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선으로 악을 이김(질문, 대답, 부가설명)12/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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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7-12-15 21:53 조회7,411회 댓글0건본문
12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18분
연구 범위 : 롬 12~13장
기억절 :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로마 교인들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한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높은 순종의 표준을 가지도록 호소하였다. 진정한 순종은 마음과 생각의 변화에서 비롯되며, 그런 변화는 오직 하나님께 굴복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그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로마서는 이런 순종이 자동적으로 발생할 것이라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의무가 무엇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고, 그런 의무에 순종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어야 한다. 게다가 우리는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 한다. 그러한 능력 없이는 순종이 불가능하다.
행위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일부이다. 바울은 행위의 가치를 평가절하하지 않았다. 로마서 13~15장에서 바울은 행위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앞서 밝힌 믿음으로 얻는 의를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행위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참된 표현 방법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신약이 구약보다 더 어려운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신약의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른 도덕적 행위의 모본이 주어졌다. 그보다 더 높은 표준은 있을 수 없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 학습 목표
깨닫기 :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관계에 상호 반응이 일어난다는 뜻임을 깨닫는다.
느끼기 :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한 매일의 삶의 방식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행하기 :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을 깨닫고 그 방향대로 행하며 살기로 선택한다.
➋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어떤 뜻이라고 생각합니까?(롬 12:1~2 참고)
※ 거듭난 생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삶의 매 순간을 바치라는 뜻이다.
➌ 우리는 믿음으로 얻은 의로운 삶을 우리의 인간관계 속에서 어떻게 실현시켜야 할까요?
※ 거듭난 생명의 작용으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섬기고 도우는 삶이다.
➍ 그리스도인들이 정부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반대하지 않으면 정부시책에 순응해야 한다.
➎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서 율법의 구체적인 명령을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율법은 사랑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적은 것일 뿐이다. 무시될 수가 없다.
➏ 우리가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으로서 어떤 일을 더욱 열심히 실천하기로 결심해야 할까요?
※ 말씀이 생활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 : 우리가 꾸준히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위를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릴 때에 우리의 마음은 새롭게 되며 그에 따른 상호 작용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느끼며 행하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첫째 날(일) 12월 17일 너희의 영적인 예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교리적인 내용은 로마서 11장에서 끝났다. 12장에서 16장까지는 실천적인 교훈과 개인적인 언급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장들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어떻게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선 믿음은 순종을 대신할 수 없다. 믿음이 주님께 순종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어느 정도 무효화시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인 명령은 여전히 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신약에서조차 강조되고 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도덕적인 명령에 따라 그들의 삶을 규범화하기 쉽다는 암시도 없다. 오히려 자아와 죄 사이의 투쟁이 항상 거칠기 때문에 그렇게 되기 힘들 때가 많다(벧전 4:1).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약속되어 있고,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원수의 세상에 살며, 유혹에 대항하여 많은 투쟁을 치러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을 의지할 수 있다(히 7:25).
1. 롬 12:1을 읽어 보라. 여기에서 나오는 비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롬 12:2은 이런 개념에 얼마나 적합한가?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답: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다.
롬 12:1에서 바울은 구약의 제사를 암시한다. 이전에 동물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몸을 죽은 제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산 제물로 바쳐야 한다.
구약 시대에 제사에 바쳐질 제물들은 엄격한 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단 하나의 흠이라도 발견되면 그 제물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나님은 제물에 어떤 흠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보존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 가운데 흠이 없는 자가 없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흠 없고 신실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사도는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대해 묘사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신자가 된 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정지해 있으면 안 되며 훌륭한 상태에서 더 훌륭한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Martin Luther, Commentary on Romans, pp. 167, 168.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주장하는 사람이다. 성령이 그의 삶을 주장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롬8:9) 성령은 생명의 성령이시다.(롬8:2) 그리스도인은 항상 생명의 성령께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살게 하신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은 두 가지 측면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나는 그가 더 이상 사망에 처하여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법을 범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서 작용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고 예수님이 하는 것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거하시는 예수께서 그 그리스도인을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20의 바울의 고백이 바로 이것을 나타낸다. 그렇게 사는 것을 바울은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있는 제사로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다. 로마서 11장까지 기록한 복음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렇게 살게 된다고 12장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궤도 위에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인을 이 궤도에서 탈선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래서 때때로 탈선한다. 그러나 탈선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로 속히 궤도로 복귀하는데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유하심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첫째는 죄를 짓지 않는다. 둘째 사단의 공격에 탈선한다 해도 곧 다시 궤도로 복귀한다.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아멘.
교훈 :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이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산 제물로 드려야 한다.
둘째 날(월) 12월 18일 지혜롭게 생각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우리는 이번 기 교과에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이 항구적이라는 사실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로마서의 기별이 결코 믿음 때문에 십계명의 폐지나 폐기를 가르치고 있지 않음을 재차 강조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율법의 문자에 얽매이기 쉽다. 누구든지 사랑을 고백할 수 있지만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러한 사랑을 드러낸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1. 롬 12:3~21을 읽어 보라.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가?
[롬12:3~21]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8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답: 자기 몸을 돌보듯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사랑으로 돌보라고 했다. 그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몸의 각 지체가 서로 협력하고 돌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인식시킨다.
고린도전서 12~13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다룬 후, 사랑을 드높였다. 사랑(아가페)은 최고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처럼 행동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러한 사랑이 어떻게 실질적인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보여 준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은 겸손인데, 그것은 기꺼이 자신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롬 12:3)을 품지 않고,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10절),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16절)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에 대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하셨던 말씀은 겸손의 본질을 드러낸다.
모든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겸손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며 타락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라.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의에 의지해야 하며, 변화되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우리에게 자랑할 것과 내세울 것이 무엇인가? 하나도 없다.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 앞에서까지 이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행할 때 우리는 바울이 가르쳐준 말씀대로 살게 된다.
<부가설명> 사람들이 가진 것은 자기 자신의 것이 없다. 모두 받은 것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받지 않은 자처럼 자랑하고 있다.(고전4:7) 사람이 존재와 생명 자체를 받은 의존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지혜이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를 존재하게 한 분에게 감사를 표하고 모든 사람은 존재와 생명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 우쭐댈 수 있는 것이 자기에게 전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창조주를 경배하게 되고 순복하게 된다. 창조주를 경배하고 순복하는 삶이 바로 사랑을 드러내는 삶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이다. 예수 안에서 거듭남으로 이 생명을 받았다면 사랑이 생활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런 삶이 겸손한 삶이다. 성경은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라고 계시하였다.(습2:3) 바울은 12장 13장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진정으로 얻은 사람은 이 사랑이 생활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도록 성령의 주장을 간절이 간구하고 굴복하자.
교훈 : 우리는 율법의 문구에 얽매이지 말고 그 정신이 사랑이라는 사실과 그것의 출발점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행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날(화) 12월 19일 그리스도인들과 정부의 관계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1. 롬 13:1~7을 읽어 보라. 우리가 공적인 권력 기관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할지에 대하여 이 말씀에서 배워야 할 기본적인 원칙은 무엇인가?
[롬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2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3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답: 정부 관리들을 존경하고 제도를 잘 시행하라고 가르친다.
한 이교 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 바울이 이 글을 적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제국은 매우 잔인하고, 그 통치자들은 부패했으며, 참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도, 관심도 없을 뿐더러, 수년 안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대거 박해할 나라였다. 게다가 바울은 그 정부에 의해 사형을 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착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같은 정부 하에서도 그래야 하는가?
그렇다. 왜냐하면 정부라는 개념 자체는 성경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의 개념과 통치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다. 인간은 규칙과 제도, 그리고 기준이 존재하는 사회 안에서 살아야 한다. 무정부(anarchy)는 성경이 가르치는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모든 형태의 정부와 통치 방식을 승인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잔인한 정권들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 단지 바울과 같은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한 그 땅의 법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와 상충되지 않는 한 충성스럽게 국가에 협조해야 한다. 우리는 권력과 충돌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사숙고하며 다른 이들의 조언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예언을 통해서 언젠가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권력과 대립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계 13). 그때까지 우리는 어떤 나라에 살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다해야 한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원칙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가이사의 권세가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할 때에, 그런 가이사의 법률은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생활원칙을 따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에게 가이사의 법률을 따르지 않는 이유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럴 때 가이사의 권세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죽이는 지경에도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하나님 편에 굳게 서야 한다. 이 세상은 나그네 세상이요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계시로 예언한 역사적 사건들을 잘 살피고 예언이 지적한 역사적 상황이 닥치려고 할 때 예언이 가르친 대로 처신하는 지혜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언연구를 부지런히 해야 하고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성경연구 하는 것이 실제적인 신앙의 지침이 되지 않으면 유익이 없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 미래의 국가가 하나님의 정부와 충돌을 일으키기 전까지,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우리는 충성스럽고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
넷째 날(수) 12월 20일 서로 사랑하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1.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
답: 그런 뜻일 수 없다. 사랑이 율법을 다 이룬다고 했지 율법을 폐지한다고 하지 않았다. 사랑하면 율법의 조문들이 다 이루어지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려고 이 구절을 아전인수(我田引水)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 실증되는 길이 율법이 실천되는 모습이다. 오해하지 말자.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바울은 율법의 교훈을 확대하여 우리의 모든 행동의 동기가 사랑이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율법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 말해주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은 곧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사랑의 모호한 표준으로 율법의 구체적인 명령을 대신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율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죄를 지적하는 역할을 한다. 누가 죄의 실재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율법은 오직 사랑이라는 동기 속에서만 준수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2 사랑이 율법 준수의 원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바울은 어떤 계명을 예로 들었는가? 왜 이 계명들만 언급되었는가?(롬 13:9~10)
[롬13:9,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답: 바울은 십계명 중에 네 가지 계명을 예로 들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오해한다. 바울은 네 가지 계명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고 말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네 가지 계명과 그 외의 다른 여섯 가지 계명을 다 지킨다는 뜻이다. 오해하지 말자.
흥미롭게도 사랑의 요소는 새롭게 소개된 원칙이 아니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레 19:18을 인용하면서 바울은 사랑의 원칙이 구약 성경의 필수적인 요소였음을 보여준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몇 가지 계명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며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섬겨도 된다는 말인가? 절대 그럴 리 없다.
문맥을 살펴보라. 바울은 우리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그가 개인적인 관계를 취급했기 때문에, 이런 관계를 둘러싼 계명들을 언급했다.
따라서 나머지 계명을 폐했다고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행 15:20, 살전 1:9, 요일 5:21 참고). 게다가 신약의 저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이에게 사랑을 보임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인다(마 25:40, 요일 4:20~21).
<부가설명> 이미 답에서 말했지만 로마서 13:9,10절은 율법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잘 인용하는 구절이다. 갈라디아서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다. 그러나 로마서의 이 구절을 정직하게 읽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히 알게 될 것이다. 바울이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장을 제대로만 읽어도 그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기록하였다. 자세히 읽어보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바울이 예로 든 네 계명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고 했다. 이 문장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은 이 네 계명 외의 여섯 계명까지 다 실천하는 삶을 산다고 가르친 것이다. 진정으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에는 십계명의 모든 조문이 다 실천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9절 10절의 어느 한 글자도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다. 네 계명과 그 외의 다른 여섯 계명이 있어도 그것들이 다 이웃 사랑하는 계명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오해할 수 있는가? 십계명을 무시하는 사상이 눈을 흐리기 때문에 오해하는 것이다. 십계명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모습을 잘 관찰하고 간단히 적어보면 그런 조문이 성립되는 그런 계명이다. 그렇지 않은가? 즉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따라다니면 면밀히 관찰하고 그것은 아주 간단히 문장으로 적어보면 십계명이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교훈 : 계명은 우리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지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진실한 사랑으로 동기가 부여된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계명을 준수할 수 있다.
다섯째 날(목) 12월 21일 이제 우리의 구원이…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롬 13:11).
바울은 로마 교회, 특히 그 가운데 유대인 신자들을 위해 한 가지 매우 특정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그것은 신약 시대의 믿음과 행위의 기능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죄인이 어떻게 구원을 받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될 수 있냐는 것이었다. 율법을 강조했던 자들을 돕기 위해 바울은 구원의 과정 속에서 율법의 역할을 설명하였다. 원래 구약 시대의 유대교도 은혜의 종교였지만 율법주의가 일어나 본질이 많이 훼손되었다. 우리도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1. 롬 13:11~14을 읽어 보라. 바울은 어떤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를 고대하면서 어떻게 우리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
[롬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답: 예수님 재림에 대하여 말한다. 깨어 준비하라고 권고한다.
여기서 바울은 감동스럽게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니 깨어서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설교한다. 이것이 2천 년 전의 기록이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재림은 우리의 죽음만큼 가깝기 때문이다. 다음 주가 됐든, 40년 후가 됐든 결국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죽은 상태로 4일 동안 잠을 자든, 400년 동안 잠을 자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잠들어있던 우리가 눈을 뜨고 처음 바라보게 될 일이 예수님의 재림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어느 순간 우리에게 이를지 모른다. 인생은 정말 짧고, 구원은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보다 가깝다.
재림이 로마서에서는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지만 데살로니가서나 고린도서에서는 훨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재림은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재림이 없다면, 소망도 믿음도 사실상 의미가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놀라운 진리에 완전한 결실을 가져올 재림이 없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부가설명>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빛은 생명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것은 생명의 갑옷을 입으라는 말과 같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곧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긴 설명을 하였다. 4장에서 그 의가 바로 죽은 자를 살린 부활의 생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설명하였다.(롬4:17~25을 자세히 읽어보라) 그리고 편지를 마무리하는 실천의 권면에서 이 부활의 생명을 입으라고 강권한다.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셨기 가능한 일이다.(벧전1:3) 예수께서 부활하지 않았으면 거듭나는 일이 불가능하다. 결국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것은 곧 빛의 갑옷을 입는 것이다. 이 생명을 가진 사람의 생활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의 내용을 간단하게 구체화하면 십계명이 되는 것이다. 악한 동무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전15:32,33)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진정 빛의 갑옷을 입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 죽는다면 내일 재림을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는 잠든 그 이튿날 재림의 아침을 맞는 것이다. 아멘.
교훈 : 우리의 죽음만큼 예수님의 재림은 정말 가깝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은 구원의 완성을 내다보며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한다.
여섯째 날(금) 12월 2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계시되어 있다. 성경의 진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말씀이다. 이런 진리를 삶에 적용하는 자는 모든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에게 새로운 지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지와 죄로 이해를 가렸던 어두움이 제거되는 것이다. ‘새 마음’을 주신다는 말씀은 ‘새로운 생각’을 주신다는 뜻이다. 심령의 변화는 항상 그리스도인의 의무에 대한 분명한 확신과 진리의 이해로부터 온다. 성경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피는 자는 하나님께 의지함에 따라 지적으로 더 높은 차원에 이른 것처럼 명철한 이해력과 건전한 판단력을 얻게 될 것이다”(My Life Today, 24).
“주님은 곧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나타나심을 위하여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아, 그분을 대면하고 그분의 속량함을 받은 자로 영접된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이 희미해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영광 중에 계신 왕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큰 소리로 ‘본향을 향하여!’라고 소리쳐야 할 것처럼 느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을 영원한 본향으로 데려가시기 위해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실 시간에 접근하고 있다”(교회증언 8권, 25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착한 시민이 되는 것과 동시에 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매우 복잡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하고 정부와 대립되는 일을 하려고 할 때, 그대에게 자문을 구한다면 그에게 어떻게 말해주겠습니까? 그대는 어떤 원칙을 따르겠습니까? 이런 상담은 오직 극도의 신중함과 기도 그리고 심사숙고의 과정을 통해 진행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한 길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성경적이 아닐까? 생각해 봅시다.
➋ 그대는 로마서를 통해서 종교개혁의 중요성에 대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로마서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또 왜 그것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어떤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 로마서는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기록된 말씀을 따라 신앙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하고 성경이 계시한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그대로 신앙생활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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