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견물생심(질문, 대답, 부가설명)01/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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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1-06 11:14 조회7,964회 댓글0건본문
1월 13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5분
● 연구 범위 : 고후 8:1~7, 마 13:3~7, 22, 창 3:1~6, 사 56:11, 마 26:14~16, 벧후 1:5~9
● 기억절 :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돈과 물질적인 소유에 대한 사랑은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에게 접근한다. 엘렌 G. 화잇은 물질주의의 술책으로 우리를 유혹하려는 마귀의 계략을 이렇게 묘사했다. “가서 땅과 돈을 소유한 자들을 이생의 염려에 취하게 하라. 가장 매혹적인 광채로서 세상을 그들 앞에 제시하여 그들의 애정을 지상의 사물들에 고정시키라.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에 수고하는 자들이 우리를 대항하는 일에 사용할 재물을 얻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해야 한다. 돈을 우리 편에 두라. 그들이 재물을 더 많이 얻으면 얻을수록 그들은 우리 백성들을 빼앗아 감으로 우리 왕국을 해칠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증오하는 그리스도의 왕국의 건설과 진리를 전파하는 일보다 돈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하라. 그러면 우리는 그들의 감화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기적이요 탐욕적인 모든 사람이 마침내 우리의 권세에 굴복하게 될 것이요 결국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분리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청지기에게 보내는 기별, 154~155).
불행히도 이 계략이 잘 통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위험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러한 덫을 피할 수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습목표
1. 깨닫기 :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부와 소비지상주의의 함정을 깨닫는다.
2. 느끼기 : 욕망, 필요, 야망의 영역에서 절제와 하나님의 통치의 필요성을 느낀다.
3. 행하기 : 하나님의 공급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
➋ 창 3:6에서 하와는 어떤 과정을 통해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까?
※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웠다.
➌ 사소한 탐욕이라도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➍ 일요일 교과에서 소개하는 ‘번영 복음’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을 거래대상으로 대하게 한다.
➎ 갈 5:24에서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말씀은 어떤 뜻이라고 생각합니까?
※ 정욕과 탐심에는 죽은 자가 되라는 뜻이다.
➏ 우리가 탐심과 탐욕의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정직하게 말씀에 굴복하면 될 것이다. 성령께서 자기를 주관하게 할 것이다.
결론 : 탐욕을 만족으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통치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맡기는 선택과 결정이 필요합니다.
1월 7일(일) 번영 복음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1~2).
어느 TV 설교자는 이런 식의 단순한 기별을 전한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며 그대가 가진 풍부한 물질적인 소유는 그분이 그대에게 복을 주셨다는 증거이다. 요컨대 그대가 신실하다면 하나님은 그대로 하여금 부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주장을 ‘번영 복음’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을 따르면 그분이 그대를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물질주의에 대한 그릇된 신학적 정당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제로 ‘물질만능주의를 따르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받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것이 딱 그대를 위한 복음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부의 약속과 복음을 연결시키는 것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슬라이드쇼와 같다. 이런 신념은 성경과의 부조화를 야기하며 성경의 언어로 치장한 유사 진리이자 자기중심적인 신학을 반영한다. 모든 죄의 중심에 자리한 문제가 이러한 거짓의 중심에도 자리하고 있다. 즉 그 어떤 것보다 자아를 기쁘게 하려는 욕망 말이다.
번영의 복음과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행하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물질적인 부를 보장받는다고 가르친다. 이런 사고방식은 하나님을 자판기로 만들고 우리와 그분의 관계를 거래로 변질시킨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당신은 답례로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해라. 내가 당신에게 행하는 것은 그것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보상을 받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바로 번영 복음이다.
1. 고후 8: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는 이 말씀에서 번영 복음에 반대되는 어떤 원칙을 볼 수 있는가? 바울이 말하는 “이 은혜”란 무엇을 의미하는가?(고후 8:7)
[고후8:1~7]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답: 마게도냐 교회는 가난과 환난 중에서도 힘에 지나도록 구제헌금을 하였다. 이것이 은혜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극심한 가난을 겪고 있었지만 베푸는 데 있어서는 그들의 처지보다 훨씬 너그러웠다. 이 외에도 많은 성경절들이 그대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면 그것의 증거로서 풍요로운 물질적인 소유를 얻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번영 복음의 신학을 반박한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려는 부귀는 땅이 저주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이다.(고전7:31) 지나가고 없어질 것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영원한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맡았다고 주장하는 마귀는 그에게 절하는 자에게 이것을 준다(눅4:5~7)고 말했다. 신명기 28장의 축복이나, 레위기 26장의 축복의 근본적 사상은 영원한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하면 이 세상에서도 부를 누릴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그랬다. 그러나 빛을 받아 빛을 따라 충성하는 사람은 또한 환난과 핍박과 파산도 겪게 된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히1032~35) 세상의 부를 생각하는 사람은 성경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좋으면 부도 얻는다는 주장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다. 그것은 마귀의 논리이다. 누가복음 4장 5~7을 기억하자.
교훈 :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우리가 부자가 된다는 식의 기별은 물질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거짓 복음이다.
1월 8일(월) 희미한 영적인 시야
이생의 염려도 재물도 다 일시적이라는 이 분명한 진리를 알기 위해 꼭 성경이 필요하지는 않다. 이 땅에서는 영원한 것도 오래 가는 것도 없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고후 4:18)하다.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하늘에 이르는 길보다 이 세상사에 고정될 때에 그들은 근시안적인 시야를 갖게 된다. 재물의 유혹만큼 그 길로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가릴 수 있는 것도 드물다. 시각장애가 있었던 헬렌 켈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눈은 있지만 비전은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성경에는 눈이 있지만 영적으로는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예가 많다.
“어떤 이들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삼켜버릴 만큼 지나치게 이 세상을 사랑한다. 이곳에서 그들의 보화가 증가될수록 하늘의 보화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감소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을 더 많이 소유할수록 탐스러운 보화가 그들에게서 떠날 것이 두려워 세상에 더욱 밀착한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다른 사람에게 덜 베푼다. 왜냐하면 더 많이 가질수록 더 가난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 재물의 유혹이여!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필요는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Spiritual Gifts, vol. 2, p. 267).
희미한 영적인 시야는 영원한 구원을 위험에 빠뜨린다. 예수님을 시야에 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그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 마 13:3~7과 22절을 읽어 보라.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위험에 대해 경고하시는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누구나 이러한 덫에 빠지기 쉬운 이유는 무엇인가?
[마13:3~7, 22]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22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답: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대하여 경고했다. 재물이 안락하고 재미있고 자기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염려에 대하여 경고하셨다(마 13:22). 예수님은 우리 모두에게 염려가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 거기에는 경제적인 염려도 포함된다.
가난한 자들은 넉넉하지 않아 염려하고 부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더 가져야 할지에 대해 염려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와 같은 염려가 말씀을 막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재물의 유혹에 대해서 경고하셨다(마 13:22). 재물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우리를 속여서 마지막 멸망의 길로 이끌 만한 잠재력이 있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오관을 통하여 직접 체험하는 것으로 자기의 생존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또 감각으로 느끼는 쾌락을 좋아한다. 솔로몬은 이런 것을 끝이 없다고 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1:8) 그래서 사람들은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말을 타면 종을 부리고 싶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세상 것은 가질수록 갈증을 느끼게 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그런 뜻이 담겨 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요4:13) 그래서 예수님은 목마르지 않는 샘물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목마른 짜릿함의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영원함을 믿지 않고 또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를 쌓아도 한번 호흡이 끊어지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될는지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자신이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가 이것을 잘 가르쳐주고 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사39:4~6) 자신을 바르게 알면 영원한 것을 구하고 붙들지 않겠는가?
교훈 : 세상의 사물과 소유에 대한 애정은 영적인 시야를 흐리게 한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초점을 예수님께 맞춰야 한다.
1월 9일(화) 탐욕의 단계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탐심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표출된다. 에덴에서 일어난 일이 그랬다.
1. 창 3:1~6을 읽어 보라. 사탄은 어떻게 하와가 죄를 범하도록 유혹했는가? 사탄은 대대로 인류를 유혹할 때에 어떻게 동일한 원리를 활용했는가?
[창3:1~6]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답: 탐심을 불러내었다고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다. (과연 그런 것인지 나는 선 듯 동의가 가지 않는다. 나는 호기심을 이끌어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사단은 대대로 이 호기심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이 탐심이 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광고 회사가 상품 판매의 모범적인 사례를 에덴의 일화에서 발췌했다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마귀는 하와의 마음속에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제시했다. 그리고 그녀로 하여금 실제로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필요하다고 여기게 했다. 얼마나 영리한가! 하와의 타락은 우리 각자가 탐심에 빠질 때에 밟게 되는 세 가지 단계를 잘 드러낸다. ‘보다. 원하다. 갖다.’
물론 탐심은 조용한 죄라고 할 수 있다. 욕정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육체의 휘장 뒤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마침내 결실을 이룰 때면 그것의 영향력은 매우 파괴적이다. 그것은 관계를 손상시키고 사랑하는 자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이후로도 죄책감에 시달리게 한다.
탐심이 수면 위에 떠오르게 해보라. 그러면 그것이 모든 원칙을 무시할 것이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보고 그것이 갖고 싶었다. 그래서 왕비가 나봇을 죽일 때까지 토라져 있었다(왕상 21장 참고). 아간은 외투 한 벌과 은금을 보고 탐이 나서 그것을 숨겼다(수 7:20~22). 탐심은 결국 이기심의 다른 형태이다.
“죄의 지배적인 형태가 이기심이라면 이기심의 지배적인 형태는 탐심일지 모른다. 이런 점은 사도 바울에 의해 크게 부각되었다. 그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딤후 3:1)를 묘사하면서 이기심을 만악의 원인으로 지목하였고 그것이 힘을 얻으면 탐심이 그 첫 열매가 되리라고 설명하였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딤후 3:2).”—John Harris, Mammon, (New York: Lane & Scott, 1849) p. 52.
<부가설명> 뱀이 여자의 마음에 탐심을 불러 일으켰다기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했다고 보는 것이 성경적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심히 좋다고 하시도록 순수하게 창조된 태초의 부부에게 탐심이 내재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호기심은 그 자체로는 순수한 것이다. 뱀은 여자의 마음에 선악과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내었고 그 호기심이 선악과를 먹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타락한 후에 기록한 성경에서 탐스럽다는 말로 표현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호기심의 발동이 결국 선악과를 먹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탐심이라고 해석하기에 이른 것이다. 호기심의 발로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태조의 여자의 호기심이 나쁜 결과를 가져왔고 그것은 탐심이라고 해석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사단은 지금도 한없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호기심은 사람들의 감성을 움직이고 그것을 따라 가면 때때로 나쁜 결과로 가고 때때로 좋은 곳으로 가기도 한다. 호기심을 따라가는 결과를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재림교회 진리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했다가 진리를 깨닫고 재림신앙을 받아들여 신실한 재림성도가 되었다. 그 호기심도 탐심이라고 할 것인가? 그런 탐심은 괜찮은 것인가? 우리는 용어들을 잘 생각할 필요가 있다.
교훈 : 우리를 타락시키려는 사탄의 전략은 우리의 마음이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이기심과 탐심에 지배되게 하는 것이다.
1월 10일(수) 제 길로 돌아가며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사 56:11).
1. 사 56:1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어떤 죄에 대한 경고인가?
[사56:11]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
답: 탐심을 실천하는 죄에 대한 경고이다. 특히 목회자들에 대한 것이다.
타락한 인류에게 탐욕은 호흡처럼 빈번하며 자연스럽다. 인간의 성품 중에 탐욕만큼이나 그리스도의 성품을 덜 반사하는 것도 찾기 힘들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하나님만이 탐욕이 역사를 통해 이뤄 놓은 해로움을 아신다. 탐욕이 전쟁을 일으켰고 탐욕이 인류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파멸을 가져온 범죄를 저지르게 하였다. 탐욕은 마치 바이러스와 같아서 숙주에게 달라붙어 남은 모든 것이 점점 더 탐욕스럽게 될 때까지 모든 선한 특성들을 다 파괴한다. 탐욕은 욕정, 권력, 소유를 다 가지려는 질병과 같다. ‘보다. 원하다. 갖다.’
2. 마 26:14~16을 읽어 보라. 이 안타까운 이야기에서 우리는 탐욕의 영향력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마26:14~16]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답: 탐욕은 예수님도 팔게 한다. 진리를 팔아버리게 한다.
유다의 말에 주목하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마 26:15). 탐욕이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한다더니 정말이다. 유다는 인류 역사에서 극히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을 누렸다. 그는 성육화된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그분의 이적들을 목격했으며 그분에게서 생명의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탐욕이 그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게 했는지 보라.
<부가설명> 유다는 자기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생명의 주를 팔았다. 그는 자기의 스승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을, 물건 흥정하듯이 ‘얼마나 주려느냐?’하고 흥정했다. 가룟 유다의 탐욕은 돈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명예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예수님이 그들의 손길에서 탈출할 것을 기대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정죄되는 것을 보고 돈을 갖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았다.’고 외친 것을 보면 그렇다. 예수님의 그 큰 능력으로 로마인들을 쳐부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왕국을 건국하고 예수가 그 왕이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 나라에서 자기는 건국공신이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예수가 로마 군인들과 싸울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아넣었던 것인데 예수님을 순순히 잡혀갔고 정죄를 받는 것이 아닌가. 자기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것을 보았을 때 가룟 유다는 자기의 계획이 잘못 된 것을 알아차렸다. 그것은 자기 욕망이었다. 그것을 이 교과에서는 탐심이라고 설명했다. 탐심은 재물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명예와 지위 등도 그 대상이 된다. 우리는 정말 이런 탐심의 덫에 걸리지 않도록 순간마다 자아를 주님께 굴복하자.
교훈 : 탐욕은 모든 선한 것을 파괴하면서까지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 죄의 특성이다. 유다는 탐욕으로 인하여 심지어 생명의 주까지 팔아넘겼다.
1월 11일(목) 절제
1. 아래의 말씀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부하든지 가난하든지에 관계없이 탐심, 탐욕, 돈과 물질에 대한 사랑이 신앙에 몰고 올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가?
[행24:24~26]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갈5:22~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벧후1:5~9]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답: 장차 있을 심판을 생각하고, 십자가에 자아를 못 박고,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여러 거룩한 명령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적인 맥락에 주목하자면 그것은 절제이다. 이것은 특히 탐심, 탐욕, 물질을 소유하려는 욕구가 일어날 때에 나타내기 어려운 덕목이다. 먼저 우리의 생각과 그다음 행동의 절제를 통해서만이 우리가 논하고 있는 것들의 위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능력에 맡기는 정도까지만 그러한 절제를 실행할 수 있다. 아무도 이러한 죄악의 특성들을 자신의 힘으로 물리칠 수 없다. 특별히 그 죄악들이 오랫동안 배양되고 간직되어 온 것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이 강력한 기만을 극복하려고 한다면 진정으로 우리의 삶에 초자연적인 성령의 사역이 필요하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부가설명> 이 세상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에게서 받은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탐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탐심은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에게 속속들이 배어있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썩어져가는 구습에 속한 것이며 옛 사람의 모습이다.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거듭난 생명이 이 세상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이 그 사람을 주관하게 된다. 당연히 성령의 열매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교인이 되고 교회에 다니면서 설교 듣고 성경 읽어도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으면 더 영악한 옛 사람이 된다. 예수 이름으로 변명도 하고 예수 이름 팔고 거짓말도 한다. 유대인들이 ‘고르반 되었다.’고 말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자기 탐욕을 채운 것과 같은 자리에 빠지게 될 것이다. 절제는 단순히 재물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자동차의 제동장치 같은 것이다. 무엇이든지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유교에도 중용사상이 있다. 성경은 삶의 절제를 가르친다. 좋은 것도 지나치게 하면 해롭게 되기 쉽다. 그래서 모든 일에 절제가 필요하다. 그렇거든 하물며 탐심과 욕망이겠는가.
교훈 : 우리의 힘으로는 탐심과 탐욕의 특성들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절제하려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맡기고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1월 12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과 만족이다. 그러나 물질주의를 통한 자기 충족으로는 이러한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마음속으로는 사람들도 이것이 사실임을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보다. 원하다. 갖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도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주의의 가치를 지지할 유혹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상품을 획득한다고 해서 행복이나 만족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바라던 바를 얻지 못하고 또는 듣지 못하고 낙심하여 슬픈 마음으로 예수님에게서 떠나간 그 젊은 관원처럼 재물은 문제를 일으킨다. “물질주의적인 가치들은 삶의 낮은 행복 지수와 만족도에서부터 우울증과 불안증, 두통과 같은 신체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인격 장애, 자기도취, 반사회적인 행위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스며 있는 행복의 약화와 관련이 있다.”—Tim Kasser, The High Price of Materialism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2002), p. 22.
물질주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재물의 샘에서 물을 마시며 으스대겠지만 영적으로는 탈수 상태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자들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 4:1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번영 복음에 대해서 더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러한 개념을 믿고 주장하는 자들은 어떤 성경절들을 주로 사용할까요? 성경에서 이런 거짓 교훈을 배격하는 삶을 살았던 인물들의 예를 들어 보십시오.
※ 신명기 28장 축복에 대한 말씀을 잘 사용한다. 아마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부자가 된 구절들도 사용하고 요한삼서 1절도 사용한다. 예수님,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을 족하게 여겼다. 많은 순교자들.
➋ 어떤 아빠는 첫째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아이를 통해 저는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첫째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과 둘째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탐욕스럽다는 것입니다.” 아기들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는 이런 사실로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깨닫습니까?
※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다 죄인이고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이기(엡4:22) 때문에 다 본질적으로 진노의 일을 한다.(엡2:3)
➌ 어떤 사람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겪는 문제들의 근원을 찾고 있다면 마약이 아닌 어리석음, 무지, 탐심 그리고 권력에 대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시험해 봐야 한다.” 탐심은 탐심을 가진 본인뿐 아니라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얼마나 큰 해를 끼칠까요?
※ 탐욕의 대상이 되는 존재들은 탐욕을 가진 사람들의 희생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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