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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과 예수님과 예루살렘(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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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5-28 07:27 조회7,6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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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4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0분

 

기억절 :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마 21:42).

 

연구 범위 : 슥 9:9, 마 21:1~46, 롬 4:13~16, 계 14:7~12, 행 6:7, 마 22:1~15

 

예수님은 마 20:27~28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에 오셔서 병들고, 가난하고, 여전히 그분을 멸시하는 잃은 영혼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봉사하시며 종의 삶을 사신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영원한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그분의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의 섬김보다 더 이해할 수 없고 놀라운 것은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목적, 즉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는 목적을 직시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은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벧전 1:12) 신비 곧 십자가 속에서 절정을 이룰 것이었다.

이번 주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지상의 왕이 되기보다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고후 5:21)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을 둘러싼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1세기 신자들이 하늘에서 비롯된 예수님의 사역으로부터 느낀 경이로움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주께서 허락하시는 승리를 수용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은혜를 받아들인다.

 

A. 

❷ 예수님은 어떤 마음으로 거대한 행렬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까요?

※ 예언의 성취를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달아서 마지막으로라도 구주로 영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러게 하셨다. 

❸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을 때에 제사장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 예수가 자기들의 권위를 여지없이 짓밟았다고 생각했거나 그가 참으로 메시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❹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도록 그분께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맡긴다면 우리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의 생명으로 생활하게 될 것이다. 

 

B. 

❷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주인의 초대와 사람들의 거절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의 구원의 초대와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상징한다. 

❸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사건이나 건축자들에게 버림받은 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까?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❹ 오늘날 우리가 심판의 엄숙한 경고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초대를 수용한다면 어떻게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될까요?

※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삶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결론 : 예수님의 위풍당당한 예루살렘 입성은 그분의 재림과 지구의 정결 그리고 최후의 심판을 예시합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첫째날(일) 예언된 분이 오심

5월 29일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 21:5).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친 후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들뜬 마음으로 성전을 재건하였지만 그 기초가 놓였을 때에 솔로몬 성전의 장엄함을 기억하는 자들은 두 번째 성전이 이전 만큼 훌륭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하였”(스 3:12)다.

백성들은 그들 중에 선 두 사람 즉 늙은 선지자 학개와 젊은 선지자 스가랴에게서 예기치 않은 격려를 받았다. 학개는 솔로몬 성전의 진정한 영광은 솔로몬이나 다른 어떤 사람이 가져다 놓은 사물로부터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다.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이었다. 학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

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 2:6~9)고 하였다.

젊은 선지자 스가랴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사정은 훨씬 희망적으로 바뀌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1. 이 예언은 어떻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마 21:1~11)에 적용되는가?

[마21:1~1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답: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므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입성에 관한 유대인의 풍습을 따르고 계셨다. 그분은 이스라엘 왕들이 탔던 동물을 타셨으며, 예언의 말씀도 메시아가 그렇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시리라고 예언했었다”(시대의 소망, 570).

 

<부가설명> 예수께서 세상에 구주로 오셨다. 그분의 탄생과 봉사에 대한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언은 예수께서 친히 하셨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예수께서 탄생부터 십자가와 부활까지 모두 친히 계획하신 구원사업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런 사실을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행2:23)이라고 말하였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도 예언을 성취하는 장면이다. 왕이 나귀를 타는 것은 평화의 일을 행하는 것을 상징했다. 말을 타면 전쟁을 위한 상징이 되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그것도 새끼나귀를 타신 것은 그분이 철저히 평화의 왕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분명히 왕이심을 드러내었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만왕의 왕이시다. 그분은 평화의 도성인 새 예루살렘에서 우주의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다. 그런 사실을 나귀새끼를 타고 평화의 도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왕이 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왕의 행렬로 입성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 얼마나 흥분했겠는가. 예수님께 기대를 하고 있는 백성들은 또 어땠겠는가. 특히 가룟 유다는 자기가 오래 꿈꾸던 일이 이제야 이루어지려나 하는 흥분으로 종려가지를 들고 호산나라고 외쳤을는지 모른다. 예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유대 백성들이 곧 일어날 고난의 사건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도록 시위하신 것이다. 그의 고난과 십자가가 바로 평화의 왕국을 이루는 것임을 느낄 수 있도록 시위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 왕이 되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무리들과 전쟁하시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분은 평화로 세상을 통치하실 것인데 먼저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승천으로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 예수님이 모든 신자의 왕이 되셔야 한다.

 

교훈 :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대로 두 번째 성전은 메시아를 맞이하는 영광을 얻었으며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둘째날(월) 성전과 예수님

5월 30일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마 21:13).

 

동물 제사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수단이었다(롬 4:13~16). 그것은 타락 이후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세상에 구원의 계획을 가르치고, 메시아의 오심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은혜를 계시하였다. 창세기 4장에 있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적으로 이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예배를 둘러싼 비극이었다(계 14:7~12 참고).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과 그분의 선민으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구원에 대한 더 포괄적이고 완전한 설명으로 성소봉사를 제정하셨다. 광야의 성소에서 시작해서 솔로몬 성전을 지나 귀환 이후에 재건된 성전에 이르기까지 복음은 성소봉사의 상징과 표상을 통해 계시되었다.

그러나 그 신적인 기원에도 불구하고 성전봉사와 그 제의들은 타락한 인간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그리고 인간들이 개입한 대부분의 일들에 나타나는 결과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계시하기 위해 그분이 제정하신 거룩한 의식에조차 부패가 뒤따랐다. 예수님 시대에 제사장들(거룩한 의식을 수행할 책임이 있던 자들)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상황은 더 끔찍하게 왜곡되어서 “백성들의 눈에는 제사 의식의 신성성이 크게 훼손되었다”(시대의 소망, 590).

 

1. 마 21:12~17을 읽어 보라. 여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마21:12~17]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14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15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6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답: 기록한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말씀대로 충성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자기 의도대로 해석하고 자기편을 만드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분의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셨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성경을 우리의 세계관과 도덕 체계의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는 풍성한 증거이다. 그분은 성경을 인용하셨고 맹인과 지체장애인들도 치유하셨다. 이 모든 것이 그분의 신성과 사명에 대하여 더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증거에 대해 가장 예민하고 개방적이어야 할 자들이 그분과 가장 치열하게 투쟁한 자들이었다니 너무도 비극적이다. 여러 성전 봉사자들은 그들이 소유한 세상의 보화와 성전 청지기와 관리자로서의 지위에 대한 염려 때문에 성전봉사가 정작 가리키고자 했던 바로 그것, 곧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놓치게 될 것이었다.

 

<부가설명> 성전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집이다.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께 올리는 신자의 찬양이며 신앙고백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을 고하고 굴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지도자들의 이욕의 전당이 되어 있었다. 예수께서 이것을 쓸어내셨다. 보이는 성전 청결은 사람 성전을 청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사람은 기도로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때에 청결한 존재로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도가 호흡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양은 온전한 것이다. 젖먹이와 어린 아기는 실제로 그렇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찬양과 감사를 온전하게 하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하다. 여기서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기도하는 집으로 주님께 드리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인격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 예수님 시대의 제사장들은 탐욕으로 말미암아 성전봉사를 왜곡했다. 주님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며 말씀과 치유로 그분의 신성과 사명을 증명하셨다.

 

 

셋째날(화) 열매가 없음

5월 31일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마 21:20).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역은 동정의 행위였다. 사고파는 행위는 이방 성전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집을 만민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공간이 되도록 계획하셨다.

반면 정화 사역은 심판의 행위이기도 했다. 성전을 운영했던 제사장들은 만민에게 복을 전할 기회를 저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을 심판할 날이 가까웠다. 예수님이 자신의 거룩한 부르심을 계시하기 위해 행하신 모든 일들을 보고도 그들이 여전히 그분을 영접하기를 거부했으니 그 안타까운 선택의 결과를 거둬들이는 일 외에 또 무슨 일이 필요하겠는가?

 

1. 마 21:18~22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그분의 성전 정화 사역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마21:18~22]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밖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답: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더러워진 성전들이었다.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것은 종교지도자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깨끗한 성전이 되라는 호소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열매 없는 무화과처럼 마른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은 유다 국가의 여러 지도자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준 비유였다. 그들은 마침내 자기들이 심은 것을 거두게 될 것이었고 그 결과는 돌이킬 수 없었다. 한편 우리는 이 비유가 모든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그러나 그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의 성전봉사 역시 결실이 없어 곧 폐지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행동과 격한 표현은 그분이 자신의 봉사를 통해 드러내셨던 동정과 포용의 교훈을 여전히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제자들로서는 상당한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

이분이 세상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 왔다고 선포하셨고, “인자는 사람들의 생명을 멸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왔느니라”(눅 9:56, 한글킹제임스)고 선언하셨던 동일한 예수님이시다. 그분의 봉사 중에 나온 모든 말과 행동은 타락한 인류를 회복하고 백성들에게 그분 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희망과 약속을 가리키기 위해 바쳐졌다. 그래서 그분의 그와 같은 단호하고 과격한 행동과 말씀은 그들을 놀라게 했고,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기록했다.

 

<부가설명> 팔레스타인 지역의 무화과는 잎이 나올 때 잎줄기와 그 잎이 나오는 가지 사이에 열매가 맺힌다고 한다. 이것을 아람어로 ‘탁쉬’라고 한다. 이때는 유월절 계절이다. 양력으로 하면 3월 하순이나 사월 초순이다. 무화과나무가 잎이 돋아나서 아직 무성하기 전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보신 무화가나무는 잎이 나와 있었다. 거기에는 탁쉬가 있어야 했다. 잎이 돋아날 때 탁쉬가 맺히면 유월절쯤에는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는 때였다. 그런데 잎 외에 탁쉬가 없었다. 진짜 먹음직한 무화과는 6월 이후에 열리는데 이것을 ‘비쿠르’라고 한다. 탁쉬가 제 때에 맞히지 않으면 비쿠르의 때에 비쿠르가 열리지 않는다. 탁쉬는 비쿠르의 전조(前兆)인 셈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그 지도자들은 탁쉬가 없는 무화과나무였다. 결코 비쿠르가 열리지 않는다. 그런 무화과나무는 과일나무로서는 소용이 없는 나무가 된 것이다. 땔감 밖에 쓸데가 없었다. 예수님이 보신 당시 유다 종교와 그 지도자들이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영원한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

 

교훈 :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종교적인 결실이 없는 종교지도자들에게 임할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을 비유하였다.

 

 

넷째날(수) 돌

6월 1일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 21:40).

 

그대에게 살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면 그 동안 무엇을 하겠는가? 예수님은 남은 시간동안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1. 마 21:33~46을 읽어 보라. 다음의 인물들은 누구를 대변하는가?

[마21:33~46]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땅 주인 : 예수님(하나님)

농부들 : 유대인

종들 : 선지자들, 예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자들

아들 : 예수님

예수님이 시 118:22~23을 인용하셨다는 점을 주목하라. 버림받은 돌에 대한 예언을 인용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사건을 언급하셨다. 그 사건은 첫 번째 성전 건축과 관련이 있었다. 솔로몬 성전의 벽과 기초에 사용될 거대한 돌들은 채석장에서 완전히 준비되어야 했다. 그것들이 성전에 옮겨진 후에는 어떤 도구도 사용되어서는 안 되었고 정과 망치소리도 들려서는 안 되었다. 일꾼들은 그것들을 제 위치에 놓는 일만 해야 했다. 기초석으로 사용할 비범한 크기와 특별한 모양의 돌 하나가 운반되어 왔다. 하지만 일꾼들은 그것을 둘 만한 자리를 찾지 못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돌이 쓸모없이 통로를 차지했기 때문에 일꾼들은 짜증이 났다. 그 돌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나 모퉁잇돌을 놓을 시기가 되자, 건축자들은 큰 무게를 견디며 그 자리에 놓을 수 있는 적합한 크기와 강도와 모양을 가진 돌을 오랫동안 찾았다.… 그러다 마침내 매우 오랫동안 버려둔 돌이 주목을 받았다.… 그 돌을 시험한 후에 정해진 장소에 가져가니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시대의 소망, 598).

 

<부가설명> 이 농부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대신에 자기들이 주인이 되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대신에 자기들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보내셔서 농부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권고하였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요6:29) 그런데 믿는 대신에 자기들이 일을 하려고 한 것이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의 사상이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자기들의 일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드디어 포도원 주인의 아들이 오셨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않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모퉁이 돌을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돌은 모퉁이 돌이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모퉁이 돌이었다. 그를 버리고 하늘과 땅은 연결되지 않는다. 

 

교훈 : 죽임을 당한 주인의 아들과 버림받은 돌은 모두 주님을 상징한다. 그분은 사람에게 거부를 당하셨지만 우리를 위한 구원의 반석이 되기를 바라신다.

 

 

다섯째날(목) 은혜의 값

6월 2일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마 22:2).

 

우리는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다. 그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죄와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길을 우리 모두에게 제공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주제는 성경 전체를 통해 이런 저런 방식으로 제시되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다음의 비유에서도 그 주제를 볼 수 있다.

 

1. 마 22:1~15을 읽어 보라. 이 비유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

[마22:1~15]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답: 초청을 거절한 자들은 임금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초청에 응했지만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왕이 준비한 예복보다 자기의 옷을 더 귀하게 여긴 자이다. 오직 임금이 마련한 예복을 입을 때 심판을 견딘다. 

 

이 비유가 비록 과격하게 보일지라도 각 사람이 영생할 것인지 영멸을 당할 것인지에 대하여 경각에 달린 사안들을 다루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또 무엇이겠는가?

인류 구원을 위한 대비책을 마련하기 위해 하나님이 희생을 치르셨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문제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깊고 심오한지 알게 된다.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스스로 엄청난 타격을 감내하시는 영원한 신격의 한 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할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가 영원히 연구해야 할 주제이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우리는 비유 속에서 매우 단호한 기별들을 듣는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신다(계 19:7). 다른 비유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값을 치러가면서까지 필요한 모든 것이 친절하게 제공되었다. 그래서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이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자신들의 일을 보러 갔다는 것은 너무 무례한 처사였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자비의 초대를 전하러 온 자들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단호한 대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예복은 그리스도의 의를 상징한다. 또한 그 의는 성도들의 삶과 행동을 통해 나타난다. 예복이 없는 사람은 구원과 은혜의 특권은 주장하면서 복음이 자신의 삶과 성품을 변화시키도록 허용하지는 않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을 대표한다. 모든 준비는 초대에 응하는 자들을 위해 큰 비용을 들여 마련되었다. 이 비유가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지 문 앞에 나타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부가설명> 21장의 성전 청결로 빚어진 논쟁들과 비유와 22장의 잔치 비유까지 그 중심에 예수님이 계신다. 그분이 하시는 구원의 사업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때만 참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자기의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그림처럼 그려준 사건과 이야기들이다. 예루살렘은 권고하는 기간 동안 예수님의 이 간절한 권고를 깨닫고 받아들여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열매 없는 무화과처럼 잎사귀만 있었다. 미래가 없었다. 소망이 없었다. 성전청결과 무화과나무 저주로 그들의 미래를 분명히 보여주셨다. 이런 말씀을 읽는 우리는 예수님이 주시는 기별을 분명히 깨닫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생활로 경건을 이루고 성품을 거룩하게 한다는 생각을 깨뜨려야 한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그의 생명이 되셨기 때문에 그 생명작용으로 그렇게 나타난 것일 뿐이다. 진정으로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힘을 다한 노력으로 경건과 거룩함을 이루었다면 그는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과 같다. 그것은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노력이 된다. 우리는 바른 깨달음으로 주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자.

 

교훈 : 하나님은 무한한 값을 치르고 마련한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신다. 잔치를 거절하고 예복을 거부하는 자들은 구원에 대한 절실함의 부족을 드러낸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6월 3일

 

“3년 동안 방치된 여성의 시신, TV 켜진 채 소파 위에 뼈만 남아…” 한 영국 신문의 헤드라인 기사의 제목이다. 런던의 한 아파트에서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에게 전화한 사람도 없었나? 어떻게 무제한 통신 시대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 소식은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지만 특별히 런던 시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어떻게 그녀의 시신은 그토록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며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단 말인가? 복음의 약속, 큰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제공되는 구원의 소망 없이는 우리도 런던의 가련한 여인처럼 망각의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처지가 훨씬 심각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멸망한 뒤에 삼 년이 지나고 삼백만 년이 지난다 할지라도 우리를 발견하고 우리의 죽음을 애도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전 우주가 수축하여 소위 ‘우주의 열죽음(the cosmic heat death)’ 또는 그 비슷한 개념의 사멸에 이를 것이라고 현재 과학계는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이러한 견해가 틀렸다고 말한다. 우리는 영원한 망각 대신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다. 그와 같이 놀랍도록 희망찬 전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 특권을 얻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사람이나 사물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사망이 얼마나 결정적이며 최종적인지 그리고 수천 년 동안 그것을 극복하려던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수명이 다 된 엔진을 가진 자동차가 새로 도장을 했다고 다시 도로를 달릴 준비가 되지 않는 것처럼 시신을 잘 보관한다고 해서 사망을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죽음을 정복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처럼 강렬하고 극적인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가 우리의 소망과 신앙에 얼마나 핵심적인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망을 처리한 것이다. 부활은 생명을 드러낸 것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고, 거듭남으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은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사업은 허무한 것이된다. 

 

➋ 예수님의 의를 입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지 묵상해 보십시오. 이 중요한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값싼 은혜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어떻게 우리를 지켜줄 수 있습니까?

※ 예수님의 의를 입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것은 내가 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이 하지 않는 것은 나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 생명의 작용이 아닌가.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면 예수님이 작용하는 대로 나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당연히 값싼 은혜나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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