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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하나님을 위한 삶(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4/2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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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4-22 08:47 조회7,344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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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0분

 

● 연구 범위 : 벧전 3:8~12, 갈 2:20, 벧전 4:1~2, 롬 6:1~11, 삼하 11:4, 벧전 4:3~11

 

● 기 억 절 :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벧전 3:12).

 

성경 기자들은 인간 죄악의 실상을 알았다. 세상이 죄악의 악취로 가득한데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딤전 1:15 참고). 그들은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도 보았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이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말해 준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그분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베드로전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을 그리스도께 맡기고 침례를 받을 때에 그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는 너무 놀라워서 다른 사람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변화가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약속된 승리를 얻으려면 육체의 고난을 겪을 필요가 있다(벧전 4:1).

베드로는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한다(벧전 4:8). 사랑하고 용서하는 삶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반사한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사랑과 화합, 겸손과 긍휼은 모든 신자가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임을 인식한다.

느끼기 :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필요성을 느낀다.

행하기 : 그리스도의 부름에 따라 사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실천하기로 결심한다.

 

➋ 그대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삶을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까?

※ 거듭난 사람들이 사는 상태를 보여주셨는데 고난과 영광이 함께 있었다. 

➌ 왜 우리는 사랑과 동정뿐 아니라 연합 또는 화합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 그리스도인 각자는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➍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기 위해서 꼭 거듭남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육에 속한 자이고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거듭나야 영이 되고 예수님의 삶을 살 수 있다.(요3:5,6, 롬8:9을 읽어보라.)

➎ 종말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왜 더 힘써 서로 사랑해야 합니까?

※ 영혼 구원과 예수님의 삶을 우리 안에 날마다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론 : 임박한 심판을 앞두고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사랑, 동정, 겸손, 화합, 긍휼의 모본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의 생애에 필적하는 삶을 살라고 호소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앙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고 믿었습니다.

 

 

첫째 날(일) 4월 23일 한마음이 됨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8~9).

 

1. 벧전 3:8~12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하여 베드로의 요점은 무엇인가? 그가 이미 벧전 2:20~21에서 기록했지만 다시 반복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벧전3:8~1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답: 그리스도인들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해롭게 하는 자들을 오히려 복을 빌어주어야 한다. 화평을 구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은혜로운 말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기별을 반복한다.

 

베드로는 그들이 모두 ‘한마음(호모프로네스)’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행하고 믿어야 한다는 식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전 12:1~26은 이 개념에 대한 적절한 예를 제시한다. 여기서 바울은 몸이 여러 지체로 구성됨을 지적한다. 손도 있고 눈도 있지만 각 지체들이 모여 몸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다양한 영적 은사를 가진 개인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모든 신자는 동일한 목적과 정신으로 함께 연합한다. 그들은 연합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협력한다.

물론 그러한 연합을 이루는 것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불행히도 기독교 역사는 이것이 사실이었음을 너무 자주 보여주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서로 의견이 불일치하는 상황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연합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말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를 동정해야 한다(벧전 3:8). 동정이란 동료 신자가 고통을 겪을 때에 다른 신자들도 함께 고통을 겪고 한 사람이 기뻐할 때 다른 사람도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고전 12:26과 비교). 동정은 우리로 하여금 상대의 관점에서 보게 한다. 그것은 연합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첫걸음이다. 베드로는 그다음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한다(벧전 3:8).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그분의 참제자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더욱이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벧전 3:8). 우리는 서로의 어려움과 실패에 대해 긍휼의 마음을 나타내야 한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동정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동정은 그냥 불쌍히 여기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개정판에 동정이라고 번역한 것이 개역에는 체휼이라고 번역되었다. 헬라어는  “쉼파데스”인데 체험적으로 동정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동병상련이라는 뜻이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 가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의 사정을 잘 알아서 합당하게 동정하는 그런 동정을 뜻하는 말이다. 체험적 동정이라고 하면 될는지 모르겠다. 이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다 전에 사망의 존재였다는 같은 병을 앓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담 안에서 죽었던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면 쉼파데스를 할 수 없다. 돈 있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과 같은 동정과 차원이 다르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자리에 서시지 않았는가!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피차 대하고 서로 이해하며 격려하고 주님의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베드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신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어떤 지체가 상처를 입으면 온 몸이 상처를 입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온 몸이 상처 입은 지체를 치유하는데 신경을 집중하는 것 같이 서로 그렇게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교훈 : 우리는 각자 다양한 은사와 개성을 지녔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목적과 정신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를 동정하고 사랑함으로 연합해야 한다.

 

 

둘째 날(월) 4월 24일 육체의 고난을 받으심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분 안에서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망을 얻는다. 우리는 그분의 의로 옷 입고 하나님의 눈에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인 바 된다”(정로의 계단, 62).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선언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죄를 이길 힘도 주신다.

 

1. 벧전 3:18, 21, 4:1~2을 롬 6:1~11과 함께 읽어 보라. 고난과 죄를 이김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벧전3:18,21]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롬6:1~1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답: 육체의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침례이다. 진정으로 그렇게 한 사람은 다시는 죄를 짓고자 하는 정신이 없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벧전 3:18을 보면 예수님의 희생에 본질적으로 포괄적인 특성이 있음을 강조하는 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단번에’라는 뜻을 가진 ‘하파크스’라는 말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죽임이 포괄적인 특성을 띠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했다.

벧전 4:2에서 “(그러므로) 그 후로는”이라는 구절은 앞서 벧전 3:18~22에서 했던 말을 벧전 4:1~2과 연결시켜준다. 베드로는 앞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과 침례가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었음을 지적하였다(벧전 3:18, 21). 어쩌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벧전 4:1)다는 베드로의 말을 이해하기에는 침례가 가장 적절한 문맥일 수 있다. 침례를 통해서 신자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고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벧전 4:2)기로 결심한다.

이런 일은 매일 주께 자아를 굴복시키고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갈 5:24) 못 박아야만 성취될 수 있다. 롬 6:1~11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침례를 받을 때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다. 침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는다. 그래서 죄에 대한 죽음이 실재가 되게 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롬 6:11)기라는 바울의 말에 그리스도인 생애의 비결이 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여 사람과 같이 되셔서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육체의 존재들에게 죽임을 당하셨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육에 속한 모든 것이 죽은 것이다. 육체의 고난을 예수님과 함께 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침례를 받음으로 고백이 사실이라는 것을 하나님과 우주 앞에서 서약한 것이다. 침례 받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아담 안에서 죽어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던 나는 죽어 없어졌고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부활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의미상으로 그렇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실제로 그렇게 된 것이다. 이후로는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호흡이 있는 날들을 생활하려는 정신으로 산다. 그렇게 사는 기간에 때때로 실수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수이다. 그의 본질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실수했기 때문에 다시 실수하지 않으려고 주님께 마음을 바치고 실수한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이제 다시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비록 자주 실수할지라도 이 정신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다는 말의 뜻이다. 우리는 이런 새 생명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 자주 물어봐야 한다. 

 

교훈 : 예수님이 육체의 고난을 받으시고 죄를 그치셨기 때문에 그분과 연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

 

 

셋째 날(화) 4월 25일 거듭남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인생을 산다. 우리는 다시 태어났다. 특별히 어린 시절 이후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에게 그것은 그들이 이전에 살았던 삶의 방식과 다르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과거에는 세상에 속했지만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를 알고 현격한 변화를 경험했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드로는 죄에 대해 죽고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새 삶에 대해 언급한 뒤에 우리가 경험하게 될 변화에 대해 말한다.

 

1. 벧전 4:3~6을 읽어 보라.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런 변화에 대해서 다른 이들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벧전4:3~6]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답: 이전 생활방식에서 완전히 돌아서서 예수님의 생활방식을 따라 살게 되었고 그렇게 변한 것을 세상이 이상히 여기고 비방한다. 

 

베드로는 술취함과 관련하여 ‘과음’, ‘취태’, ‘연회’, ‘향락’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이제 방황은 끝났다. 베드로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변화는 너무 급격해서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이다(벧전 4:4). 우리는 이런 기회를 통해서 설교하지 않고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증언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경건한 삶은 세상의 그 어떤 설교보다 강력한 증거가 된다.

 

2. 베드로는 위의 말씀에서 심판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벧전4:4~6]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답: 삼자와 죽은 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의 상태를 직접 고한다고 말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요 5:29, 고후 5:10, 히 9:27), 베드로는 육신으로 사는 동안의 행위에 대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확언한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살아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알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도 공평하게 심판하실 수 있다는 뜻이다(벧전 4:6).

 

<부가설명> 베드로전서의 이 구절은 해석이 좀 어려운 구절로 알려져 있다.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 되었다는 말은 어떤 교파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림보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벧전 3:19에 있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했다는 말과 연결하여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설명은 영혼불멸설에 근거한 것이다. 이 구절은 죽은 자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을 다 들었다는 뜻이다. 죽은 다음에 그 영혼이 지옥이나 연옥이나 림보에서 들은 것이 아니고 죽기 전에 복음을 다 들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판 때에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5절을 보면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시는 분에게 직고한다고 했는데 ‘저희가“ 누군가? 여기 심판자 앞에서 직고하는 저희는 비방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예수님께 직고하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정죄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회개하고 돌아왔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죄의 심판에서 사망 판결을 받고 영원히 존재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산 자로 판정을 받고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다. 영으로 하나님처럼 살게 한다는 말이 이 뜻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산 자가 되어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산 자의 땅에 있어야 할 것이다.(마12:27, 시27:13 참고) 

 

교훈 :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삶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며 거듭남의 경험은 불신자들에게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된다.

 

 

넷째 날(수) 4월 26일 육체의 죄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

 

베드로는 사람들이 과거에 저질렀으나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그만둔 과오들을 열거하면서 ‘성적인 악행’으로 볼 수 있는 죄목들도 나열했다.

 

1. 벧전 4:3을 다시 읽어 보라. 여기서 베드로는 무엇을 열거하는가?

[벧전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답: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열거하였다. 특이 음란과 정욕은 성적 범죄에 대한 경고이다. 

 

뚜렷한 성적 의미를 가진 두 단어가 언급되었다. ‘음란(아셀기아)’과 ‘정욕(에피투미아)’이다. ‘아셀기아’는 관능을 뜻하며 ‘에피투미아’는 욕망을 뜻한다. 성경은 ‘성(性)’을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남녀를 만드시고 성이 인류에게 큰 복이 되게 하셨다. ‘성’은 태초의 에덴에도 있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4~25). ‘성’은 남편와 아내로 하여금 평생 동안 연합하여 살게 하는 주된 요소 중 하나이며 이를 통해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이 마련된다. 또한 이런 친밀감과 유대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경험하시기를 바라는 정서를 반영한다(렘 3장, 겔 16장, 호 1~3장).

결혼한 남녀 사이의 올바른 성은 큰 축복이 된다. 그러나 그릇된 성은 세상에서 가장 심각한 종류의 파괴를 가져온다. 현재 이 죄악으로 인한 피해의 규모는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막대하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운 선물을 남용함으로 상처 입은 인생들의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2. 다음 성경절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삼하 11:4, 고전 5:1, 창 19:5, 고전 10:8

[삼하11:4]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고전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창19: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고전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답: 성적 범죄에 대한 기록들이다. 

 

물론 이런 죄악들이 야기한 고통과 불행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꼭 성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도 조심해야 한다. 이런 특성을 가진 죄악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사회는 대부분 그런 죄들에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죄는 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성적인 죄악들도 덮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특별히 이런 민감한 영역에서 신중해야 하며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 6:42)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죄의 몸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신체가 죄 자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롬6:6) 그렇기 때문에 삶이 죄를 생산하는 것이다. 그것을 썩어져가는 구습이라고 말한다.(엡4:22) 육체에 속한 이 몸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생활하기 때문에 베드로가 열거한 이런 죄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래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날 때 우리는 영이 된다.(요3:5,6, 롬8:9) 이런 경험이 없이는 우리는 여전히 지체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 우리를 사로잡아 죄 아래 끌고 갈 때에 속절없이 끌려간다. 그런 것 중에 음란과 욕정이 강하게 역사한다. 인간의 정서는 이런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쾌락을 느끼게 한다. 사단은 이것에 갈고리를 걸고 택한 자라도 끌고 가려고 한다. 육체의 죄라고 오늘 제목이 말했지만 단순히 살(肉)이 가지고 있는 죄가 아니라 예수 없는 인간의 인격과 사상이 육인 것이다. 감성과 지성과 의지가 합작해서 우리를 죄 아래로 끌고 간다. 여기서 육이라고 할 때 예수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거듭난 생명이 날로 풍성하여지도록 순간마다 예수님 앞에 자아를 굴복시키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성령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순간마다 해방해주시도록 기도하자.(롬8:2)

 

교훈 : 결혼한 남녀 사이의 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만 이것을 남용하는 죄는 개인과 사회에 심각한 해를 끼치므로 항상 조심해야 한다.

 

 

다섯째 날(목) 4월 27일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

 

베드로의 시대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곧 오시고 세상이 멸망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벧전 4:7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했다. 즉 종말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각자에게 종말이란 죽음 직후의 순간 그 이상은 아니다. 우리가 죽어 눈을 감고 수천 년이 지나든 또는 며칠이 지나든 우리가 다시 눈을 뜰 때가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세상이 멸망하는 날일 것이기 때문이다.

 

1. 베드로의 말처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벧전 4:7~11)

[벧전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답: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받은 은사에 충성하여 봉사하며 말은 하나님의 말을 하고 일은 하나님의 힘으로 하라고 권고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진지하고 주의 깊게 기도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기 때문이다(벧전 4:8). 서로를 사랑하면 우리는 자신에게 상처 주고 해를 입힌 자들을 더 쉽게 용서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면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 사랑이 넘치면 작은 상처와 심지어 큰 상처들도 쉽게 간과하고 잊는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온 율법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된다는 사상을 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마 22:34~39, 롬 13:8~10).

베드로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친절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재림이 가깝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인 관계까지 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처럼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대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영적인 진리에 대하여 진지한 대화를 나누라는 뜻이다.

 

<부가설명> 아마도 여러 해 교과의 부가설명하면서 우리에게 허락된 날은 오늘 뿐이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경은 사람들이 오늘이라는 하루만 산다고 가르친다. 오늘 우리는 내일 또는 모래, 글피, 내년 등 이런 말을 하지만 밤에 자고 눈을 뜨면 또 오늘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오늘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오늘 살고 오늘 죽는다. 언제나 오늘만 산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만 사는 우리 각 개인에게 내일 오신다. 호흡이 끊어진 사람에게는 시간도 세월도 없다. 성경은 평안의 침상에 눕는다고 말한다.(사57:1,2) 그렇기 때문에 사람 각 개인은 언제나 만물의 마지막에 살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은 속히 오신다. 각 개인에게 내일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오늘, 언제나 오늘 베드로가 권고한 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오늘 하나님의 말을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 입의 말은 속히 오시는 예수님과 그의 심판에 대하여 증거하고 우리도 내일 그분을 맞이하도록 살며 심판의 선고가 산 자라는 선고를 받도록 산 자로 생활해야 한다. 산 자는 거듭난 사람들을 뜻한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예외 없이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그들은 산 자의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우리는 과연 진정으로 산 자인가?

 

교훈 : 우리는 종말이 가까울수록 더욱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서로 대접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며 은사대로 서로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섯째 날(금) 4월 2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인내하며 친절한 사랑은 지각없는 경솔한 행동을 마치 용서받을 수 없는 죄처럼 과장해서 말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과오를 치명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실수한 자를 관용과 깊은 배려로 다루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만약 현명한 방법을 취한다면 현저하게 고집 세고 완고하게 보이는 마음이라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허다한 죄를 가린다. 주님의 은혜는 절대적인 필요가 없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결코 외부로 노출시키지 않을 것이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267). 예를 들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이 어떻게 대하셨는지 생각해 보라(요 8:1~11). 우리는 이 부분을 그리스도께서 한 타락한 여인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일화 정도로 본다. 그런데 그 안에 더 깊은 요소가 있다. 예수님은 왜 그녀를 데리고 온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생애에 “숨은 죄의 비밀들”(시대의 소망, 461)을 즉시 지울 수 있게 땅에 쓰셨을까? 그분은 왜 그녀의 죄만큼 나쁘거나 그보다 더 심할지도 모르는 그들의 죄를 모든 사람 앞에 폭로하여 그들을 공개적으로 고소하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의 위선과 죄악상을 알고 계심을 보여주셨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는 않으셨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자신이 그들의 동기를 알고계심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시려고 했던 것 같다. 이는 우리가 죄인을 상대할 상황에 처할 때 알고 있어야 하는 귀중한 교훈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는 교회로서 어떤 면에서 통일성을 갖추어야 합니까? 반대로 어떤 영역에서는 다양성이 위험하지 않고 오히려 유익할까요?

※ 사상이 예수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수행하는 방법과 봉사의 영역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➋ 죄를 멈추기 위해 육체의 고난이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대는 이 말에 대해 어떤 경험이 있습니까?

※ 죄에 대하여 날마다 죽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다. 경험은 각자가 생각하면 된다. 

 

➌ 술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청소년들이 호기심으로 음주를 시도하는 것조차 큰 실수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 글쎄요? 각 사람이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성경 사상을 철저히 이해하도록 하면 가능할까? 성령께서 감동하시도록 기도하고 선도해야 할 것이다.

댓글목록

정효빈님의 댓글

정효빈 작성일

목사님글을 자주보는 사람입니다 둘째날[벧전3:18,21][롬6:1~11] 위의 구절에 침례를 세례로 잘못 기제되어 있습니다 초신자분들이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을까 하여 글을 올림니다 오해마시고요 항상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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