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섬김의 지도력(질문, 대답, 부가설명)05/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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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05-06 09:04 조회6,508회 댓글0건본문
5월 1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3분
● 연구 범위 : 벧전 5:1~10, 행 6:1~6, 렘 10:21, 마 20:24~28, 잠 3:34, 계 12:7~9
● 기 억 절 :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교회성장에 관한 연구에서 항상 강조되는 것은 훌륭한 지도력의 중요성이다. 훌륭한 지도력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서 비전을 얻고 교회의 각 구성원이 자신의 영적인 은사에 따라 복음의 사명을 추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력은 매우 어려운 분야이다. 교회는 이미 분주하지만 시간을 쪼개서 헌신하는 자원봉사들에 의해 운영된다. 신자들은 그들이 지지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면 출석을 중단함으로 그들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다. 심지어 훌륭한 지도자는 또한 깊은 영성을 갖춰야 한다. 베드로가 박해를 받고 있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는 특히 그러한 때에 공격을 받기 쉽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일을 맡기에 적합한가?
벧전 5:1~10에서 베드로는 지역 교회 차원의 지도력 문제를 다룬다. 그는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요구되는 몇 가지 중요한 자질을 기록한다. 그의 권면은 그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만큼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학습 목표
깨닫기 : 훌륭한 지도력과 섬김의 사역의 핵심 요소가 겸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느끼기 : 예수님이 보이신 겸손과 봉사의 정신을 본받기를 갈망한다.
행하기 : 하나님이 필요하신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 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라는 권면에 귀를 기울인다.
➋ 초기 교회가 세운 장로와 집사들은 어떤 지도자였을까요?
※ 고난이 분명한 중에 죽도록 충성하는 믿음으로 직분을 받는 사람들이다.
➌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지도력을 우리의 모본으로 보여주셨습니까?
※ 섬기는 지도자의 본을 보이셨다.
➍ 사회에서뿐 아니라 특히 교회에서 왜 겸손이 지도자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어야 할까요?
※ 예수님의 정신이다.
➎ 그대는 사탄이 지도자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교회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도록 공격할 것이다.
결론 : 장로는 교회에서 목자와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베드로는 지도자뿐 아니라 젊은이든 노인이든 모든 신자에게 겸손과 섬김의 정신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춘 자들을 언젠가 높이실 것입니다.
첫째 날(일) 5월 7일 초기 교회의 장로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딤전 5:17).
1. 행 6:1~6, 14:23, 15:6, 딤전 5:17, 벧전 5:2을 살펴보라. 이 말씀들은 초기 교회의 어려움과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해 어떤 관점을 제공하는가?
[행6:1~6]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4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행14: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행15: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딤전5:17]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답: 교인들이 많이 불어나자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다. 교회를 잘 이끌어가기 위하여 장로와 집사들을 세우도록 했다. 조직이 필요하고 질서 안에서 교회가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가 되어 교회에 등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결과이다. 그러나 초기 교회의 경험이 예증하듯이 급성장에는 문제가 따른다.
예를 들어 행 1~5장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수많은 사람이 기독교로 개종한 사실을 기록한다. 행 6:1~6은 그 결과를 보여주는데 지도력이 감당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커져서 교회의 일상적인 역할을 관리하기 위해 정돈된 조직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조직적인 구조의 취약성을 노출시킨 문제는 차별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헬라파 신자들은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의 배급에서 제외되었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그래서 12사도를 도와 교회의 재정을 관리할 집사들이 특별히 임명되었다.
초기 교회는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의 지도를 받았다. 그럼에도 교회 구조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초기에 필요한 교회 지도자 집단은 장로였다. 그들은 각 지역 회중을 위해 세움을 입었다. 사실 바울과 바나바도 예수님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막 생성된 그리스도인 집단을 이끌 장로들을 세웠다(행 14:23).
초기 기독교에서 장로들은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지역 교회의 장로로서 그들은 때로 새로운 회심자를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공동체의 복리를 위해 필요한 일들이 이루어지게 했다(행 15:6, 딤전 5:17, 벧전 5:2).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 조직과 질서를 세우셨다. 천지자 주의 규례대로 유지된다고 계시하였다.(시119:91)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고전14:50) 당연히 그의 교회가 질서대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은 둘 말할 필요가 없다. 첫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기본적으로 무질서한 존재가 되었고 제멋대로 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모이면 무질서하려는 경향으로 흐른다. 이것은 사람이 많아지면 열역학 제2법칙이 말하는 엔트로피 법칙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조질서대로 교회가 새로운 피조물의 조직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 조직이 바로 인체조직으로 비유되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처음에는 무질서한 모습이다가도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게 되어야 한다. 이유는 생명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엔트로피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울은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교회의 모든 직분들은 지체의 역할이라고 가르쳤다. 목사, 장로 집사 등은 지체의 직무에 대한 표현이다. 몸의 지체들은 서로 시기하거나 다투는 일이 없다. 협력하고 서로 위한다. 교회의 질서가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의 시작은 이랬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런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직하고 조직의 규칙을 따라 교회를 운영하도록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이다. 역사의 종말에 재림교회는 새 창조의 질서를 세워야 할 것이다.
교훈 : 교회는 성령의 지도를 받지만 여러 다양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조직을 갖추고 장로나 집사와 같은 지도자들을 세울 필요가 있다.
둘째 날(월) 5월 8일 장로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벧전 5:2).
1. 벧전 5:1~4을 읽어 보라. 교회에서 장로들의 역할을 수행하려면 어떤 태도가 필요한가? 역할과 관계없이 이러한 원칙은 우리 각자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벧전5:1~4]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답: 억지로 하지 않고 이익을 위하여서도 아니고 그리스도 고난의 증인으로서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하여 봉사해야 한다. 또 주장하는 자가 아니고 본이 되어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곧 선한 목자같이 일해야 한다.
베드로는 자신도 동료 장로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장로들에게 지침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주지시킨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장로에게 있어야 할 첫 번째 자질을 강조한다. 즉 장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고난을 겪으셨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소망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이해해야 한다.
베드로는 장로의 역할을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 비유한다. 교회를 양떼로 비유한다는 것은 신자들이 양처럼 종종 맘대로 떠날 수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그들이 무리 가운데로 돌아오고 그 안에서 협력할 수 있도록 이끌 목자가 필요하다. 장로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겸손한 모본으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2. 다음의 말씀들은 목자들에게 무엇을 경고하는가?(렘 10:21, 겔 34:8~10, 슥 11:17)
[렘10:21]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 떼는 흩어졌도다.
[슥11:17] 화 있을진저 양 떼를 버린 못된 목자여 칼이 그 팔에, 우편 눈에 임하리니 그 팔이 아주 마르고 그 우편 눈이 아주 어두우리라.
답: 반드시 여호와를 찾아야 하고 양 떼를 버리지 않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경고한다.
기독교 지도자들의 역할은 목자가 양들을 돌보는 것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교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장로들은 예배를 드리는 일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하도록 신자들을 자상하게 인도해야 한다.
또한 장로는 강요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독의 직임을 이행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기꺼이 앞장서서 짐을 짊어질 사람을 찾기란 항상 쉽지 않다. 선거위원회를 할 때면 더욱 그렇다. 교회가 제대로 기능을 하려면 다양한 역할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지도자의 직분을 꺼리는 이유가 있다. 그런 역할을 하려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그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이미 상당히 헌신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역할을 맡을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요청이 있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 지도자의 책임을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
<부가설명> 성경 기록에 의하면 초기 교회에는 장로와 감독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호칭은 동일한 직분에 대한 것임을 목회서신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교회가 조직이 되고 제도화 되면서 아마도 유급 직분이 생길 때 감독은 목사로 장로는 평신도 지도자로 한정되는 방향을 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어떤 교단은 목사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오늘 공부에서 말하는 것은 평신도 지도자로서 장로에 대한 것인 것 같다. 장로나 집사나 교회에서 봉사하려면 시간을 많이 소비해야 한다. 생업과 가정생활에 어떤 지장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하기에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교회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시는 거룩하고 영화로운 지분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봉사를 하는 것이다. 기쁘고 즐겁게 헌신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진정으로 거듭난 생명이 작용하면 그 일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건강하고 몸으로서의 모든 기능을 다 최선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지체로서 자기 자리에서 자기 직무를 원만하게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각각 지체의 직무를 올바르고 건강하게 감당하도록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주께서 주신 영화롭고 고귀한 직분임을 실감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장로는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책임을 감당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예배와 선교에 협력하도록 인도하는 영적인 모본이 되어야 한다.
셋째 날(화) 5월 9일 섬기는 지도력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3).
1. 벧전 5:3과 마 20:24~28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기독교 지도력에 필요한 어떤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는가?
[벧전5: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마20:24~28]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답: 교인들을 지배하는 자세를 취하면 안 된다. 참으로 섬기는 자세로 봉사해야 한다.
그리스어로 보면 벧전 5:3의 핵심어는 ‘카타퀴리유온테스’이다. 같은 말이 마 20:25에도 나오는데 그 뜻은 ‘통치하다’, ‘(누구 위에)군림하다’이다. 따라서 벧전 5:3은 마 20:25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맡은 자들 위에 군림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마 20:20~23을 보면 예수님이 마 20:24~28에서 하신 말씀의 배경을 알 수 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찾아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두 아들을 그분의 좌우편에 앉혀달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는 동료들보다 더 높은 자리를 구하는 그들의 이기심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부드럽게 대하셨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당신께 대한 그들의 애정의 깊이를 아셨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히 인간의 애정만은 아니었다. 비록 이 사랑이 인간이란 통로를 통하여 세속적인 요소로 더러워졌지만 그것은 예수의 구속하시는 사랑의 샘에서 넘쳐 나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책망하지 않으시고 깊게 하시고 정결케 하실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548).
예수님은 그 같은 영광의 지위는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부여하시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분의 나라와 이방 나라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지도자의 유형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왕으로 계신 나라에서 지도자가 되려는 자들은 종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의 나라의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이 보여주신 순종과 자기부인의 정신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나타나야 한다.
<부가설명> 성경의 교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요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인데, 세상에 있는 조직은 엔트로피 현상으로 흐르는 것 같다. 조직이 있으면 지도자가 있게 된다. 지도자는 으스댈 수 있다.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될 수 없다. 진정으로 섬기는 자세로 일할 것이다. 그런데 조직이 되면 장이 생기고 부서가 생긴다. 조직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으면 권력이라는 것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직원회 의장이 교회를 먹이는 목사는 우두머리 행세를 하려는 사고방식이 꿈틀거린다. 장로도 교회에 계급서열로 인식한다. 세속적 정신이 속 깊이 도사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속속들이 회개하고 거듭나지 않으면 이런 정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는 엔트로피 현상으로 치닫게 된다. 재림교회 같은 조직은 이런 현상에 더 빨리 빠질 수 있다. 오늘 교회 조직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앉은 사람들은 이런 성신을 신속히 버려야 한다. 그 자리가 섬기는 종의 자리라는 것을 뼈 속까지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정신으로 직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말은 쉽지만.
교훈 : 예수님은 종처럼 섬기는 지도자셨다. 그분의 교회와 나라의 지도자들은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고 그분의 정신을 본받아 섬김의 지도력을 나타내야 한다.
넷째 날(수) 5월 10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베드로가 살던 고대 사회는 계급화가 심했다. 지식층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위세가 대단했다. 그들은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최하층에는 노예들이 있었다. 낮은 계급이 높은 계급을 상대할 때 보여야 하는 적절한 태도는 겸손이었다. 겸손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낮은’, ‘중요하지 않은’, ‘약한’, ‘가난한’의 뜻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사회에서 지위와 권력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유대교와 기독교 밖의 세계에서 겸손이라는 말은 낮은 지위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겸손한 행동은 자유민에게 적합한 필수적인 권장 사항이 아니었다.
1. 벧전 5:5~7을 읽어 보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베드로의 말은 얼마나 주목할 만한 것인가?
[벧전5:5~7]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답: 주목해서 음미하고 깊이 생각해야 할 권고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겸소한 자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겸손은 베드로가 살았던 시대와 문화에서 생각하는 겸손과는 보는 관점이 다르다. 베드로는 70인역(그리스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에서 잠 3:34을 인용했다. 그 성경절은 약 4:6에서도 인용된다. 구약성경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지위가 높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낮추신다(사 13:11, 23:9, 욥 40:11).
겸손은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의 바른 태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자존심보다는 겸손이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벧전 5:5).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죄인임을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평등하며 십자가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이러한 겸손은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특히 우리가 맡고 있는 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누구든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해질 수 있다. 또한 우리보다 위에 있는 자들, 권한을 가지고 우리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그래서 겸손의 진실성은 권한이 없는 ‘아랫사람’을 상대할 때에 시험을 받는다. 베드로가 말하려는 겸손은 바로 그러한 종류이다.
<부가설명>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사회상을 우리는 정확하게 모른다. 그러나 교과에 기록한 대로 그런 상태였다고 인정할 것이다. 옛 사회는 봉건 사회라서 신분 차별이 대단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아왔다. 한국도 당연히 그런 사회였다. 인간은 이런 정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지금도 한국에서는 갑질한다. 을이 당한다. 이런 표현을 보도에서 자주 대한다. 지금도 은근히 신분서열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을 맡기면 그것이 신분이 격상되고 계급이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교인들이 부지기수가 아닌가? 이런 정신이 있는 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겸손은 하나님의 법에 철저히 굴복한 상태를 뜻한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습2:3)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지 않는 것은 교만이다.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시119:85) 성경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을 겸손이라고 가르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을 교만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면 그 생명의 작용이 바로 겸손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은 바로 섬기게 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교훈 : 겸손은 낮은 지위의 사람에게 요구되는 태도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타인 그리고 우리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도 겸손을 나타내기 원하신다.
다섯째 날(목) 5월 11일 우는 사자같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이미 살펴보았듯이 베드로전서는 박해라는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다. 서신의 독자들에게 대쟁투 주제는 단순히 추상적인 신학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겪어보지 못한 방법으로 대쟁투를 경험하고 있었다.
1. 벧전 5:8~10과 계 12:7~9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죄의 기원과 사탄의 일에 대해 어떤 사실을 알려주는가?
[벧전5:8~10]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계12:7~9]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쫓기니라.
답: 용과 미가엘의 싸움에서 용 곧 마귀요 사단이 패배하여 땅으로 쫓겨나서 땅에 있는 자들을 괴롭히는데 특히 성도들을 괴롭힌다. 삼키려고 사자같이 두루 찾아다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고난을 당한다.
계시록은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우주적인 전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일정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의 세력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왕의 왕이며 주의 주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는다(계 19:13, 16). 악의 세력은 용으로 묘사된 사탄 마귀의 인도를 따른다(계 12:7~9, 20:7~8). 대중 매체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실재성을 부인하지만 마귀는 우리에게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강력한 존재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끝에 이르면 마귀는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계 20:9~10).
베드로는 마귀의 위험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마귀는 삼킬 자들을 찾는 우는 사자와 같다(벧전 5:8). 베드로는 또한 신자들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에서 마귀의 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도 영원한 영광으로 마무리될 것이다(벧전 5:10).
2. 벧전 5:10을 다시 읽어 보라. 여기서 베드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답: 은혜의 하나님의 은혜로 고난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마침내 영운한 영광에 이를 것이니 인내로 굳게 믿음을 지키라고 권고한다.
그들이 겪는 시련의 정확한 본질을 알지 못할지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가 표현하고 있는 소망이다. 마귀와 쟁투 그리고 고난도 모두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마귀를 무찌르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고난을 겪든지 믿음을 지킨다면 심지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승리는 보장되어 있다(히 11:13~16 참고).
<부가설명> 사단은 실재하는 인격적 존재이다. 그는 하나님과 겨루려고 할 만큼 스스로 능력 있는 자로 자신을 평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결국 쫓겨났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자존자이시며 창조주이시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겨루어 피조물이 창조주를 이길 수 있겠는가? 창조주께서 창조해 주신 그것을 거두면 존재 자체를 상실한다. 사단은 이미 존재를 반납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최후의 발악을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니 역부족이니까 그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어른이 미우면 그 자녀들을 때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때가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성도들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슨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 지구에서는 사단은 그리스도인을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교과에서 선악의 싸움이라고 했지만, 또 교회에서 그렇게 잘 사용하지만 이것은 생명과 사망의 투쟁이다. 사망이 생명에게 이기겠는가? 결코 이길 수 없다. 부활의 날에 부활한 성도들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라고 외칠 것이다. 생명이 승리한 것이다.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망이 어떻게 생명을 이기겠는가? 그러나 사망의 세상에서는 생명이 사망을 두려워하고 있으니 그것이 사망의 속성이기도 하다. 괜히 밤에 묘지에 가면 섬뜩하지 않던가? 시체 앞에 가면 섬뜩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하겠는가? 생명은 여전히 생명인 것이다. 이 생명이 확실하도록 하자.
교훈 : 대쟁투는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마귀의 위험성에 주의하며 믿음을 지킨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다.
여섯째 날(금) 5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섬김의 지도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모본을 남기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곧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할 것을 온전히 알고 계셨다(요 13:1). 식사 후에 그분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길 때마다 이 장면을 재현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에서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상기시킨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분명하게 이해한 뒤에 제자들은 남은 세월 동안 주님이 제정하신 이러한 겸손의 행위를 기억했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기로 동의하시는 가운데 나타내신 겸비의 정신은 온 하늘의 지적 존재자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바 되었다.… 우리는 이해력을 넓혀 인간이 위치해 있는 곳에서 인간을 만나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될 수 있는 도덕적인 능력을 인간 가족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왕의 제복과 왕관과 높은 지위를 내놓으셨고 당신의 신성에 인성을 옷 입히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특징지은 온유와 겸손함은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자들의 생애와 품성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81).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예수님은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도 어떻게 하면 마귀를 물리칠 수 있을까요?
※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로 이긴다.(계12:11)
➋ 구체적인 예를 들어 진정한 겸손을 설명해 보십시오. 그러한 예로부터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입니까?
※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겸손한 자들아(습2:3) 예수님의 정신을 발휘하는 것이다.
➌ 이번 주에 다룬 교훈 이외에 훌륭한 지도자에게 필요한 자질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 겸손과 섬김의 정신을 가져야 하며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고 있는지 상대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분명한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서로 토의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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