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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맨의 교과지도 제 5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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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해피맨 작성일09-10-25 08:30 조회3,0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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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맨의 교과지도 제 5 과
불평에서 배교까지

기억절 빌 2:14-15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연구범위 민 11-14장

학습 목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층에서 일어난 반역 사건과
그에 대한 하나님과 모세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원망과 불평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깨닫는다.

안식일 오후

민수기 1-10장까지의 내용은
일사분란하게 조직되고 진행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11장부터는 문제의 연속이다.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었다.
불평과 원망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얼마나 큰 해독이었는지를 보라.

어느 사회에나 불평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하는 불평은 단지 발전을 위한 건전한 제안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불평은 사회악이라고 보기도 한다.
나는 불평분자인가 아니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감사쟁이인가?
나는 불평을 어떻게 보는가?

제 5 과의 기억절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권면한다.
내 삶에서 이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누군가의 “원망들을 만한 일”을 나는 하지 않고 사는가?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할 수 있거든”이라는 표현은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라는 뜻이다.
100% 실현은 불가능하지만 최선을 다해보자는 말이다.
바울 자신도 포함해서

빌 2:14,15절에 반복되는 단어는 “흠이 없는”이다.
흠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흠이 된다.
먹으면 먹는다고 흠잡고
안 먹으면 안 먹는다고 흠잡는다.

사도 바울이 “율법없는 자에게는 율법없는 자로
율법있는 자에게는 율법있는 자로”
카멜레온식 전도법을 말하지만
그도 얼마나 비난과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나?

흠없는 사람은 없다.
목사, 장로, 심지어 선지자도 흠이 많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능하신 하나님도 흠을 찾아 불평해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서로를 “낫게” 여기고
원망과 시비를 그치자는 말이다.

하나님께 불평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가 말이다.

“좋은 게 좋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것으로 여기는 식의 악한 태도나
함부로 불평하거나 원망거리를 찾지 말라는 말이다.

민수기 11장으로 가보자.
얼마나 어리석은 불평과 원망이 있는지를 보자.

일요일 배은망덕의 죄(민 11 장)

일요일 교과의 제목은 배고프다고 불평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다.
배은망덕이라니?
아니 최소한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상황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을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여기서 먼저 분명하게 할 것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원망의 상황들과
민 11장의 원망의 상황이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요약하자면, 출애굽기에 기록된 원망의 상황들은 다음의 4가지인데

1) 홍해에서 애굽의 군대가 쳐들어 올 때(출 14장)
2) 마라에서 쓴 물을 마셨을 때(출 15:24)
3) 한달 반 후 모든 양식이 떨어졌을 때(출 16장)
4) 므리바에서 물이 없었을 때(출 17:3)

위의 상황을 모두 다루자면 내용이 너무 길어지므로 단순히 하면
위의 4 경우에 분명 “원망”이라는 단어와 상황이 벌어졌지만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질책하시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면 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 먹고 마시는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하나님만을 붙잡고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또는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방편으로(출 14:4) 홍해와 광야로 내모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원망은 Acceptible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을 체험한 직후의 마라에서의 원망의 태도와
한달반이 지난 후 므리바에서의 원망의 태도는 매우 틀렸다.

모세가 돌에 맞을까 두려워할 만큼 거칠어졌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불신의 씨앗이 이미 거기 자라나고 있었다.

여기 민수기 11장의 원망은 “악한” 원망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악한 불평자”라는 표현은 정당한 이유없이
불평불만을 쉴새없이 내뱉는 부류의 사람들을 말한다.

성경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다.
어쩌면 모세가 차마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의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했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민 11장의 상황이 이제는 더 이상 목마름이나 배고픔
또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과 같은
1차적인 생존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벌어지고 있는
“악한” 원망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원망은 Not Acceptible 한 원망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킨 원망들이었다.

1) 1-3절 악한 말로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이 불에 탔고
2) 4-34절 고기달라 원망한 자들에게는 메추라기가 주어졌지만
씹기도 전에 재앙이 내려 죽었다.

특히 두번째 원망은 탐욕의 원망이라고 지칭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구원과 축복들을 더 이상 감사할 줄 모르고
탐욕으로 인해 원망한 사람들은 죽음을 당했다.

기가막힌 표현들을 보라
애굽에서 그들이 “값없이” 먹었다니…
정말 값없이 주어진 것은 “만나”였지 않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요 은총인 “만나”를 경시하였다.

그러므로 민 11 장의 원망은 분명 생존과 관련없는 성질의 것들이었다.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음으로 인해 벌어진 상황이었다.
불평은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는 즉시 생겨났다.

우리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자.
우리를 구원하신 그 크신 은혜를 기억하자.
할 수 있는대로 원망과 불평이 우리 입술에서 사라지게 하자.
혹 배고픔와 목마름으로 울부짖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홀히 여기는 배은망덕과 탐욕의 죄에 해당하는
“악한” 원망만은 결코 범치 말자.

월요일 지도력에 대한 압박(민 11:10-15)

1. 원망하는 자들에 대한 모세의 태도

모세는 이처럼 어이없는 원망을 접하자 기가 막혔다.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달라고 요청하였다.

기업체의 사장들이나 지도자들이 아무리 잘해주어도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이나 불평만 일삼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품고 가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배고픔과 목마름의 문제,
생존의 문제는 해결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어떤 배부른 노사분규처럼
악하고 탐욕스런 원망들을 모두 받아줄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결국 하나님은 모세에게 70 장로를 주셨다.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약속대로 모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셨고
그 증거로 예언하게 하셨다.

이 70장로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 신을 …주어 선지자되게 “하신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이었다.

70인이 예언하고 모세와 동일한 신을 받는 사건은 시시하는 바가 크다.
첫째는 지도자로서 고군분투하던 모세의 외로움을 생각하신 것이었고
둘째는 자신이 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있다는 모세의 착각을 깨뜨려주신 것이다.
누구든 모세가 받은 같은 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자는 하나님 자신이셨다.
하나님은 “돌들이 소리지르게”도 하실 수 있으시다. (눅 19:40)

2. 모세의 불신

”… 한들 족하오리까?”(민 11:21-22)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는 원망을 들으시고
화가 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코에 실증 날 때까지
“일 개월간” 고기를 먹이시겠다고 선언하시자
모세는 화난 김에 불신의 말까지 내뱉는다.
그는 양 떼와 소 떼, 그리고 바다의 고기를 다 잡아도 안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하늘의 새떼는 생각하지 못하였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이 짧은 손 이야기를 2번이나 다시 사용하셨다.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사 50:2, 사 59:1)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분이 친히 해결하신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보리떡 5개를 찾아 온 안드레가 예수님께 물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
그도 하늘의 떡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요 6: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주님의 약속을 부지런히 찾아 구하자.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그분의 능력으로 꼭 지키시는 분이시다. (롬 4:21)

(고후 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화요일 - 유쾌하지 못한 가족 문제(민 12 장)

민 12 장에는 미리암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것을 두고 아론과 함께 비방하였다가
문둥병에 걸리는 형벌을 받고 일주일간 진 밖에 격리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
"모세가 취한 구스 여인이 누구인가?" 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이 제기되었다. 그 견해 중에서 중요한 것 몇 가지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일부 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구스 여인이 모세이 첫 아내였던 십보라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미디안"은 때로 "구스"라고도 부른 적이 있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구스 여인은 미디안 여인인 십보라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 근거가 약해 보인다. 왜냐하면 모세의 가족들이 모세가 수십 년 전에 했던 결혼 문제를 가지고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문제로 삼을 가능성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둘째로 일부 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구스 여인이 애굽의 공주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근거를 유대 역사가인 요셉푸스의 기록에서 찾고 있다. 유대인 역사가 요셉푸스는 그의 저서인 Antiguittes 2권 10장 2절에서 "모세가 에디오피아의 공주와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성경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참고만 할 뿐이다.
셋째로 가장 많은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모세가 그의 아내 십보라가 죽은 후에 광야에서 구스 여인 중의 한 명과 재혼을 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모세가 함 족속의 여인과 결혼한 일은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분명히 상식적인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이방인 중에서도 함 족속의 후예인(흑인?)으로 추정되는 구스 여인과 재혼한다는 것은 너무나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가족인 미리암과 아론이 당시의 관습을 뛰어 넘는 모세의 결혼을 비난할 가능성이 많았다.
이 구스 여인이 누구인지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가족간의 문제가 불거져서 결국 지도자 위치에 대한 도전까지 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민 12:2)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세 사람을 호출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다른 선지자들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셨다.
다른 선지자들에게는 환상, 꿈, 은밀한 말 등을 사용하셨으나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직접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여주셨다고 말씀하셨다.(민 12:7,8)

모세가 미리암 등의 말에 전혀 대항하지 않자
하나님께서 친히 “갑자기” 나타나셔서 모세를 도우셨다.
영적 지도자와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이 같은 온유함의 덕목이 필요한 것 같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온유함이 필요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해결해주신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참고] 민수기의 저자 문제

민 12:3절의 이 말씀이 저자에 관한 논란을 일으키는 구절 중 하나이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자기 자신을 일컬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하는 온유한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은 모세의 기본 저작에 후대의 편집자가 삽입한 구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수요일 – 가나안 접경에서(민 13 장)

여행을 하거나 등산을 한다고 생각해보라.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안도감, 성취감 등을 기억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태양력으로 3,4월에 출발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조직을 재구성하고 유월절을 보내고 드디어 진군하여
가데스 바네아에 마침내 도착한 것은 포도,무화과, 석류가 영글은 때였다.
말하자면 9월경. 약 6개월간의 긴 여정을 통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신 1:2절의 열 하룻길은 일반적인 보행의 거리를 말한다.

1. 신 1:19-23에는 가나안 접경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보내자고 제안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모세도 이를 선히 여겨 각 지파의 족장들 중 12명을 선택하여 보낸다.

비록 모세의 입장은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였지만 그도 백성들의 의견을 옳게 여겼다. 물론 그 구절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이 계획에 대해 물었다는 구절은 찾지 못한다.
그러나 민수기의 기록에는 백성들의 요구는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보내라고 명령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기에 정탐꾼을 보낸 행위에 대하여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민 13장)

정탐 자체가 문제라면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복할 때도 정탐꾼을 보낸 것은
과거의 잘못을 어리석게도 답습했다는 말이 아닌가? (수2;1)
이후에도 그들은 전쟁을 치를 때마다 정탐꾼을 사용했다.(수 7:2)

그러므로 문제는 정탐군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이 한 보고의 내용과 백성들의 반응이었다.

일단 12명의 정탐꾼 모두가 동의한 것은 “모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27절)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올 만큼 큰 포도송이와, 무화과, 석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결정적인 증거였다.

하나님은 시내광야에서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는 타이밍을 조절하셨다.
풍성한 결실의 계절에 눈에 보이는 결정적인 증거들을 보도록 준비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참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의 놀라운 증거들을 보며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부조와 선지자 387 페이지]
그러나 그 땅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을 묘사한 후 두 정탐꾼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전도에 놓인 고난과 위험을 과장하여 말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든지 확실하다.
약속의 땅 가나안이 바로 그들의 눈 앞에 있었다.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불신이었다.

[부조와 선지자 389 페이지]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불신에 굴복시킬 때에는 자신을 사단의 지배아래 두게 되며, 사단이 그들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가나안에 도착한 백성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옥토만 기대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살지 않는 비옥한 땅을 차지하길 원했던 것이다.
전쟁을 해서 땅을 차지하는 방식을 꿈꾼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12 정탐꾼이 모두 믿음에 충만하여서 일어나 전쟁을 하자고 보고했을지라도
백성들은 이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항상 죽음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무혈 입성토록 하지 않으셨슴을 기억해야 한다.

애초에 열 하룻길이면 도착할 가데스 바네아였지만
1년 6개월이나 광야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고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돌아갈까” 걱정하셨는데
아직도 그들은 불신의 사람들이었으니
그 좋은 땅 가나안에 하루라도 빨리 데려가시려는 하나님의 조급한 마음과
인간의 뿌리깊은 불신의 골은 넓고도 깊은 것이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계 22:20) 약속하신 주님의 마음은
2000년이 지난 오늘도 인간의 그 깊은 불신에 눈물젖는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라는 예수님의 탄식은
오늘도 하늘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목요일 – 애굽으로 돌아가려 함(민 14장)

민 14장의 기록은 유대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중의 하나이다.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은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의 뇌리 속에
지대한 영향을 지금도 끼치고 있다.

1)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도 불신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집단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건이기 때문이다.

2) 결국 무의미한 40년의 광야생활 끝에 모래 사막의 어느 한 부분에
그들의 뼈를 묻어야 했던 처절한 역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3)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고 구원받았다고 기뻐 춤추던 자들이
이 같은 서글프기 짝이 없는 죽음을 당한 것은
만인 구원설 혹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거짓된 구원론의 종지부를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12 정탐꾼의 보고는 믿음과 불신의 양극을 달리고 있었고
슬프게도 하나님의 능력을 그토록 많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10명의 불신하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두려움에 떨면서 격렬하게 반응하였다.

(민 14: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아가 믿음을 드러낸 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하였고
그들이 한 원망 중에서 가장 무서운 최악의 말인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악한 원망을 내뱉었다.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은 찼다.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모세의 중보로 그들의 죄악은 사하셨으나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민 14:28) 하나님은 벌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리고 무의미한 40년의 광야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른바 죽음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교과를 마치면서]

부디 원망하지 말자.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을 들으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다면 믿기만 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놀라운 기적과 능력으로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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