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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신자답게 살라(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5/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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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5-20 07:04 조회7,01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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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4분

 

● 연구 범위 : 벧후 1:1~15, 엡 2:8, 롬 5:3~5, 히 10:38, 롬 6:11, 고전 15:12~57

 

● 기 억 절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신약 성경은 매우 제한된 공간 안에 수많은 진리가 압축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준다. 이번 주에 우리가 살펴볼 벧후 1:1~14에서 베드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가르친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신을 맡긴 자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일을 이룰 수 있는지를 다룬다. 그는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될 수 있으며 세상의 부패와 정욕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놀라운 진리를 말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의 목록을 나열하면서 그것을 구체적인 순서를 따라 제시한다. 그것들은 차례대로 이어져서 마침내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랑에 도달한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과 옛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는다는 것(벧후 1:9)의 의미에 대해서도 기록한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 속에서 우리 주님의 “영원한 나라”(벧후 1:11)에서 누릴 영생의 약속을 소개한다.

끝으로 우리는 죽은 자의 상태라는 중요한 주제도 잠깐 다룰 예정이다. 이렇게 풍부하고 깊은 진리가 놀랍게도 열네 개의 절 안에 담겨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경건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신성한 능력의 선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느끼기 :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환영 받는 성공적인 신앙생활의 비결을 이해함으로 확신을 얻는다.

행하기 : 꾸준한 품성의 성장을 통해서 부르심과 택하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➋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벧후 1:4)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 하나님께 보배로운 믿음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가 된 것이다. 

➌ 베드로는 그러한 성품이 어떤 단계를 거쳐 성장한다고 말합니까?(벧후 1:5~7)

※ 믿음을 기초로 그 위에 쌓아가는 것처럼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배로운 믿음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➍ 이러한 성품들이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에 이르기까지 자란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숙하는 것을 가르친다. 

➎ 성품의 변화와 영생의 약속과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영생의 생명을 주신 예수께서는 그 생명작용이 성품을 변화시킨다고 가르치셨다.

➏ 우리가 어떻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의 염려를 버리고 이타적인 삶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 부활의 확실한 소망이 있을 때 가능하다. 

 

결론 : 베드로는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절대 넘어지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벧후 1:10~11) 받을 것입니다.

 

 

첫째 날(일) 5월 21일 보배로운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

 

1. 벧후 1:1~4을 읽어 보라. 베드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무엇을 얻었다고 말하는가? 즉 여기서 실제적인 은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벧후1:1~4]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답: 보배로운 믿음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얻었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셨다. 

 

베드로는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벧후 1:1) 보낸다는 말로 서신을 시작한다. ‘보배로운’이라고 번역된 말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또는 ‘동일한 특권을 가진’이란 뜻이다. 이 보배로운 믿음은 그들이 일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것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았다고 말한다. 바울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고 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히 11:6)기 때문에 믿음은 보배롭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러 아름다운 약속들을 붙잡을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은 보배롭다.

베드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강조한다(벧후 1:3).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가 존재하며, 오직 그분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가 거룩함을 얻는다. 이 신기한 능력은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벧후 1:3)아 우리에게 주어졌다(요 17:3 참고).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기록된 말씀, 창조 세계, 믿음과 순종의 삶에서 겪는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시는 일들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를 변화시키는 지식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실제적인 은혜를 통해서 그분을 배워간다.

베드로는 나아가 더 놀라운 사실을 말한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이 크고 보배로운 약속 안에는 “신성한 성품”(벧후 1:4)에 참여하는 것도 포함된다. 인류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그 형상은 크게 훼손되고 퇴색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고,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형상을 회복시키신다. 대신 이러한 변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부패와 정욕에서 떠나야 한다.

 

<부가설명> 베드로도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도 에베소 2:8절에서 그렇게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우리는 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얻는다. 믿음을 받지 않으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어떻게 주시며 우리는 어떻게 그 보배로운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는 일단 그를 만나보고 그와 약속을 해보고 거래를 해보면 결과적으로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하든지 못 믿을 사람이라고 판단하든지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다. 그가 나에게 행한 일에 의하여 판단한다. 믿을 수 있게 하는 것도 그가 하기 나름이고 못 믿게 하는 것도 그가 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믿음을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상대가 어떻게 하느냐에 나의 믿음이 달려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믿음은 상대방이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되는 것이다. 그처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일단 하나님을 만나봐야 한다. 만나서 거래해 봐야 안다. 어디서 만나는가? 성경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이 우리에게 하시는 것을 자세히 보면 결국 하나님의 주시는 보배로운 믿음을 얻게 된다. 그렇게 하면 그냥 따라오는 것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다. 믿음과 함께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보배로운 믿음이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교훈 : 우리에게 주어진 보배로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얻고 신성한 성품에도 참여한다.

 

 

둘째 날(월) 5월 22일 그리스도인 덕목의 목표는 사랑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1. 벧후 1:5~7, 롬 5:3~5, 약 1:3~4, 갈 5:22~23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에서 나오는 공통적인 주제는 무엇인가? 

[벧후1:5~7]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롬5:3~5]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약1:3,4]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답: 교과 저자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각 성경구절에 빠짐이 없이 있는 것은 오히려 인애(오래 참음)이다. 그러나 저자의 말과 같이 사랑이 절정에 있으니 그것이 공통 주제라고 봐야 하는 것 같다. 

 

흔히 고대 철학자들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을 열거하면서 그러한 목록들을 ‘미덕의 목록’이라고 불렀다. 신약 성경에도 몇 가지 예가 나온다(롬 5:3~5, 약 1:3~4, 갈 5:22~23). 비록 철학자들의 목록과 베드로의 목록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점들이 있지만 베드로후서의 독자들은 그러한 목록들에 대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각 덕목들을 정교한 순서대로 배열했다. 각 덕목은 앞의 덕목 위에 세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사랑에서 절정에 도달한다.

베드로가 열거한 각 덕목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문맥에서 믿음이란 다름 아닌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다(갈 3:11, 히 10:38 참고). 덕은 하나의 훌륭한 자질로서 이교 철학자들의 목록에도 열거된다. 물론 믿음이 중요하지만 믿음은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고 거기서 나와야 할 덕목 중 하나가 ‘덕’이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지식은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지식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은 충동을 조절하되, 특히 과도함에 이르기 쉬운 충동을 절제할 줄 안다. 인내란 시험과 박해 중에 나타나는 참을성과 꾸준함이다. 이방 세계에서 경건이란 어떤 신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 나타나는 윤리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신약 성경이 말하는 경건 역시 참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윤리적인 행위라는 개념을 수반한다(딤전 2:2). 형제 우애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의 가족과 같이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건함은 서로에게 친절한 공동체를 낳는다. 베드로는 목록의 최종 단계로 사랑을 꺼낸다. 바울처럼 베드로에게도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고전 13:13)다.

 

<부가설명> 베드로가 열거한 덕목들은 흔히 성령의 열매와 대조된다. 바울은 아홉을 말하고 베드로는 여덟을 말했다. 서로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베드로는 이 여덟 가지를 말할 때에 ‘더하고’라는 말을 사용했다. ‘더하다.’ 개역에는 ‘공급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에피코레게오’인데 우리말의 두 번역은 다 맞는 번역이다. 공급하다 더하다는 말은 원문에는 이 여덟 가지를 이야기하는 첫 머리에 나온다. 이것은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포개는 것 같은 표현이 된다. 맨 꼭대기에 사랑이 있다. 기초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앞의 구절에서 말한 보배로운 믿음이다. 이 믿음이 기초가 될 때에 함께 따라오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 모든 것 안에 있는 것들이 바로 이 것들이다. 이것을 학자들은 베드로의 사다리라고 한다. 한 계단씩 한 계단씩 올라가서 꼭대기에 이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정의 개념으로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보배로운 믿음을 주실 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보배로운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생명력에 의하여 생산되는 은사들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 아니, 예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면 그 생명에서 나오는 것들이 성령의 열매, 열덟 가지 덕목들이 아니겠는가. 우리에게 참으로 예수님의 생명이신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의 영적 성장은 믿음에서 출발하여 최종적으로 사랑에 이르는 덕목들의 성장과 함께한다.

 

 

셋째 날(화) 5월 23일 신자답게 살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베드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써 추구해야 할 목록을 제시한 후에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1. 벧후 1:8~11을 읽어 보라. 한 신자를 위해 이미 이루어진 일들과 그가 실천해야 할 삶의 방식 사이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벧후1:8~11]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답: 베드로가 가르친 여덟 가지 덕목이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은 옛 죄를 깨끗하게 한 것을 잊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옛 죄를 깨끗하게 함을 받은 것은 이루어진 일이고 여덟 가지 덕목은 깨끗함을 입은 사람의 삶의 방식이다.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 적용된 새로운 현실에 맞게 살아가라고 충고한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의 특성들은 그들에게 흡족하게 있다(벧후 1:8).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다 새로운 현실에 맞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벧후 1:8). 그런 사람들은 그들이 “옛 죄”(벧후 1:9)에서 깨끗하게 된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신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 적용된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용서, 깨끗함 그리고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권리를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벧후 1:10) 해야 한다. 이전에 행하던 대로 살며 쓸모없고 열매 없는 그리스도인이 될 변명의 여지는 없다.

“우리는 믿음에 관하여 많이 듣고 있다. 그러나 행함에 관하여 더 많이 들을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안이하고, 편안하고, 고생 없는 신앙 생애를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있다”(믿음과 행함, 50).

 

2. 롬 6:11을 읽어 보라. 바울은 오늘 베드로가 하는 말과 어떤 비슷한 말을 하는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답: 표현은 다르지만 같은 사실을 말한다. 옛 죄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가 되었다고 가르친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와 여덟 가지 덕목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베드로와 바울은 모두 신자답게 살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었으며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가 부르심대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할 의무가 있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의 의미이다.

 

<부가설명>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사고방식, 언어방식, 생활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산다는 것이다. 옛날 생활방식은 사망의 방식, 죄의 방식이었지만 예수를 믿고 옛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생명의 방식, 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옛 죄가 용서받은 아무런 증거가 없다. 옛 죄를 용서받은 것을 잊어버리고 용서받지 않은 자리에 그냥 있는 것이다. 예수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전제는 육신에 있었으나 이제는 영에 있는 것이다. 육신의 사고와 생활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영의 사고와 생활이 되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우리는 영에 있는 참 그리스도인인지 매일 매일 스스로 물어보고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 우리는 과거의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라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힘써 지키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열매 맺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넷째 날(수) 5월 24일 장막을 벗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3~14).

 

1956년 오스카 쿨만은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 : 신약 성경의 증언>이라는 제목의 짧은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부활의 개념과 영혼불멸의 개념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신약 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 편에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고 말했다. 후에 그는 “내 저서 중 그처럼 큰 환호와 격렬한 증오심을 일으킨 책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1. 고전 15:12~57을 읽어 보라.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가?

[고전15:12~57] 본문이 길어서 여기 옮기지 않는다. 각자가 찾아 읽어보기 바란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계시의 말씀이다. 

 

답: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예수를 믿고 성도로 산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을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을 한다고 분명히 계시하였다.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죽음과 부활에 관한 신약 성경의 연구를 통해서 쿨만이 옳다고 인정한다. 신약 성경은 몸은 죽고 영혼은 생존한다는 영혼불멸 사상이 아닌 부활의 개념을 당연하게 여긴다.

예를 들어 살전 4:16~18에서 바울은 사랑하는 자를 잃은 자들에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리라는 지식을 가지고 위로를 받으라고 권면한다. 고전 15:12~57에서 그는 부활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우선 기독교 신앙이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해 있음을 주지시킨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에 대한 믿음은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러나 그분은 정말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즉 죽음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분을 믿는 모든 자들도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고전 15:35~50에서 바울은 몸의 부활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현재의 몸과 부활할 때 받을 몸을 비교한다. 현재의 몸은 죽겠지만 부활의 몸은 죽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신약 성경은 영혼불멸이 아닌 부활의 관점에서 죽음을 설명한다. 벧후 1:12~14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신학적인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부가설명> 성경의 종교는 예수님의 부활한 사실에 의하여 확고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일이 없으면 사망의 종교일 뿐이다. 다는 종교들처럼 영혼불멸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최초에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유혹한 뱀, 곧 사단 마귀의 거짓말이다. 그는 여자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아도 결코 죽지 않는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은 아담부부는 죽었다. 사단은 자기의 거짓말을 사실로 알도록 다시 한 번 속인 것이 몸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소위 영혼불멸설을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의 영혼이 몸은 없이 영으로만 활동한다는 것을 성경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믿도록 하기 위하여 그의 부하 타락한 천사들을 죽은 자의 귀신노릇을 하게 하여 아직도 몸을 가지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속인다. 사후 세계를 볼 수 없는 사람들은 이런 사단의 장난에 완전히 속아 있는데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가 앞장서서 이 속임수를 성경진리인 것처럼 교리를 만들어 가르치고 있다. 사단이 얼마나 성공했는가.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그대로 사후 상태와 마지막 날 부활을 믿어야 한다. 죽은 자는 부활하는 그날까지 아무것도 모른다. 이미 어디서 말한 것 같은데 사도행전은 예수부활 증거행전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하였고 이 진리를 믿을 때 예수님 재림하실 때 성도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한다는 소망을 확실하게 하였다. 베드로가 이 장막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은 몸을 벗고 영혼이 어디에 간다는 뜻이 아니다. 죽을 때가 가깝다는 것이고 그는 부활의 소망 중에 잠잘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벧전 1장부터 부활의 소망을 강하게 이야기했다. 

 

교훈 : 성경은 일관성 있게 영혼불멸이 아닌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친다. 죽은 의인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영원히 죽지 않을 몸으로 부활한다.

 

 

다섯째 날(목) 5월 25일 죽음을 목전에 둔 신앙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2~14).

 

1. 벧후 1:12~15을 읽어 보라. 베드로가 곧 자신의 장막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인가?

[벧후1:12~15]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답: 베드로가 죽을 날이 가까웠다는 뜻이다. 

 

벧후 1:12~14은 서신의 동기를 밝힌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마지막 기별 또는 증언을 서신에 담았다. 그가 임박한 죽음을 예상했다는 사실은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벧후 1:13~14)라고 말한 어법에서 드러난다. 베드로는 몸을 자신이 죽을 때 벗게 될 장막으로 비유했다. 베드로가 장막을 벗겠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분명히 몸을 의미하기 때문에 현대의 번역성경들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여러분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곧 육신을 떠나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벧후 1:13~14, 쉬운성경)라고 번역했다. 자신이 장막 혹은 몸을 벗을 것이라는 베드로의 말 속에는 그의 영혼이 일종의 분리된 존재로서 생존하리라는 암시는 전혀 없다.

 

2. 벧후 1:12~15을 다시 읽어 보라. 베드로는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러한 태도는 믿음에 대하여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는가?

 

답: 죽기 전에 신자들에게 소망을 확실하게 증거하고 베드로가 죽은 후에도 그들이 이미 받은 믿음에 굳게 서도록 권고하는 자세였다. 우리도 그와 같은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벧후 1:12~15은 베드로의 편지에 엄숙함을 더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곧 그칠 것을 알고 편지를 기록한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려움, 염려, 불길함의 조짐이 없었다. 대신 베드로의 초점은 자신이 남겨둘 자들의 안녕에 맞춰져 있다. 그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에 굳게 서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살아있는 한 그들에게 신실하게 살라고 당부할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주님에게서 얻은 경험의 진실성과 깊이를 볼 수 있다. 즉 그는 곧 죽을 것이다. 심지어 그것은 편안한 죽음이 아닐 것이다(사도행적, 537~538 참고). 그럼에도 그는 다른 이들의 유익에 이타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진실로 베드로는 자신이 가르친 믿음대로 사는 사람이었다.

 

<부가설명> 사람은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살아있고 싶은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들은 상실감에 사로잡힌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라고 했다.(히9:27) 그러므로 한 번 죽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죽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하고 함께 살던 사람이 죽을 때 대화가 끊어지고 친교가 없어지기 때문에 슬퍼하게 된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이 확실하면 죽는 것은 그냥 깊은 수면상태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믿음이다. 요셉은 자기가 죽고 이스라엘이 해방되어 약속의 땅에 갈 때에 자기 해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유언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항상 기억하라가는 확고한 신앙의 부탁이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가 임종하면서 후손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베드로도 같은 마음으로 자기 임종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후생들에게 소망에 대한 신앙을 확고하게 하도록 당부하는 편지를 쓴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죽음을 보지 않는다고 예수께서 약속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이 말씀은 예수를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영원한 사망을 당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데 곧 둘째 사망과 상관없다는 말씀이다. 둘째 사망이 진짜 사망이다. 이 사망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것이 잠자는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라고 확언하는 말씀이다. 베드로는 이 소망이 확실했고 우리도 확실하다. 믿는가?

 

교훈 :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염려의 주제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살아있는 동안에 동료 신자들의 믿음을 격려하고 이타적인 관심을 기울인다.

 

 

여섯째 날(금) 5월 2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베드로는 자신이 곧 죽게 될 것을 알았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어떻게 죽게 될 것도 알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의 결말은 어떠했는가?

“유대인이요 외국인으로서 베드로는 채찍질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선고를 받았다. 이 무서운 죽음을 내다본 사도는 예수께서 심문받으시는 시간에 그분을 부인한 그의 큰 죄를 기억하였다. 한때 그처럼 십자가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그는 이제 복음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버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주님을 부인하였던 자신이 주님이 죽으신 동일한 방법으로 죽는 것은 너무도 큰 영광이라고 느낄 뿐이었다. 베드로는 그 죄를 성실히 회개하였으며 그에게 양떼를 먹이라고 하신 고상한 사명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용서함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최후의 무서운 장면의 고통에 대한 생각조차도 슬픔과 회개의 괴로움을 감소시킬 수 없었다.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아 달라고 사형 집행자들에게 간청하였다. 그 요구는 수락되었다. 위대한 사도 베드로는 이런 방법으로 죽었다”(사도행적, 537~538). 이런 일을 내다보고도 베드로의 관심은 양떼의 영적 안녕에 있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신자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거듭났으면 신자답게 살아질 수밖에 없다. 

 

➋ 우리는 벧후 1:5~7에 나오는 영적 덕목들을 어떻게 잘 나타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서로를 도울 수 있을까요?

※ 생경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참으로 받았으면 그렇게 된다. 서로 복음과 진리로 거듭나는 경험을 함께 하도록 말씀과 기도로 도우도록 해야 한다. 

 

❸ 벧후 1:12에서 말하는 “이미 알고 있는 진리” 또는 “현대 진리”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시대의 “현대 진리”는 무엇일까요?

※ 각각 그 시대에 가장 필요한 복음 진리를 깨닫고 그 위에 굳게 서는 것이다. 이 시대의 현대진리를 세 천사의 기별을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이며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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