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산상보훈(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4/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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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4-09 00:21 조회8,869회 댓글0건본문
4월 16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8분
기억절 :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연구 범위 : 마 5~7장, 롬 7:7, 창 15:6, 미 6:6~8, 눅 6:36, 마 13:44~52, 롬 8:5~10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홍해에서 그들에게 침례를 베푸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그들을 인도하시며,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고, 그들을 만나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애굽에서 나오시고,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며, 광야로 가서 40일을 보내시고,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며, 백성들을 만나 산 위에서 동일한 율법을 확대 해석하신다.
산상보훈은 지금까지 선포된 설교 중에 가장 큰 감화를 끼친 설교이다. 그분의 말씀은 당시의 청중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세기 동안 많은 사람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쳤으며, 사람들은 그 말씀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는 기별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설교를 단지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삶에 적용해야 한다. 이번 주에 우리는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주신 말씀과 마태복음 13장을 연구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삶에 적용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산상보훈의 핵심 기별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큰 교사 되시는 주님의 능력과 요구가 무엇인지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산상보훈의 교훈을 따라서 다른 사람의 삶을 인도한다.
A.
❷ 산상보훈은 지상의 법과 어떻게 다릅니까?
※ 영원한 생명의 법이다.
❸ 산상보훈은 어떤 면에서 은혜의 법이 될 수 있습니까?
※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실행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❹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늘의 백성처럼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거듭나서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B.
❶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어떤 모습을 보고 실망합니까?
※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지 않을까?
❷ 우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훌륭해야 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 율법적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거듭남으로 드러나는 의를 뜻한다.
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처럼 온전해지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 하나님의 자비하신 마음을 가지라는 것인데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받을 때 된다.
결론 : 산상보훈은 하나님 나라의 헌장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늘 왕국을 지배하는 기본 원칙과 그 나라의 시민들이 가야 할 여정의 안내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원리를 발견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주해야 할 도전 과제입니다.
첫째날(일) 원칙과 표준
4월 10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1~2).
1. 산상보훈이 기록된 마태복음 5~7장을 훑어보라. 가장 인상적인 말씀은 무엇이며 그것이 그대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요약해 보라.
답: 각자가 자신들이 교훈 받은 대로 이야기해보자. 산상보훈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눈에 따라 개요를 각각 다르게 말할 수 있다.
1) 산상보훈의 개요
(1) 팔복; 마 5:3~12
(2) 천국시민의 세상에서의 기능; 마 5:13~16
(3) 예수의 교훈과 율법과 선지자와의 관계; 마 5:17~19
(4) 더욱 완전한 의와 도덕; 마 5:20~48
(5) 참 종교의 생활; 마 6:1~18
(6) 참 종교의 목표; 마 6:19~34
(7) 황금률; 마 7:1~12
(8) 천국시민의 열매; 마 7:12~23
(9) 천국시민의 터; 마 7:24~29
산상보훈을 천국시민의 자격과 생활과 그 결과라는 구분으로 볼 때 위와 같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5장은 천국시민의 자격, 6장은 천국시민의 생활, 7장은 천국시민의 생활의 열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산상보훈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던 다른 종교적인 담화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비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를 경배하기 거부했던 철학자들과 사회운동가들도 그의 윤리사상에는 경의를 표했다. 모한다스 간디는 산상보훈을 추종했던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비기독교인이다.”―Craig L. Blomberg, The New American Commentary: Matthew (Nashville: B&H Publishing Group, 1992), vol. 22, pp. 93, 94.
산상보훈은 여러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도달하기 불가능한 도덕적 표준으로 본다. 그들은 하나님이 산상보훈에서 우리를 거룩한 표준으로 부르셨지만 우리는 모두 타락하여 그것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산상보훈은 우리로 하여금 무릎을 꿇고 우리의 유일한 구원의 소망이신 예수님의 의를 구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일종의 시민윤리에 관한 담화 또는 평화주의로의 요구로 본다. 반면 어떤 이들은 그것을 사회복음 즉,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하라는 요구로 본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 이 설교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삶의 핵심적인 영역에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에 반응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 가운데서 거짓 교육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결과를 회복하시고 당신의 나라와 자신의 품성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듣는 무리들에게 주시고자 힘쓰셨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진리는 당신을 따르던 무리들에게 중요하였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도 그들 못지않게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원칙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시대의 소망, 299).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산상보훈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근본 원칙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나라의 백성들로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지에 대하여 말해 준다. 산상보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시적인 나라의 원칙과 표준에서 영원토록 존재할 나라의 원칙과 표준으로 옮기라는 혁명적인 요구이다(단 7:27 참고).
<부가설명> 산상보훈은 교과 저자의 말과 같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교훈은 도덕적 윤리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데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신학이나 설교가 성경을 도덕적 눈으로 읽고 설명하는데 엄청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도덕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도록 하는 생명의 길을 열어놓은 생명의 말씀이다. 산상보훈의 시작이 익숙히 알려져 있는 팔복이다. 이것은 세상적 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다 인정하고 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복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에는 새로운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강한 암시가 있다. 5:20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아니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단언하셨는데 팔복의 첫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다. 이 천국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들어가는 천국이다. 그 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거듭나서 예수님의 생명을 얻는 의이다. 팔복 다음의 모든 교훈은 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얻은 그 생명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가르쳐주신 것이다. 사람의 모든 생활은 그 사람의 생명 작용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을 가졌으면 예수님이 생활하신 것과 같은 생명작용을 생활로 드러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산상보훈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훈 : 산상보훈은 역사상 가장 인상 깊은 교훈을 제공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지상 나라의 원칙에서 떠나 하나님 나라의 원칙으로 옮기라는 혁명적인 요구이다.
둘째날(월) 설교 대 율법
4월 11일
어떤 기독교인들은 산상보훈을 그리스도의 ‘새로운 법’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법’을 대체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율법주의 체제가 이제 은혜의 체제로 전환되었다거나 그리스도의 법은 하나님의 법과 다르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산상보훈에 대한 오해이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은 율법에 대해서 그리고 율법(또는 십계명)이 산상보훈으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간접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려주는가?(마 5:17~19, 21~22, 27~28; 약 2:10~11, 롬 7:7 참고)
[마5:17~19, 21,22, 27,2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약2:10,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롬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답: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폐할 수 없다.
크레이그 S. 키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은혜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실질적으로 더 큰 은혜에 대한 예수의 요구를 고려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은혜를 감안한 왕국의 요구를 의도했을 것이다(마 6:12, 눅 11:4, 막 11:25, 마 6:14~15, 막 10:15 비교). 복음의 담론에서 예수는 비록 도덕적 완전이라는 목표에는 미달하지만(마 5:48)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며 자신을 낮추는 자들을 포용한다. 그러나 예수가 선포했던 왕국의 은혜는 상당수의 서양 기독교가 주장하는 ‘일하지 않는 은혜’가 아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왕국의 기별은 겸손히 그것을 수용하는 자들은 변화시키되 종교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만족하는 이들과 교만한 자들은 궤멸시킨다.”―The Gospel of Matthew: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9), pp. 161, 162.
창 15:6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구원이 항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새로운 믿음이 아니라 타락 이후에 계속되었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이다. 산상보훈은 행위로 얻는 구원을 대체하는 은혜로 얻는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언제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율법에 순종하도록 요구받기 전에 홍해에서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출 20:2 참고).
<부가설명>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다윗은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시119:96)라고 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끝이 없는 원칙이라고 계시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을 폐했다고 하는 것은 루시퍼의 사상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폐했다고 하는 그때가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라고 가르친다.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시119:126) 그런데 감히 하나님의 계명을 폐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엄한 사상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조문으로 된 율법으로만 이해한다면 심히 넓은 계명의 의미를 너무 축소시키는 것이다. 십계명이라는 말은 한글 성경이나 영어 성경에 세 번 기록되었다. 출34:28과 신4:13, 10:4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없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언약의 열 말씀들”이라고 되어 있다. 언약의 열 말씀이라는 표현은 십계명이라는 표현과 뉘앙스가 다르다. 언약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시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드러낸 영생의 생명이 이 사람들의 생명이 되게 하셨을 때 그 생명이 생활이 될 때 바로 언약의 열 말씀들처럼 살게 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생명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 언약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이끌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가 쉽게 표현하는 십계명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 궤도가 무엇이고 어떻게 살게 되는지를 가르쳐주는 표준이다. 기차가 철로 위로만 달리듯이 거듭나서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이 언약의 열 말씀들의 궤도위로만 생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데 어떻게 이 계명이 폐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기차의 철로를 없애는 것과 같다. 스데반은 이것을 “생명의 도”(행7:38)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 생명의 도에 따라 올바르게 신앙의 궤도를 달려야 할 것이다. 탈선하면 생명을 잃는다.
교훈 : 산상보훈은 주로 서양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옛 법을 대체하는 새 법이 아니라 처음부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다.
셋째날(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
4월 12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1. 마 5:2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말씀하셨는가?
[마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답: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문자주의자였다. 하나님의 계명의 정신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더 나은 의는 문자로 하지 않고 영으로 하는 것인데 곧 예수님의 부활시키는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었다.
비록 구원이 언제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유대교도 마땅히 언제나 은혜의 종교여야 했지만, 율법주의가 서서히 그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처럼 순종을 심각하게 생각하는 종교라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시대에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의 종교 지도자들이 “회개와 온유와 사랑”이 결핍된 일종의 “까다롭고 완고한 정통”에 빠졌다. “그들의 감화는 이 세상을 부패에서 방지하는 아무런 힘이 없었”(산상보훈, 53)다.
특히 인간이 만든 외형적인 형식은 삶을 변화시키거나 성품을 향상시킬 능력이 없다. 진정한 믿음은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뿐이다(갈 5:6). 오직 그것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용납할 만한 외적인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
2. 미 6:6~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어떻게 산상보훈을 요약하는가?
[미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답: 미가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올바르게 경배하는 것은 생활사상의 문제라고 계시하였다. 인격과 사상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산상보훈이 바로 이것을 가르친다.
심지어 구약시대에도 제사제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 목적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그분의 사랑과 성품을 반사하는 삶, 곧 오직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구원을 주시는 그분의 은혜에 철저하게 의존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경건과 믿음의 외형에도 불구하고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본이 되지 못했다.
<부가설명>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하나님의 율법을 문자대로 시행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이 아담 안에서 사망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사망한 상태에서 아무리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켜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없다. 다만 죽어서 썩어가는 상태에 방부제를 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좀 더 나아간다면 방취제나 방향제를 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죽은 자를 살릴 수는 없다.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7:7) 아담 안에서 생명을 잃고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람들은 다 썩어질 생명으로 수명을 이어가는 것뿐이다.(벧전1:23, 엡4:22) 거듭나서 썩지 않을 씨로 태어날 때만 썩지 않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4)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이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깨닫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않은 것이다.(롬10:4)
교훈 : 성경의 종교는 항상 은혜의 종교였지만 율법주의와 외형에 그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신앙은 진정한 의의 모본이 되지 못했다.
넷째날(수) 천국의 법칙
4월 13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1. 아마도 예수님의 가장 급진적인 교훈은 마 5:48에 있는 것 같다. 죄인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을 해야 하는가?
[마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답: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성품의 온전하심 전에 생명의 온전하심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의 온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2번 문제의 답과 같은 답이라고 생각한다.
산상보훈의 모든 교훈 중에 이것은 가장 놀랍고 ‘극단적인’ 교훈이다. 어떻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는 말인가?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성경절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요소는 ‘그러므로’라는 첫마디에 있다. 즉 그것은 앞에 했던 말에 대한 결론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앞에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
2. 마 5:43~47을 읽어 보라. 우리는 48절과 근접해 있는 이 성경절들을 통해 어떻게 48절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가?(눅 6:36 참고)
[마5:43~47]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답: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온전한 것이라고 누가복음이 설명했다.
이러한 개념이 성경에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레 19:2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눅 6:36에서는 예수님이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다.
규율과 표준이 비록 중요하다 할지라도 마 5:43~48의 전체적인 문맥은 그것에 대한 외형적인 순응에 대한 것이 아니다. 대신 이 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초점은 사람들을 사랑하되 누구든지 사랑할 수 있는 자들뿐 아니라 세속적인 기준에서 일반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자들까지 사랑하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사람의 표준이 아니라 하늘 왕국의 표준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룰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죄와 이기심에 지배를 받도록 우리끼리 남겨진다면 누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다른 나라의 시민이지 않은가?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빌 1:6)어 주신다는 약속을 받았다.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신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신 더 큰 일이 무엇이겠는가?
<부가설명> 인간이 아무리 선을 행하고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해도 하나님의 완전함에 이를 수 있겠는가?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감히 말하였다.(빌3:6) 그러나 그것이 자기에게 해로운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정신이었다. 그들이 행하는 의 때문에 하나님의 의를 거절하였다. 이런 사상으로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기들이 의롭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사울일 때에 그랬다. 그리스도인을 죽이는 것은 그들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것을 깨달았고 율법의 의로 흠이 없었던 것이 해로운 것을 알아서 배설물로 버렸다. 율법의 의를 주장하고 붙들고 있는 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인간은 생명을 잃으면 끝난다. 아무리 완전한 도덕적인 사람이라도 생명을 잃으면 썩는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은 그분이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이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이 생명으로 난자이다.
교훈 : 산상보훈이 요구하는 법칙은 우리가 행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사랑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리라는 약속을 주셨다.
다섯째날(목) 천국 말씀을 받아들임
4월 14일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서 있더니”(마 13:2).
예수님은 산 위에서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동일한 천국 복음을 이스라엘 곳곳에서 선포하셨다. 마태복음 13장은 예수님이 배 위에서 말씀하셨다고 기록한다.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것을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1. 마 13:44~52을 읽어 보라. 이 비유는 산상보훈에서 드러난 진리들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방법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 비유로부터 우리가 들어야 하는 기별은 무엇인가?
[마13:44~52]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45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6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51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52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 것과 옛 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답: 천국복음을 실현하는 것은 세상적인 것을 다 팔아버리는 것이다.
이 비유들 가운데 처음 두 개에서 두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 두 경우 모두 밭에 감춰져 있는 보화 또는 진주를 얻기 위해 자신의 소유를 분리시키거나 제거한다. 또 다른 요점은 그 사람들이 발견한 것에 큰 가치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얻기 위해 가서 그들이 소유한 모든 것을 팔았다. 물론 우리는 구원을 살 수 없지만(사 55:1~2), 이 비유의 요점은 분명하다. 이 생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어떤 것도 다음 생애를 잃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우리 삶에 적용하려면 우리는 세속적이고 육욕적인 모든 것을 우리로부터 분리시키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채울 수 있도록 자신을 드리기로 결심해야 한다(롬 8:5~10). 이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자아에 대해서 죽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우리에게 약속된 것들을 가치있고 소중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그만큼 마땅한 것들을 선택해야 한다는 동기를 품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어떤 가난한 사람에게 엄청난 돈을 주면서 이 돈을 받고 네 목숨을 달라고 하면 선 듯 그렇게 하겠는가? 당연히 그 돈은 자기만 쓸 수 있다고 할 때 말이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돈은 자기가 살아 있고 생활한다는 전제로 필요한 것이다. 생명을 없애고 재물을 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생명에 대하여 가르친다. 밭에 감춰진 보화나 지극히 값진 진주나 자기의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하여 생명을 얻는데 방해되는 것을 다 버리라는 교훈이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다. 썩어질 씨로 태어난 사람들이 썩어져가는 구습으로 생활하는 곳이다. 우리의 삶은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버리라는 것이 밭의 보화와 진주에 대한 비유이다. 진주 비유는 다른 의미도 있지만 여기서 그것을 쓸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일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이 다 영원한 생명을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이 생활하신 그 방법으로만 살게 되는 존재들이라고 가르친다.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야 한다는 것이 52절의 결론이다.
교훈 : 천국의 교훈을 가치 있고 소중하게 여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자아를 죽이며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15일
엘렌 G. 화잇의 <시대의 소망>, 298~314 “산상수훈”과 <산상보훈>을 읽어보라.
마 13:44~46에서 그 사람은 매우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 특별히 예수님이 세 번째 비유(마 13:47~50)를 말씀하신 뒤의 문맥에 따르면 그들이 발견한 것은 영생으로 인도하는 진리였고 그 반대는 풀무불에 던져지는 영멸이었다. 이 교훈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기껏해야 진리를 구식으로 취급하고 심하게는 위험하다고 인식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기독교 신자들이 도입하는 거짓 사상이다. 그럼에도 이 비유들은 진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이 각 사람의 영생을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기별을 전한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기별이 아니다. 성경은 ‘절대적인 진리’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다. 게다가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절대적인 진리를 천명하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물론 바울처럼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도 그들의 지식이 부분적이라는 사실을 시인한다(고전 13:9 참고).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부분적인 지식에 대한 바울의 고백은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죽음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더 많은 진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암시한다. 영원한 생명이나 영원한 죽음만큼 더 절대적인 주제도 없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모든 사람이 산상보훈의 법칙을 따른다면 그런 세상에서 사는 삶은 어떨까요?
※ 사랑과 평화가 충만할 것이다.
➋ 예수님은 갈릴리 호숫가를 배경으로 지혜로운 건축가와 어리석은 건축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마 7:24~27 참고). 이스라엘의 건기에 호숫가의 바위층과 모래층의 겉모습은 차이점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건축가는 바위층이라고 생각하고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면 모래 바닥이 드러나고 집은 붕괴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는 자들을 모래 바닥에 비유하십니다. 인생의 폭풍이 불면 우리의 삶의 기반이 바위인지 모래인지 어떻게 드러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장 심한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안전하고 견고하게 지탱해 주는 기초에 설 수 있을까요?
※ 기록된 말씀을 깨닫고 그 위에 자기의 신앙과 생활사상을 완전히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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