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청지기의 표식(질문, 대답, 부가설명)0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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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2-03 07:54 조회7,747회 댓글0건본문
2월 10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5분
● 연구 범위 : 히 11:8~12, 롬 4:13, 18~21, 마 6:24, 히 9:14, 요일 5:2~3, 눅 16:10~12
● 기억절 :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기업들이 그들의 로고나 상표명으로 식별되는 것처럼 청지기들도 그들의 상표 또는 독특한 표식으로 식별된다. 사실 많은 사람이 자신 스스로를 상표화해서 유명해졌다.
그리스도인 청지기의 상표 또는 표식은 그가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를 통해 나타내는 그분의 사랑의 투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특징을 실천하며 살 때에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상표를 드러낼 것이다. 우리의 상표는 그분의 상표이며 우리의 정체성은 그분의 정체성에 결합된다(고전 6:17).
이번 주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들의 상표명을 구성하는 특성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특성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게 하고 그분의 진리를 지키는 신실한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을 행하도록 고무시킨다. 각 특성은 잃은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던 분과 맺을 수 있는 깊은 관계를 묘사한다. 이러한 특질들을 연구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우리의 삶에 더 깊이 새겨질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우리의 상표가 될 것이며 지금 그리고 영원토록 삶의 모든 면에 감화를 줄 것이다.
학습목표
1. 깨닫기 : 그리스도인 청지기의 특성들을 이해한다.
2. 느끼기 : 그러한 특성들을 개인의 삶에 결합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느낀다.
3. 행하기 : 이러한 표식을 각자의 매일의 삶에 통합하기 위한 실질적인 단계를 밟기로 결심한다.
➋ 하나님의 청지기가 행동으로 나타내야 할 특징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신실함과 순종
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계 2:10)
※ 하나님의 성품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➍ 왜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양심을 깨끗하게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까?(히 10:22)
※ 모든 거짓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➎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청지기라면 그 동기와 마음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 맑은 양심으로 자발적이어야 한다.
➏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을만한 사람으로 평가를 받기 위해서 평소 어떤 모습을 나타내기로 결심하겠습니까?
※ 믿을만한 인격으로 드러나야 한다.
결론: 표적이 활 쏘는 사람에게 목표를 제시하는 것처럼 이번 교과는 헌신적인 청지기의 길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목표를 제시합니다. 진정한 청지기의 이러한 표식들은 만약 그것이 삶에 통합된다면 목적, 성공, 의미 그리고 소속감의 기초를 이룹니다.
2월 4일(일) 신실함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롬 4:20).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신실한 청지기에게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딤전 6:12)고 승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실함이란 하나님의 성품으로서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일하실 때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성품이기도 하다. 신실하게 된다는 것은 특별히 우리가 영적인 싸움 중에서도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진실함을 고수한다는 의미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사이의 영적인 싸움은 반드시 벌어진다. 그것들은 믿음의 싸움의 일부이다. 각 상황에서 신실함에 머물기 위한 선택은 청지기임을 증명하는 결정이 된다. 그대가 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하나님께 그리고 돈에 대한 사랑을 경고하는 그분의 음성에 꼭 신실하게 머물라. 그대가 명예를 갈망한다면 겸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머물라. 그대가 육욕적인 생각과 씨름하고 있다면 거룩함의 약속들에 신실하게 머물라. 그대가 권력을 탐한다면 모두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머물라. 신실할지 신실하지 않을지에 대한 선택은 순식간에 일어나지만 그 결과는 영원할 수 있다.
1. 히 11:8~12, 17~19, 롬 4:13, 18~21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해 신실하게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히11:8~12, 17~1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18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롬4:13, 18~21]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답: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고 명령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신실하다’라는 말은 신임한다는 뜻이다. ‘아멘’이란 말도 같은 어근에서 비롯되는데 사실 그 의미는 ‘단단한’, ‘견고한’이다. 신실함이란 우리가 시험과 연단을 거쳐서 하나님의 계획에 단단히 충성스럽게 머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황제 앞에서의 진술을 준비하면서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자신의 글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답변을 적합한 형태로 작성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성경을 가까이했다.…그는 감격하여 왼손을 성경에 올려놓고 오른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며 자신은 복음에 신실하게 머무르겠으며 심지어 자신의 피로서 그의 증언에 인을 쳐야 할지라도 자신의 믿음을 거침없이 고백하겠노라고 서약했다.”—J. H. Merle d’Aubign, History of the Reformation (New York: The American Tract Society, 1846), vol. 2, book 7, p. 260.
<부가설명> 성경의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에 신실하시다. 약속은 반드시 시행하신다.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는데 때가 찼을 때 그 약속을 시행하셨다. 예수께서 남자와 상관없는 동정녀에게 잉태하시고 탄생하셨다. 또 십자가에서 발꿈치를 상하셨으니 부활하셔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하셨다.(히2:14) 마귀는 이때 의미상으로 없어진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은 천년기 후에 실현된다.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은 이삭을 통하여 성취되게 하셨고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과 오늘날 교회로 이어지면서 이우러지고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 노력으로 성취하려는 유혹에 빠져서 하갈을 첩으로 취하였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육체의 자녀였다. 결과는 약속의 자녀를 핍박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런 시행착오를 거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신실해졌다. 바울은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미쁘시다고 하셨다.(딤후2:13) 미쁘다는 말이 신실하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성취하는데 자기 노력을 보태려고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더 노력할 수 없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다. 믿음이 없어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청지기로서 책임을 다하는데 필요하다.
교훈 : 영적인 투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진실한 청지기는 시험과 유혹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편에 신실하게 머무르기로 선택한다.
2월 5일(월) 충성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1. 우리는 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답: 한 분에게만 충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정체이다. 두 주인을 섬기면 두 주인에게 다 충성이 되지 않는다.
“질투라 이름하는”(출 34:14)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마땅히 충성을 호소한다. 질투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사랑의 충성이다. 믿음의 싸움 중에서 충성은 우리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며 우리로 하여금 전투를 지속하도록 격려한다. 우리의 충성은 하나님께 중요한 문제이다(왕상 8:61). 충성은 모든 사태에 대비하려는 계약이나 단순한 일련의 규율과는 다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 개인의 신념과 믿음, 헌신에 대한 가시적인 표현이다.
2. 대상 28:9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충성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대상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답: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실 것이다.
충성이 있는 곳에는 배신의 가능성도 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충성도 자발적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한 충성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최전방의 병사들은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교들이 그들에게 총을 쏜다. 이들은 그들의 의무를 다할 뿐이지 그것이 꼭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그런 종류의 충성이 아니다.
욥을 보라. 그는 자신의 가족과 소유와 건강을 파괴할 재앙을 내다보지 못했다. 그는 신뢰와 사랑과 헌신의 마음을 저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그의 충성심은 흔들리지 않는 윤리적인 선택과 같은 것이었다. 정직하고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찬양하면서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분이 나를 죽이신다 해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네”(욥 13:15, 우리말성경).
재앙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심은 충성의 진수를 보여주었으며 최고의 충성스러운 청지기란 어떤지를 예증했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계 12:11).
<부가설명> 성경에 충성이라고 번역된 말은 믿음이라는 말과 같다. 성령의 열매에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질이 있는데 충성은 ‘피스티스’이다. ‘믿음’이라는 말이다. 충성은 믿음에서 나온다. 위에 욥기를 인용했는데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네’라고 했다. 신뢰하기 때문에 그분이 나를 죽이시더라고 충성할 수 있는 것이다. 신뢰, 곧 믿음과 충성은 같은 것이다. 믿지 않으면 충성할 수 없다. 믿음이 생활현장에 나타나는 모습이 충성이다. 신실한 청지기라는 말은 충성된 청기지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신실하다는 말은 ‘피스토스’인데 믿음이라는 말 ‘피스티스’의 형용사이다. 결과로 ‘피스튜오’한다. 이 말은 믿는다는 동사이다. 이 말은 또한 ‘맡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고 자기 소유를 맡기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이 맡긴 하나님의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관리하며 자기를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 그렇기 위하여서는 자기 뜻을 포기해야 한다. 자기 뜻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나의 품은 뜻 주의 뜻 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충성의 노래이다.
교훈 : 하나님은 의무감이 아닌 자발성에서 비롯된 충성심을 바라신다. 그것은 상황이 어렵더라도 변하지 않는 사랑과 신뢰와 헌신에 대한 가시적인 표현이다.
2월 6일(화) 깨끗한 양심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세상에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이 많다. 건강, 사랑, 우정, 가족, 이 모든 것들이 복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깨끗한 양심이다.
1. 히 10:19~22과 딤전 4:1~2을 읽어 보라. ‘악한 양심’과 ‘화인 맞은 양심’은 어떤 의미인가?
[히10:19~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딤전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답: 악한 양심은 아담 안에서 죽은 양심이고 화인 맞은 양심은 외식(外飾)하고 거짓말하는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의 외적인 생활을 주시하는 내적인 감시 장치로서 기능한다. 양심은 높고 완전한 표준 곧 하나님의 율법에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율법을 아담의 마음에 기록하셨지만 죄는 그의 마음에서뿐 아니라 그 후손의 마음에서까지 율법을 거의 지워버렸다. 하지만 율법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 예수님은 아담이 실패한 지점에서 성공하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그분의 “심중에 있”(시 40:8)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은 악한 양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무엇이라고 했는가?(히 9:14)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답: 예수님의 보혈로 씻음을 받는 것이다.
“거미줄이 쳐진 양심의 골방에 들어가야 한다. 영혼의 창문들은 지상을 향하여는 닫히고, 의의 태양의 밝은 광선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늘을 향하여는 활짝 열려야 한다.… 마음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도록 깨끗하고 순결하게 보존되어야 한다”(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1권, 327~328).
하나님의 율법이 신자의 마음에 새겨졌고(히 8:10) 그 신자가 믿음으로 그 율법을 따르고자 한다면 깨끗한 양심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부가설명> 구약성경에는 양심이라고 번역된 말이 한 번도 없다. 양심이라고 번역된 말은 신약에만 28번 있다. 양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쉬네이데시스’인데 헬라어 성경에는 30번쯤 사용한 것 같다. ‘쉬네이데시스’는 구약 70인역본에서 3회만 나온다. 전 10:20에서 심중(心中)을 그렇게 번역하였다. 외경 집회서 42:18에서는 단순히 ‘지식’을 의미하였다. ‘쉬네이데시스’는 ‘쉬네이도’(함께보다, 이해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의식, 양심, 성실함’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함께보다’는 뜻은 생각하면 재미있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본 것이 무엇일까? 시편 33:15에는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일반의 마음’이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동일하게 지으셨다는 뜻이 있다. 함께 본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모든 사람들의 의식(쉬네이데시스)에는 이 하나님의 형상이 깃들여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망이 되어서 양심도 썩어짐의 종노릇 하게 되었지만 그래서 아직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 그것이 남아 있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속죄의 피가 이 양심을 살아나게 하신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피로 씻어 깨끗하게 된 양심이다. 청지기는 이 마음이 있어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의 청지기는 우리의 마음에서 희미해진 율법이 복원되도록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양심을 순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2월 7일(수) 순종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아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제물로 바칠 어린 양을 붙잡고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반면 가인은 열매를 붙잡고 분노하여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둘 다 제물을 가져왔지만 한 사람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가납되었지만 땅의 수확물들은 거부되었다. 두 형제 모두 희생 제물의 의미와 그와 같은 지시를 이해했지만 한 사람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창 4:1~5).
“아벨의 죽음은 가인이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보이는 희생 제물로 표상된 그분의 피로 구원을 받고 순종의 학교에서 순종을 배우는 것이다. 가인은 세상을 위하여 흘리실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피흘림을 거부하였다”(화잇주석, 갈 3:24).
순종은 마음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더 높은 권위로부터 온 명령을 이행할 책임을 이성적으로 수용하는 헌신의 과정을 포함한다. 순종은 권위를 가진 인물과의 관계와 그 인물에게 순종하려는 자발성에서 기인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순종은 우리의 행위를 도덕적인 의무에 일치시키려는 하나의 자발적이고 사랑에 기초한 행동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그분의 지시대로 구체적이어야 하지 우리의 생각이나 바람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가인의 일화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 대신 자신이 생각한 것을 행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1. 요일 5:2~3과 롬 1:5, 10:16~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순종이란 어떤 의미인가?
[요일5:2,3]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롬10:16,17]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답: 순종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생명의 열매이다. 이 열매가 없으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한다. 순종은 도덕적인 신앙에 대한 실질적인 진술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부가설명> 우리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있고 각 지체들은 몸에서 수행해야 할 책임과 직무가 있다. 심장은 뛰어야 하고 눈은 보아야 하고… 이것들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 있어서 작용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뇌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모든 지체들은 뇌의 지시를 받지 않는가? 뇌가 고장 나면 지체들이 바르게 활동하는데 지장이 생긴다. 또 지체 자체가 고장이 나면 뇌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 지체들의 움직임은 뇌의 작용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뇌가 지시하는데 지체들이 순종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순종은 지체들이 자기 위치에서 뇌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생명과 뇌의 작용이라고 하면 틀리는 것인가? 성도들의 순종도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머리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머리되신 예수님의 생명작용에 반응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순종도 나의 행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이다. 예수님의 지체라면 그렇다. 순종이 되지 않으면 지체가 고장 났거나 떨어져나갔거나 그 중에 하나이다. 우리는 건강한 지체인가? 순종이 증명한다.
교훈 : 순종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행위를 도덕적인 의무에 일치시키려는 자발적이고 사랑에 기초한 행동이다.
2월 8일(목) 신뢰할 만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1. 눅 16:10~12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신뢰에 대해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신실한 청지기에게 이러한 특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눅16:10~12]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답: 충성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영원한 나라를 상속하지 않으신다.
신뢰성이라는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네 명의 레위인 문지기 우두머리들은 밤마다 구약의 성전을 지키도록 위임받았다. 그들은 보화로 가득한 창고들을 지키고 매일 아침 문을 열 수 있도록 열쇠를 보관해야 했다(대상 9:26~27). 그들은 믿을 만한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임무가 맡겨졌다.
신뢰성이란 훌륭한 청지기의 특징이다. 신뢰할 만한 청지기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의 중요성을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시기에 그들도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신 32:4, 왕상 8:56).
신뢰성은 성숙한 성품의 특성이다. 그것은 관찰자들이 보기에 한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성품과 역량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한다는 것은 그대에게 달리 행하도록 억압하는 사람 또는 상황과 관계없이 그대가 스스로 행하겠다고 말한 것을 행하겠다는 뜻이다(왕하 12:15).
다니엘은 세계적인 두 제국의 왕들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왕에게 진실과 지혜를 가감 없이 말하는 믿음직한 조언자로서의 그의 생애와 명성은 간신과 마법사들의 태도와는 정반대였다. 신뢰성은 윤리의 꽃이다. 그것은 그대의 도덕적인 원칙들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진열한다. 이러한 자질은 어느 날 밤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작은 일도 성실하게 임할 때 이르러 온다.
사람들은 우리의 신뢰성에 주목한다. 그들은 우리가 여론, 유행, 아첨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우리를 존경하며 의지한다.
우리는 하늘을 위한 지상의 시험 무대에서 우리의 성품의 결과를 나타내야 한다.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는 평가는 그러한 성품의 성과를 증명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신실하고 믿음직한 신민이 되어서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의 부요와 선함과 자비, 온유와 예절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교회증언 6권, 190).
<부가설명> 오늘 청지기의 표지(標識, 표식은 잘못된 읽기이다.) 열거한, 신실함, 신뢰할 만하다는 말은 전부 헬라어 ‘피스티스, 피스토스, 피스튜오’에서 나온 말이다. 깨끗한 양심과 순종만이 다른 단어이다. 청지기는 믿을 수 있는 인격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행하는 지체들이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휘포쿠오’ ‘휘포탓소’등인데 ‘휘포’라는 말은 ‘…아래’라는 뜻이다. 순종은 누군가가 순종하는 사람 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위에서 시키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휘포쿠오’이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정돈하는 것이 ‘휘포탓소’이다. 청지기는 위에 주인이 계신다. 주인이 시키는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말대로 하는 것이고, 시킨 대로 정돈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청지기는 예수께서 주인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수행해야 하고 그대로 정리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주인의 신임을 얻고 하늘나라를 상속받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지 못할 것을 아시면 하나님께서 관리할 것을 맡기겠는가?
교훈 : 신뢰성이란 우리가 지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성숙한 성품의 특성으로서 하늘을 준비하는 훌륭한 청지기에게 나타나야 할 자질이다.
2월 9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좋은 청지기의 또 하나의 표식은 개인적인 책임감이다.
“사탄의 계획은 예로부터 예수님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을 인간들에게로 돌리게 하여 개인적인 책임감을 말소시키려 하는 것이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을 유혹하려던 계획에는 실패했으나 타락한 인간에게는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타락했다”(초기문집, 213).
우리는 우리 존재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그러면 믿음, 충성, 순종, 깨끗한 양심, 신뢰성, 개인적인 책임감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청지기로 완성된다(시 139:23~24).
개인의 책임감은 성경의 핵심적인 개념이다. 예수님은 지구에 계시는 동안 아버지께 개인적으로 책임을 다하셨다(요 8:28). 우리는 모든 무익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마 12:36).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눅 12:48). 개인적인 책임감에 대한 가장 큰 위험 요소는 우리의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려는 경향이다.
“그것은 우리가 투자하도록 위탁받은 것이지 우리의 자산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 재량권을 주장하고, 우리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기거나 우리의 청지기 직분을 그들에게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주께서 우리를 각자 그분의 청지기로 삼으셨기 때문이다”(교회증언 7권, 17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이번 주에 공부한 청지기의 모든 표식을 살펴보십시오. 개인적인 책임감, 신뢰성, 순종, 충성, 깨끗한 양심, 신실함. 이것들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하나에 대한 태만은 어떻게 다른 것에 대한 태만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까? 또는 하나에 대한 엄격한 고수는 어떻게 다른 것에 대한 고수로 이어질 수 있습니까?
※ 이미 부가설명에서 말했듯이 신뢰성, 충성, 신실함은 다 같은 믿음을 뜻하는 ‘피스티스’에 관련된 단어들이다.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되게 되어 있다.
➋ 복음의 약속이 어떻게 양심의 가책으로 씨름하는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그들은 어떤 약속을 주장할 수 있습니까?
※ 주님께 굴복하는 사람을 용서하시고 청지기의 직무를 맡겨주신다는 약속이다.
➌ 어떤 상황에서 우리는 사람에게 또는 옳지 않은 것에 충성할 수도 있습니까?
※ 이기심과 또는 위협에 의하여 그렇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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