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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질문, 대답, 부가설명)0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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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4-29 05:15 조회7,3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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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6분

 

● 연구 범위 : 벧전 1:6, 3:13~22, 딤후 3:12, 벧전 4:12~14, 계 12:17, 벧전 4:17~19

 

● 기 억 절 :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기독교 역사가 시작된 후 처음 몇 세기 동안은 박해가 계속되었다. 성경 특히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교회가 어떤 곤경을 겪었는지 엿볼 수 있다. 고통을 수반하는 박해는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신자들의 삶에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베드로는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서신의 거의 끝부분에서도 동일한 권면을 남겼다.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이 짧은 서신 안에 적어도 3개의 긴 본문이 그리스도를 위한 신자들의 고난의 문제를 다룬다(벧전 2:18~25, 3:13~21, 4:12~19). 이번 주에 우리는 베드로전서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인 고난의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깨닫기 : 시련과 고난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필연적인 경험이며 특권이자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는 개념을 이해한다.

느끼기 : 시련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뻐한다.

행하기 : 신실하신 창조주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계속 선을 행하기로 결심한다.

 

➋ 초기 기독교인들은 어떤 종류의 박해를 받았습니까?

※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것을 거절했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➌ 베드로는 그들에게 어떤 권면의 기별을 전했습니까?(벧전 3:13~17)

※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복된 일이며 소망의 이유를 분명히 전하라고 했다. 

➍ 베드로가 시련을 “불 시험”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벧전 4:12)

※ 불순한 것을 태우고 없어지지 않을 것은 정결하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➎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과 심판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 고난은 단련하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심판은 그들을 신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➏ 시련과 고난이 계속될지라도 우리가 멈추지 말고 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다짐해 봅시다.

※ 진리를 따라 충성하고 우리 자신을 창조주께 전적으로 맡기는 것은 결코 멈추지 않아야 한다. 

 

결론 : 우리를 시험하기 위한 불 시험이 닥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자신을 신실하신 창조주께 맡기고 계속 옳은 일을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 날(일) 4월 30일 초기 교회가 받은 박해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1. 벧전 1:6, 5:10을 읽어 보라. 베드로는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에게 닥치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했는가?

[벧전1: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답: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할 고난에 대하여 가르친다. 근심하게 되지만 오히려 기뻐하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하게 되라고 한다. 

 

신약 교회가 출범한 지 처음 몇 백 년 동안에는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내는 한 서신은 초기 기독교인들의 안전이 대단히 취약했음을 예증한다. 그 서신의 발신자는 본도와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우스(A.D. 111-113)였다(벧전 1:1 참고).

그는 트라야누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발을 당하는 백성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관한 지침을 요청하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사형시킨 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더 이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플리니우스는 그들에게 황제의 동상이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고 예수를 저주하게 해서 그들의 혐의를 풀 수 있도록 허용했다.

살아있는 황제를 숭배하는 행습은 로마에서 희귀한 일이었으나 베드로전서의 수신 지역이었던 로마 제국 동편에서는 황제들이 자신들을 위한 성전 건축을 허용하거나 권장했다. 이런 성전의 일부에는 사제와 제물을 바칠 수 있는 제단도 있었다. 그래서 플리니우스는 소아시아 지역의 오래된 행습에 따라 기독교인들에게 황제상에 분향하고 경배하게 함으로 황제에 대한 충성을 증명하게 했다.

1세기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심각한 위험에 직면해야 하는 시기들이 있었다. 네로 황제(A.D. 54-68)와 도미티아누스 황제(A.D. 81-96)의 시대가 특히 심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가 묘사하는 박해는 지역적인 박해였다. 구체적인 박해의 사례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거기에는 아마도 거짓 고발(벧전 2:12), 매도와 비난(벧전 3:9, 4:14)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비록 시련이 극심했지만 적어도 그 시대에는 대규모 투옥이나 사형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1세기 사회의 중요한 요소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 때문에 고통을 겪을 수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던 것이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와 고난,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을 주관하고 통치하는 보이지 않는 존재는 루시퍼였다. 지금도 그렇다. 루시퍼는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가 아담을 꾀어 지구를 넘겨받고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이 지구를 탈환하고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시니 그는 사력을 다해 그것을 저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나 그것이 그 자신이 죽는 것인 줄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루시퍼의 왕국을 흔드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핍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어떤 경우든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핍박한다면 그는 루시퍼 편이다.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면 비난하는 사람은 루시퍼 편이다. 베드로는 그 당시 서서히 일어나는 핍박의 물결을 내다보고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잘 대처하도록 편지에 권고한다. 이 권고는 지금도 여전히 적용된다. IS 집단이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죽이는 일은 옛날 일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에 비난과 핍박을 받는다면 진리에 서 있는 것이고 비난하고 핍박하는 사람은 루시퍼 편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베드로의 권고를 잘 기억하고 도리어 기뻐하며 굳게 하고 견고한 터에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 도우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교훈 : 기독교인들은 신앙 때문에 사회로부터 오해와 비난과 박해를 받을 수 있으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로 투옥과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

 

 

둘째 날(월) 5월 1일 고난과 그리스도의 모본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벧전 3:14).

 

1. 벧전 3:13~22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이유로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고난과 신자들이 경험하는 고난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벧전3:13~22]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답: 비방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선을 행하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나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이며 그럴수록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라고 가르쳐주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벧전 3:14)이 있다는 베드로의 말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마 5:10)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반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대신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모셔야 한다(벧전 3:15). 예수님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그들을 적대시하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있는 소망의 이유를 언제든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온유하고 존중하는 태도와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벧전 3:15~16).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에게 비방할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벧전 3:16). 그래야 비방을 당할지라도 그들의 흠 없는 생애로 인하여 그를 비방한 자들이 부끄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벧전 3:17). 반면 선을 위해 또는 옳은 일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 3:17).

베드로는 예수님의 모본을 사용한다. 그분은 자신의 의로움 때문에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그분의 거룩함과 정결함은 그분을 멸시했던 자들에게 항구적인 책망이 된다. 예수님은 바로 그릇됨이 아닌 옳은 일을 행하느라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구원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분이 죄인들을 대신해 죽으심으로 그분을 믿는 자들은 영생의 약속을 받게 되었다.

 

<부가설명> 베드로는 예수께서 고난으로 본을 보여서 우리가 그분의 발자국을 따르게 하셨다고 가르친다.(벧전2:21) 예수께서는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핍박과 고난을 받으셨다. 이 세상이 죄와 사망의 세상이기 때문에 생명과 의의 존재들은 고난을 받게 되어 있다. 그들이 핍박을 하지 않아도 고난의 환경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작용할 때 사망은 싫어한다. 사망이 만든 환경과 생활하는 상태가 생명의 존재에게는 환난으로 와서 얹힌다. 그기에 세상 세력이 핍박을 하게 되면 고난의 도가 높아진다. 물리적 가해가 이루어지면 더욱 극심한 고난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고난을 받았다. 마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7배나 뜨거워진 풀무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광로와 같은 곳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내로 부활과 생명의 주님을 신뢰하며 고난을 당하면 복이 있는 자라고 가르쳤다. 영생의 보증으로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가르치셨다. 말이 쉽지만 주께서 환난과 핍박을 견디고 굳게 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의지로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는 경험으로 충실하게 신뢰하는 믿음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은사로 이룰 수 있을 뿐이다. 

 

교훈 : 우리는 세상의 비방을 받지 않도록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다면 오히려 그것을 복으로 여겨야 한다.

 

 

셋째 날(화) 5월 2일 불 시험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

 

1. 벧전 4:12~14을 읽어 보라. 왜 베드로는 그들이 당하는 고난 때문에 놀라지 말라고 말하는가?(딤후 3:12, 요 15:18)

[벧전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답: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계신 증거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받는 박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천명한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말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당할 일들을 경고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마 24:9~10).

엘렌 G. 화잇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박해와 비난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는 모든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박해의 성격은 시대와 더불어 변하나 그 원칙(그 기초가 되는 정신)은 아벨 이후로 언제나 주의 택하신 사람들을 살해한 바로 그 정신이다”(사도행적, 576).

 

2. 계 12:17을 읽어 보라.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박해는 어떠한가?

[계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답: 용이 그들과 싸우려고 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박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베드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언급하면서 서신의 독자들이 마주할 불 시험에 대해 경고한다.

불은 적절한 비유이다. 불은 파괴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순물들을 제거한다. 불에 닿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집은 불에 타지만 금이나 은은 순도가 높아진다. 일부러 박해를 자초해서는 안 되겠지만 하나님은 그것으로부터도 긍정적인 일을 행하신다. 베드로의 권면은 다음과 같다. ‘물론 박해는 나쁜 것이지만 그것을 예기치 못한 것처럼 생각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저 믿음으로 전진하라.’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불 시험이다. 불은 태워서 정결하게 한다. 불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타서 없어지고 견디는 것은 정결하게 된다. 환난과 핍박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해놓는다. 탈 것이 다 타고 남는 것이 진짜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불 시험을 당하지만 그렇게 박해한 사람들은 마지막에 불 시험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견디지 못하고 타서 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시험은 그들을 정금같이 되게 할 것이다. 믿음으로 바르게 진리를 따사 사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시련을 겪는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도 시련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살 세상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외셔서 구원하여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셔서 그리로 옮기시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이 그리스도인이 살기에 합당하고 평화의 세계라면 굳이 새 하늘 새 땅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불 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히 여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 온 것일 뿐이다. 심지어 성경이 가르쳐주는 대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생활하려고 하면 교회 안에서도 시련이 온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깨달아 알고 증거하고 생활하는 신도가 되어야 한다. 

 

교훈 : 우리는 시험이 닥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우리를 단련하고 순결하게 하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전진해야 한다.

 

 

넷째 날(수) 5월 3일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벧전 4:17).

 

1. 벧전 4:17~19을 사 10:11~12, 말 3:1~6과 비교해서 읽어 보라. 공통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벧전4:17~19]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사10:11,12] 내가 사마리아와 그 신상에게 행함같이 예루살렘과 그 신상에게 행치 못하겠느냐 하도다 12 이러므로 주 내가 나의 일을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 다 행한 후에 앗수르 왕의 완악한 마음의 열매와 높은 눈의 자랑을 벌하리라.

[말3:1~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술수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케 하며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거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6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답: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부터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위의 말씀들은 모두 심판의 과정이 하나님의 백성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묘사한다. 베드로는 심지어 신자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심판을 연결시킨다. 그에 따르면 신자들이 경험하는 고난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그분의 심판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2. 눅 18:1~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눅18:1~8]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답: 재판장을 찾아서 간절히 간구할 때 재판장은 그를 신원했다. 그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는 성도들은 신원될 것이다. 

 

성경 시대에 심판은 일반적으로 매우 간절한 주제였다. 눅 18:1~8에 나오는 가난한 과부의 비유는 심판에 대한 대중적인 자세를 묘사한다. 그 과부는 자신의 소송을 맡아줄 재판장만 찾으면 승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말하기에는 돈도 여건도 부족했지만 어떤 재판관을 졸라서 자신의 억울함을 전하고 타당한 결과를 얻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 18:7). 죄는 세상에 불행을 가져왔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시 바로 잡으시리라고 믿고 기다려왔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계 15:4).

 

<부가설명>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부터 시작하신다는 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백성의 심판은 이름뿐인 하나님의 백성인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구별하는 심판을 하실 것이다. 벧전 4:17~19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하실 때가 되었다고 하여 심판을 시작하실 때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심판하실 때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첫째 천사의 기별은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고 외친다. 사도행전 17:31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다고 기록하였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하실 것이다. 이 집은 하나님의 교회이다.(딤점3:15)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있는 교회들의 실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것이 작은 뿔인지, 참 하나님의 교회인지를 심판으로 밝히시고 작은 뿔을 교회로 믿고 있는 신자들에게 거기서 나오라고 외칠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이다. 우리는 성경, 오직 성경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깨닫고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밝혀놓은 작은 뿔 교회와 하나님의 참 교회를 확실히 구별하여 알고 참 하나님의 교회에서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당한 환난을 신원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의 심판을 기다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시고 죄로 인해 잘못된 모든 것들을 바로잡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날(목) 5월 4일 시련 중의 믿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알다시피 베드로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겪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 따르면 적어도 잠시 동안 상황은 더 나빠진다. 따라서 이후 몇 년 동안 많은 신자들이 베드로의 서신으로부터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 왜 고난이 오는가? 매우 고전적인 질문이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책 중 하나인 욥기는 고난을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벧전 4:15)가 아니지만 고난을 받은 자가 바로 욥이다. 심지어 하나님은 욥에 대하여 사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선하기 때문에 겪은 일들을 보라!

 

1. 고통의 근원을 묻는 질문에 다음의 성경절들은 어떻게 대답하는가?(벧전 5:8, 계 12:9, 2:10)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계12: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계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답: 성도들의 고난은 사단에게서 온다고 대답한다. 

 

짧게 답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 가운데 있기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선과 악에 대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사탄이 인류를 사이에 두고 전쟁을 벌이고 있다.

 

1. 벧전 4:19을 읽어 보라. 베드로의 말은 우리가 현재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벧전4: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답: 우리를 창조주께 맡기라고 권고하였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우리가 나쁜 짓을 저질러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욥처럼 자연스럽게 ‘왜?’라고 반복하여 묻게 된다. 하지만 답을 알 수 없다. 베드로의 말처럼 고난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실한 창조주이신 우리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영혼을 맡기며 계속 선을 행하는 것이다(벧전 4:19).

 

<부가설명> 욥은 많은 질문을 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대답을 한 번도 하시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욥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창조와 섭리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욥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80회 이상 하셨다. 그것은 다 피조물을 돌보시는 섭리에 대한 질문이요 내용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도덕적으로 경배했다. 이런 경배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사상이 약하다.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신다는 도덕론적 사고방식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욥은 나무랄 것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두려움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가 도덕적 악에서 떠난 것은 그런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앙을 내리실 가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3:25,26) 이 구절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내면을 토한 말이다. 이런 믿음에는 기쁨이 없다. 그냥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애쓰는 노력이 있을 뿐이다. 우리도 이런 신앙을 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욥이 창조와 섭리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고 회개한 그 회개가 필요하다. 그래서 베드로도 심판의 때에 우리를 창조주께 의탁하라고 권고한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고 우리가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 고백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훈 : 넓게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은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을 맡겨야 한다.

 

 

여섯째 날(금) 5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일요일 교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박해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음은 당시에 박해를 받았던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황제에게 보고했던 서신의 내용이다.

“제가 그리스도인으로 고발당한 자들을 식별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인지를 먼저 추궁합니다. 그들이 시인하면 저는 사형으로 위협하며 두 차례 다시 묻습니다. 만약 그들이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저는 그들을 처형시키도록 명령합니다. 그들이 믿는 신조의 성격이 무엇이든지 저는 불복종과 융통성 없는 고집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러한 목적으로 대령시킨 신들의 우상과 황제의 동상에 포도주와 유향으로 참배하고 저를 따라 신들에게 기원하며 마침내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하거나 그냥 과거에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석방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강요가 있다고 해도 그런 일을 절대 행할 수 없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정보원에게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혔다가 부인한 자들도 있습니다. 실제 그들은 3년 혹은 수 년 전, 소수의 경우에는 25년 전에 그 신앙에 순복했지만 포기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황제의 동상과 신들의 우상에게 절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했습니다.”—Pliny Letters (London: William Heinemann, 1915), book 10:96 (vol. 2, pp. 401–40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에서 인용한 플리니우스의 서신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이 겪어야 했던 주된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당시 상황과 계 14:9~12의 셋째 천사의 기별이 묘사하는 종말 사이에는 어떤 유사성이 있습니까? 이는 대쟁투의 근본적인 사안들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려줍니까?

※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셋째 천사의 기별도 우상에게 경배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쟁투의 근본적 사안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는가? 하는 것이다. 

 

➋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심판을 초래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리고 그들은 천연계의 두려운 재난과,… 유혈 사태의 장본인으로 간주될 것이다.… 기별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사탄은 증오와 박해의 정신을 극도로 격발시킬 것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614). 이런 일에 대비하여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합니까?

※ 우리를 창조주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믿음으로 서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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