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썩지 않는 유업(질문, 대답, 부가설명)04/08/17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4-01 07:29 조회7,347회 댓글0건본문
4월 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분
● 연구 범위 : 벧전 1:1~2, 요 3:16, 겔 33:11, 벧전 1:3~21, 레 11:44~45, 벧전 1:22~25
● 기 억 절 :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우리가 성경을 연구할 때, 특별히 한 책을 선택하여 그중 일부분에만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려고 한다면 가능한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 말씀의 대상이 누구인지 알면 좋다. 그다음 기록의 정확한 목적을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저자가 다루고자 했던 특정 문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구원과 율법에 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갈라디아교회의 신학적 오류에 대해 기록하였다. 알다시피 신약 성경 대부분은 서신의 형태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서신을 기록하여 수신자에게 구체적인 기별을 전하였다.
요컨대 우리는 베드로 서신을 읽을 때 가능하다면 최대한 그 서신의 역사적 정황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그가 무엇에 대해 말했으며 왜 그렇게 말했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말씀으로부터 어떤 기별을 배워야 하는가?’이다.
베드로는 긴 세월이 흐른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가르쳐 줄 중요한 진리가 많았다. 그의 편지 처음 몇 절만 봐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며 그분의 부활을 통해서 산 소망을 갖게 됨을 깨닫는다.
느끼기 : 구원의 기쁨을 경험한다.
행하기 : 믿음, 소망, 사랑, 거룩함의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답게 산다.
➋ 베드로는 누구에게 편지를 썼습니까?
※ 지금 터키 지방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 성도들에게.
➌ 그들은 어떤 상황 속에 있었습니까?
※ 고난당하는 상황이었다.
➍ 그대가 베드로라면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신자들에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내겠습니까?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인내하라고 격려한다.
➎ 부활에 대한 확신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 세상 고난을 인내하면서 소망으로 기뻐하며 생활한다.
➏ 우리가 깨끗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요?
※ 진리를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결론 : 베드로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에게 그들이 구약의 백성들의 뒤를 이어서 헛된 삶의 방식에서 대속함을 받아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소망을 바라보는 삶으로 거듭났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관점에서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첫째 날(일) 4월 2일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
‘친애하는’과 같은 말로 시작하는 한 장의 종이를 받았다면 그대는 편지를 읽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대와 가깝지 않은 누군가에게서 받은 편지일 것이다.
오늘날의 서신이 상투적인 방식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고대의 서신들도 그랬다. 베드로서의 시작은 고대의 서신들처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밝히고 있다.
1. 벧전 1:1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한 절로부터 당시의 어떤 사실을 엿볼 수 있는가?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답: 편지의 기자가 베드로라는 것과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다. 원문을 보면 그의 이름은 서신의 첫 번째 단어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부른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갈 1:1, 롬 1:1, 엡 1:1) 베드로는 우선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며 거룩한 부르심을 강조한다. 그는 사도였다. 즉 그는 보냄을 받았으며 그를 보내신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베드로의 편지가 전달될 곳은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이다. 이들 고장은 모두 보스포루스 해협 동쪽의 오늘날 터키 지역과 거의 동일하다.
베드로가 주로 유대인 신자들에게 서신을 보냈는지 아니면 이방인 신자들에게 보냈는지에 관한 논란이 있다. 벧전 1:1에서 베드로가 사용한 “흩어진 나그네”라는 말은 1세기 유대 땅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데 흔히 사용되었다. 반면 벧전 1:2에 나오는 “거룩하게 하심”과 “택하심을 받은”이란 표현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사용될 수 있다. 공동체 밖에서 “이방인”(벧전 2:12, 4:3)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묘사한다는 것은 베드로의 서신을 받을 자들의 유대인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반대로 어떤 주석가들은 벧전 1:18과 4:3에서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보다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설마 베드로가 정말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 관하여 유대인들에게 말했겠는가? 또는 그가 유대인 신자들에게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벧전 4:3)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서신의 ‘수신인이 누구인가’보다 ‘그의 기별이 무엇인가’이다.
<부가설명> 베드로는 유대 지역을 벗어나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썼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이들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인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모두인지 편지 자체로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우리는 당시에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베드로가 주는 예수님의 기별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당시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산재해 있지만 또 핍박의 대상들이었지만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생활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감명을 준다. 지금 우리도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이다. 베드로를 통해 주시는 주님의 기별은 그때 필요하고 유용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도 유용하고 필요한 것이다. 1절에 나타난 지역은 지금 다 터키에 있는 지역이다. 초대교회의 흔적을 보려면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터키에 가는 것이 바른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베드로는 자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한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즉 예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말이다. 그가 하는 말은 자기의 말이 아니고 그를 심부름 보낸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이다. 성경은 다 그렇다. 성경을 읽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교훈 : 베드로는 주님께 부름을 받은 사도의 자격으로 오늘날 터키 지역에 흩어져 사는 교회의 신자들에게 중요한 기별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둘째 날(월) 4월 3일 택하심을 받은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전 1:2).
1. 벧전 1:2을 읽어 보라. 베드로의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베드로는 그들을 어떻게 불렀는가?
[벧전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답: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가 유대인 신자에게 썼든지 아니면 이방인 신자에게 썼든지 상관없이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벧전 1:2)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일부는 구원을 받고 일부는 멸망하도록 예정하셨다는 뜻은 아니다. 운 좋게도 베드로의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택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도록 선택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러한 사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2. 딤전 2:4, 벧후 3:9, 요 3:16, 겔 33: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베드로가 말한 “택하심을 받은”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겔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답: 택했다는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는 것이다. 예수를 믿도록 택함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택함을 받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런 계획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수립되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엡 1:4)셨다. 모두가 구원을 받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원래 계획을 보면 모두가 택하심을 받은 것이 맞다. 그분은 온 인류가 영생하도록 예정하셨다. 이는 비록 모두가 자신에게 제공된 속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는 않을지라도 구원의 계획은 모든 사람을 속죄에 포함시키기에 넉넉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예지란 단지 구원에 관한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무엇일지 미리 아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우리의 선택을 강요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녀가 콩깍지 요리 대신 초콜릿 케이크를 선택할 것을 미리 아는 어머니의 예지가 자녀에게 선택을 강요했다고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부가설명> 예지와 예정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것이지만 인간의 논리가 단순하지 않아서 계속된 논란 때문에 더욱 복잡해졌다. 신학은 이것을 이해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것이다. 이 말은 예수 믿을 사람, 안 믿을 사람을 예정했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구원받도록 예정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창세전에 이미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창조되는 사람과 그의 후손들은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하도록 예정된 것이다. 그런데 시조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들여서 이 예정 밖으로 나간 것이다. 이 예정을 거절했기 때문에 사망이 된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창세 전에 예정된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말씀하나님을 독생자로 세상에 보내시고 아담이 예정 밖으로 나간 그것을 다시 예정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셨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이 아담 안에서 예정 밖으로, 즉 영생을 거절한 자리로 나가버렸기 때문에 그들에게 모두 예수 안으로 들어와서 창세 전에 예정된 그 생명을 받으라고 하지만 그것을 받지 않으면 사망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과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가르침이다.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기 위하여 택함을 입었다는 말은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복음과 창조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미리 아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는다는 사실이고 택했다는 것은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은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로 택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누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할지를 미리 아신다.
셋째 날(화) 4월 4일 핵심 주제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 1:7).
1. 벧전 1:3~12을 읽어 보라. 여기서 전하고자 하는 주요 기별은 무엇인가?
[벧전1:3~12]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답: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련된 영원한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고난을 능히 견디고 소망 중에 기뻐하며 말씀 안에서 믿음을 굳게 하라는 권고이다.
벧전 1:1~2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인사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언급한다(벧전 1:2). 삼위의 하나님은 벧전 1:3~12의 주제를 형성한다. 벧전 1:3~9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이 그리고 벧전 1:10~12에서는 성령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베드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역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앞으로 다룰 주제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듭났다(벧전 1:3, 요 3:7 참고). 그들의 전 생애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들을 위해 하늘에 예비된 특별한 유업으로 인하여 변화되었다(벧전 1:3~4).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언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의 열쇠이다.
이러한 소망은 베드로의 서신을 읽는 많은 이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이다. 고난은 불이 금을 제련하듯이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고 정제시킨다. 비록 베드로의 독자들은 지상에서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다. 그분에 대한 믿음의 결과 그들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으며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된 유업의 약속과 구원을 받는다(벧전 1:4).
베드로는 또한 옛날 선지자들이 “너희에게 임할 은혜”(벧전 1:10)를 예언했음을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 백성들이 지금 예수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구원에 대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벧전 1:10)폈다.
믿음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있을 때 베드로는 그들이 선악 사이의 더 큰 싸움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하며 시험 중에도 진리 위에 서도록 그들을 돕고자 했다.
<부가설명> 인류의 구원은 말씀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피 흘려 사망을 처리하시고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드러내셔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거듭나고 부활의 생명을 얻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너무나도 분명한 말로 기록하였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한 것이다. 이것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생명과 구원의 복음이다. 지금 우리는 이것을 이루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기록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현재의 모습이고 마침내 믿음의 결국 영원한 구원에 들어가서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천사들도 이런 복음을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함으로 신자들이 기록된 말씀을 깊이 연구하도록 권고하고 불같은 시련을 능히 이기고 이 소망을 이루는 기쁨에 참여하라고 권한다.
교훈 : 우리가 고난 중에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삶이 새롭게 되며 하늘에 간직된 영원한 유업을 받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넷째 날(수) 4월 5일 구원의 삶을 살아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1. 벧전 1:13~2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무엇이 그리스도인 행위의 동기가 되어야 하는가?
[벧전1:13~21]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답: 교과 저자가 설명한 동기 세 가지가 아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성품, 둘째,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 이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이 기초가 되어서 구원을 받아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 생명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동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이 생명이 진정한 동기일 수밖에 없다.
벧전 1:13이 “그러므로”로 시작한다는 것은 이제 하려는 말이 앞에 했던 말에서 발전된 것임을 보여준다. 어제 본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진 소망과 은혜에 대해 이야기했다(벧전 1:3~12).
이러한 은혜와 소망의 결과로 베드로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벧전 1:13)라고 충고한다. 즉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구원에 반응하여 믿음에 굳게 서도록 마음을 준비해야 했다.
2. 벧전 1:13을 읽어 보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나타난 은혜를 온전하게 바라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벧전1: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답: 예수님 재림하실 때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오직 예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구원의 결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되는 어떤 차원의 행동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그리스도인 행위에 깔려 있는 3가지 중요한 동기 즉 하나님의 성품(벧전 1:15~16), 임박한 심판(벧전 1:17), 속량함의 대가(벧전 1:17~21)를 주목한다.
그리스도인 행위의 첫째 동기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분의 성품은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라는 식으로 요약될 수 있다. 베드로는 레 11:44~45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벧전 1:15~17).
그리스도인 행위의 둘째 동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각자를 그들의 행위대로 공정하게 심판하시리라는 인식에 있다(벧전 1:17).
셋째 동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속량함을 받았다는 놀라운 사실에서 생긴다. 이는 하나님이 매우 큰 값 즉 그리스도의 보혈을 주고 그들을 샀다는 뜻이다(벧전 1:19).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계획된 것임을 강조한다(벧전 1:20).
<부가설명>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많이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 같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였다. 개역 한글 성경에 성품이라는 단어가 모두 18회밖에 없다. 그것도 사람과 관계되어 사용되었지 하나님과 관계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증언의 말씀에 성품이라는 말, 또는 품성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내가 대강 세어본 대로 7천 번이 넘는다. 당연히 우리교회가 성품 또는 품성이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성품이라고 번역된 18번 중에 신약에는 벧후1:4에 한 번 있고 17번은 구약에만 있다. 신약은 ‘퓌시스’라는 말인데 이 단어는 신약에 14번 있지만 성품이라고 번역된 것은 이것뿐이고 나머지는 ‘본질’ 또는 ‘원래’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Character가 아니고 Nature이다. 본성이다. 구약에는 신명기에 10번 있다. 신2:30은 ‘루아흐’이고 나머지는 다 ‘네페쉬’이다. 17번 중에 잠17:27은 ‘루아흐’이고 나머지는 모두 ‘네페쉬’이다. ‘루아흐’나 ‘네페쉬’는 다 ‘생명’을 뜻하는 말이다. 성품은 생명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Character는 생명이 나타나는 모습이다. 하나님은 생명 자체이기고 이 생명의 본질이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이 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이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요일3:16) 이 이 생명이 이 사랑이 우리 행위의 동기이다. 동기가 되어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 그분의 임박한 심판 그리고 우리를 속량하신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다섯째 날(목) 4월 6일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그다음 베드로는 거룩하고 신실한 생애가 무엇인지 말해주는 최상의 표현으로 신자들을 이끌어 간다.
1. 벧전 1:22~25을 읽어 보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그것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논점을 밝히고 있는가?
[벧전1:22~25]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답: 그리스도인은 진리의 말씀을 따라 생활하는 사람이다.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거듭난 생명은 말씀으로만 살게 되어 있다고 가르친다.
베드로의 논리는 신자들이 이미 깨끗하게 되었으며 진리에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벧전 1:22). ‘정결하게 하다’ 또는 ‘깨끗하게 하다’라는 뜻의 동사는 베드로가 앞에서 언급한 ‘거룩하다’ 또는 ‘거룩함’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벧전 1:15).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충성과 침례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 곁에 둠으로써 깨끗해지며,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정결해진다.
그들의 삶에서 일어난 이러한 변화는 다른 변화를 가져온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과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베드로가 가족의 언어로 묘사할 만큼 그러한 관계는 매우 가깝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자매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베드로가 벧전 1:22에서 형제들의 사랑에 대하여 말할 때 사용한 그리스어 ‘필라델피아’는 문자적으로 형제 또는 자매의 사랑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이다.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는 그리스어는 몇 가지가 있다. ‘필리아’는 친구의 사랑, ‘에로스’는 남편과 아내의 열정적인 사랑, ‘아가페’는 이타적인 순수한 사랑을 의미한다. 베드로가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고 했을 때 사용한 말은 ‘아가페’의 동사형이다. 그래서 그는 썩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날 때 우러나오는 그런 종류의 “(순수한) 마음으로”라는 문구를 덧붙였다(벧전 1:22~23, 벧전 1:3 참고).
이런 종류의 사랑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된다. 아가페는 이기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이거나 거듭나지 않은 마음이 나타낼 수 없는 사랑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순결해지는 것과 진리에 순종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었다(벧전 1:22). 진리는 믿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생명의 하나님의 본질적 성질이다. 생명의 본성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다. 이 사랑은 도덕적이거나 또는 감성적으로 말하는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일이 없는 도덕적이거나 감성적인 사랑은 아무 유익이 없는 사랑, 아무것도 아닌 사랑이다.(고전13:1~3) 그러므로 피차 사랑하라는 권면은 성도 상호 간에 생명을 주고 풍성하게 하려는 정신을 나타내라는 권면이다. 이런 정신이 없는 단순한 동정이나 베푸는 인정은 그 나름으로 가치가 있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본질적인 사랑은 아니다. 그런 사랑은 영생의 생명을 얻는 데는 유익이 없다.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이 생명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증거가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다.(요일3:14~16 참고) 베드로는 이런 사랑은 거듭날 때 발생하며 거듭나는 것은 생명의 말씀으로 되는 것이다. 당연히 말씀을 따라 사는 생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훈 : 진리에 순종하여 거듭난 생애는 순결해진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이타적인 사랑으로 형제와 자매를 사랑한다.
여섯째 날(금) 4월 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가려 뽑은 기별> 365~368과 373~376에서 “생명의 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완전한 순종”을 읽어 보라.
베드로전서의 첫 장은 놀랍게도 매우 풍부하고 깊이 있고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베드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함으로 그의 서신을 시작한다. 아버지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주셨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거룩함과 순종에 이르도록 택함을 입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숭고한 기쁨을 누린다. 왜냐하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썩지 않는 유업을 약속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공된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할 수 있다. “그의 편지들은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고 믿음을 굳게 하며 여러 가지 유혹들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는 사람들을 쇄신시켜 선한 사업을 하도록 하는 방편이었다”(사도행적, 517). 베드로전서는 성령의 영감으로 베드로와 그의 독자들이 살았던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충만하여 ‘순결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동기는 무엇입니까? 안교반원들의 대답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또는 얼마나 다양한 동기가 있습니까?
※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동기는 참된 생명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으로 산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➋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에서 두 번이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언급합니다(벧전 1:3, 21). 부활은 무엇이며 왜 우리의 신앙에 그토록 중요할까요?
※ 부활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예수 안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 믿는 믿음은 소용이 없다.
➌ 베드로는 썩지 않을 유업에 대해 말했습니다(단 7:18 참고).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쉽게 사라지거나 파괴되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비하면 우리에게 약속된 유업은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 썩지 않는 유업은 이 세상의 썩어져가는 사물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이다. 성도들이 이것을 상속받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