로 빚어질 일들에게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또 어떤 예들을 사용하는가?

[벧후2:6~1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답: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과 발람에 대한 심판을 예로 들었다. 

 

소돔에 대한 성경의 첫 번째 실질적인 언급은 창 13:12~13에 나온다. 아브라함과 롯은 경제적인 이유로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한다. 롯은 요단 골짜기를 선택하고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창 13:12)다. 그런데 성경은 소돔 사람이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창 13:13)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소돔을 멸망시킬 계획을 예고하시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조를 얻는다(창 18:16~33). 소돔에서 의인 열 명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롯을 방문한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벌어진 일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성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직 롯과 그의 두 딸만 멸망을 피했다(창 19:12~25).

베드로는 이 일화에서 두 개의 교훈을 끄집어낸다. 첫째, 두 도시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이를 심판을 예표한다(벧후 2:6). 둘째, 하나님께는 의인들을 시련에서 건져낼 방법이 있다(벧후 2:7~9).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멸망을 당한 이들의 몇 가지 특징을 주목한다. 그들은 부패한 정욕으로 그들의 육체를 채우고, 권위를 무시하고, 당돌하고, 고의적이며, 주저하지 않고 천사들을 비방했다(벧후 2:10~11). 이러한 특징은 거짓 교사들과 그 추종자들에 대한 베드로의 묘사와 비슷하다.

발람의 이야기는 민 22:1~24:25에 나온다.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모압 왕 발락의 사주를 받았다.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결국 큰 액수의 제안에 설득을 당하고 만다(민 22:7~21).

여호와의 천사가 그가 떠나는 길을 막아섰다. 그러나 그의 나귀가 피한 덕택에 목숨을 부지했다. 발람은 나귀를 때렸다. 그러나 눈의 열려 여호와의 사자가 보이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민 22:22~35). 결국 발람은 이스라엘을 축복하였다(민 23:4~24:24). 베드로는 발람을 간음과 탐욕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에 대한 예로 사용했다(벧후 2:14~15). 그들은 발람과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마땅히 가야할 길에서 이탈했다.

 

<부가설명> 발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도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고 믿었던 것 같다. 베드로는 그를 미친 선지자로 해서 선지자로 인정했다.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점을 쳤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방인 중에 여호와의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특하게 보셨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자기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돈을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결국 그는 불의의 삯을 탐한 사람이었다. 그는 재물과 함께 망하였다. 소돔 고모라는 성도착 지대였다. 남색이 대 유행이었다. 소돔의 죄는 부유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고(겔16:49) 쾌락에 젖었는데 그 절정이 남색, 동성연애였다. 결국 하늘에서 내리는 불로 소멸되었다. 이런 일들은 역사의 끝에도 있을 것을 경고한다. 최종적으로 이런 정신으로 생활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도 삯을 위하여 거룩한 이름을 이용하면 발람의 경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정말 베드로의 경고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는 세상에 임할 심판을 예표하며 발람의 일화는 정욕과 탐욕으로 유혹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고의 기별이다.

 

 

여섯째 날(금) 6월 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논하는 신자들을 본다. 물론 그것은 유효한 개념이다. 우리가 율법의 정죄에서 자유롭게 되고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들로 인하여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된다면 정말 자유롭게 된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은혜를 깨닫기 전에 고통을 겪었던 속박의 이야기는 이러한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서신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진리는 왜곡될 수 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위대한 진리는 추측의 오류와 근접 거리에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누리는 자유를 율법이 없는 상태로 오해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풀어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해서 많은 이들이 율법 자체가 폐지되었고 그것을 준수하는 자들은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선언한다. 이렇듯 진리와 오류는 너무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 정신은 오류를 수용하도록 인도함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를 기만하는 사탄의 권세 아래 두게 된다. 사탄은 진리를 가장한 오류를 수용하도록 백성들을 유혹해서 개신교계의 충성을 다지는 일을 하고 있다”(Christ Triumphant, 32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왜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핵심 진리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정확하게 동의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어떤 경우에 동료 신자들과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이 위험합니까?

※ 오직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진리에 있을 때 거짓교리를 분별할 수 있다. 성경적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진리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➋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율법 전체가 아니라 넷째 계명인 안식일 준수의 문맥에서 그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라는 개념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까?

※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와 합리화를 위한 그릇된 논리이다. 자유는 죄에 대하여 자유하고 의에게 종노릇하는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