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일어나 걸으라!” 믿음과 치유(질문, 대답, 부가설명)04/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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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4-16 05:16 조회8,852회 댓글0건본문
4월 23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5분
기억절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마 9:5).
연구 범위 : 마 8장, 레 13:44~50, 단 7:7~8, 요 10:10, 마 9:1~8, 요일 1:9
삶에서 가장 두려운 일들을 꼽으라면 어떤 목록이 나올까? 대부분 거기에는 가족이나 자신의 죽음이 포함될 것이다.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사실 그것은 지상에 국한된, 현생에 대한 두려움에 불과하다. 목숨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정말 우리가 지상에서 목숨을 잃는 일을 가장 두려워해야 하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가장 두려움이 되는 것들을 열거하신다면 그 목록에는 분명히 우리의 가족이나 우리 자신의 영생이 상실될 두려움이 포함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육체적인 질병과 죽음의 문제도 염려하시지만 무엇보다 영적인 질병과 죽음을 염려하신다.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치유하셨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셨지만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에 무덤에서 일어난 성도들을 제외하면(성경주석, 마 27:52; 시대의 소망, 786 참고) 그들은 모두 육체적으로 사망했다.
물론 구원의 계획이 우리를 위해 성취된다고 해서 우리를 지상의 질병과 사망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치유의 기사들을 살펴보면서 그것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믿음의 교훈을 찾아보자.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분께 나오는 자들의 믿음에 보상하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➋ 느끼기 : 인생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예수님의 치유와 용서의 능력을 신뢰한다.
A.
❷ 예수님이 베푸신 치유 또는 회복의 사역에는 어떤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 심령을 치유하시는 특징이 있다.
❸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에서 우리는 어떤 영적인 교훈을 얻어야 합니까?
※ 육신의 회복보다 먼저 심령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❹ 우리는 육체와 마음의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 수 있을까요?
※ 말씀과 기도와 다가서는 봉사로.
B.
❶ 오늘날 사람들의 정신과 육체는 어떻게 병들어 있습니까?
※ 물질적인 욕망과 세상적 사상으로 병들어 있고 결과로 육체의 질병도 만연하다.
❷ 예수님은 치유를 바라고 오는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반응하십니까?
※ 세상에 속한 것들을 다 버릴 수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보라고 반응하신다.
❸ 나병환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신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사랑을 엿볼 수 있
습니까?
※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도 다 포용하시고 치유하는 사랑을 볼 수 있다.
❹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갈망을 치유 받아야 하며 말씀이 인격이 되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
결론 :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는 인류를 위한 봉사와 우리를 고양시키는 일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포용적입니다. 그분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그분의 사랑에
첫째날(일) 만질 수 없는 자를 만지심
4월 17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 8:2).
예수님은 산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을 설명하신 후에 다시 사탄의 나라, 곧 구원을 갈망하며 죽어가는 백성으로 가득한 차갑고 어두운 나라,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법칙이 지배하는 나라와 마주하셨다. 나병은 그 당시 사탄의 왕국이 얼마나 비참하게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미리암의 경우처럼(민 12:9~12) 나병은 때로 하나님의 심판의 형태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성경에서 그것은 전반적으로 타락하고 망가진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 주는 강렬하고 참혹한 예였다.
1. 마 8:1~4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그 나병환자를 만져서 치유하셨다는 사실에서 깨달아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레 13:44~50 참고)
[마8:1~4]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답: 유대에서 나병 환자에게는 가까이 가지도 말아야 했다. 만지면 부정해서 정결예식을 하지 않고는 집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를 만지셨다. 죄가 예수님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예수께 나아가면 죄가 정결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어로 ‘할 수 있다’라는 말은 ‘뒤나미스’이다. 그것은 능력의 충만을 의미한다. ‘주여 당신은 능력으로 충만하시니 원하시면 저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나이다.’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치유하기 원하신다고 말씀하시고 즉시 치유를 베푸셨다.
예수님이 그를 만지셨다는 사실은 그 광경을 바라보았던 군중들 사이에 큰 파장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분은 다른 경우에서처럼 단지 말씀하심으로 그를 치유하실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를 만지셨던 것일까?
예수님은 그 나병환자를 만지심으로 우리의 죄가 아무리 심각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죄로부터 용서와 치유와 정결함을 받기 원한다면 기꺼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셨던 것 같다.
“나병환자를 그 무서운 질병에서 깨끗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사업은 영혼을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의 사업에 대한 예증이다.… 나병은 깨끗하여졌다. 뿌리를 깊이 박고, 치명적이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정결함을 입을 수 없는 죄의 나병도 이와 같다”(시대의 소망, 266).
<부가설명> 성경에서 나병은 죄를 표상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 병을 고친 이적이 8장 1절부터 기록된 나병 환자를 고치는 사건이다. 4장에 예수께서 두루 다니시며 병을 고쳤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병을 고친 첫 이적이 8장의 이 기록이다. 상징성이 강한 기록이다. 특히 나병 환자를 만져서 고치셨다는 사실이 그렇다. 답에서 말한 대로 나환자는 백성들과 함께 섞여 살 수 없다. 그들은 마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도 없고 같은 나환자 외에는 친구도 없다. 그 나환자가 예수께 나아올 때 예수님은 허다한 무리들과 함께 있었다. 나환자를 본 사람들은 가능한 멀리 피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돌질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태를 무릅쓰고 나환자는 예수께 나아왔다. 그가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4장에서 두루 다니시며 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5장에서 7장까지 산상보훈을 하시기 전에 이미 치료봉사를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소문을 들은 나환자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께로 돌진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치료하시되 손을 대서 치료하셨다. 소외된 사람에게 나타내시는 사랑의 관심을 보여주시고 예수께 나아오면 죄 사함을 받는 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이다. 5장에서 7장까지 산상보훈을 하신 후에 8장에서 산상보훈의 정신을 생활에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가르쳐주신 것이다.
교훈 : 나병환자를 만져서 치유해 주심으로 예수님은 죄로 뒤틀린 사탄의 나라에서 진정한 용서를 바라는 자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의지를 보여주셨다.
둘째날(월) 로마 백부장과 메시아
4월 18일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다니엘서가 로마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단 7:7~8, 19~21, 8:9~12, 23~25 참고). 왜냐하면 로마는 예수님 시대에 세상을 지배하는 막강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마 권력의 상징일 뿐 아니라 그 힘의 표현이었던 한 로마군 장교가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는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동일한 고난과 슬픔 앞에서 절망하였다. 이는 권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교훈을 준다.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과 가장 부유한 사람들도 일반적인 삶의 문제 앞에서 절망한다. 정말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 중 누구에게 소망이 있겠는가?
1. 마 8:5~13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에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어떤 중요한 진리가 드러나는가? 우리가 가진 특권들을 고려했을 때 그것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마8:5~13]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답: 백부장은 자기 군대 생활에서 말의 능력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렇다면 말씀 한마디로 병이 나을 줄 확신했다.
백부장은 일반적으로 80~100명 사이의 병사를 거느린 로마군 장교직이었다. 거의 20년간의 복무 기간 동안 그에게 합법적인 가정생활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백부장의 종이 그에게는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사회에서 이러한 이방인보다 더 멸시를 받을 만한 대상은 나병환자들뿐이었다. 그래서 이 장교는 예수님이 그의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그것을 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추측했다. 집에 오실 필요 없이 말씀만 해달라는 그의 간청은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그분의 접촉만큼 능력이 크다. 백부장이 보기에 예수님이 누군가를 치유하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휘관이 어떤 병사에게 명령하면 그대로 이행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또한 예수님이 마 8:11~12에서 하신 말씀을 보라. 큰 특권을 받은 자들에게 엄한 경고가 주어졌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서 많은 특권을 받은 우리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부가설명> 당시 유대 사회는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금지하였다. 백부장은 이런 유대인의 풍속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겠다는 것을 만류하였다.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 풍속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는 일개 군 장교인데 자기 부하들에게 명령하면 당장 그것을 수행하는 것과 또 자기의 상관이 자기에게 명령하면 순종해야 하는 것을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모든 것이 예수님의 수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런 예수님을 감히 자기 집에 모시기에 자기는 감당할 수 없는 신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신 것은 그가 자기 직업에서 배운 사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부장만큼 말씀에 대한 신뢰가 없지 않는가? 기록된 말씀은 예수께서 친히 입으로 하시는 말씀과 다를 것이 없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깨달아서 성경이 생활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이다. 생명이 없으면 생활이 없다. 말씀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어 예수님을 세상에서 생활하셨다. 그처럼 기록된 말씀인 성경도 그리스도인으로 육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경 말씀이 육신이 되어 생활하는 그런 상태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생명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이 된 사람들은 그렇게 생활이 나타날 것이다.
교훈 : 예수님께 말씀만으로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요청한 로마 백부장은 많은 특권을 가진 유대 백성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진정한 믿음을 나타내었다.
셋째날(화) 마귀와 돼지
4월 19일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마 8:28).
1. 마 8:25~34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두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무엇을 알게 되는가? 특별히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상대와 씨름할 때라도 여기서 그분의 능력에 대하여 관찰한 사실로부터 어떤 위로를 받아야 하는가?
[마8:25~34]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32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답: 예수님은 천연계를 지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증거하시고 귀신을 제압하시고 쩣아내시는 것으로 영의 세계를 지배하시는 주님이심을 증거하셨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신뢰하는 믿음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의 생각 속에서 천연계와 마귀를 지배하실 분은 하나님뿐이다. 말씀 한마디로 폭풍을 잠재우신 뒤에(마 8:23~27) 예수님은 갈릴리 동편 호숫가로 가셨는데 그곳은 이방인 지역일 뿐 아니라 귀신 들린 두 남자가 살고 있었다.
막 5:1~20과 눅 8:26~39도 그들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덧붙인다. 귀신들은 스스로를 ‘군대(군단)’라고 불렀다. ‘군단’은 약 6천 명의 군사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마귀들이 2천 마리의 돼지 떼에게 달려든 것이다.
왜 마귀들이 돼지에게 들어가게 해 달라고 요구했는지 많은 사람이 의아해한다.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마귀들은 공허하게 떠도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비록 불결한 돼지일지라도 거처가 될 만한 대상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다른 가르침에 따르면 마귀들은 물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마귀들이 물 없는 곳을 찾아다닌다고 언급하셨다(마 12:43 참고). 또 어떤 유대교 전통은 여호와의 최후 심판 날이 이르기 전에 마귀들이 멸망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인간이 겪는 파괴적인 상황은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져다주기를 바라는 파괴적인 상황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하게 변화시키셨다. 자신을 그리스도께 맡기기로 결심하는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사탄이 우리의 삶 속에 가져다 놓으려는 모든 것들을 되돌려 놓으실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탄에게 꼼짝 못하는 절망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대쟁투 속에서 이편 아니면 저편에 서야 한다. 그 말이 아무리 냉정하고 비타협적으로 들릴지라도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눅 11:23)고 말씀하셨을 때보다 더 분명하게 이 진리를 표현하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편에 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부가설명>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 중에 천연계 이적이 9개가 기록되어 있다. 물로 포도즙, 5,000명을 먹이심, 4,000명을 먹이심, 폭풍을 잔잔케 하심, 물 위를 걸으심, 고기 입에서 은전을 얻음, 무화과 저주, 베드로가 깊은데 그물 던져 고기 잡음, 153마리 고기 잡음, 등이다. 이것은 이적 행하신 차례대로 적은 것이 아니다.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 이 이적은 창조주 되심을 나타내는 이적들이고 구원하시는 능력에 대한 것을 드러내는 이적들이다. 제자들이 이적을 행했지만 천연계 이적을 행한 일이 없다. 바울이 배 타고 로마로 갈 때 2주나 광풍에 쫓겼지만 바다를 잔잔하게 하는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천연계 이적은 이런 이적을 행하시는 분은 창조주시며 천연계를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이적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러 가실 때 폭풍을 잔잔케 하셨다. 천연계를 지배하시는 분은 또 영의 세계도 지배하시는 분임을 동시에 보여주셨다. 제자들이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창조주이심을 깨닫지 못했다.
귀신들을 왜 돼지에게 들어가도록 허락하셨는지는 분명한 설명이 없어서 짐작할 뿐이다. 왜 개인 재산을 손해 보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적어도 두 영혼의 가치는 돼지 2천 마리보다 귀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켰고, 사단이 하는 짓을 허락하셨는데, 사단은 그렇게 하므로 예수님의 평판을 나쁘게 하려고 했다. 그래도 예수님의 평판이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또 사단과 그를 따르는 귀신이 된 천사들이 마침내 망할 것을 보여주셨다.
교훈 : 귀신들린 남자들은 사탄이 인류에게 가져온 파괴적인 상태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이 이룬 것들을 되돌려 놓으실 수 있다.
넷째날(수) 일어나 걸으라!
4월 20일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예수님은 로마군 백부장을 보시고 이스라엘 안에서 그처럼 큰 믿음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비슷한 시각에 심령의 치유가 육체의 치유보다 더 절실해서 예수님을 찾아 온 남자가 있었다.
1. 마 9:1~8을 읽어 보라. 우리의 과거와 죄가 어떠하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약속으로부터 우리가 얻어야 하는 큰 소망은 무엇인가?(롬 4:7, 요일 1:9, 2:12 참고)
[마9:1~8]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롬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답: 죄의 세상에 살면서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사단의 공격으로 많고 큰 상처를 입고 많은 죄의 때가 묻어도 예수께서 그것을 다 용서하시고 승리하게 하신다는 소망으로 우리는 믿음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
놀랍게도 그 중풍병자가 예수님께 들려 왔을 때 그분이 처음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의 영적 상태였다. 예수님은 무엇이 진짜 문제인지 정확히 아셨다. 그 사람의 비참한 신체적 상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거의 타락한 생활에 대하여 그가 느끼고 있는 죄책감이었다. 용서를 바라는 그의 열망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죄의 실체와 대가를 아는 자라면 가장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씀을 주셨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덧붙였다. “그가 바란 것은 육체적 회복이라기보다는 죄 짐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가 만일 예수를 보고 용서와 하늘의 평강의 보증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만족할 수 있었다”(시대의 소망, 267).
어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목사는 치유를 받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한 믿음을 가지라고 설교하였다. 위대한 믿음이란 우리가 우리의 육체적인 상태보다 더 깊은 것을 봄으로써 우리의 영원한 실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의 육체적 필요에 대하여 기도한다. 물론 하나님도 그러한 것들을 돌보신다. 그러나 산상보훈에서 예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당장의 육체적인 필요가 있을지라도 많은 것들이 왔다가 사라지는 이 세상에서 항상 영원한 것들을 염두에 두며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부가설명> 중풍환자의 친구들이 그를 메고 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내려놓았다. 대단한 믿음이다. 아마도 중풍환자가 강력히 소원했을 것이다. 소원한 환자나 그 소원을 들어준 친구들이 모두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환자의 마음의 소원을 알았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포하신 것은 확실하다.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주위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하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때 예수께서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셨다. 물론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도 이 말씀의 의도가 어디 있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이 말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말씀이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목사나 신부나 교회의 성직자들이 참람한 마음을 먹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말이다. 고해성사 할 때 신부가 그렇게 말한다. 죄를 고백한 사람의 죄가 참으로 사함을 받았는지 아무런 드러나는 표가 없다. 드러나는 표가 없는 것은 누구든지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어나 걸어가라’고 했을 때 환자가 일어나서 걸어가는 사건이 생기지 않으면 그 말한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폭로된다. 중풍환자를 당장 일어나 걸어가게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그 말을 못한다. 그러나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드러나는 표가 없기 때문이다. 신앙과 종교는 이렇게 사람을 속일 수 있다. 예수께서는 결코 속임수를 쓰지 않으셨고 중풍환자를 걸어가게 하시므로 죄 사하는 권세를 드러나게 증거하셨다.
교훈 : 중풍병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육체의 치유보다 죄 사함과 심령의 치유였다. 우리는 육체적인 필요보다 영원한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섯째날(목)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4월 21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1. 마 8:18~22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여기서 그분을 따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라고 말씀하시는가?
[마8:18~22]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1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답: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잠자리가 없어도 따라야 하면,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우선 마 8:18~22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열망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온 두 사람을 본다. 둘 다 신실한 자들이었지만 뭔가 그들의 발목을 붙드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은 정곡을 찌르셨다. 예수님은 첫째 사람에게 자신의 잠자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분을 따를 각오가 있는지 물으셨다. 그렇다고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모든 세속적인 소유를 잃게 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할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둘째 사람에게 기꺼이 그분을 그의 가족보다 우선시할 수 있는지 물으셨다. 언뜻 둘째 사람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너무 심하게 들린다.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은 단지 그의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의 믿음에 따르면 부모가 제대로 매장되도록 보장하는 것도 제5계명에 대한 순종의 일부로 간주되었는데, 그렇다면 먼저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예수님을 따르면 왜 안 된다는 것인가?
그러나 어떤 주석가들은 그 사람의 아버지가 아직 죽지 않았거나 죽을 때도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 사람은 예수님께 ‘내 가족과 관련된 모든 일을 다 보게 해 주시면 그 다음에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했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대답을 주셨다는 것이다.
마 9:9~13에는 경멸을 받았던 세리 마태가 제자로 부름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부르심에 대한 그의 반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진리를 향해 열려 있는 그의 마음을 아셨다. 예수님은 분명히 마태와 같은 사람을 부르실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아셨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마태와 같은 사람을 부른다는 것이 그 시대 사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현상태를 어지럽히는 일인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복음의 초청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본다.
<부가설명> 먼저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서기관은 일단 생활이 보장된 직업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면 그 직업이 보장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를 때 믿음과 위배되는 직업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러나 나아가서는 그 서기관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께서 그의 마음에 여우 굴도 있고 새 집도 있지만 예수님의 머리를 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우리가 형식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도 마음에 세상이 들어 있어서 예수님이 들어갈 공간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또 둘째 사람에게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셨다. 아울러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실상을 지적하셨다. 호흡하는 사람이나 호흡이 끊어진 사람이나 예수님의 안목에는 다 죽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다. 수명이 다 하면 죽게 되지만 이미 영생의 생명은 없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 그런 사람 때문에 영생의 생명을 얻기를 주저하는 일은 지혜가 아니라고 가르치셨다.
교훈 :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우선시할 각오가 있는지 물으신다. 그럼에도 그분의 부르심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22일
<시대의 소망>, 262~271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를 읽어 보라. 독일 속담에 ‘한 번만 일어난 일은 없던 일과 같다’는 말이 있다. 즉 단 한 번만 발생한 일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대가 동의하든지 동의하지 않든지 목요일 교과의 내용에서 나오는 이러한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라.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전에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 8:22)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무엇인가? 한 번만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인 것처럼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으로 이어지지 않고 일회성에 그친다면 우리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 했고, 지금 죽어도 상관없을 것이다(참고 요 3:18). 내세를 믿지 않는 세상의 사상가들은 단 한 번, 그것도 너무 짧은 시간 동안 존재했다가 영원히 소멸되는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푸념한다. 그들의 질문처럼 삶이 이렇게 짧은 세월 존재하다가 영원히 사라지고 잊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삶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일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분은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것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노력하셨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에서 제시된 개념을 염두에 두고 아버지를 먼저 장사하겠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큰 그림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의 신학은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됩니까?
※ 이 말씀은 영생을 얻는 일기 최우선 순위라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➋ 우리가 육체적인 치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언제나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 치유에 대한 그분의 뜻은 항상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의 기도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 우리는 기도의 호흡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호흡이 있는 사람이 산 사람이다. 기도는 영적 호흡이다.
➌ 그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목록을 적어 안교반에서 발표해 보십시오. 그대는 다른 사람의 우선순위에서 무엇을 배웁니까? 우리의 우선순위는 우리 자신과 세상, 하나님 그리고 서로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 대해 무엇을 알려줍니까?
※ 진정한 신앙인인지 아닌지를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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