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과 대쟁투(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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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9-30 14:10 조회7,410회 댓글1건본문
10월 8일 안식일
일몰 : 오후 6시 5분
기억절 :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슥 3:2).
연구 범위 : 욥 1:1~5, 욥 1:6~12, 슥 3:2, 마 4:1, 겔 28:12~16, 롬 3:26, 히 2:14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는 우주 또는 개인의 삶에서 벌어지는 하나님과 사탄 그리고 선과 악의 끊임없는 전쟁을 암시하는 언급들이 산재해 있다.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비교하면서 각각의 통찰들을 엮어 진리의 모자이크를 구성하며 그것을 통해서 이전보다 훨씬 선명하게 성경 전체의 기별을 인지할 수 있다.”― The Handbook of Seventh-day Adventist Theology (Hagerstown, Md.: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2000), p. 969.
대쟁투 주제는 우리가 성경 전체의 기별, 특히 구원의 계획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틀을 마련해 준다. 그 주제는 구약 성경에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신약 성경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아마도 구약 성경에서 욥기만큼 이러한 투쟁과 사탄의 존재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책은 없을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배후에 존재하는 더 거대한 실상을 보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욥기의 핵심이다. 우리의 삶은 욥의 삶과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도 욥처럼 이 투쟁에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대쟁투 주제가 욥과 성경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기틀이 됨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우주적인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낀다.
➌ 행하기 : 우리의 삶에서 전개되는 대쟁투 속에서 승리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매일 결심한다.
A.
❷ 사탄은 어떤 이유로 욥을 둘러싸고 하나님과 쟁투를 벌였을까요?
※ 하나님이 축복하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트집을 했다.
❸ 하나님은 사탄의 비난에 대하여 결국 십자가에서 어떤 대답을 주셨습니까?
※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사탄의 비난이 거짓임을 드러내셨다.
❹ 우리 각자의 삶을 두고 어떻게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 예수님 편에 서는가 예수님을 떠날 것인가 하는 투쟁을 한다.
B.
❷ 하나님과 사탄은 욥을 둘러싸고 어떻게 쟁투를 벌였습니까?
※ 사탄은 욥의 순종하는 삶을 두고 하나님이 욥을 편애하기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❸ 어떤 면에서 욥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었습니까?
※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경외할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비난 한 것이다.
❹ 우리를 둘러싼 하나님과 사탄의 쟁투에서 우리는 어떤 믿음과 소망이 필요합니까?
※ 욥처럼 절대적인 신뢰로 충성하며 재림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한다.
결론 : 욥기의 초반부는 대쟁투 주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 때문이라고 비난합니다. 그 비난의 화살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향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시작된 전쟁, 지상의 타락한 인간 속에서 전개되는 투쟁 모두가 이와 동일한 비난에서 비롯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비난에 대해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이 멸망할 때에 그 문제는 마침내 해결될 것입니다.
첫째 날(일) 10월 2일 지상의 작은 천국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욥기는 비교적 긍정적인 어조로 시작한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보더라도 우리는 여러 면에서 복 받은 한 남자를 만난다.
1. 욥 1:1~4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욥이 어떤 생애를 살았다고 묘사하고 있는가? 욥의 삶에서 긍정적인 측면은 무엇이었는가?
[욥1:1~4]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2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3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4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답: 욥은 부유하고 다복하였고 하나님을 순전하게 경외하며 악을 떠난 삶을 살았다.
욥은 의로운 성품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욥 1:1에서 ‘순전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완전한’ 또는 ‘무결점’을 뜻하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정직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곧다’라는 뜻이며 곧은길을 걷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서 욥기는 모든 것을 가진 한 신실하고 온전한 부자를 묘사한다. 이런 장면은 에덴에서나 어울릴 것 같지만 욥은 이 모든 것을 타락한 세계에서 소유하고 있었다.
2. 욥 1:5~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욥이 거주하는 타락한 세상의 실상에 대해 무엇을 밝히고 있는가?
[욥1:5,6]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답: 세상이 죄의 세상이기 때문에 언제나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것과 배후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아들과 딸들이 잔치를 하는 중에 혹 하나님을 진노케 하지는 않았나 하고 그는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가정의 충실한 제사장으로서 그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희생 제물을 드렸다. 그는 죄의 공격적인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요구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하였다”(화잇주석, 욥 1:5).
욥은 확실히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받았다. 그는 풍족한 생활과 대가족, 명성과 많은 재물을 소유한 남자였다. 이러한 장면은 마치 에덴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그러나 죄로 기울어진 타락한 세상에서의 삶이었기에 이런 삶에 엄청난 위험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었다.
<부가설명> 욥기는 이 세상의 배후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의 일상적인 평범한 생활에도 사단의 영향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자녀들이 생일잔치하는 데도 죄 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호흡하고 먹고 마시고 친교 하는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을 가르쳐준다. 마귀가 예수님께 주장한 것처럼 이 세상은 마귀에게 넘겨준 영역이기 때문에 모든 선한 것에도 악이 함께 있는 세상이다.(전3:16 참고) 우리가 도덕적으로 선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안목에 참으로 선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게 보일지라도 필경은 사망의 길일 수 있다.(잠14:12)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마다 예수님께 굴복해야 한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예수님께 복종시켜야 한다. 욥은 그렇게 살았지만 그가 경배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했던 것을 42장에서 고백하였다. 우리는 여호와를 올바르게 잘 알아야 하고 바르게 경배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욥은 타락한 세상 속에서도 거의 모든 것을 소유한 신실하고 온전한 부자였다. 그는 죄악에도 민감했지만 세상이 가져오는 시련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둘째 날(월) 10월 3일 우주적인 쟁투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욥 1:6).
욥기는 지상의 평온하고 고요한 한 장소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첫 장의 6절에 이르러서 장소가 바뀐다. 장면은 신의 계시가 아니면 인간의 눈으로 절대 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된다. 흥미롭게도 이 다른 차원의 세계 곧 하늘은 앞서 제시되었던 지상만큼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지 않는다.
1. 욥 1:6~12을 읽어 보라.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지상에서 욥에게 일어난 일들과 어떻게 대조되는가?
[욥1:6~12]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답: 지상의 욥에 대한 기록은 평화롭고 부요하다. 그러나 하늘에는 투쟁하는 장면이다. 사단이 여호와 앞에 나타나 욥을 두고 하나님을 힐난(詰難)하고 있다.
이 짧은 본문 속에는 우리가 탐구해야 할 내용이 많다. 이 성경절들은 어떤 천체망원경으로도 탐색할 수 없고 인간의 과학으로는 절대 헤아릴 수 없는 이 우주의 양상들을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것들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쟁투를 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접하며 듣는 대화는 조용하고 평화로우며 고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마치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버지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욥에 대해 말씀하신다. 반대로 사탄은 하나님이 욥에 대해 하신 말씀을 조롱한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욥 1:9). 사탄의 어투에서 조롱과 빈정댐이 느껴진다.
말씀 속에서는 이 대결이 어디에서 벌어졌는지에 대한 확실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그곳은 틀림없이 하늘이었을 것이다. 피조물인 한 천사가 하늘의 하나님 앞에 선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는 앞에서 그분께 도전한다. 지상의 권력자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감히 피조물이 하나님께 이렇게 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성경의 여러 말씀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하는 한 주제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대쟁투라고 부른다. 대쟁투는 욥기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틀을 제공하며, 지상에 편만한 죄와 고통의 이야기들을 설명해 준다. 더욱이 우리는 그것을 통해 지상의 죄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배후에 어떤 세력이 역사하고 있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계시해주시기를 원하셨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아주 자세히 계시해주셨는데 그 내용들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계시된 것이다.
그러나 욥기는 지극히 개인적 사건을 통하여 사건 배후에 역사하는 세력에 대하여 계시해 주신 사례이다. 이 사건은 사단이 역사적 사건에 집중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집중 공격한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우리 각 개인의 생활에도 이렇게 개입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단이 하나님께 대드는 내용은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축복하여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원인을 제공하니까 욥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는 비난이다. 특정인을 특별히 복을 베풀어서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꾀었는가 하는 주장인 것이다. 또 이 장면은 우주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는 피조물들이 있다는 것을 계시한다. 그들이 필요에 따라서 여호와 앞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 모습을 가르쳐준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히12:23)라고 하였다. 사단은 하늘에서 쫓겨났지만 지구의 장자 아담을 속여 장자권을 빼앗고 지구의 장자 자격으로 우주 장자 총회에 참석한 사실도 가르쳐준다.(눅4:5,6) 우리가 사는 우주에는 죄의 세상이 된 이 지구에서는 전혀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세계가 있고 사단이 온 우주를 교란시키며 창조주와 사사건건 투쟁하는 것을 알려 주셨다.
교훈 : 욥기는 서두에서 인간의 시력과 어떤 기술로도 들여다볼 수 없는 하늘의 장면을 제시한다. 그곳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다.
셋째 날(화) 10월 4일 지상에서의 쟁투
욥기는 베일을 젖혀서 세상의 철학과 인간의 눈과 귀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차원의 세계를 계시한다. (심지어 욥기는 큰 그림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세상의 철학이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알려준다.) 욥기는 더욱이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쟁투를 보여준다. 욥기에서 이 쟁투는 먼저 하늘에서 일어나서 곧바로 지상으로 옮겨진다. 우리는 성경 전체에서 이러한 쟁투가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도 이 쟁투에 개입되어 있다.
1. 다음의 말씀들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초자연적인 악의 세력들과 싸우는 지상의 쟁투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창 3:1~4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슥 3:2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마 4:1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벧전 5:8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요일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계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답: 사탄은 실제적인 존재이며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현실 생활에서 실제로 유혹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계시한다.
이 말씀들은 악한 의도를 가진 초자연적인 존재, 즉 악마의 실체를 직간접적으로 가리키는 수많은 말씀 중 일부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은 사탄의 존재를 고대의 신화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의 분명한 증언을 가진 우리는 그러한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부가설명> 세상은 희한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과학이 아주 발달한 시대, 이성이 칭찬을 받고 경배를 받는 시대인 지금도 귄신 같은 것은 없다고 과학적으로 주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귀신이 있고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사람을 괴롭힌다고 믿으며 신 내림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는 그런 혼란한 사상이 주자하고 있다. 아주 이성적이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있어서 어딘가 좋은 데 간다고 믿는 것 같다. 사고를 당해서 죽든지 억울하게 죽든지 그를 두고 하는 말은 내세에서는 그런 대접 받지 않고 복되게 살거야 하는 식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문제로 토론을 하면 그런 것을 없다고 말한다. 얼마나 모순되고 혼란한 인식들인가. 성경은 마귀의 존재와 그 활동을 분명히 보여준다. 창조주께서 가장 잘 아신다. 성경의 계시를 믿고 우리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참 백성들로 충성해야 할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사단이 ‘전쟁, 테러, 폭력, 살인뿐 아니라 질병과 재난 그리고 갈등과 분열은 그가 인간을 고통에 빠뜨리고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그는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가장 선한 도덕적 성취를 하도록 부추긴다. 그것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같이 보이도록 온 세상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 개인적으로도 속지 않아야 한다.
교훈 : 욥기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악마가 존재하며 그가 일으킨 하늘의 쟁투가 지상으로 확대되었고 인간도 그 쟁투에 개입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넷째 날(수) 10월 5일 우주의 축소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2).
욥기의 첫 장면들은 몇 가지 핵심적인 요점을 보여준다. 첫째,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것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너머의 다른 차원의 세상, 즉 하나님뿐 아니라 다른 천상의 존재가 사는 하늘을 계시한다. 둘째, 그것들은 지상의 삶이 어떻게 하늘의 영역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늘의 존재들과 단절되어 있지 않다. 셋째, 그것들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도덕적 쟁투가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실제로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간추리자면 욥기의 서론부와 이후의 기술들은 대쟁투의 축소판과 같다. 그 기록들은 우주적인 범주에서 대쟁투가 욥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나는 방식을 보여준다. 앞으로 계속 보겠지만 이런 문제들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1. 욥기는 사탄이 하나님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일이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의 말씀들을 통해 그런 쟁투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가?(사 14:12~14, 겔 28:12~16, 딤전 3:6)
[사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겔28:12~16] 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5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6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덮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었고 화광석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딤전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답: 하늘에서 덮는 그룹이었던 아침의 아들 계명성(루시퍼)이 여호와의 집회의 산에 자기 보좌를 놓고 지극히 높으신 분과 동등하려고 하는 교만에서 우주적 대쟁투가 발발하였고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서 이 지구를 자기의 수중에 넣고 지구 거민들을 볼모로 잡고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렌 G. 화잇은 하나님 정부의 기초인 “사랑의 율법”에 대해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적 굴종”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모든 도덕적인 피조물들에게 “의지의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허락하셨던 자유를 악용한 자가 있었다. 죄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다음가는 최고의 영광을 받았으며, 하늘 거민들 가운데 가장 높은 권세와 영광을 가졌던 자에게서 시작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4~35). 그다음 엘렌 G. 화잇은 사탄의 타락에 대해 설명하는 이사야와 에스겔의 성경절들을 인용했다.
여기서 핵심적인 개념은 ‘사랑의 법’과 ‘자유의지’의 실재성이다. 성경은 사탄이 자신의 영광과 아름다움 때문에 거만해졌다고 말한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이것은 아마 살후 2:7에서 “불법의 비밀”이라고 부르는 것들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은 하나님의 율법이 얼마나 하늘 정부의 기초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이해할 때에 수긍이 간다. 사탄이 욥기에 등장했을 때에 그는 이미 과거에 타락했으며 그가 시작한 쟁투는 진행 중이었다.
<부가설명>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뜻은 ‘스스로 계시는 자’라는 것이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 외에는 온 우주 어디에도 스스로 있는 자가 없다. 그래서 여호와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이름이 유일하시다.(슥14:9) 이 이름을 가지신 분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삼위이다. 그런데 피조물인 루시퍼가 자기도 여호와만이 앉을 수 있는 집회의 산에 자기 보좌를 높이고 여호와와 동등하려고 했다. 이것이 루시퍼의 교만이다. 그는 피조물이지 자존자(自存者)가 아니다. 결국 그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에 있을 곳을 얻지 못하고 땅으로 쫓겨났다. 그는 땅으로 쫓겨나기 전에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신세였다. 이것을 성경은 ‘유리하는 별’(유 13)이라고 표현하였다. 유리(遊離)는 떠돌아다닌 다는 말이다. 헬라어로 ‘플라네테스’인데 ‘떠돌아다니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지구가 창조되자 잽싸게 지구로 달려와서 사람을 유혹하여 창조주를 떠나게 하였다. 뱀이 여자를 미혹한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게 한 것이다.(고후11:3) 지구에는 사망이 들어오고 사망의 세력을 잡은 루시퍼가 지구의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시험의 광야에서 예수님께 이 지구는 자기에게 넘겨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눅4:4,6) 아담이 주권을 넘겨준 것이다. 그 후로 그는 창조주 앞에서 밤낮 사람과 우주 거민들에 대하여서도 참소하는 일을 계속해 왔다.(계12:10) 지금 지구에 한정되어 땅에 사는 자들에게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계12:12)
교훈 : 욥기는 우주적인 쟁투가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다섯째 날(목) 10월 6일 십자가에서 주신 대답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욥기는 여러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러나 그 문제들에 대한 답은 대부분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전히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고전 13:12)다.
예를 들어 어제 본 것처럼 욥기는 사탄의 반역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사탄이 대쟁투에서 어떻게 패할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사실 사탄은 욥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에도 불구하고 두 번 등장한 이후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욥 1:6~12, 2:1~7). 그가 야기한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그는 그냥 사라진다. 그 후로 욥기는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욥기의 남은 부분은 대부분 사탄이 아닌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다. 이것이 납득이 되는 이유는 결국 욥기는 하나님에 관한 책이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대쟁투에서 사탄이 어떻게 패배할지를 묻는 우리의 질문에 답을 준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그에게 패배를 안길 결정적인 사건이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의 설명에 따르면 어떻게 예수님이 이루신 일들이 대쟁투를 종결시킬 것인가?(요 12:31~32, 계 12:10~12, 롬 3:26, 히 2:14)
[요12:31,32]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계12:10~12]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11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롬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히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답: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없이 하게 되었고 마지막 심판으로 마침내 완전히 없어지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서 사탄의 정체가 우주에 완전히 폭로되었다. 그는 살인자였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통치하셨던 사실을 알고 있는 존재들은 그분이 사탄의 하수인들에게 당한 모욕을 보고 탄식했을 것이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사탄에게는 그것이 심판이었다. 구주께서 “온 세상의 죄”(요일 2:2)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 비로소 하늘은 ‘이제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할 수 있었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수립된 하나님의 약속(딤후 1:9)이 바로 그 순간 실현되었다. 우리를 대신한 그분의 죽음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 3:26)고 하실 수 있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율법을 유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율법을 어긴 자들을 구원하실 수도 없다는 마귀의 논박을 십자가에서 물리치셨다. 갈보리 이후에 사탄의 운명은 확정되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의미상으로 사단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되었다. 십자가에서 사망을 폐하셨기 때문에(딤후1:10 참고)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가 사망하게 된 것이다.(히2:14) 히브리서는 ‘마귀를 없이 하시고’라고 했는데, 헬라어로 ‘카타르게세’인데 과거형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일로 마귀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러나 마귀는 아직도 활동한다. 마지막에 불 못에서 살라질 때 완전히 없어진다. 왜 히브리서는 없이 했다고 과거형 동사를 사용했을까? 그것은 없어지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확신적 과거형이다. 성경에는 이렇게 확신적 과거형을 쓴 동사들이 많다. 사단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지금 역사적 현실에서 사단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단을 없이하시는 사건이 된 것이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단은 완전히 존재를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사단을 이긴 승리자들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고 사단과 더불어 싸우되 겁내지 말고 담대히 승리자로 사단에게 군림하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아멘.
교훈 : 욥기에서는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사탄이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패배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여섯째 날(금) 10월 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선악의 싸움 내지 쟁투는 여러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한 개념은 수천 년 동안 이어졌고 종종 신화를 통해 표현되었다. 오늘날 고등비평 또는 근대적인 이성주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귀와 악한 천사의 실재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이 같은 것들을 인간과 자연 속에 내재한 악을 상징하는 원시 문화의 산물로 인식한다. 그러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의 관점에서 보면 마귀와 그 천사들의 존재를 믿지 않고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이 선과 악을 대표하는 초자연적인 세력 사이의 우주적 쟁투를 부인하는 기만에 빠진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레고리 보이드 같은 복음주의 학자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쟁투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책 서론에서 보이드는 다니엘 10장의 몇 절을 해석한 뒤에 이렇게 기록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인 존재를 전제한다. 그들의 행위는 좋은 쪽이든지 또는 나쁜 쪽이든지 인간 존재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진실로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그 같은 개념이 성경의 세계관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이다.”―Gregory A. Boyd, God at War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7), p. 11. 그의 주장이 정말 옳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사탄과 마귀의 권세에 대해 말하는 성경절들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말씀을 단지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때에 우리는 무엇을 놓치게 됩니까?
※ 창세기 3장1,2에 있다. 그 외에도 많이 기록되었다. 이것을 부인하면 실제적인 투쟁의 대상을 없애는 것이 되고 성경의 많은 기록을 거짓으로 여기게 된다.
➋ 16세기에 피렌체의 문인이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보다 국민이 두려워하는 통치자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엘렌 G. 화잇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사탄이 하늘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리신 후에도 그를 즉시 멸망시키지 아니하셨다.… 만일 사탄이 즉시로 멸망을 당하면 그들은 사랑으로보다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이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498~499). 하나님은 왜 우리가 두려움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기를 바라실까요?
※ 두려움으로 하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자발적인 헌신으로 섬기는 것보다 확실한 경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