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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그리스도인의 삶(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2/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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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12-23 04:00 조회7,255회 댓글0건

본문

12월 30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23분

 

연구 범위 : 롬 14~16장

기억절 :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우리는 이제 로마서 연구의 마지막 과에 이르렀다. 종교개혁이 바로 이 책에서 태동했다. 로마서는 우리가 왜 개신교도여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 신앙에 머물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개신교도이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 성경만이 신앙의 표준이라는 ‘오직 성경’의 원칙을 고수한다. 수백 년 전 우리의 영적인 선조들을 로마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진리도 바로 성경에서 비롯되었다. 그 위대한 진리는 바울의 서신 로마서에 매우 강력하게 제시되어 있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

어쩌면 이방인 간수의 질문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0). 우리는 로마서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다. 그러나 루터의 시대에 교회는 그 답을 주지 못했고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지금 우리가 그 믿음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과에서 바울은 주요 주제만큼 핵심적이지는 않지만 서신에 포함될 만한 중요한 주제들을 다룬다. 우리에게는 그것들도 거룩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어떻게 서신을 마무리했고 바울의 후손일 뿐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후손들인 우리에게 어떤 진리를 남겼는가?

 

※ 학습 목표

깨닫기 : 각자의 확신과 사랑, 조화가 그리스도의 몸에 의로움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느끼기 : 각자의 확신과 이웃에 대한 긍휼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느낀다.

행하기 :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확신대로 살고 있는지 점검하며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확신대로 살도록 격려한다.

 

➋ 우리는 나와 믿음의 적용이 다른 동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 성경의 원리와 다르지 않는 한 이해하고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 판단은 주께서 하신다.

➌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나에게는 거리낌이 없어도 다른 사람의 양심을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나의 자유가 그의 신앙양심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➍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까?

※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판단하면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두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➎ 어떤 경우에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나쁜 모본이 될 수 있을까요?

※ 우리를 본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우리의 자유를 이해지 못할 때 그럴 수 있다.

 

결론 :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시는 확신에 반응하는 삶이며 또한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 그리고 성령 안에서의 조화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각각 확신을 불어넣어주신 형제와 자매들을 격려하는 삶을 말합니다.

 

 

첫째 날(일) 12월 24일 믿음이 연약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1~3).

 

롬 14:1~3에는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고기를 먹는 문제가 나온다. 예루살렘 총회(행 15장)에서는 이방인 개심자들에게 그런 종류의 육류를 삼가도록 했다. 그러나 시장에서 팔고 있는 고기가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인지 아닌지가 항상 의문시되었다(고전 10:25). 그럼에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그 문제에 전혀 개의치 않았고, 어떤 이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다면 차라리 채식을 하기로 선택했다. 이것은 채식주의나 건강한 생활과는 무관한 문제이다. 또한 이 본문은 정결한 육류와 부정한 육류의 구분이 폐지되었다는 어떤 암시도 내포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이 본문의 고려 사항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롬 14:2)라는 말씀을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모두 먹을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적용이다. 신약의 다른 본문들과 비교한다면 그렇게 적용할 수 없다.

반면 믿음이 약한 자를 받으라는 말씀은 교인으로서의 그의 온전한 권리와 그가 처해 있는 사회적인 상황을 인정하라는 의미이다. 교인들은 그와 논쟁을 하는 대신 그가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롬 14:1~3에서 우리는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하는가?

절에서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라는 문구를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강하게 되는 방법을 조언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예민한’(하나님이 아닌 동료 신자들의 평가에 의하면) 신자들도 수용된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3).

 

1. 롬 14:4은 앞에서 살펴본 내용들을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가?

[롬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답: 예수께서 세우는 자를 사람이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물었다. 모든 것은 주님께 있으니 서로 판단하지 말도록 권고하였다. 

 

<부가설명> 로마 14장 1~6은 로마교나 개신교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이다. 그 문제의 핵심은 음식물 문제와 안식일 문제이다. 1~3은 채소를 먹는 사람은 믿음이 약한 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 보이고 모든 것을 먹는 사람은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5,6절은 아무 날이나 교인이 마음에 확정하는 대로 지켜도 된다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교단과 음식물을 가리지 않는 교회는 이 구절을 그런 주장을 하는데 아주 잘 사용한다. 만일 그렇게 주장하면 성경 전체의 사상과 부딪히게 된다. 성경은 까닭을 밝히지 않고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말한 것을 다른 곳에서 폐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폐지하는 이유를 밝히고 그렇게 말한다. 사람에게 음식물은 폐지할 것이 아니다. 음식을 폐지하면 사람이 생존하지 못한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것은 금식일과 관련하여 가르치는 내용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교과는 우상의 제물과 관련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유대인의 종교생활 습관을 따르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눅18:12) 초기 문서인 ‘허마의 목자’에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로마교회도 그렇게 하는데 그것을 꼭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교인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 교인도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이런 일로 교회가 내분을 겪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시정하고 있는 것이다. 금식 일을 지키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금식 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주를 위하여 하면 된다고 교정해 주는 말씀이다. 금식은 단식이 아니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채소를 먹었고 금식 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날도 지키지 않았고 자기가 먹고 싶은 대로 고기도 먹었다. 이런 사실로 교회가 분란을 겪는 것을 막고 예수께서 인정하는 것을 사람이 함부로 논단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서로 존중하여 믿을을 상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 구절을 두고 안식일이 폐했다거나 아무것이나 먹어도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이 사실을 도외시하는 것이다. 

 

교훈 : 우리는 각자의 믿음에 따른 선택에 대해서 서로 논쟁하기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는 것처럼 서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둘째 날(월) 12월 25일 심판대 앞에서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롬 14:10을 읽어 보라. 바울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을 주의하도록 권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판단하실 것인데 사람이 자기 의견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쉽다. 간혹 우리도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그렇게 한다. 남이 하면 안 되고 내가 하면 괜찮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고 스스로 어리석게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마 7:1~4)라고 경고하신다.

 

2. 바울이 롬 14:11에서 인용하는 구약의 말씀은 어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가?

[롬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답: 10절에서 각각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각자가 하나님의 질문데 대답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의 모든 것은 그때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된 사 45:23은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상을 지지한다. “모든 무릎”과 “모든 혀”는 이 교훈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라는 뜻이다. 그뿐 아니라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과 행위에 대하여 하나님께 대답해야 할 것이라고 암시한다(롬 14:12).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말해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형제를 지키는 자가 되지 못한다.

 

3. 문맥을 고려할 때, 우리는 롬 14:14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롬14:14]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답: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지적한 말씀이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것을 먹는 자체가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의심을 하면서 먹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가르친다. 그럴 때에는 먹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이다. 

 

본문의 주제는 여전히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다. 정결한 짐승인지 부정한 짐승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분명 핵심이 아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을 먹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상이란 무엇인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전 8:4 참고). 따라서 이교도들이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고 해서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양심이 매우 예민한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사실을 “강한” 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약한 자들”의 예민함을 무시했고 그들의 길에 걸림돌을 두었다.

 

<부가설명> 사람은 예외 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선다. 심판의 핵심은 예수 안에서 받은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는 것이고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은 선악 간에 다 심판을 받는다.(고후5:10)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심판대 앞에 서고 하나님 앞에 직고하는 때가 있다.(롬14:12, 벧전4:5) 그럴 때에 우리는 스스로 형제를 판단한 재판장 노릇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우리는 쉽게 남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약4:11,12) 저자의 글에도 있는 대로 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세상에서도 헤아림을 받겠지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헤아림이라는 말은 ‘메트론’인데 척도(尺度)라는 말이다. 척도는 자로 재는 것을 뜻하고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무엇을 척도로 다른 사람의 삶을 재었느냐? 그 척도대로 너를 재어 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척도를 정확하게 모른다. 대부분 자기가 세운 척도로 남을 재어보면서 판단한다.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바울을 권고한다. 물론 당연히 성경에 나와 있는 원칙을 척도로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을 따르도록 권고할 수 있고 말씀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고 안타깝게 충고할 수 있다. 그러나 심판자적인 태도로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조심하자.

 

교훈 : 우리에게는 아무렇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양심에 부담이 된다면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셋째 날(화) 12월 26일 거리낌이 되지 않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롬 14:15~23을 읽어 보라(고전 8:12~13 참고). 바울이 말하려는 숨은 골자가 무엇인지 요약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원칙을 배워야 하는가?

[롬14:15~23]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20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21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답: 신자 각자가 다른 신자들에게 거리끼는 언행(言行)을 삼가라는 것이다.

 

15~20 절에서 바울은 기독교의 다양한 측면을 적절한 관점에서 다룬다. 식생활은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육류 대신 채식을 선택한 자들과 논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화, 기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재림 교회의 식생활 문제에 관하여 이 교훈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건강 기별, 특히 식생활에 관한 가르침이 우리에게 축복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 주제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차이점들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22절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매우 흥미로운 경고를 덧붙였다.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이 경고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씀은 주어진 문맥 속에서 어떻게 조화가 되는가?

 

답: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될 때에 그것은 자기를 정죄하는 것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먹든, 무엇을 입든, 어떤 오락을 즐기든지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정말 그런가? 우리는 우주에서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위, 심지어 식생활은 다른 사람에게 선악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대를 존경하는 누군가가 그대가 잘못 행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도 그대의 잘못된 모본을 따를 수 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대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본이 다른 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면 우리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다.

 

<부가설명> 각 신자가 자기 신앙철학을 가지게 되는지 모르겠다. 신앙의 표준은 성경이고 하나님께 있지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성경을 해석해서 그 해석을 자기 신앙철학이나 원칙으로 세워도 안 된다. 예수님이 세상에 보여주신 원칙은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5:30) 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하시는 대로만 사셨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원하시는 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친다. 예수님은 ‘기록하였으되’라고 하셨고, 바울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고 하였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 해야 한다. 성경의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아야 한다.(고전4:6)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후2:17) 그렇게 신앙생활하면 남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신앙생활하며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나 바울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신앙하지 않고 말씀을 넘어가거나 왜곡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갈라디아교인들을 말씀 밖으로 이끌고 나가려는 유대주의를 다른 복음이라고 분명히 지적하였다. 이것은 우리도 오직 기록한 말씀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바른 분별로 바르게 신앙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믿음대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의 양심에 죄가 되는 일을 행하는 모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넷째 날(수) 12월 27일 날들을 지킴

 

바울은 앞서 우리와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고, 우리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의 양심에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그리고 이제 일부는 원하지만, 다른 이들은 지키기를 원치 않는 기념일 문제를 다룬다.

 

1. 롬 14:4~10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말씀은 넷째 계명에 관한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롬14:4~10]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답: 모든 것을 성경이 계시한 원칙에 의하여 행하라는 권면이다.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신앙생활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기록한 말씀에 의하여 판결될 것을 기억하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 어떤 날들을 준수하는 문제로 초대교회에 논쟁이 있었는가? 갈 4:9~10에서 바울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문제에 대하여 갈라디아 신자들을 질책하였다. 이로 보건대 초기 기독교에 분명히 그런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2과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어떤 이들은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설득하였다. 바울은 로마 교회도 이러한 사상으로 피해를 입을까 우려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회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자들은 오히려 유대인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축제일들을 더 이상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를 설득해야만 했다.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하여 각자가 기뻐하는 대로 행하라고 말하였다. 핵심은 그 문제에 관하여 그대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축일 가운데 한두 개를 준수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두라고 권고하였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롬 14:5에 제칠일 안식일을 포함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바울이 제4계명에 대하여 그렇게 느긋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번 기 교과에서 줄곧 살펴봤던 것처럼, 바울은 도덕적인 율법의 준수를 매우 강조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졌을지도 모르는 음식에 대한 문제와 제4계명을 같은 범주에서 다룰 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이 성경절들은 제칠일 안식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증거로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실과 무관하다. 그래서 베드로는 바울의 글을 오용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6).

 

<부가설명> 이 구절에 대하여서는 앞에 어디서 말했다.(일요일 부가설명) 그것은 열 견해들 중에 하나이다. 다른 견해들을 소개하면 로마교회는 유대인 교인과 이방인 교인이 섞인 교회인데 로마황제가 유대인들을 다 추방할 때 로마교회 유대인 지도자들이 다 떠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방인 교인이 지도자가 되어서 유대인의 여러 규제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총회 결정을 시행하게 되어서 먹는 것과 날을 지키는 문제, 곧 절기의 날들과 그 절기에 먹고 마시는 문제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생활하는데 유대인 추방령이 흐지부지해 질 때 다시 유대인 지도자들이 교회로 돌아와서 옛날 지도자의 자리를 다시 찾으려고 할 때 일어난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재림교회 주석도 이런 견해를 지지하고 또 어떤 주석도 이런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독자들이 성경 중심으로 이런 견해들을 숙고하고 이해하기를 바란다. 필자는 월요일 부가설명에 기록한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날을 지키는 것과 음식문제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금식일과 관련된 권고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견해이든지 바울이 가르치고자 하는 핵심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용납하고 이해하며 판단하고 비방하지 말고 주님 말씀 중심으로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이 핵심을 내놓고 먹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에 초점을 두고 논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 먹는 것과 날을 지키는 문제는 일상 식생활에 대한 것이 아닌 것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 날을 지키는 것도 제칠일 안식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기본 사상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기록한 말씀의 원칙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안(事案)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안식일과 달리 유대인 기독교도들에게 구약의 축제일 준수는 그들의 선택 사항이었다.

 

 

다섯째 날(목) 12월 28일 마지막 권면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 15:1~3).

 

1. 위의 말씀을 읽어 보라. 여기에 어떤 중요한 기독교 진리가 있는가?

위의 말씀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 잘 담아냈는가?

같은 사상을 가르치는 다른 성경절들은 또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어떻게 이런 원칙에 따라 살겠는가?

 

답: 예수님 이름으로 먼저 상대방을 대접하는 황금률의 진리가 있다. 특히 연약한 자를 위하여 봉사하기를 권고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의 지도를 따를 때 가능할 것이다.

 

2. 서신을 마쳐 갈 즈음에 바울은 어떤 다양한 말로 축도했는가?(롬 15:5~6, 13, 33)

[롬15:5,6,13,33]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답: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같은 뜻을 가지게 하고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며, 소망의 하나님이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하게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며 평강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축도했다.

 

인내의 하나님이란 그의 자녀들이 끝까지 견디도록 돕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인내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휘포모네’는 ‘꿋꿋함’ 또는 ‘꾸준한 참을성’을 의미한다. 위로라는 말은 ‘격려’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로의 하나님은 격려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한다. 소망의 하나님이란 인류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이다.

 

3. 개인적인 안부를 전한 뒤에 바울은 어떻게 서신을 마치고 있는가?(롬 16:25~27)

[롬16:25~27]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답: 영세 전부터 가추어두었던 구원의 복음을 주셔서 세상과 사람을 구원하신 아버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기를 축도하며 마친다.

 

바울은 영광과 찬미의 기원으로 로마서를 마친다. 하나님은 로마의 기독교인뿐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굳게 서기까지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시다.

바울은 특정 시대의 특정 상황에 대응하여 이 편지를 쓰도록 하나님께 영감을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래에 대하여 그에게 무엇을 계시하셨는지는 구체적으로 다 알지는 못한다. 바울은 훗날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을 알았지만(살후 2:3), 그가 얼마만큼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의 언급이 없다.

즉 바울이 자신과 그의 서신들 특히 로마서가 마지막 때에 담당할 역할에 대해 얼마나 짐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신 이 말씀들로부터 개신교 신앙이 태동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고자 하는 자들은 그 안에서 그들의 믿음과 헌신을 세울 성경적인 토대를 찾았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계 13:3)더라도 그들은 성경을 기초로 한 믿음을 지킬 다른복음을 전할 것을 염려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의를 분명하게 하여 복음을 올바르게 설명하고 그 일이 영세 전부터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는데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일로 온 세상에 드러내 어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을 때 구것이다.

 

<부가설명>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다른 복음을 전한 유대교적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서도 원을 얻는다는 것을 설파하였다. 그래서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나신바’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는 ‘영세 전’과 ‘이제’가 대조 되어 있다. 이제는 예수께서 오시므로 구원의 복음이 현실로 드러난 때를 뜻한다. 이제는 누구든지 유대인들에게 예언으로 주신 구원의 소식이 예수께서 오시므로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모세의 율법과 세상에 있는 성전봉사를 하지 않아도 예수를 믿으면 속죄 받고 의롭다함을 얻으며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그것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파한 것이다. 루터가 이 사실을 깨닫고 천주교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의 불길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신자들도 이 도리를 분명히 깨달으면 개인적으로 신앙개혁을 이루게 될 것이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으면 진정한 신앙개혁을 이룰 것이다. 아직도 우리교회 신자들이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는가 하는 두려움이 있다. 바울은 로마서 시작하면서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들에서 그것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를 간단히 적으면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났다고 제시한 것이다. 로마서를 더욱 읽고 연구해서 바울을 통하여 계시하신 믿음의 의를 분명히 깨닫고 신앙개혁을 이루는 재림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디며 그분의 자녀로 굳게 설 수 있도록 인내심을 주시고 격려하신다.

 

 

여섯째 날(금) 12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교회증언 5권>, 477~478 “교회의 연합과 사랑”, 604~606 “실수한 자들에게 대한 사랑”, <치료봉사>, 166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 줌”, <재림교 성경주석 13권>, 220을 읽어 보라.

 

“많은 이들이 질문을 가지고 온다. 이것을 해도 될까요? 그 사업을 해도 될까요? 나는 그들에게 대답한다. 그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지 않는가? 성경을 연구하라. 우리의 사랑하는 구주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어떻게 사셨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성경을 읽어라. 그분의 생애를 모방하라. 그리하면 그대는 좁은 길에서부터 빗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그대의 양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대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한다면, 그대는 예수께 직접 나아가지 않고 우리에게 와서 자문을 구하게 될 것이다”(교회증언 2권, 118~119).

 

“우리는 우리의 의무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지 말 것이며 무엇을 해야 될는지 우리에게 말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권고에 의지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다른 어느 사람을 가르치실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도 우리의 의무를 가르치실 것이다.…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이 그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뢸 때에 바로 어떤 노선으로 나아가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시대의 소망, 66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떻게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해서 정죄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하여 충실할 수 있을까요?

※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오직 성령의 인도를 구하여 사람들을 대할 때 그런 경험에 이르게 될 것이다.

 

➋ 내 자신의 양심에 바르게 행하면서 동시에 오류에 빠진 자들을 도우려 한다면, 언제 그들의 오류에 대해 말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침묵해야 합니까? 어떤 경우에 우리가 침묵한다면 우리에게 과실이 있을까요?

※ 그들의 주장이 성경과 분명히 다른 주장을 직접 들을 때에 말해야 한다. 남에게 들은 소리에 대하여는 침묵하는 것이 옳다. 본인에게 확인하기 전에는 침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➌ 왜 우리는 주 안에서 자유롭게 행하되 우리를 존경하는 자들에게 좋은 모본을 보일 책임이 있습니까?

※ 그들의 이해와도 관련되어 있다. 올바르게 성경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들을 말씀에 굳게 서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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