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과 마음의 우상들(질문, 대답, 부가설명)05/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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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5-21 00:39 조회7,163회 댓글0건본문
5월 2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45분
기억절 :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
연구 범위 : 전 9:10, 마 18:1~4, 마 18:21~35, 마 19:16~30, 갈 3:21~22, 마 19:27
인간은 환경과 문화의 산물이다.(이 표현은 잘못되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고 적어야 옳다. 저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이런 표현은 조심해야 한다.) 이것들이 우리의 가치관, 신념 그리고 태도를 형성한다. 우리가 자란 곳이 대도시이든지, 깨끗한 물조차 없는 마을이든지 차이는 없다. 우리가 성장한 문화와 환경은 우리의 현재 모습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설령 그대가 다른 환경으로 이동할지라도 그대의 성장 배경은 죽을 때까지 그대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불행히도 우리의 환경과 문화는 대부분 하나님 나라의 법칙에 조금씩 어긋난다. 이 세계는 타락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와 도덕, 관습은 그 타락한 상태를 반영한다. 그것들이 그 외에 무엇을 반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문화와 환경에 너무 젖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알기 어렵다.
우리 마음속에서 그분의 나라의 가치와 도덕과 표준을 제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이번 주에 살펴보겠지만, 그러한 가치와 도덕과 표준들은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세상의 가치와 크게 다르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러한 교훈들을 깨달아야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위대함을 측정하는 인간의 방식과 하늘의 방식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정한 위대함을 알고 그분의 인정을 갈망한다.
➌ 행하기 : 친절에 대한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봉사 중심의 삶을 추구한다.
A.
❷ 성경에 따르면 하늘의 평가 기준과 세상의 평가 기준은 얼마나, 어떻게 다릅니까?
※ 하늘의 기준은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고 세상은 권세와 물질과 교육 도덕성 신분 등등으로 평가한다.
❸ 부자 관원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또 어떤 평가 기준을 제시하셨다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인간의 행위의 차이를 드러내셨다.
❹ 우리 각자 또는 우리 교회가 하늘의 평가 기준에 적합하게 되려면 어떤 부분의 개선이 필요합니까?
※ 무조건 진정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
B.
❷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마 19:27~20:16)
※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대우하신다. 하나님의 주시는 것은 생명이라는 것을 가르치셨다.
❸ 야고보와 요한이 원하는 지위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자아부정의 잔을 마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❹ 우리가 교회의 일을 하며 봉사할 때 어떤 보상이나 인정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려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이 있어야 할까요?
※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라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지체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결론 : 진정한 위대함은 인간의 주목을 추구함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겸손히 굴복함으로 성취됩니다.
첫째날(일) 겸손의 위대함
5월 22일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마 18:1).
위대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위대한 사람이 되거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런 열망이 항상 이기심과 교만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가져다주기를 희망하면서 최선을 다한다(전 9:10 참고).
그러나 문제는 ‘위대함’을 정의하는 데서 비롯된다. 타락한 인간의 정신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매우 벗어난 방법으로 그 개념을 이해하기 쉽다.
1. 마 18:1~4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무엇이 진정한 위대함인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
[마18:1~4]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답: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이다. 우리는 겸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진정한 위대함을 정의하기 위해 예수님은 그분 앞에 한 어린이를 불러 세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예수님은 위대한 설교자, 위대한 사업가 또는 위대한 자선사업가가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위대함이란 우리가 겉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다. 물론 우리 내면의 것은 우리가 겉으로 하는 일에 영향을 준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방식으로 위대함을 정의하셨던 점에 주목하라. 이것은 누군가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우리가 바라는 위대함이란 작은 아이처럼 겸손해지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낯설게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의 원칙과 사상과 개념에 너무 오염됐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처럼 겸손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겸손을 가리키는 한 가지 특징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앞에 두고 순종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길에 빠졌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분의 길로 돌아가라. 만약 아담과 하와가 겸손에 머물렀다면 그들은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모두 동산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흥미롭다. 생명과 멸망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않다. 차이는 겸손에 있다.
<부가설명> 성경이 말하는 교만이나 겸손 이외의 많은 단어들은 성경의 정의를 찾아서 바르게 개념을 알아야 한다. 많은 경우 성경의 용어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주의 법을 좇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가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시119:85) 그처럼 겸손도 정의하고 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2:3) 여호와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어린아이가 자기를 낮추는가? 사람들 중에 어린아이처럼 자기만 위하는 존재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 속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고 하셨다. 돌이킨다는 말이 핵심이다. 이것은 회개를 가리키는 말이다. 회개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어린아이가 되려면 태어나야 한다. 아담의 씨로 태어난 사람들은 육체뿐이다.(시 78:39)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롬8:7) 아담의 씨로 태어난 사람들은 다 교만한 자이다.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되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나라에 출생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영의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이다. 천국에서는 이런 사람이 큰 자이다.
교훈 : 예수님은 어린 아이처럼 겸손한 자가 큰 사람이라는 하늘의 평가 기준을 제시하셨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둘째날(월) 용서의 위대함
5월 23일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마 18:21).
타락의 가장 심각한 결과는 인간 상호 관계에서 나타난다. 아담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하와를 비난하려고 했던 때부터(창 3:12)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개인들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쇠퇴하였다. 불행히도 갈등은 세상뿐 아니라 교회 안에도 존재한다.
1. 마 18:15~35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여기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가? 그럼에도 우리가 종종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마18:15~3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답: 합심해서 기도하면서 허물을 범한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용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자기감정 위주로 사람을 대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직접 가서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뒤에서 불평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정확한 이유는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관계를 회복하라고 가르치신다. 만약 그 사람이 이런 노력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다음 조치를 위한 추가적인 지침이 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이 말씀의 문맥은 다른 사람과의 회복과 징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절을 더 넓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은 작은 무리가 신자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 성령께서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구속 사역이다. 이러한 사역은 겸손하게 의로운 일을 행하며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과 직접 대화함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그렇게 행하는 자들 중에 존재하는 위대함의 또 다른 예가 될 수 있다.
2. 마 18:21~35을 다시 읽어 보라. 예수님이 강조하신 요점은 무엇인가?
[마18:21~35]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답: 언제나 용서하는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일곱 번에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실제로 누군가를 용서할 때에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용서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유익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도 용서의 불가피성을 진지하게 다루신다.
예수님이 자신의 요점을 밝히기 위해 말씀하신 비유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보라. 우리는 많은 것을 용서받을 수 있다. 복음은 말하자면 용서에 대한 것이다(출 32:32, 행 5:31, 골 1:14 참고).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방법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각한 결과를 맞이해야 할 것이다.
<부가설명>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용서하시고 그 용서하신 증거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가 회개하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고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할 수 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 있고 그 용서를 감사하게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이 회개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시고 기다리신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과 구원의 도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였다는 증거가 우리에게 허물진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 증명된다고 가르치신다.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사람은 두말없이 백 데나리온 빚을 탕감해야 한다. 그것이 자지가 엄청 탕감 받은 감사의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망을 탕감 받았다. 이제는 생명의 존재가 되었다. 우리 주위에서 사망의 정신으로 우리에게 허물진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탕감해야 한다. 사단은 사람들이 용서하는 정신을 가지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사단의 궤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2:10,11) 우리는 사단의 궤계에 속지 않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주님은 우리가 하늘의 큰 용서를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에 주저하지 말도록 가르치신다. 용서의 정신은 또 다른 위대함의 예이다.
셋째날(화) 마음의 우상들
5월 24일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
1. 마 19:16~30을 읽어 보라. 신약 시대의 신자로서 우리는 오늘날 이 이야기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연관시켜야 하는가?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마19:16~30]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20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5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답: 영생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야 한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예수를 따를 때 나타나는 생활의 결과이다. 자기가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생각하는 동안 예수님을 참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부요한 사람은 천국을 얻을 수 없다. 이런 교훈들을 가르치는 것이고 배워야 한다.
이 사람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는 별로 없지만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짚을 수 있다. 그는 부자 관원이었으며(눅 18:18 참고) 분명 철저한 율법의 추종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 속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겉으로는 경건한 수도승이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영적 생애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구원의 확신에 관한 문제로 씨름했다. 두 경우 모두, 그들은 그들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큰 간극이 그들의 외적인 행위를 통해 메워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관원은 자기 자신의 의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어떤 점에 있어서도 결점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았으나 그러면서도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가 갖지 못한 어떤 것의 필요를 느꼈다. 예수께서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처럼 그를 축복해서 그의 영혼의 필요를 만족시키실 수는 없으실까?”(시대의 소망, 518).
어떤 사람은 이 일화에서 예수님이 우리가 자신의 선한 행위를 바탕으로 영생을 얻는 것처럼 가르치신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어쨌든지 예수님은 마 19:17에서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고 하셨다. 만약 이 말씀이 구원을 주제로 한 유일한 성경절이라면 그렇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훨씬 많은 성경절들이, 특히 바울의 서신에서,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다만 구원의 필요성을 제시한다고 가르친다(롬 3:28, 갈 3:21~22, 롬 7:7 참고).
실제로 예수님은 그가 자신의 현재 행위보다 더 큰 필요를 볼 수 있도록 이끄셨던 것이 분명하다. 만약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구원을 얻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복음은 심령을 꿰뚫고 곧바로 마음의 우상에게 향한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들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다면 제거될 필요가 있다. 이 일화에서 그 장애물은 그의 돈이었다. 예수님은 부자가 구원을 받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주목하신다. 그러나 이 담화 직후에 누가는 방금 일어난 아름다운 일화를 기록한다(눅 19:1~10).
<부가설명>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19:17) 라고 하셨는데도 그 다음에 있는 것을 다 팔아 구제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은 강조하면서 계명들을 지키라는 말은 거의 무시하는 것 같다. 계명은 분명히 십계명의 내용을 제시하셨다.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예수를 믿으면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이해하려고 한다. 이 청년이 계명을 지킨 것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자기 공로로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그것이 이 청년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이었다. 또 이 청년이 실제로 계명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문자만 지킨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자아를 그분께 굴복하고 예수님을 따를 때만 이 계명의 정신이 인격이 되고 생활이 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있는 것을 다 팔려고 하면 예수님이 그것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밭에 감춘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은 계명이 생활이 되도록 생명작용을 한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이 뜻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자기 공로의 우상을 쫓아내어야 한다. 전적으로 예수님께 굴복해야 한다.
교훈 :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겉으로 경건하게 산다 할지라도 마음의 우상을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도, 영생을 얻을 수도 없다.
넷째날(수)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5월 25일
부자 법관과의 만남 직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마 19:27).
무엇이 이런 질문을 하도록 자극했는지에 대해 성경에는 아무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 질문은 부자가 예수님을 떠난 즉시 나타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거부하거나 그분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버린 사람들과 달리 자신과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커다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신실하게 그분께 남아있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이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이 질문은 제자들의 완고한 마음과 어두운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또 다른 증거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질문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무엇을 얻게 될지 궁금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잖은가?
어쨌든 이곳에서의 삶은 최고의 특혜를 누리는 자들에게도 힘들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타락한 삶에서 겪는 정신적 충격, 실망, 고통에 시달린다. 1800년대 이탈리아의 지성인 자코모 레오파르디는 인류를 지배하는 불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은 또한 불만과 고통을 느낄 것이다.”
삶이란 일종의 투쟁이며 이 세상에서 선이 언제나 악과 평형을 이루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질문은 상당히 공감할 만하다. 삶이 이렇게 힘드니 우리가 예수님을 따름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런 종류의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1. 예수님은 그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셨는가?(마 19:28~20:16)
[마19:28~20:1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3 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5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답: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는다고 대답하셨다. 그 핵심은 영생이다. 그것은 또한 왕의 지위이다. 고통 중에 영생하는 것이 아니고 왕으로서 영생한다. 그 나라는 새롭게 된 세상이다.
예수님은 이기심이나 그와 유사한 이유를 들어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먼저 그에게 매우 직선적인 답을 주셨고 그 다음 품꾼들과 그들의 품삯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셨다. 수세기 동안 이 비유의 의미를 추적하는 수많은 토론이 있었지만 기본 요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받는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보상은 우리의 소망대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한 그것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셨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생명은 공평하게 주어진다. 이 땅에서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수명이 동일하지 않지만 생명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동일하다. 영생도 그렇다. 먼저 믿은 사람이나 나중 믿은 사람이나 동일하게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먼저 믿은 사람들이 자기의 수고를 주장할 때 문제는 달라진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은 사람의 수고와 아무런 상관없다. 그것은 선물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굴복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으로 충성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이다.
교훈 : 세상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대가는 우리의 충성과 노력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다.
다섯째날(목) 할 수 있나이다
5월 26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마 20:20~27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 어머니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눅 9:51~56을 읽어 보라. 누가복음에 기록된 이 사건은 야고보와 요한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을 수 있는지 묻기 며칠 전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여정 중에 일어난다.
1. 마 20:20~27을 읽어 보라. 눅 9:51~56에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을 만큼 얼마나 준비되어 있었는가?
[마20:20~27]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눅9:51~56]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답: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의 나라에서 예수님의 좌우에 앉도록 부탁했다. 예수께서는 나의 마실 잔을 마시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우레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벌써 주변 지역에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경험이 있었지만 여전히 주위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더 걱정이 많았다. 이 일화는 예수님을 따름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던 베드로의 질문과 통하는 면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의 대답을 자세히 살펴보라.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 다시 말해서 미래에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것은 먼저 그분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에 대해 전혀 예상도, 대비도 하지 못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그들이 “할 수 있나이다”(마 20:22)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경고하는 내용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뜻이다.
여기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흥미로운 대조점이 있다. 어제 우리가 공부했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영생을 포함한 놀라운 것들을 약속받는다(마 19:29). 반면 성경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어느 정도의 대가, 때로 매우 큰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예수님은 후에 베드로가 순교자의 죽음을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요 21:18~19 참고). 과거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왔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면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면 우리의 신앙 여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대가가 무엇이든지 영생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싸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숨을 쉬고 활동하는 동안 자기를 중심에 두고 생존을 이어간다. 결국 죽음으로 모든 욕망과 소유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 버리고 망각의 영토로 간다.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 외에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그렇게도 어렵다. 생명이신 분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 제자들의 상태였다. 지금 우리는 제자들의 이런 상태를 읽고 알면서도 그들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수께서 나의 잔을 마시겠느냐는 질문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고난을 견딜 수 있겠느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고 하늘을 버리고 종의 형체로 세상에 사람 되어 오셨다. 예수께서 물으시는 핵심은 자기를 부인하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잔이다. 세상에 죽을 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는 것도 못하는 인생에 대한 연민의 말씀이다. 우리는 정말 자아를 비우겠는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영생을 얻으면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이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누구에게든지 공평하게 주시는 그 생명을 얻을 것을 확인해 주셨다.
교훈 :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는 상당한 희생이 요구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약속된 생명과 영광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5월 27일
수세기에 걸쳐서 사람들은 ‘자연법’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논의해 왔다. 비록 그것이 다양한 모양과 형태로 등장하지만 그 바탕에는 우리가 자연에서 우리의 행동을 지도할 수 있는 도덕적 원칙들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이 깔려있다. 어떤 면에서 천연계가 하나님의 둘째 성경이라고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이런 주장에도 모종의 진리가 있음을 수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천연계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바울의 설명을 보라(롬 1:18~32). 한편 우리는 이 세계가 타락했으며 우리는 우리의 타락하고 부패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가 천연계로부터 엉뚱한 도덕적 교훈을 얻어 곁길로 빠진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대의 가장 위대한 지성으로 일컬어지는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노예제도에 대해 논했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자연은 두 계층의 사람을 드러낸다. 한 계급은 다른 계급에 비해 하등하며 그것은 마치 사람과 동물의 관계와 같다. 심지어 굴욕적인 노예 생활이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세상의 원칙과 가치, 사상이 하나님의 나라의 그것들과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보여주는 많은 예시들 중 하나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는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우리 삶을 지배할 도덕과 가치와 원칙을 얻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외에는 그 자체로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이 세상에 없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가까운 사람 중에 그대에게 상처를 준 이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대가 어떻게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 예수 안에서 자아가 죽을 때 가능하다.
➋ 세상의 가치와 성경의 가치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간극 사이에서 어떻게 사역해야 할까요?
※ 세상의 가치와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는 사망과 생명의 차이이다. 우리는 예수님께 받은 그 생명으로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이 생명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뿐 아니라 무엇을 더 필요로 합니까?
※ 우리 스스로 하는 순종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작용해서 나타나는 순종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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