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예수님은 그들의 행복을 바라셨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8/13/16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8-06 08:48 조회7,368회 댓글0건본문
8월 13일 안식일
일몰 : 오후 7시 27분
기억절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연구 범위 : 욘 3:4~4:6, 눅 19:38~42, 마 5:43~47, 고전 13장, 막 8:22~25, 빌 2:3~5, 약 2:14~17
어느 재림교회의 안식일 아침, 안식일학교와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교회 문을 드나드는 모습이 보였다. 왜일까? 그 이유는 이 교회가 스케이트보드장 바로 옆에 있는 지역청소년센터에서 모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이들을 골칫거리로 봤다면 다시 생각해 보라.
치솟는 청소년 범죄율을 낮추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 정부는 도시 안에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여가를 보낼 수 있는 공원들을 조성하였다. 청소년센터와 스케이트보드장이 완공되자 시 정부는 청소년센터 시설을 활용하여 예배를 드릴 교회를 찾았다. 지역 지도자들은 교회가 있다면 공원을 사용하는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인 감화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여러 교단의 교회들을 초청했지만 결국 토요일 오전에 안식일학교와 예배를 진행하는 재림교회가 선정되었다.
이 재림교회의 신자들은 청소년센터로 들어가는 것을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들이 접촉하려는 대상 집단에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청소년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지역 주민과 섞여 사귈 때에 동기와 목적이 중요함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진정한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의 감화력을 인식한다.
➌ 행하기 : 우리가 그들을 돌본다는 사실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는 실질적인 방법을 찾는다.
A.
❶ 그대도 거부감을 느끼는 기독교인들의 전도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로 전도하는 것.
❷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기별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까?
※ 사람들이 참으로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별자.
❸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봉사해야 할 대상은 어떤 원칙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합니까?
※ 예수님이 사람을 보신 안목으로.
❹ 기독교에 거부감을 느끼는 현대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생활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B.
❷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바른 이유와 동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랑은 나누어 함께 영생의 생명을 얻게 하는 것.
❸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교회는 어떤 모습의 교회일까요?
※ 사랑으로 봉사는 교회
❹ 우리가 전도하려는 사람들은 어떤 필요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슨 일 을 할 수 있을까요?
※ 공통적 필요는 사망을 정복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구사해야 한다.
결론 : 사람들은 사적인 교제, 상품 홍보 및 판매, 활용 가치가 있는 인간관계 형성 등 다양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을 사귑니다. 기독교인들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고 진정으로 그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최선의 것을 제공하기 위해 그들과 사귑니다.
첫째 날(일) 8월 7일 니느웨로 간 요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 4:11).
1. 욘 3:4~4:6을 읽어 보라. 이 선지자의 태도에는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는가?
[욘3:4~4:6]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6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7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4: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답: 요나는 선민사상이 꽉 차 있는 사람이라 이방인데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자비를 바라지 않은 것 같다.
요나서 4장에서 선지자는 큰 성 니느웨 동편에 자리를 잡는다. 그는 이미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멸망의 기별을 전파했다. 그는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본다. 그는 니느웨에 가기 싫어서 도망했다. 하나님은 그를 끈질기게 붙잡으셨고 그는 3일 동안 물고기 뱃속에 있었다. 그는 해변에서부터 내륙까지 오랫동안 여행했다. 무엇 때문인가? 이 비열한 백성의 마음을 돌리고 그들에게 자신의 은혜를 나타내시려는 하나님 때문인가? 그들은 회개했다. 그런데 요나는 배신감을 느낀다. 망신스럽고 이용당한 느낌이다. 요나는 12만 명이 거주하는 이 이방 도시가 멸망함으로 선택받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증명되고 니느웨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이 정당화되기를 바랐다.
2. 눅 19:38~42을 읽어 보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예루살렘 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눅19:38~42]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답: 예루살렘이 회개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것을 거절한 그들을 보고 우셨다.
요나가 활동했던 시대로부터 800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한 언덕 꼭대기에 이르러 예루살렘을 바라보셨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는 외침과 함께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눅 19:38)라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런데 예수님은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시다가 갑자기 멈추시더니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눅 19:42)라고 말씀하시며 우셨다. 얼마나 대조적인가? 요나는 마지못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고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을 거의 베풀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자신이 베푸는 구원을 예루살렘이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심적 부담감을 가지고 그 성에 다가가셨다. 니느웨와 예루살렘 두 도성에 요나와 예수라는 두 기별자가 있다. 차이는 명확하다. 예수님은 백성들의 유익을 바라는 태도와 이타심의 모본을 보이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잃은 자들에게 보이셨던 동일한 태도를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란다.
<부가설명> 니느웨 성의 구원을 위하여 요나를 파견했는데 요나는 그냥 하나님의 명령만 전달했지 그들이 회개하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외친 것뿐이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요나가 외치는 기별을 통하여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셨다. 회개는 기별을 전하는 자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감동하시는 능력에 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게 하시지만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동기를 말씀을 전달하는 것에 두셨다. 예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회개를 촉구했지만 그들이 성령의 감동을 수 세기 동안 거절하고 말씀의 형식만을 강조하는 동안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데 실패했다. 예수께서 전하시는 자비와 사랑의 봉사는 그들이 생각하는 율법의 문자와 충돌하기 때문에 율법의 문자로 예수를 정죄하고 예수님의 기별을 완강히 거절했다. 마치 여리고 성문이 굳게 닫힌 것과 같았다. 그들은 여리고성처럼 내부적으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오늘날 재림성도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지역사회에 침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감동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다. 우리 자신이 굴복하는 정신으로 생활하고 삶을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우리가 멸망하는 세상에 단지 심판을 전하는 기별자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동정과 자비를 나타내는 기별자가 되기를 바라신다.
둘째 날(월) 8월 8일 ‘어쨌든’ 원칙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고쳐주시기를 구했다. 사회적인 통념에 따르면 그는 격리되어야 했다. 정결하신 예수님은 그를 만지시고 어쨌든 고쳐주셨다 (마 8:1~4). 베드로는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시는 동안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요 18장). 부활하신 뒤에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살피신 다음 어쨌든 그의 직분을 회복시키셨다(요 21장).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권위와 영향력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어쨌든 그들을 위해 봉사했다(고후 12:14~15).
이렇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은 사람들의 유익을 바라시는 분의 성품을 나타내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무지와 죄악의 사슬에 매여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천천만만의 영혼들은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듣지도 못하고 있다. 만일 우리의 입장이 그들의 입장과 뒤바뀐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해 달라고 요청할 것인가?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 그들을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엄숙한 의무가 우리에게 지워져 있다. 심판의 때에 우리들을 서게 하든지 혹은 넘어지게 할 그리스도의 생애의 법칙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이다"(시대의 소망, 640).
이러한 '황금률'은 우리의 유익이 아닌 우리가 섬기는 자들의 유익을 바라는 사역이 갖춰야 할 사고방식의 바탕이다.
1. 마 5:43~47, 눅 6:27, 35, 23:34을 읽어 보라.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중요한 요점을 알려주셨는가?
[마5:43~47]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눅6:27,35]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23: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답: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일반 사람들보다 더 하는 성도의 생활 태도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우리를 미워하거나 적대시할지라도 그들에게 사랑을 보이며 친절하게 대하도록 요구하신다. 예수님이 이러한 행위와 태도를 하나님의 성품과 결부시키셨던 점을 주목하라.
<부가설명>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 닮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노력해서 예수님을 닮은 것은 자기 수양(修養)과 도야(陶冶)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도덕적 종교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방법이다. 예수교도 이런 주장을 한다. 그래서 스스로 최고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고 도덕적인 종교라고 자부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을 세상이 다 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성경의 복음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도 잃어버리고 복음도 잃어버린 세상의 다른 도덕종교보다도 못한 상태에 떨어졌다. 복음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종교는 수양과 도야의 종교가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죽은 썩어질 씨로 태어난 상태에서 예수 안에서 썩지 않을 씨로 다시 태어나서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는 종교이고 복음이다. 이렇게 생명을 얻었을 때 인격과 생활은 예수님의 생명이 작용하는 모습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의 생명이 작용하여 나타나는 인격과 생활이 가장 고상한 도덕적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양과 도야의 차원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당연한 상태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생명으로 역사하시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는 것이 아니고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셔서 감동하신다. 이렇게 할 마음이 생긴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교훈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어쨌든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
셋째 날(화) 8월 9일 사랑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눅 10:27~28). 그분은 또한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 보여주셨다(눅 10:29~37). 예수님의 생애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 자체가 사랑이신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셨다(요일 4:16).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사해야 한다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님 혹은 기독교를 거부할 때 드는 가장 흔한 핑계 중 하나가 바로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역사적으로 또는 오늘날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저지른 끔찍한 일들을 보라. 심지어 다니엘서에서도 이런 일을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단 7:24~25, 롬 2:24 참고)
오랜 세월 동안 심지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부터 외면당해 왔다. 그래서 우리 개인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야 한다는 사명은 그 어느 시대보다 절실하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해 표현된 그런 종류의 사랑을 우리의 삶에서도 표현하는 것 외에는 이 명령을 더욱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1. 고전 13장을 읽어 보라. 바울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사랑은 어떤 일을 하는가? 사랑은 어떤 일을 하지 않는가? 사랑은 기독교인들의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가? 사랑은 우리가 지역사회의 증인이 되려는 방식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 이런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필요한 변화는 무엇인가?
[고전13:1~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답: 사랑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이다. 사랑은 불의에 속한 것은 결코 하지 않고 진리에 속한 것은 결코 행한다. 사랑은 완전한 이해이다. 주께서 우리를 아신 것같이 온전히 알고 상대를 대하는 것이다.
<부가설명> 고전 13장은 사랑장이라고 널리 알려진 말씀이다.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하면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사랑이라고 하면 남녀간의 사랑을 생각하고 우정을 생각한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도 생각한다. 기독교의 예수님의 사랑은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 여긴다. 죄인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요일4:9) 고전 13장의 사랑을 도덕적인 사랑으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실상을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고전 13장의 사랑은 도덕적인 사랑이 포함된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설명한 것이다. 13장 1~3에 표현한 사랑, 특히 3절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는 표현은 어떻게 생각하면 이해가 어렵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면 이보다 더한 사랑이 없는데, 그렇게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으니 이해가 어려운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랑은 재산을 다 구제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보다 다른 차원의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이 다른 차원의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설명한 말씀이 앞에 인용한 요일 4:9이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려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이다. 진정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사랑이 아니면 아무 유익이 없는 사랑이다. 우리는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생명을 나누어주는 사랑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고전 13장이 가르치는 사랑의 본질이고 성경의 사랑의 본질이다.
교훈 :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지른 기독교인들의 잘못은 사람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주된 원인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넷째 날(수) 8월 10일 두 번째 접촉
1. 막 8:22~25을 읽어 보라. 예수님의 첫 번째 접촉이 맹인을 완전히 치료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배워야 할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막8:22~25]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23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24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답: 맹인이 예수님의 첫 안수에서 사람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것과 다음에 다시 안수하여 완전하게 보이게 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와 확실히 만났을 때의 상태를 표상적으로 가르쳐준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영적 시력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눈에 침을 뱉고 만지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다(막 8:23). 예수님은 왜 그의 눈에 침을 뱉으셨을까? 고대의 문헌을 보면 의사들이 침을 사용한 예들이 있다. 이 이적은 예수님이 얼마 전에 데가볼리에서 귀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던 사건과 비슷하다(막 7:31~37 참고). 그러나 기록된 다른 모든 치유의 이적과 다르게 이 맹인의 치유는 두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막 8:23~24을 다시 읽어 보라. 그대는 "무엇이 보이느냐"는 질문에 대한 그 사람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24절). 즉 그는 단지 사람들의 움직임을 통해서 그들을 나무와 분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주신 후에도 우리는 온전하게 회복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을 나무와 같은 사물로 인식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아직도 그들을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할 진짜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교회에 가입시켜야 할 대상이며 침례 실적을 자랑하기 위한, 우리를 뽐내기 위한 상품이며 숫자이다. 사람들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가진 그러한 교회 안에 사람들이 머물 가능성은 거의 없다.
2. 막 8:25을 다시 읽어 보라. 예수님은 왜 그 사람들을 두 번의 단계를 거쳐서 치료하셨을까?
[막8:25]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답: 제자들의 영적 발전을 돕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사건 이전에 예수님은 다른 종류의 시각 장애를 다루셨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막 8:15)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배에 떡이 충분하지 못해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막 8:18)한다고 지적하셨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만 예수님의 치유의 손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도 시각 장애가 있다. 사람을 통계와 사물로 보는 치우친 시선을 가진 교인들은 교회 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어린 자녀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주목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두 번째 접촉이 필요하다. 그러면 그들이 모든 것을 분명히 보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부가설명> 예수님의 봉사가 제자들에게 영적 교훈을 주는 봉사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좋은 통찰력이다.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대상에 따라 다른 행동을 취하신 경우가 있다. 이렇게 봉사하신 사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영적 교훈을 찾으면 큰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듣지 못하는 자에게도 비슷하게 사람이 있는데서 딴 곳을 데리고 가서 귀에 손을 대고 고치셨다. 여기서는 눈에 침을 발라 고치신다. 대상의 믿음에 따라 그들에게 친근한 이해를 돕는 방법으로 치유하셨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람을 치유할 때 대상의 상태를 따라 바른 방법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방법으로 접근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적다. 우리는 성령의 지혜를 구하면 우리가 접촉하는 대상에게 합당한 방법으로 복음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진리의 사람으로 산다면 사람을 접촉하여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상대방이 깨닫게 되는 이적을 볼 수 있다. 성령께서 하시는 것이다. 요나의 불평스러운 외침에도 성령께서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니 그들이 회개한 것처럼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정신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면 평범한 말에도 상대는 진리를 깨닫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교훈 : 우리에게도 영적인 시각 장애가 있다. 사람들을 구체적인 필요를 가지고 있는 영혼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선에 치유가 필요하다.
다섯째 날(목) 8월 11일 타인 중심의 교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3~5).
1. 여기서 표현된 원칙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며, 우리가 교인뿐 아니라 지역 사회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
답: 진정으로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정신이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 그분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셨다. 다른 이들의 유익을 바라는 것이 그분의 관심사였다. 그분의 사역은 대부분 끼어듦에 대한 반응의 결과였다. 예를 들어 야이로는 그분을 가로막고 죽어가는 딸을 고쳐달라며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다시 그분의 길을 가로막았다(막 5:21~43).
교회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이자 손길이다. 예수님은 그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셨다. 그래서 진실로 그분의 뜻을 받드는 교회는 사람을 사랑한다.
교회에는 계획과 목표가 있다. 물론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나타내려는 목적에서 이탈하면, 인류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사전에 형성된 계획에서 벗어나도록 우리를 이끈다. 많은 교회에서 침례는 우선적인 의제이다. 침례는 좋은 것이다. 그것은 마 28:19을 성취하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침례를 주려는 동기는 무엇인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닌가? 교회를 과시하고 목회자의 실적을 높이려는 것인가? 아니면 지역 주민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찾을 수 있는 풍성한 삶을 누리고(요 10:10) 그분이 제공하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기를 진정으로 바라기 때문인가?
도심의 가장 낙후된 지역에서 무료급식봉사를 하는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이 봉사를 그만 두어야 합니다. 침례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또 막 새로운 교회 건물을 지은 교회가 있었다. 담임목사는 사람들에게 교회의 환경을 공개하기 위해서 여름성경학교나 건강세미나 같은 행사를 열어 지역주민들을 교회 안으로 초청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 교회의 최우선 고려사항은 새로운 카펫이 더러워지고, 새로운 욕실이 파손될지도 모른다는 염려였다. 스케이트보드장에서 모이는 교회와 이 두 교회를 대조해 보라.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셔서 사람과 같이 되셨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사람이 되셔서 세상에 오시고 사람을 섬기시되 죽기까지 하셨다. 일찍이 욥기의 엘리후는 “34:14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34:14,15)h 말하였다. 정말 하나님께서 자기만 생각하셨다면 우리가 구원받았겠는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이런 말을 하는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생명에서 사망으로 옮겼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그를 다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하여 여자의 씨가 되어 세상에 오셔서 아담 대신 죽기로 하신 것이다. 이런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을 믿게 하고 깨닫게 하고 생명을 얻게 한 것이다. 우리도 이런 주님의 마음을 품어서 사람을 살리는 사랑을 교회와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나타내도록 성령이 도우심을 간구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의 최우선 고려 대상은 항상 자신이 아닌 타인이었다. 마찬가지로 지역 주민이 누릴 행복이 교회 사역의 핵심 동기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날(금) 8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치료봉사>, 17~28 "우리의 모본", <시대의 소망>, 518~523 "네게 한 가지 부 족한 것이 있으니"를 읽어 보라.
"우리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이르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우리를 찾는 일은 드물 것이다. 설교에 의해서만 사람의 마음이 진리에 접촉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자처럼 그들 가운데 가셔서 그들의 관심을 일깨우셨다. 그분은 그들의 일터로 찾아가 그들을 만나셨고 그들의 사소한 일에 꾸밈없는 관심을 나타내셨다"(My Life Today, 186). 오늘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우리를 찾는 일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신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이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세상에는 수많은 필요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 세상은 상처받고 깨진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그들은 경우에 따라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말을 걸어주고,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물론 우리는 교회로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야고보가 경고한 것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믿음은 있지만 그것을 증명할 행위는 없는 것. 흥미롭게도 야고보는 그러한 경고를 음식, 의복, 개인 생활의 문맥에서 다루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도우라는 문맥에서 다루고 있다(약 2:14~17 참고). 누구든지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게 어떻게 하고 있는지가 진정한 믿음의 잣대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행 9:36). 그대의 교회는 현대의 ‘욥바’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 각 교회에서 대답을 찾기 바란다.
➋ 어떤 신자는 삶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갚기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 습니다. 이는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를 얼마나 잘 요약하고 있습니까?
※ 올바른 대답이다. 핵심을 찌르는 대답으로 아주 잘 요약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