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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호소하셨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909/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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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9-02 14:46 조회7,07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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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안식일 

일몰 : 오후 6시 48분 

 

기억절 :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5). 

 

연구 범위 : 요 10:1~5, 요 10:16,
눅 9:2,
계 14:6~7, 눅 19:1~10, 행 26:11~27, 계 3:20 

 

기원후 362년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는 이교를 재건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을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이교 지도자들의 염려가 컸다. 한 이교 사제에게 전한 율리아누스의 충고를 보면 기독교가 왜 그토록 신속히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이교) 사제들이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고 간과할 때에 불경한 갈릴리 사람들(기독교도들)은 자선행위에 전념한다.... 그들은 가난한 신자들뿐 아니라 가난한 우리 백성들까지 돕고 있다. 백성들이 우리에게 받는 도움이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Rodney Stark, Cities of God (San Francisco: HarperCollins Publishers, 2006), p. 31. 

로마인들은 기독교의 수장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면 기독교가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엄청난 수의 로마인들이 예수를 따랐다. 그들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위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채움으로써 그분의 사랑을 증명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 행하셨던 일이고 또한 그의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라는 권유가 있었을 때에 많은 사람이 그렇게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그리스도의 사역 방법 중 마지막 단계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➋ 느끼기 : 권유는 우리의 역할이지만 회심은 오직 성령의 역할임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마지막 단계에 이르도록 기회를 기다린다. 

 

A

❷ 성경 외의 어떤 다른 방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의 부름에 이끌리게 할 수 있을까요? 


※ 성경으로 체험한 신앙 간증과 신앙고백과 그런 신앙생활이다. 

❸ 그대가 친절과 봉사로 사귄 사람들에게 언제 예수님을 믿도록 호소할 수 있을까요?


※ 증거하는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호소할 수 있다. 

 

B

❷ 영혼 구원 사업에 있어서 따기 어려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합니까?

※ 그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❸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오는 자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조심해야 할까요? 

※ 그들에게 거치는 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 

 

결론: 예수님의 사역 방법의 최종 단계는 다른 네 단계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 단계를 당연하게 여겨서도, 저절로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따르도록 당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첫째 날(일) 9월 4일 그들이 그분의 음성을 앎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요 10:16). 

 

1. 요 10:1~5, 16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대표자들로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 노력할 때에 지역 주민들과 긍정적이고 다정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들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요10:1~5,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답: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도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가르치신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하기 위해서 교회가 지역사회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예수님의 음성이 되어야 한다.

 

낯선 이의 외침보다 친구의 속삭임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더 효과적이다. 우리가 우리를 신뢰하는 사람을 친구로 사귈 때, 선한 목자께서는 그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배우며 따르도록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 

물론 다른 이들이 주님의 음성을 깨닫도록 돕기 전에 우리 자신이 그분의 음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탄의 교활한 음성과 주님의 음성을 가릴 수 있는 하늘의 식별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대쟁투의 실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되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과의 관계에 이르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원수가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알도록 돕는 훌륭한 전달자가 될 수 있다. 그분은 천연계(타락으로 인해 훼손되었지만)와 섭리가 깃든 상황, 성령의 감화, 경건한 사람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신다(정로의 계단, 85~91 참고). 그 음성을 알고 순종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예수님이 경고하셨던 것처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이다(마 15:14). 

 

2.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는 그런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셨을까? 

 

답: 겸손한 섬김과 희생의 사랑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이적들도 이끄는 능력이 되었다. 

 

사람들이 거부하기 힘들었던 것은 이타적으로 자신을 주시는 그분의 모본이었다. 우리가 그분의 지체로서 이기심을 버리고 종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안에 그분이 사시도록 한다면 다른 이들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의 부름에 이끌릴 것이다. 우리가 선한 목자의 대표자들로서 사람들에게 그분을 따르도록 당부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사역의 특성들을 반사해야 한다.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반사하는 진정한 봉사와 말씀의 진실성은 우리가 섬기는 자들의 귀를 열고 지역사회와 교회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허문다. 

 

<부가설명> 문제는 신자들이 이웃에게 드러내는 삶의 모습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웃들에게 예수님처럼 생활을 보인다면 그들이 우리의 말을 긍정적으로 들을 것이다. 그러나 매사에 자기중심으로 생활하고 경우를 따지고 손톱만큼도 손해 보기를 거절하고 자기 몫을 끝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인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할 기회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성경은 재림신자들이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더욱 너그러워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4:5) 재림성도들에게 관용이 필요하다. 재림성도들은 교리에서부터 재정에 이르기까지 따지는 성질이 있다. 증언의 말씀에 익숙한 사람들이 좀 더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데 증언에 일치하려는 마음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일 것이다. 그런 정신은 좋지만 그렇게 따지는 것이 우리가 한 우리 안으로 들어오게 할 양을 멀리 쫓아버리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관용을 어떻게 나타내어야 할는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사람들은 우리의 이타적인 봉사를 통해서 주님의 부름에 이끌린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둘째 날(월) 9월 5일 우리가 찾아야 함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1. 눅 19:10, 막 1:17, 눅 9:2, 계 14:6~7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핵심은 무엇인가?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눅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막1: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계14:6,7]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답: 예수님을 따라서 사람을 예수께로 이끌어오라는 것이다. 

 

어느 재림교회 신자들은 여러 해 동안 "주여, 이 지역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그리고 주께로 이끌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며 마치 교회가 사람들을 매혹적으로 이끌 수 있는 거대한 자석처럼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물론 간혹 우리의 별다른 노력 없이도 하나님을 찾아 스스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지역 주민들 중에 교회에 오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그대가 사람들이 오도록 기도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그대는 영혼을 얻기 위한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과 섞여서 사귀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노력하셨다. "우리는 구도자들이 우리에게로 오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그들에게 가지고가지 않는 한 복음을 접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실물교훈, 229). 

성경은 이렇게 영혼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개념을 다양한 비유로 설명한다. 

1.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 안에 두고 방황하는 한 마리 양을 찾는다(마 18:10~14 참고). 예수님은 '작은 자들'을 죄로부터 보호하고 양육해야 한다는 훈계의 말씀 가운데 이 비유를 들려주셨다. '작은 자들'은 문자적으로 어린이나 미숙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할 수 있다. 만약 그들이 세상에서 방황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들을 찾고 다정하게 그분께로 인도해야 한다. 

위의 말씀처럼 여기서의 요점도 비슷하다. 우리는 주도적으로 잃은 자들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르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스스로 와서 "저에게 하나님에 대해, 구원에 대해, 진리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반적이지 않다. 

2. 잃은 자들을 찾는 그리스도의 방법은 "결실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없을 수도 없다"(치료봉사, 144). 하지만 우리가 '따기 쉬운 열매들', 즉 다른 교단에 속한 신자들처럼 이미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자들에게만 집중해야 하는가? 우리는 세속적인 사람, 무신론자, 무슬림, 유대인, 힌두교인, 불교도 등과 같이 ‘따기 어려운 열매들’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역사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재림교 신앙에 공감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세계관을 가진 신앙 집단에게도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훨씬 훌륭한 일을 해야 한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라고 하셨다. 교회는 예수께서 찾으시는 잃은 사람들을 찾는 예수님의 지체로서의 손발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손발이 되기보다는 머리와 입이 되기를 원한다. 은사 중에 눈과 귀와 입이 되는 은사도 있다. 눈과 귀와 입의 은사는 발과 손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과 같이 해야 한다. 발로 찾아가고 손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입이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합과 협력이 필요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자들은 그 몸의 지체들이다. 각각 자기에게 있는 은사를 점검하고 은사를 따라 봉사하면 효율적인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하여 상대할 대상과 대화할 수 있는 준비도 필요하다. 위에서 말한 불교, 이슬람, 힌두교, 유대인 등을 만날 때에 그들에 사상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나의 이야기만 주장하면 대화와 친교가 성립될 수 없다. 전도자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다양한 상식이 필요하다. 모를 때에는 상대에게 그의 사상을 이야기할 기회를 주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한 우리에 있어야할 사람들을 이끌도록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다. 

 

교훈 : 우리는 영혼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 기독교인들 뿐 아니라 다른 세계관을 가진 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셋째 날(화) 9월 6일 가교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눅 19:3~4). 

 

교회들은 건강, 가정, 개인 재정, 갈등 해결 등의 영역에서 지역사회와 접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따르라"의 단계에 이르도록 어떻게 가교를 놓아야 할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누가 다리가 될 것인가? 대답은 그대이다. "복음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상냥하고 친절한 그리스도인이다"(치료봉사, 470). 방문자들로 하여금 이 행사에서 저 행사로, 이 프로그램에서 저 프로그램으로 계속 참석을 유도하는 데 성공하는 교회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속적인 우정을 고양시키려는 신자들로 인해 복을 받은 것이다. 

반대로 방문자들에 대한 부주의함과 심지어 전혀 감동이 없는 태도로 일관하는 교인들은 오히려 교회 전도 활동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번도 회심해 보지 않은 교인들과 한 번 회심했으나 뒤로 물러앉은 교인들 때문에 주께서는 지금 많은 영혼들이 진리에 들어오도록 일하지 않으신다"(교회증언 6권, 371). 

 

1. 눅 19:1~10을 읽어 보라. 왜 삭개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엿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야 했는가? 우리는 이 일화에서 어떤 영적 교훈을 얻어야 하는가? 

[눅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답: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군중에가 둘러싸여 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보기 위하여 높은 곳에 올라갔다. 이것은 예수님 주위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려버리는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 하는 교훈을 준다. 

 

만약 여리고에서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던 자들이 그분께 가까이 가려는 삭개오의 깊은 관심을 주목하고 다정하게 이 '죄인'을 구주의 발 앞으로 초대했더라면 어땠을지 상상해 보라. 

예수님 주변에 있던 군중들 중의 일부처럼 우리도 투쟁과 죄로 얼룩진 인간에 대한 그분의 사랑에 병들어 '전염된' 기독교인이 되었다. 만약 우리가 우리 같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달았다면 영적으로 병약한 상태에 있는 군중 밖에 있는 자들을 열정적으로 찾아나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것이다.

 

<부가설명> 어쩌면 많은 경우 우리는 예수님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존재가 되어 있지 않을까? 옛날 유대인들이 천국 문에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고 예수께서 책망하셨다.(마23:13)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생활하지 못할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가족들을 진리로 이끌기가 어려운 이유가 가족 중에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언행(思言行)이 항상 적나라하게 노출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아닌 가족이 볼 때에 그의 삶의 모습이 자기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다고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의 가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회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진정한 삶을 나태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할 때에 한 우리에 들어어게 할 다른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의 가교(架橋)가 되는 것이다. 

 

교훈 :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료된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한 긍정적인 가교 역할을 하지 못할 때에 그분의 사랑이 필요한 자들에게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넷째 날(수) 9월 7일 호소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난 다음 그들의 마음을 영원한 주제로 이끌었다(치료봉사, 20 참고). 전도부흥사 마크 핀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는 것은 직무태만이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의 전도 방법은 가장 큰 필요를 느끼는 부분에서 그들을 감동시키는 것이었다. 의료선교사업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적인 치유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다. 목표는 그분 안에 있는 영생이었다. 우리가 의료선교사업을 통해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라고 호소할 수는 없지만 결국 그 지점에 이르러야 한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전하기를 열망해야 한다. 

그러나 그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방법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고 호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대가 첫 번째 부분을 실천한다면 그대는 저절로 예수님을 전하는 자신을 보고 놀랄 것이다. 그대가 이미 그들의 마음에 정지(整地)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쉬울 것이다. 

그대가 섬기는 사람들과 더욱 친근해지면 촉각을 세우고 그대의 믿음에 대해 또 주께서 그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으라. 영적인 주제를 꺼낼 기회를 찾으라. 새로운 친구들에게 그들의 가족, 직업, 종교에 대해 물으라. 그러면 그대의 개인적인 간증을 나눌 길이 열린다. 

실제로 개인의 간증은 가장 효과적인 증언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간증은 사람들에게 가장 덜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설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우리 삶에서 이루신 일들에 대하여 개인적인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러 단계들을 주목하라. 바울은 자신이 주를 알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실제로 회심한 경험을 말했다. 그다음 그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삶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말했다. 그러고 나서 호소했 다.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행 26:29). 

 

<부가설명>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에는 자기의 신앙고백과 간증이 되어야 한다. 간증은 철저하게 성경적이어야 한다. 자기의 감각과 소위 말하는 신앙체험이 간증의 중심이 되면 안 된다. 감각과 개인적 신앙체험은 사단도 이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체험이 성경과 일치하지 않으면 버려야 한다. 지옥을 다녀왔다든지 천국을 다녀왔다든지 하는 따위의 체험은 성경적이 아니다. 실생활에서 믿음으로 일어난 체험들을 성경 사상에 입각하여 증거해야 한다. 그들의 말하는 것이 율법과 증거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아침빛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사8:20) 증인이 되기 위하여서는 성경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야 한다. 성경에서 올바르게 만난 그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분을 믿는 믿음을 성경과 일치하게 고백해야 한다. 진지하고 따뜻하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증언할 때 감동을 줄 것이다. 감동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교훈 : 우리는 예수님의 방법대로 사람들을 사귀고 우리의 간증을 들려주며 주님을 따르도록 호소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

 

 

다섯째 날(목) 9월 8일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1. 계 3:20, 마 7:7~8, 요 1:12을 읽어 보라. 이 세 성경절들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나님을 찾으면 찾게 되리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마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답: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뜻이 연결되어 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묻고, 찾고, 문을 열어야 한다.

 

위의 말씀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묻고 찾으며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시에 계 3:20은 자신을 영접하도록 문을 두드리며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런 개념들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비록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가기 위해 일하시며 그들을 그분께로 이끄신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찾을 수 없는 어떤 것을 찾을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에 그들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멋진 특권이겠는가? 

사실 예수님은 그대를 통해서 지역 사회의 주민들의 삶의 '문'을 두드리실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지 문을 열고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은 그분을 통해 오는 복을 받을 것이다(계 3:20, 요 1:12 참고). 또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묻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서 그분의 나라로부터 오는 선물을 받도록 강권하신다(마 7:7~8, 11). 

만약 성령께서 그대에게 누군가 그리스도를 향해 문을 열 준비가 되었다고 감동을 주신다면, 그에게 "저와 함께 기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분의 가족이 되시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으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주 예수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음을 믿습니다. 죄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들어오시옵소서. 예수님을 제 구주로 믿고 따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는 언제가 호소하기에 적절한 때인지를 가려내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그때에 지나치게 공격적이어서는 안 되겠지만 너무 소극적이어서도 안 된다. 때로 주를 선택하도록 단호하면서 애정 어린 압박이 필요하다. 그 순간 이 누군가에게는 영생과 영멸 사이의 갈림길일지 누가 알겠는가? 확신하건대 우리에게 거룩한 책임이 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부가설명> 성경에 나타난 증거들은 증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기가 만난 예수님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 오직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을 올바르게 만나도록 간절히 구해야 한다. 날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진리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것이다. 예수께서 네 마음문을 열라고 하실 것이다. 입을 크게 열라고 하실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채우실 것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시81:10) 그런데 우리도 옛 이스라엘처럼 입을 열지 않고 구하지도 찾지도 문을 두드리지도 않고 안식일에 목회자가 설교하는 것으로 성경말씀 듣는 것이 전부인 신앙생활을 한다면 증거할 예수님을 올바르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서로 친교하며 이야기하고 그럴 때에 예수님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마음이 열리도록 두드리신다. 누군가 문을 열 준비가 되었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그분을 영접하도록 강권할 필요가 있다. 

 

 

여섯째 날(금) 9월 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 77:20, 호 11:4, 고후 5:11~21을 읽어 보라. <치료봉사>, 139~146 "가르치는 일과 치료하는 일", 469~470 "일상생활에서의 도움", <실물교훈>, 185~197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한다", 228~237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를 읽어 보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기술적으로나 은사적으로나 훌륭한 증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하는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언제나 한 가지가 문제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마음을 바치라고 말하기를 항상 주저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주를 위해 담대히 말하며 기꺼이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그의 그런 주저함에 교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에 그는 자신에게 그런 은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씨 뿌리기는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이 추수하도록 그것을 내버려 두고자 했다. 얼마 후에 그는 무엇보다 거부당할까봐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항상 자신이 주를 위한 증인으로 합당치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호소할 때에 그들이 예수님께 마음을 바치지 않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다른 교인들은 증언이란 우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것이라고 그에게 설명했다. 우리는 언제나 불완전한 증인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하면서 애정 어린 방법으로 그들에게 예수님을 주목하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성령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 성령만이 사람들에게 확신과 회심을 가져다주실 수 있다. 대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인간 통로가 되어야 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사람들에게 예수님께 마음을 바치라고 호소하기를 두려워하는 신자가 있다면 그대는 그에게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 결과는 성령께 맡기고 우리 몫을 다하면 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➋ 그대의 교회는 방문자들에게 얼마나 친절합니까?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을 더 잘 환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예수님의 심정으로 그들을 대하여야 할 것이다. 

 

➌ 각자 회심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 각각 서로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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