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베드로가 묘사하는 예수님(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5/20/17 > 교과토의 자료

본문 바로가기

운영진
x


교과토의 자료 보기

교과토의 자료

제8과 베드로가 묘사하는 예수님(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5/20/17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5-13 08:01 조회7,113회 댓글0건

본문

5월 20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9분

 

● 연구 범위 : 벧전 1:18~19, 골 1:13~14, 사 53:1~12, 요 11:25, 시 18:50, 벧후 1:1

 

● 기 억 절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베드로가 다루고 있는 특정한 문제나 배경과 상관없이 그의 초점은 예수님께 맞춰져 있다. 그의 모든 필적 속에 예수님이 스며들어 있고 그분은 마치 그의 서신을 직조하는 금실과 같다.

그는 첫 줄부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소개하고 끝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벧전 5:14)라고 마친다. 예수님은 그의 핵심 주제이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과 희생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그분이 겪으신 큰 고초에 대해 말하며 그분의 고난을 우리의 모본으로 제시한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과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말한다. 덧붙여 예수님을 단순히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아니라 신성을 가지신 메시아(Divine Messiah)로 소개한다. 우리는 베드로전서에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더 많은 증거를 본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육체로 세상에 오셔서 사시다가 죽으셨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영생의 소망과 약속을 얻을 수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메시아 되심, 그분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재림이 베드로 신학과 교훈의 중심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특권으로 여기고 재림의 날에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 믿음과 소망을 간직한다.

행하기 : 헛된 삶을 버리고 신실한 믿음으로 옳은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긴다.

 

➋ 메시아 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이루셔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명이다. 즉 대속의 속죄 사명이다.

➌ 그분이 흠 없는 제물이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 우리의 모든 흠을 대속하실 수 있으신 분이신 것을 가르치고 그분 안에서 우리도 흠 없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➍ 예수님이 메시아이자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의 가치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 우리의 구원의 가치, 곧 존재 가치를 하나님만큼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➎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어떤 확신과 소망을 줍니까?

※ 사망을 이긴 것을 확실히 증거하여 생명이 예수 안에서 영원한 것을 드러낸다. 

 

결론 : 베드로는 그의 모든 논의를 예수님의 기별과 연결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죄 중에 빠진 백성들을 속량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거룩한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으며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실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그분께 있습니다.

 

 

첫째 날(일) 5월 14일 우리의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

 

성경의 주요 주제 또는 중심 주제는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 바벨론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와 계시록 사이에서 성경은 “잃어버린 자를”(눅 19:10)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나타난다.

 

1. 벧전 1:18~19과 골 1:13~14을 읽어 보라. 대속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피는 대속과 무슨 관계인가?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골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답: 유전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되는 것이고 죄 사함을 받아 흑암에서 아들이 나라로 옮기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예수님의 보혈로 값을 치르셨기 때문이다. 

 

벧전 1:18~19은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가…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나오는 두 가지 핵심 개념은 ‘대속’과 ‘희생 제물’이다.

대속이라는 개념은 성경에서 몇 가지 방법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초태생 나귀(제물로 사용할 수 없음)와 장자는(출 34:19~20)는 어린양으로 대속해야 했다. 가난해서 팔았던 것은 돈으로 되살(대속할) 수 있다(레 25:25~26). 종도 대속할 수 있었다(레 25:47~49). 베드로전서는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벧전 1:18) 다름 아닌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벧전 1:19) 된 것임을 알려준다.

베드로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약 성경의 희생 제물에 비유하였다. 죄인은 흠 없는 양을 성소에 가지고 왔다. 그는 양에게 손을 얹었다(레 4:32~33). 그다음 양을 잡아 제사장이 그 피의 일부를 제단에 바르고 나머지는 밑에 부었다(레 4:34). 희생 제물의 죽음은 제물을 바친 자에게 속죄를 제공했다(레 4:35).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의 옛 생애와 운명에서 우리를 대속하셨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피를 흘려 죽으신 것은 생명을 버린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한다. 생명이 피에 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피가 생명을 속할 수 있다고 했다.(레17:11,14) 우리가 죽을 그것을 예수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마치 성소에서 죄인 대신 제물로 가져온 짐승이 피를 흘려 죽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하고 속량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피를 흘려 죽으신 의미가 여기 있고 그래서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구원에 중요한 것이다. 베드로가 가르쳐준 대로 예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실 때 피를 흘려 죽으신 것으로 우리도 그분의 육체의 고난과 흘리신 피의 의미와 공효를 믿을 때 죄를 그치게 되는 것이다.(벧전4:1)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이는 용서가 없다고 했다.(히9:22) 믿음으로 예수의 보혈을 개인적으로 적용할 때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고 흑암의 나라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다. 구원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다.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다.(요1:12,13)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부자관계가 되고 부자관계는 혈연관계인데 이때 혈이 곧 예수님의 보혈이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이라고 하신다. 부자관계가 확인되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 확실한가?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원한 생명인가? 시시로 확인해보자.

 

교훈 :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성경의 주제이며 그 중에서도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핵심 주제이다.

 

 

 

둘째 날(월) 5월 15일 그리스도의 고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종종 이야기한다. 고난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패션(passion)’은 고통을 당한다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해서 생애의 마지막 기간에 당하신 고통을 일컫는다.

 

1. 벧전 2:21~25과 사 53:1~12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하는가?

[벧전2:21~25]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사53:1~12]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답: 육체의 고통을 겪으셨는데 결국 나무에 달려 죽음의 고통을 겪으셨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기 위한 고통이었다. 

 

예수님의 고난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분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4).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입술에서조차 거짓이 없으신(벧전 2:22) 완전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러한 교환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구원의 계획이 주어졌다.

 

2. 사 53:1~12을 다시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신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주는가?

[1번 문제 성경이 다 있다.]

 

답: 우리의 허물과 죄를 인하여 고난 당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려는 사랑이시다. 

 

“사탄은 맹렬한 유혹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쥐어짜듯이 괴롭혔다. 구주께서는 무덤의 문을 꿰뚫어 보실 수 없었다. 그분이 정복자로서 무덤에서 나오리라는 희망이 주어지지 않았고, 아버지께서 자기의 희생을 가납하셨다는 말도 그분에게 들려오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히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시대의 소망, 753).

 

<부가설명>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의 정도는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분은 생명자체이시고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지금 생명을 버리려고 한다. 그 고통의 정도는 인간이나 천사들이 결코 측량할 수 없다. 성경도 그 고통을 묘사하지 못한다. 이사야가 예언으로 쓴 것을 읽고 받아들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말할 때 그의 육체적 고통을 염두에 두는 것이 대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유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육체의 고통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은 죄 짐의 고통이었다. 이 고통이 너무 커서 육체의 고통은 더 큰 고통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우리가 다쳤을 때 가장 아픈 곳의 고통을 느낀다. 그것이 좀 나아지면 다음 아픈 곳을 느끼게 된다. 죄 짐의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에 육체의 고통을 그 고통에 묻힌 것이다. 그만큼 죄의 고통은 크고 심한 것이었다. “이 최대의 고민의 시간에 하나님께서 구주로부터 얼굴을 돌리심으로 인간이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분의 마음을 찔렀다. 이러한 고민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분은 육체적 고통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DA 753.1) 그것은 영원한 사망, 곧 둘째 사망의 고통이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는 것이다. 

 

교훈 :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멸망을 피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한 구원의 계획이 실현되었다.

 

 

셋째 날(화) 5월 16일 예수님의 부활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1. 벧전 1:3~4, 21, 3:21, 요 11:25, 빌 3:10~11, 계 20:6을 읽어 보라. 이 성경 말씀들은 어떤 위대한 소망을 가리키며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벧전1:3,4,2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요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빌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답: 부활과 영생과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리키며 환난의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승리와 평화의 보증이 된다. 

 

알다시피 베드로전서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고난을 겪는 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서두부터 독자들의 관심을 그들 앞에 있는 소망에 두게 한 것은 매우 적절한 노력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산 소망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기초한 소망이기 때문이다(벧전 1:3).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유업을 내다볼 수 있다(벧전 1:4). 그래서 우리는 상황이 나빠질지라도 모든 것이 끝날 때 우리를 기다리는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일종의 보증이다(고전 15:20~21).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고전 15:17)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서 일어나심으로 그분에게 죽음을 정복할 능력이 있음을 보이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분의 부활은 종말에 있을 우리의 부활의 근거가 된다.

그러한 소망과 약속이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것들은 부활의 약속에서 정점에 이른다. 우리는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과 달리 죽음이란 의식이 없는 수면 상태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남아있지 않다.

 

<부가설명> 부활은 성경 종교의 핵심이다. 부활이 없으면 성경 종교는 헛것이다.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속죄를 다 이룬 줄 착각하고 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바로 위에 인용한 고전15:17을 읽어보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믿음이 헛것이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에 있다고 했다. 부활이 속죄를 확정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증이 드러나는 것은 첫째 부활에 참여할 때이다. 물론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 앞에 진정으로 나올 때 우리는 죄 사함을 받는다. 즉 부활의 확약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그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뿐만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확신하는 믿음을 굳게 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예수 부활 증거행전이다. 사도행전에 십자가 이야기는 두 번 나온다. 또 예수께서 죽으신 사실도 직접적으로는 두 번 정도 기록했으나 부활은 열 번 이상 기록했다. 사도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부활한 것을 믿는 것이고 그분 안에서 우리도 생명의 부활을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그는 결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확신하고 있는가?

 

교훈 :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는 보증이다. 죽음은 의식이 없는 수면 상태이며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깨어날 것이다.

 

 

넷째 날(수) 5월 17일 메시아이신 예수님

 

예수님이 자신을 누구로 알고 있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예수님은 지상 봉사의 매우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셨다. ‘그리스도(그리스어로 크리스토스)’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메시아(히브리어로 마쉬아흐)’이다. 그 말은 ‘기름을 붓다’라는 뜻의 동사의 어근에서 유래했고 구약에서 다양한 배경에서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이방인 왕 고레스를 가리켜 사용되기도 했다(사 45:1 참고).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에 그는 이상적인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에서부터 유래된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1. 메시아나 기름부음과 관련된 다음의 구약 성경절들을 읽어 보라. 말씀의 배경에 따르면 그것은 어떤 의미인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칭했을 때에 그는 그 의미를 얼마나 이해했을까?

“세상의 군왕들이…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시 18:50).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예순두 이레가 지날 것이요…”(단 9:25).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금하시는 것이니”(삼상 24:6). “여호와께서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고레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사 45:1).

 

답: 통치자로 임명받은 것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이 구절들을 이해했다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세상의 통치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언했지만(마 16:16~17), 그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했을 리는 없다.

당시 이스라엘 안에는 메시아에 대한 다양한 개념이 있었다. 그래서 위의 말씀들이 메시아가 장차 어떻게 되고 무엇을 행할지 어렴풋하게 보여주더라도 그에 대한 그 완전한 그림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요 7:40은 메시아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는 다윗의 후손이며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사 11:1~16, 미 5:2). 여기까지는 맞았다. 그러나 대중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아가 다윗처럼 유대인의 원수들을 무찌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로마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메시아는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베드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이 인류를 위해 이루실 일들에 관하여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베드로전·후서에서 열다섯 번이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부가설명>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직책에 임명되는 것을 나타낸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에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세 종류가 있다. 곧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이다. 사울이나 다윗, 솔로몬이 왕으로 취임하기 위하여 다 기름부음을 받았다. 제사장들에 대하여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그 사실이 잘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에 대한 기록은 왕상 19장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선지자의 직무를 맡기도록 한 사실 한 번만 기록되어 있다.(왕상19:16) 이렇게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다 예수님이 행하실 직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왕이시오, 대제사장이시며 선지자이시다. 예수님은 이 세 직책 중에 하나만 수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셋 다 수행하신다. 그러므로 한 직책만이 아니기 때문에 통합적으로 메시어, 또는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방인 고레스가 여호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기록된 것은 그가 포로 된 유대 민족을 해방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낸 것이 예수께서 죄에 포로 된 세상 사람들을 죄에서 해방하여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복음적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이해로 부활하셔서 생명의 왕으로 봉사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날 아침 환희로 뵈어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이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메시아의 사명을 성취한 그분을 우리는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다섯째 날(목) 5월 18일 신성한 메시아이신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하나님] 곧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 우리와 더불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얻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 킹제임스흠정역).

 

베드로는 예수님이 메시아이실 뿐 아니라 또한 ‘주’라는 사실을 알았다. 즉 서신을 기록할 당시 베드로는 메시아가 곧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주’라는 호칭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사용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했다. 벧전 1:3과 벧후 1:8, 14, 16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 주 그리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신약의 다른 기자들처럼 베드로도 다음과 같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로 묘사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벧전 1:3). 예수님은 사랑하는 아들로 묘사된다(벧후 1:17). 주님으로서 예수님의 권위와 하늘의 지위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특별한 관계에서 비롯된다.

 

1. 벧후 1:1, 요 1:1, 요 20:28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려주는가?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20: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답: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다. 

 

벧후 1:1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원어를 보면 ‘하나님’과 ‘구주’라는 낱말 앞에 각각 동일한 정관사가 사용되었다.(각각 동일한 정관사가 사용된 것이 아니고 정관사 하나가 하나님이란 단어 앞에 있다. 이 정관사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같이 사용되었다. 이런 경우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동격이다.) 이는 문법적으로 ‘하나님’과 ‘구주’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벧후 1:1은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는 가장 명확한 증거 중 하나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점차 신약 성경의 증거들을 종합했다. 신약의 다른 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구분되어 있다(아버지/아들에 대해서는 벧전 1:3, 벧후 1:17 참고, 성령에 대해서는 벧전 1:12, 벧후 1:21 참고). 예수님은 성령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시간이 흘러 많은 논의 끝에 교회는 가능한 한 신성의 거룩한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발전시켰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기본교리 28개조 안에 삼위일체 교리를 포함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베드로전·후서에서 메시아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묘사를 볼 수 있다.

 

<부가설명> 오늘날 어떤 교단은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들로 낳았다고 주장한다. 시편 2:7을 인용하여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예언의 신의 증언에는 “그리스도에게는 최초부터 있고 빌려오지 않고 다른 곳에서 파생(派生)되지 않은 생명이 있다.”(소망530)고 분명히 증언하였다. 예수님은 자존하신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베드로는 이것을 잘 알았고 확신하였다. 벧후1:1의 문장은 이것을 고백하는 문장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장로교 총회성경연구소 연구원인 김재수 목사의 설명을 소개한다. “헬라어 문법에 그란빌 샤프 법칙이란 것이 있다. 그란빌 샤프는 (Granville Sharp 1735-1813) 영국의 노예 해방운동가 이다. 보다시피 이 법칙은 초대 교회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에 와서 발견되어졌다. 이 법칙은 사람을 지칭하는 동격 단수인 두 보통 명사가 하나의 관사와 접속사καὶ(카이) ‘그리고’ (and) 로 연결되었을 때, 그 두 명사는 한 사람을 지칭한다는 법칙이다. 영어 예문을 들어서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the teacher and doctor. 이 문장은 교사이며 의사인 한 분을 표현한다.

the teacher and the doctor. 이 문장은 한 분의 교사와 한 분의 의사, 도합 두 사람을 표현한다.” 베드로는 정관사 tou'(투)를 하나님 앞에 쓰고 카이를 쓴 다음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기 때문에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이시다. 아멘. 아무도 혼란을 겪을 필요도 이유도 없다. 

 

교훈 : 베드로는 신성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구분하였고 예수님을 메시아요 또한 하나님으로 불렀다.

 

 

여섯째 날(금) 5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기독교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그리스어 ‘크리스토스’에서 이름을 따왔으니 ‘메시아’로 시작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그 히브리어 낱말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구원자와 관련이 있는데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새 시대의 출범을 알리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다. 그 말의 히브리어와 그리스어가 모두 ‘기름을 붓다’라는 동사의 어근에서 유래한다. 확실하게 신약 성경의 기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부름으로써 그를 특별한 임무를 위해 구별된 자로 간주했다.

‘크리스토스’라는 칭호는 신약 성경에서 500회 이상 등장한다. 물론 예수의 시대에 메시아에 대한 하나 이상의 개념이 존재했지만 일반적으로 1세기의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인물로 보았다. 그는 시대의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수립될 것인지 예고한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 예수는 ‘메시아’라는 칭호를 수용했으나 그 말의 사용을 권장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은 그 사용을 어렵게 만드는 정치적인 함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묘사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그 말을 스스로에게 사용하기를 꺼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썼던 베드로(마 16:16~17)나 사마리아 여인(요 4:25~26)을 책망하지 않았다.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막 9:41)인 줄 알면서도 제자들 중 하나에게 물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행위에 대한 예수의 언급을 볼 때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인식했다.”—The SDA Bible Commentary, vol. 12, p. 165.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사 53:1~12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물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왜 그분이 우리의 대속물이 되셔야 할까요?

※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4절 5절은 직접적으로 대신하신 사실을 묘사한다. 우리가 사망의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사망을 처리하시기 위하여서이다. 

 

➋ 역사를 보면 사후에 대한 기독교의 약속은 때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현실은 어렵지만 내세를 생각하라는 식의 가르침을 일종의 기만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그들의 비난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가르친 사후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다른 잘못된 가르침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대총회 북아태지회 한국연합회 성경통신학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한국연합회 선교부 | 고유번호증번호: 204-82-62040 | 대표자: 강순기 | 부서장: 신광철
Copyright © 2014 안식일학교·선교부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