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결말(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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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9-23 15:27 조회7,272회 댓글0건본문
10월 1일 안식일
일몰 : 오후 6시 15분
기억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연구 범위 : 욥 42:10~17, 창 4:8, 마 14:10, 고전 4:5, 단 2:44, 욥 14:14~15
학생들은 작문 수업 시간에 결말의 중요성에 대해 배운다. 특히 소설처럼 전체가 허구인 작품일수록 작가는 끝에 납득할 만한 결말을 구상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책이나 영화 대본이 아닌 실제 삶은 어떠한가? 우리의 삶의 이야기들은 어떠한가? 그것들의 결말은 어떠한가? 그것은 어떻게 마무리되는가? 훌륭한 작품에서처럼 미진한 부분들이 서로 멋있게 연결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소설 속 이야기들의 결말은 아름다울지 모르나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가?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절대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지 못한다. 언제 죽음이 행복했던 적이 있는가?
욥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욥기의 결말은 욥이 겪은 모든 고통과 대조해 볼 때 종종 해피엔딩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욥기 역시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욥기를 공부하기 시작하되 결말에서부터 출발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 결말이 현재뿐 아니라 영원의 문제를 통해 우리의 결말에 대해서도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욥의 결말을 보고 종말에 우리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마칠 것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행복하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시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
➌ 행하기 : 하나님이 우리를 행복한 결말로 인도하시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A.
❶ 결말이 행복한 대표적인 이야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엘리야의 승천, 예수님의 부활, 등등.
❷ 욥기의 결말이 완벽하게 행복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❸ 욥기의 결말이 정말 행복해지려면 어떤 요소들이 필요할까요?
※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부활의 요소가 필요하다.
B.
❷ 모든 인간의 삶이 행복하게 끝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이 세상에는 사망이 왕노릇 하기 때문이다.
❸ 성경의 종말론 또는 부활의 신앙은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소망을 제시합니까?
※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예수님 재림하시는 때에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기 때문에.
❹ 우리는 우리보다 더 큰 불행 중에 있는 사람들을 어떤 소망으로 위로할 수 있을까요?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과 행복과 평화의 하나님의 나라를 잘 가르쳐주는 것으로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 결론부터 본다면 욥기는 행복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비극을 행복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욥기의 요점은 소유의 회복이라기보다는 그가 경험하였고 우리도 경험할 수 있는 심령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날(일) 9월 25일 그 후로 행복했다?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욥 42:16~17).
동화들은 대부분 ‘그들은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식으로 끝난다. 어떤 나라에서는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다. 공주가 납치되고 교활한 늑대나 사악한 왕이 등장할지라도 결국 주인공과 그의 아내가 승리한다.
언뜻 보기에는 욥의 결말도 비슷하다. 욥에게 임했던 수많은 시련과 재앙이 끝나고 비교적 긍정적인 어조로 마친다.
1. 책의 마지막 부분인 욥 42:10~17을 읽어 보라. 욥은 어떻게 생을 마쳤는가?
[욥42:10~17]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15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 16 그 후에 욥이 일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17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
답: 모든 것이 회복된 상태에서 생을 마쳤다.
성경에서 주인공의 행복으로 끝나는 책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욥기를 들 것이다.
어쨌든 이야기가 끝날 때 욥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보라. 욥이 고난 받는 동안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와 그의 아내 외에는 볼 수 없었던 형제자매와 친구들이 돌아와 그를 위로한다. 그들은 너그럽게 그에게 돈까지 준다. 이야기가 마칠 때에 욥은 적어도 물질적인 부에 관해서는 이전보다 두 배를 소유하고 있다(욥 1:3, 42:12 비교). 사망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대신하여 다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그 땅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욥 42:15)다. 이전의 딸에게는 이런 표현이 없었다. 그는 140년을 더 살고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욥 42:17)다. “나이가 차서”라는 히브리식 표현은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죽음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창 25:8, 35:29, 대상 29:28 참고). 이 말은 그가 죽음이라는 명백하게 불행한 사건을 맞았을 때에 비교적 훌륭하고 행복한 처지에 있던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부가설명> 이 세상에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수명을 누리는 사람은 행복한 결말이 없다. 죽는다는 것은 어떤 상태에 있다 해도 불행이다. 세상에서 맑은 정신으로 행복한 생활을 했어도 결국 죽는다는 것이 결론이다. 죽음은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불행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죄의 실상이다. 욥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그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다가 그가 경배하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창조주시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도덕적 종교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생명과 존재의 종교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하게 죽을 수 있었다. 그가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죽음이라는 불행을 맞을지라도 부활의 소망 중에 죽음이 쉬는 잠이 된 사람은 그 죽음이 그리 불행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 안에서 사망을 정복하고 생명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에 그렇게 죽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부활로 일으키실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이것을 얻지 못한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 죽더라고 다 불행일 뿐이다.
교훈 : 욥기는 고난이 끝난 후에 욥의 행복이 회복되는 모습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죽음이라는 불행한 사건으로 결말을 맺는다.
둘째 날(월) 9월 26일 불행한 결말
욥기는 욥이 잘 살다가 “나이가 차서” 죽었다고 하며 끝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대부분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심지어 신실하고 고결하며 도덕적인 사람들도 언제나 욥처럼 삶을 마무리하는 것은 아니다.
1. 다음 인물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는가?
아벨 -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우리아 -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삼하 11:17).
엘리 -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삼상 4:18).
요시야 왕 - “요시야가…변장하고…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대하 35:22~24).
침례 요한 -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마 14:10).
스데반 -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9~60).
보았다시피 성경은 결말이 불행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 자체가 불행하게 끝나는 이야기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선한 목적을 위해 순교를 당했든지, 끔찍한 질병으로 죽었든지, 고뇌와 탄식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든지 대부분의 사람은 욥처럼 성공적으로 시련을 이기지 못한다. 솔직히 말해서 욥처럼 일이 잘 풀리는 경우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굳이 이런 비참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성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인생의 불행한 결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부가설명> 성경은 인생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사람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은 굳이 성경을 읽지 않아도 다 안다. 그러나 성경 외의 도덕적 종교들은 사람이 죽지 않는다고 속인다. 즉 몸은 죽지만 그 사람의 인격을 그대로 가진 영혼은 불멸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면 그 영혼은 육체가 죽은 후에 육체에서 해방이 되어서 그가 육체에 있을 때에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소위 인과응보이다. 영혼이 불멸이기 때문에 그 불멸하는 영혼은 육체 안에 살 동안 행한 업에 따라서 지옥에서 영생하든지 극락이나 천국에서 영생하든지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인생의 실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아무도 사후의 일을 알지 못한다. “그에게 죽은 다음에 일어날 일을 보여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전3:22 쉬운성경) 사후의 상태를 아시는 분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뿐이다. 그분이 계시하여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분명히 가르친다.(전9:5) 사람은 죽으면 소멸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죽은 자가 부활할 것을 확증해 주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을 때 비로소 부활할 것을 안다. 생명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계시로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불행에 매여 있는 인생들의 유일한 행복의 소망이다.
교훈: 욥기의 결말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수준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며 이는 이생에서 사는 삶의 한계를 말해준다.
셋째 날(화) 9월 27일 (부분적인) 회복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맞다. 욥의 이야기는 성경의 다른 인물들과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긍정적인 어조로 끝난다. 성경학자들은 간혹 욥의 ‘회복’에 대해 말한다. 어떤 의미에서 많은 것들이 회복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이야기의 끝이라면, 엄격한 의미에서 그 이야기는 정말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욥의 삶은 훨씬 더 나아졌다. 그럼에도 결국 그는 죽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그 후손들의 후손들도 모두 죽었다. 그들 모두가 정도가 다를 뿐 우리가 겪는 동일한 시련과 충격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것이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삶이다.
우리가 아는 한 욥은 자신에게 임한 모든 재앙의 배후와 원인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는 다시 자녀를 얻었지만, 잃은 자녀들에 대한 슬픔과 비애는 어쩌란 말인가? 그가 남은 생애 동안 간직해야 했던 상처는 어쩌란 말인가? 욥의 결말은 행복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하게 행복한 결말은 아니었다. 여전히 불완전한 것들과 답을 얻지 못한 문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욥의 곤경을 돌이키”(욥 42:10)셨다고 말한다. 이전의 것과 비교하면 그분은 정말 그렇게 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불완전하고, 해결되지 않고, 성취되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끝이 좋든지 나쁘든지 지금과 같은 이 세상에서 어떤 것들은 불완전하고 해결되지 않고 성취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욥의 결말은 희미하나마 모든 인류가 겪는 저주와 불행의 종결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소유하게 된 궁극적인 희망과 약속을 암시한다. 예수님은 욥의 회복을 초라하게 보이게 할 정도로 우리에게 온전하고 완벽한 회복을 주실 것이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회복시키는 것은 영원한 회복의 그림자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다.(히9:27) 특별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데려간 사람들이 있고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도 다 죽는다. 그러나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 중에 잠자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부활의 아침에 깨어나면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명으로 산 자의 하나님이신 삼위일명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으로 살 것이다. 그때가 참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때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곳이라고 했다.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했다. 우리는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원을 위하여 바른 길로 잘 걸어가야 한다. 욥이 깨달은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지 않고 바른 진리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교훈 : 하나님은 욥에게 많은 것들을 되돌려 주셨다. 그럼에도 이 땅에서의 회복은 예수님을 통해 제공될 궁극적인 회복에 비하면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
넷째 날(수) 9월 28일 마지막 나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영원하리라”(단 7:18).
성경은 무엇보다도 역사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다. 성경은 과거의 사건들, 역사적인 사건들에 대해 말하며 그것들을 이용하여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준다. 성경은 과거의 사건을 이용해서 우리가 현재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진리를 가르친다(고전 10:11 참고).
그러나 성경은 과거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일어난 사건뿐 아니라 일어날 사건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미래, 심지어 종말의 때를 제시한다. 종말론을 의미하는 신학 용어 ‘에스카톨로지’는 ‘마지막’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때로 그 말은 죽음, 심판, 하늘 또는 일반적으로 지옥에 관한 신조를 포괄하기 위해 사용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새로운 세상에서 갖게 될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약속을 다룬다.
성경은 종말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언급한다. 물론 욥기는 욥의 죽음으로 끝난다. 만약 욥기가 우리가 읽어야 할 유일한 책이라면 우리는 욥의 이야기처럼 우리도 모두 죽음으로 끝난다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특별한 사실을 알려준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수립될 것이고 그것이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속량함을 받은 자들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왔다가 사라지는 지상의 나라와 달리 그 나라는 영원토록 존재할 것이다.
1. 단 2:44, 7:18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종말에 대해 어떤 희망을 제시하는가?
[단2: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단7:18]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답: 종말에 이 땅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고 성도들은 그 나라를 얻어서 영원히 살게 된다.
욥기는 욥의 죽음으로 마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욥기의 끝이 이야기의 끝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 역시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부가설명> 성경의 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신학에서는 역사적 종교라는 것을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역사에 들어오셔서 일하신 사실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 사건을 예언하고 그것이 역사에서 성취되는 것을 계시해주었다. 어떤 종교도 이렇게 역사적 현실을 말하는 경전을 가지고 있지 않다. 모든 고등 종교는 다 도덕적 수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한 선악의 행위를 따라 내세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가르친다. 내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신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역사의 진행에 대한 사실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역사적 현장과 관계없이 언제나 도덕적으로 선을 행하면 동일하게 내세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역사적 시점을 따라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사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가르치며 구원은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을 가르친다. 그분이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않았으면 인간의 선행이 아무런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적 사건 안에서 이루어놓은 구원의 길이 없으면 인간의 도덕적 노력 자체는 내세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다. 우리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것은 도덕적 선행이 내세를 결정한다는 사상이다. 욥이 바로 이런 사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깨달은 다음에 이 사상을 버렸다.
교훈 : 성경의 예언과 종말론은 인간 역사 너머의 사실을 가리킨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위대한 소망과 약속을 다룬다.
다섯째 날(목) 9월 29일 부활과 생명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욥 14:14~15).
욥 14:14~15을 읽어 보라. 욥은 어떤 질문을 제기하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자기 나름대로 대답하는가?
답: 욥은 죽음과 부활의 소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부활의 날에 하나님께서 불러내실 것을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욥기에서 다루는 주제 중 하나는 죽음의 문제이다. 그 문제가 어떻게 빠질 수 있겠는가? 인간의 고통을 취급하는 책이라면 당연하게 고통의 근원인 죽음을 살펴봐야 한다. 욥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날 것인지 묻는다. 그리고 그가 변할 때를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기다리다’라는 뜻의 히브리 단어는 또한 ‘희망’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그것은 단지 어떤 것을 기다릴 뿐 아니라 그것을 희망한다는 뜻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변화’였다. 그 말은 ‘재개’, ‘대체’라는 개념을 내포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옷을 갈아입음’이라는 의미로도 자주 쓰인다. 이렇게 이 단어의 의미는 광범위하다. 그러나 죽음 다음의 ‘재개’를 바라는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욥 14:15)는 날에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의 변화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우리의 위대한 소망과 약속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 그리고 그분의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이르러 온다. “신약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인류 최대의 원수인 죽음을 물리치셨고, 하나님이 최후의 심판 날에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성경적인 믿음의 중심을 차지하였다. 왜냐하면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통해서 그 유효성을 얻기 때문이다.” ―John E. Hartley, The Book of Job,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Accordance electronic ed. (Grand Rapids: Eerdmans, 1988), p. 237.
<부가설명>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생명이 아니시고 단순히 선악을 다스려 상벌을 주는 정도의 신이라면 가치 없는 신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이 말은 생명 자체라는 의미가 포함된 것을 나타낸다.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고 세세토록 살아계신 생명자체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어떤 것에게도 생명을 주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그가 산 사람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죽은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아주 쉽다. 아담의 후손들이 생명을 얻는 것도 아주 쉽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으면 된다. 특히 그분이 사망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망을 이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으면 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주 쉬운데 사람들은 쉽지 않게 여긴다. 첫째로 그들은 예수를 믿고 선을 행하는 길이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고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놔두고 예수를 믿으면 진정으로 믿으면 일단 생명을 주신다. 이 생명을 얻은 후에는 그가 생명을 얻기 전에 부담스러워 하던 것이나. 선을 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 전혀 부담되지 않고 어렵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수 믿는 것은 진정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공짜로 얻는 것이다. 욥은 이것을 알았다.
교훈 : 창조주께서 그 지으신 것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시리라는 욥의 기대는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를 암시하는 부활의 소망이었다.
여섯째 날(금) 9월 30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욥은 자신에게 임한 여러 끔찍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을 뿐 아니라 잃었던 것들을 되돌려 받았다. 그러나 욥기에서 그랬듯이 세상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있다. 욥기는 성경의 한 책일 뿐이다. 한 권의 책에서 신학 전체를 수립하기란 무리이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욥기에서 제기하는 여러 난제들에 관한 이해를 넓힐 수 있다. 특별히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밝혀준다. 성소 제도의 의미가 가장 훌륭한 예이다.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이 동물의 죽음과 희생제도 전체의 의미를 얼마나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그분의 계시를 통해서 그 제도의 의미는 훨씬 온전하게 밝혀졌다. 히브리서는 성소봉사의 진정한 의미를 조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진리’(벧후 1:12)를 알 특권이 있으며 분명히 욥의 시대보다 더 많은 빛을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야 한다. 진리는 점진적으로 계시된다. 지금도 큰 빛이 주어졌다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들은 여전히 많다. 실제로 이런 증언이 있다.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순항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들을 구속의 신비들을 찾아내는 일에 쓸 것이다. 영원무궁토록 계속해서 이 주제의 내용들이 그들의 마음에 공개될 것이다”(Advent Review and Sabbath Herald, 1886. 3. 9.).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점진적인 계시’란 어떤 뜻일까요? 그 의미를 보여주는 예는 어떤 것입니까? 수를 세면서 우리는 수학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다음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배우죠. 그다음은 대수, 기하학, 미분, 적분과 같은 더 깊은 영역을 배웁니다. 이런 경험은 점진적인 계시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됩니까?
※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구원의 복음을 점점 밝게 계시한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 앞의 계시와 뒤의 계시가 정반대로 나타지 않는다. 뒤의 계시는 앞의 계시를 확대 보충하여 온전한 이해를 돕도록 나타난다.
➋ 욥 42:11을 읽어 보십시오. 욥이 곤궁에 처해 있을 때에 그의 친척들과 친구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은 그의 사정이 좋아진 후에 왔습니다.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인간 마음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들은 욥이 재앙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욥에게 가면 같은 재앙에 감영될 것을 무서워서 나타나지 않았다. 인간의 동정은 지극히 이기적임을 드러낸다.
➌ 어떻게 십자가는 그대가 알고 있는 불행한 결말이 진짜 끝은 아니라는 소망을 줍니까?
※ 십자가는 사망을 처리한 것이고 부활은 생명의 영원함을 드러낸 것이다.(딤후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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