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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사역의 시작(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4/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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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4-02 00:03 조회8,44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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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2분

 

기억절 :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연구 범위 : 마 3:1~12, 벧후 1:19, 빌 2:5~8, 마 4:1~12, 사 9:1~2, 마 4:17~22

 

인류의 가장 고달픈 씨름 중 하나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닫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할지 겨드랑이에 설명서를 끼고 태어난 것도 아니잖나?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약물중독자가 된 17세의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생의 의미를 몰랐고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줄 알았다.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나만 모르는 큰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모두가 자신들이 태어난 이유를 이해하고 내가 없는 어떤 곳에서 은밀하게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과학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파울 파이어아벤트는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하루 뒤에 또 하루가 지나도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면 성경, 복음, 예수님의 이야기와 그분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보라. 예수님(그의 선재하심, 탄생, 생애, 죽음, 하늘에서의 사역, 재림) 안에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다급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우리에게 풍성한 의미를 선사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사역의 시작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침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사명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침례 요한과 메시아의 기별에서 전달되는 능력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제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다.

 

A. 

❷ 침례요한이 전한 ‘현대 진리’에는 어떤 중요한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 회개와 심판과 구주 예수님이 포함되어 있다. 

❸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사실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 기록된 말씀에 올바르게 정통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❹ 우리는 재림을 앞두고 어떻게 예수님이나 침례요한처럼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생활화하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B. 

❷ 예수님이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 거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 흑암과 사망의 땅에 있을 때 먼저 찾아오시고 빛을 비추도록 하라는 교훈이다. 

❸ 예수님은 어떤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제자들을 부르셨습니까?

※ 순진하여 예수님의 사상을 가감 없이 받아들일 사람들을 부르셨다. 

❹ 우리가 가야 하는 ‘사망의 땅’은 어디며, ‘그늘에 앉은 백성’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 바른 복음 기별을 깨닫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이다. 

 

결론 : 마태복음 3~4장은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적인 특징으로서 회개, 승리하는 삶, 제자도를 제시합니다. 그대는 이런 개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첫째날(일) 침례 요한과 “현대 진리”

4월 3일

 

마태복음 3장은 침례요한으로 시작한다. 성경에 기록된 그의 첫 마디는 “회개하라!”(마 3:2)는 명령형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이 인류에게 해 오신 말씀의 요약이다. ‘회개하고 내게 용서를 받으며 죄를 버리라. 그러면 구원과 영혼의 안식을 찾을 것이다.’

그 기별이 얼마나 일반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요한은 그것을 당대의 백성들을 위해 구별된 ‘현재의 진리’(벧후 1:12, 한글킹제임스)라고 이해했다.

 

1. 마 3:2~3을 읽어 보라. 회개와 침례, 자백에 대한 호소와 더불어 요한이 설교했던 현대 진리의 기별은 무엇이었는가?(마 3:6 참고)

[마3:2,3]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저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답: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것과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이다.

 

침례요한은 여기서 신약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구약성경을 인용한다. 구약의 예언은 신약에서 실현된다.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신약시대에 벌어지는 일들의 의미를 인증하고 해설 또는 증명하기 위해 구약을 자주 인용한다.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말하면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적을 설명하는 과정에서조차 “더 확실한 예언”(벧후 1:19)을 강조하였다.

 

2. 마 3:7~12을 읽어 보라. 요한은 지도자들에게 어떤 기별을 전하는가? 그의 언어는 거칠었지만 그들에게 어떤 희망을 제시했는가?

[마3:7~12]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답: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전한다. 자기 뒤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침례를 베풀고 심판 하실 것이다.

 

요한이 전하는 모든 기별에서 예수님이 얼마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했는지 보라. 심지어 그때에도 모든 것이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분이 무엇을 하실지에 관한 것이었다. 요한은 복음을 전했지만 한편으로는 곡식과 가라지를 나누는 최후의 판결이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그 일은 예언된 분이 맡으실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복음과 심판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증거가 나타난다. 이것은 또한 성경에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같은 사건으로 바라보는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침례요한은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문맥에서 재림에 대해서도 말하였다.

 

<부가설명> 복음에는 심판이 따른다. 심판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망이고 받아들이면 생명이 되는 것 자체가 심판의 성질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7,18) 이런 이유로 복음은 심판을 동반하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도 이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고 예수님의 그 큰 희생으로 주신 영생의 생명을 거절한 사람들은 그 존재를 영원히 상실하여 창조되지 않은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이 창조되지 않은 것과 같이 되는 과정이 괴로운 것이다. 불로 태워 존재와 생명을 없이하기 때문이다. 재가 된다. 세상이 불로 정결하여진다는 말이 이 뜻이다.(벧후3:7)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복음은 구원의 능력이고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에게 복음은 심판이 된다. 침례요한은 이 사실을 선포하였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입구가 회개이다.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회개가 없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교훈 : 침례요한은 당시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현재의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의 기별의 중심은 그리스도셨으며 그는 복음과 더불어 심판을 전하였다.

 

 

둘째날(월) 광야의 빛과 어두움

4월 4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이 장면을 사탄의 관점에서 본다고 상상해 보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거룩한 분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의 육신을 입기까지 자신을 낮추셨다. 그는 하늘에서 사탄과 전쟁을 치르고 사탄과 그의 사자들을 쫓으셨던 바로 그분이다(계 12:7~9). 그런데 이 예수께서 지금 무엇이 되었는가? 아무런 도움도 없는 거친 광야에서 외롭고 수척한 인간의 모습으로 있지 않은가? 분명 예수님은 사탄이 기만할 수 있는 쉬운 목표물이 되었다.

“사탄과 하나님의 아들이 처음 맞서 싸웠을 당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만군의 사령관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발생한 반역의 지도자였던 사탄은 쫓겨났다. 이제 그들의 형편이 역전된 것처럼 보였으며 사탄은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최대한 이용했다”(시대의 소망, 119).

얼마나 대조적인가? 루시퍼는 한때 지극히 높으신 분과 같아지기를 바랐건만(사 14:14) 예수님은 스스로 하늘의 영광을 비우셨다. 이 한 장면만 보더라도 우리는 이기심과 이타심 그리고 거룩함과 죄 사이의 큰 차이점을 알 수 있다.

 

1. 사 14:12~14과 빌 2:5~8을 비교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과 사탄의 성품 사이에서 어떤 차이점을 볼 수 있는가?

[사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답: 사단은 자기를 하나님과 같이 높아지려고 했고,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어 사람과 같이 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하늘의 영광을 입은 예수님의 모습을 아는 천사들이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았을지 상상해 보라. 예수님과 사탄이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양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대결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지만, 당시 하늘의 모든 천사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숨을 죽이고 이 대결을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부가설명> 일이 끝난 후에 그 사건을 아는 사람과 일이 시작되기 전에 그 사건이 어떻게 될는지 바라보는 사람은 그 느낌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결론이 난 사건을 성경을 읽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천사들은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수님과 사단의 대결을 보아야 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천사들의 사령관이었던 것을 천사들은 다 알고 있고 루시퍼와 전쟁할 때 예수님과 함께 한 경험이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 예수님이 이제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게다가 40일 동안 완전 금식했기 때문에 가장 연약하여진 상태에 있을 때이다. 연약한 사람이 되셨는데 더구나 40일을 금식한 상태 아닌가. 이 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천사들은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록된 말씀으로 넉넉히 이기셨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여러 면으로 시험을 당할 것이다. 예수님처럼 기록된 말씀으로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예수님과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천사도 우리를 둘러 진치고 일으키기 때문에 패배해야 할 이유가 없다. 예수 안에서 이미 이긴 그것을 잘 유지하자.

 

교훈 : 하늘에서 사탄과 그의 무리를 내쫓으신 예수께서 이제는 나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광야에서 사탄을 만나 이전에 없던 방식으로 대결을 벌이셨다.

 

 

셋째날(화) 시험

4월 5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마 4:1).

 

1. 마 4:1~12을 읽어 보라. 이 유혹의 기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예수님은 왜 이런 시험을 통과하셔야 했는가? 이 이야기는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어려운 조건 아래서 그와 같이 강한 유혹들을 견디실 수 있었는가? 우리는 이 기사로부터 유혹을 견디는 신앙에 대하여 무엇을 배우는가?

[마4:1~1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답: 사단과 예수님의 대결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기셨다. 죄 없는 환경에서 아담부부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을 만큼 탐스러운 과일을 먹어버렸다. 예수님은 죄가 넘치는 환경에서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를 얻을 만한 탐스러운 것을 이기셨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사람을 시험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며 모든 시험을 포괄한 것이다. 예수께서 이기시므로 그분은 죄와 상관없음을 증명하셨고 우리도 예수 안에서 이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셨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록하였으되 라는 무기로 이길 수 있다. 아니 예수님의 승리 안에서 이긴 것이다. 

 

마 4:1은 다소 생소해 보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도록 예수님을 광야로 몰고 간 분은 성령이셨다. 우리는 마귀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게 기도할 의무가 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그렇다면 왜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이 길로 인도하신 것인가?

해답의 열쇠는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셨던 앞장의 내용에 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즉 인류의 완전한 모범과 대표가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기 위해 예수님은 죄가 없어도 침례를 받으셔야 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도 예수님은 아담이 경험했던 똑같은 지점을 통과하셔야 했다. 그분은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이 이루지 못했던 유혹으로부터의 승리가 필요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다”(시대의 소망, 117). 심지어 그분은 아담이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조건 아래서 그렇게 하셨다.

이 승리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으며,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도 없고,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에 실패하지 않고 믿음과 순종을 통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약 4:7~8).

 

<부가설명> 답을 쓰고 보니 부가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요한은 사람이 당하는 시험을 세 범주로 압축하였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이것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여자를 유혹했을 때 여자가 선악과나무를 볼 때 그랬다고 기록하였다.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의 광야에서 먹는 것과 세상 만국을 보이는 것과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고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시험했다. 이것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유명해지라는 것이다. 시험의 차례는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둘째와 셋째가 바뀌어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돌들로 떡을 만들라는 것을 경제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고 높은데서 뛰어내려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유명해지라는 것인데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이라는 것이고 마귀에게 절하라는 것은 종교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 된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이런 문제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의 문제일 뿐이다. 예수 안에서 영생을 얻으면 이런 문제는 영원히 없다. 그것이 천국이다. 

 

교훈 :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통과하셔야 했던 이유는 인류의 대표가 되어서 아담이 실패한 지점에서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모본이 되시기 위해서였다.

 

 

넷째날(수) 스불론과 납달리 땅

4월 6일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마 4:12).

 

우리는 마 4:12에서 침례요한이 투옥되고 그의 사역이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듣는다. 이 시점에서 예수님의 공적인 사역이 시작된다. 성경은 예수님이 요한의 소식을 듣고 단지 갈릴리로 가셨다는 사실을 말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막 1:14~16, 눅 4:14 참고). 아마도 예수님은 아직 요한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는 경쟁이 생기지 않도록 세간의 이목을 피하셨던 것 같다. 마 4:12의 그리스어 동사는 종종 ‘출발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되지만 ‘(위험을 피하기 위해) 물러나다’라는 뜻도 있다. 항상 신중하셨던 예수님이 아마도 갈등상황을 피하시려고 했던 것 같다.

 

1. 예수님이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정착하셨다는 사실을 전하는 마 4:13~16을 읽어 보라(사 9:1~2 참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어떤 사실을 말하고 있는가?

[마4:13~16]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사9:1,2]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답: 예수님의 사역은 흑암과 사망에 매인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불러내는 것임을 보여준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야곱의 두 아들이다(창 35:23~26 참고). 그들의 자손들은 두 지파를 이루어 아름다운 북쪽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두 지파는 다른 여덟 지파와 함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의 것에 마음을 돌렸다. 구약성경의 여러 선지자들이 이 북쪽 지파들의 죄와 세속성을 책망했지만 결국 그들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하였고 전 세계로 흩어졌다. 대신 이방인들이 그 지역에 정착하면서 갈릴리는 다양한 인종이 섞인 혼돈과 어둠의 지역이 되었다. 갈릴리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자는 요나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충성의 정도에 대해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하고자 했다. 갈릴리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이사야서에는 스불론과 납달리의 그늘진 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예언이 주어졌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 4:16).

다른 말로 너무도 필요가 절실한 땅에 무례하고, 촌스럽고, 천박하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사는 땅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봉사하셨다. 우리는 크게 높임을 받으셔야 하는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낮추시는 모습을 본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구약성경이 예수님의 사역에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또 다른 예를 본다.

 

<부가설명>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들은 사사 시대 이래로 주변 열국들의 잦은 침입으로 고통을 받아왔으며, 이방 민족들과 접경하고 있는 지정학적 요인으로 팔레스틴의 다른 지역들보다도 이방 색채가 강하였다. 앗수르 군대의 침략(B.C. 733,732년)으로 이 근방은 거의 초토화되다시피 하였다. 이런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 요인들 때문에 갈릴리 지역은 같은 유대인들로부터도 멸시를 받아왔다.(요 1:46;7:41,52;행 2:7). 그러나 새날이 밝을 때, 흑암이 가장 깊은 이 땅에 빛이 가장 먼저 비췰 것이라고 이사야는 예언했고 예수께서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 지방 전도 본부로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있는 가버나움을 택하셨다. 어두움이 깊은 곳에 먼저 빛을 비추시려고 한 것이다. 복음이 들어가기에 매우 어려운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복음서를 보면 가버나움이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마11:23)는 탄식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빛이 비칠 때 속히 문을 열어야 한다. 예수께서 이 지역에 복음 센터를 세우신 것은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한 것을 이루시는 것이 되었다. 

 

교훈 : 예수님은 침례요한이 투옥되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리는 스불론과 납달리 땅으로 물러나 사역을 시작하셨다.

 

 

다섯째날(목) 어부를 부르심

4월 7일

 

“예수께서…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7).

 

예수님도 요한처럼 회개하라는 호소로 사역을 시작하셨다. 그분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타락한 인류의 상태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나아와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셨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기록된 것처럼 그분의 첫 공적인 선포가 적어도 회개에 대한 촉구였다는 사실은 그리 새삼스럽지 않았다.

 

1. 마 4:17~22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요구하시는 전적인 충성에 대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

[마4:17~22]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답: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네 제자의 응답으로 보여준다. 

 

갈릴리의 잊힌 땅에 두 형제 곧 네 남자로 결성된 동업 어부들이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몇은 잠시 동안 침례요한을 따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침례요한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지역에서 온 다른 젊은이를 주목하게 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께 다가가서 그분과 함께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요 1장 참고). 그것은 당시의 문화적 관습이었다. 사람들은 랍비에게 가서 그를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누가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랍비의 몫이었다. 그래서 랍비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제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는 것은 매우 흥분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것이 그들과 그분이 처음 만난 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1~5장에 따르면 이들은 이미 부분적으로 일 년 동안 예수님과 시간을 보냈다.

“예수께서 배움이 없는 어부들을 선정하신 것은 그들이 그 당시의 유전과 그릇된 관습들로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선천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겸손하고 온순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교육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시대의 소망, 250).

“평범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만일 부름을 받아 활동한다면 세상의 가장 존귀한 사람들과 동일한 수준까지 올라갈 수 있음에도 그런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일상적인 삶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잠재력들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당신의 동역자가 되도록 부르신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과 가깝게 사귈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시대의 소망, 250).

 

<부가설명> 저자의 말대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갈릴리 해변에서 부름을 받기 약 1년쯤 전에 유다지방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 1년이 좀 더 되는 기간은 파타임 제자노릇을 한 것이다. 그 기간 동안 예수님은 주로 유다 지방에서 봉사하시면서 때때로 갈릴리 지방으로 가셨다. 가나의 혼인 잔치나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것이나 갈릴리 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나 혼인 잔치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는 다 마태복음 4장의 제자를 부르신 것보다 먼저 있었던 사건들이다. 1년 이상을 파타임 제자로 다니다가 침례요한이 잡힌 사건으로 예수께서 유대 지방을 떠나시면서 갈릴리에 전도센터를 정하시고 갈릴리 본격적으로 갈릴리 지방에서 전도 봉사를 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때 12 제자를 택하시고 그들이 파타임이 아니고 전적으로 예수님과 동거동행하면서 제자 훈련을 받았다. 이런 부르심은 그들의 본업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교훈 : 동업자였던 두 어부 형제들은 침례요한의 소개를 받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으며 그분은 일 년 뒤에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여섯째날(금)

4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어떤 복음전도자가 한 마을에 와서 이렇게 집회를 광고했다. “와서 성경을 찢는 설교자를 보십시오!” 당연히 군중들이 몰려왔다. 그는 군중 앞에서 성경을 펴고 놀랍게도 성경의 한 페이지를 찢었다. 그리고 “이 페이지로 말씀드리자면 원래 성경이 아닙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나누는 페이지죠.” 사람들이 그의 연출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설교자는 핵심을 짚었다. 두 책은 실제로 한 책이다. 신약 전체에서 구약이 인용된다. 예수님이든 신약 성경의 다른 저자이든 모두가 신약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구약성경절을 가지고 설명하거나 입증한다. 예수님이 얼마나 자주 성경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가? 구약의 기록을 자주 가리키셨던 예수님뿐 아니라, 항상 구약성경을 인용했던 바울과 약 550개의 구약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는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은 일관성 있게 구약성경과 연결되어 있다. 구약과 신약은 인류에게 구원의 계획을 알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기록된 계시이다. 물론 제사제도와 같은 구약의 일부분은 더 이상 기독교인들에게 구속력이 없지만, 우리는 구약성경을 신약성경보다 격하시키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책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구원의 계획에 대한 중대한 진리를 배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우리는 사탄이 다양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그분이 어떤 유혹과 그 배후의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셨기 때문에 마귀의 유혹을 방어하는 수단으로 성경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가 유혹과 씨름할 때에 성경이 얼마나 중요하고 핵심적이겠습니까?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유혹에 맞설 때에 성경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실제로 어떻게 그리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마주하는 공격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성경을 활용해야 합니까?

※ 우리는 먼저 성경 말씀에 익숙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지도로 성경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20)고 하셨기 때문이다. 

 

➋ 기독교인들에게 왜 겸손이 그토록 중요한 특성이 됩니까? 우리는 어떻게 겸손을 배우며 그것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이 중요한 영역에서 십자가는 어떤 역할을 합니까?

※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다. 말씀이 지시하면 아멘 하는 정신으로 순복하면 된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도록 기도하셨다. 그것이 십자가로 연결되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습2:3)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겸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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