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율법의 ‘변경’(질문, 대답, 부가설명)0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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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5-05 22:36 조회8,375회 댓글0건본문
5월 12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31분
● 연구 범위 : 롬 8:1, 7:15~25, 롬 7:1~14, 요 20:19~23, 행 20:6~7, 단 7:23~25, 계 13:1~17
● 기억절 :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우리가 마지막 사건들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는 내용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문제가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넷째 계명 곧 제칠일 안식일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안식일을 포함한 율법의 준수가 절대로 구원을 이루지 못함을 알고 있지만, 제칠일 안식일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마지막 때에 진정한 충성을 가늠하는 외적인 표시 또는 표지가 될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특별히 계시록 13~14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결정적인 사건들 속에서 두드러질 것이다. 때가 되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종교와 정치의 복합 세력들이 전 세계 백성에게 거짓 형태의 예배를 강요하는 일로 연합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즉 ‘창조주 외에 아무도 경배하지 말라’는 계 14:7의 말씀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 특별히 안식일에 대해 살펴보면서 율법을 변경하려는 시도를 둘러싼 사안들과 그것이 종말을 맞이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다룰 예정이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하나님의 법의 중요성과 그중 안식일이 차지하는 비중을 깨닫는다.
느끼기 : 하나님의 법 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경험하고 순종의 삶을 기뻐한다.
행하기 :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서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는 길을 찾는다.
➋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교리에서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까?
※ 율법은 회개해야할 죄를 지적하고 또한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생활해야하는지 보여준다.
➌ 단 7:25에서 작은 뿔 세력이 “때와 법”을 고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게 하여 바른 경배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➍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되었다는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습니까?
※ 전혀 성경과 상관없는 전통의 주장이고 사탄의 교훈이다.
➎ 어떻게 안식일이 참하나님의 백성을 구분하는 충성의 시금석으로 작용할까요?
※ 창조주를 경배하도록 창조주께서 친히 제정하신 표이기 때문이다.
➏ 우리가 안식일을 의미 있게 지키되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구원의 기쁨이 생활로 드러나는 표라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의 법은 성경을 따르는 신앙에 있어서 가장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가장 심한 논쟁과 반박도 일어납니다. 결론적으로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충성스러운 신앙의 시금석이 되는 쟁점은 하나님의 법,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안식일 문제입니다.
5월 6일(일) 약속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성경에 기록된 가장 위대한 약속 중 하나가 롬 8:1에 있다.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영을 따라 행한다.’ 이 말씀은 이전에 이어져왔던 논리의 정점이자 절정이다. 우리는 바울이 이 성경절 이전에 논했던 주제를 연구해야만 여기에 나타난 소망과 약속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1. 롬 7:15~25을 읽어 보라.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무엇인가?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롬 8:1에서 그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했는가?
[롬7:15~2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답: 사람이 육신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존재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정죄함이 없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기독교 내에서는 여기서 바울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큰 논쟁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의 언급이 죄의 실재성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모든 사람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여기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갈등과 관련이 있다. 육체와 자신 안에 거하는 죄의 욕망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롬 7:17)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하는 줄 알면서 행하고, 해야 하는 줄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이 무엇 때문이겠는가? 바울에 따르면 문제는 율법에 있지 않고 우리의 육신에 있다.
우리도 옳은 일을 행하고 싶지만 잘못된 일을 행하지 않는가? 물론 여기서 바울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과 죄의 불가분성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구하는 자라면 누구든지 항상 마주하게 될 갈등을 강력하게 입증하고 있다.
결국 그는 이런 명언에 도달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님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에 따라 행하면 은혜로 말미암아 정죄함이 없으리라는 위대한 약속을 받았다. 물론 우리는 투쟁하며 유혹에 부딪힌다. 이것이 죄의 현실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더 이상 율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순종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육체를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사는 법을 배운다.
<부가설명> 교과 저자가 첫 부분에서 말한 로마서 8:1에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는 말은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성경에는 없다. KJV에 있는데 이 구절이 있는 사본도 있고 없는 사본도 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을 읽어 내려가면 이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읽는 분들이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아담의 후손 그대로의 사람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하여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죽은 자가 무슨 활동을 하겠는가.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이 그에게 생명을 주어서 살리기 전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이 생명을 줄 수 있는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고 생명의 작용으로 생활하게 된다. 그럴지라도 지체에는 사망의 존재일 때에 행했던 습관의 요구가 배어 있다. 그것들이 세상의 유혹에 반응해서 죄 아래 팔리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감각은 그것을 아프게 느낀다. 그때 즉시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붙잡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 씻어주시고 고쳐주시면서 정죄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신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8:10,11)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면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주시기 때문이다.
교훈 :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도 죄의 유혹을 마주한다. 대신 우리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약속을 믿고 육체가 아닌 성령에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5월 7일(월) 율법과 죄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어제 우리는 롬 7:15~25을 살펴보면서 모든 사람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 죄의 현실과 마주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바울은 그전에 죄가 얼마나 편만하고 치명적인지를 드러내는 율법의 역할에 주목했다.
1. 롬 7:1~14을 읽어 보라. 율법과 죄는 어떤 관계인가? 이 말씀에 따르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구원은 얼마나 불가능한가?
[롬7:1~14]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9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답: 율법은 사람에게 죄를 지적하는 역할만 할 뿐이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죄를 없게 못한다. 이미 정죄아래 있기 때문이다. 결코 될 수 없다.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려는 두 가지 요점은 이것이다. 첫째, 율법이 문제가 아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문제는 죄이다. 죄는 사망을 야기한다. 둘째, 율법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에 무력하다. 율법은 죄와 사망의 문제를 지적한다. 심지어 그것은 죄와 사망의 문제를 더 드러낼 뿐 그것을 해결할 방법은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을 표면적으로 읽는 사람들만이 이 성경절들을 사용하여 율법과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입장과 정반대이다. 만약 율법이 폐지되었다면 여기에 바울이 쓴 내용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의 논리는 율법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다는 전제 하에 작동한다. 왜냐하면 죄의 실재와 복음의 필요성을 가리키는 것이 바로 율법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2. 롬 7:13을 주의 깊게 읽어 보라.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것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는가?
[롬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답: 율법과 계명은 사람들의 죄가 사망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율법이 제시되지 않으면 죄를 죄로 깨닫기 못한다. 그러면 속죄의 필요를 깨닫지 못한다. 속죄의 필요를 깨닫게 하려는 율법이 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사망을 가져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이다. 율법은 단지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만을 보여준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는 데 능하지만 죄에 대한 해결책은 없다. 그러나 복음에는 해결책이 있다.
바울의 요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영의 새로운 것”(롬 7:6)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면서 예수님과의 신뢰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부가설명> 죄가 있어도 율법이 그것을 죄라고 드러내지 않으면 사람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살인하는 것은 죄다. 그런데 살인하는 것을 죄로 규정한 율법이 없으면 살인을 죄라고 여기지 않게 된다. 그러면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며 살인을 자행하게 될 것이다. 살인이 죄라고 율법이 규정하고 합당한 형벌을 적시하면 사람들이 살인을 자제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살인할 생각이나 의도 자체도 죄로 규정한다. 그전에 성경은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라고 계시하였다.(고전15:22) 아담의 후손들은 죽은 자들이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에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말은 사람은 아담 안에서 다 죄인이 되었다는 뜻이다.(롬5:12)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인줄 모른다. 사회적으로 선남선녀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목에는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이 사실을 율법이 지적한다. 그것을 깨달을 때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게 된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죄와 복음은 이런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교훈 : 율법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죄와 사망의 문제를 지적하되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하고 대신 우리에게 복음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5월 8일(화) 안식일에서 일요일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다른 교단의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로부터 율법이 폐지되었다거나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주장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네 번째 계명이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많은 이들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제칠일 안식일이 첫째 날인 일요일로 대체되었다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할 성경절이 있다고 믿는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래에서 살펴볼 성경절들을 근거로 안식일이 구약시대에는 일곱 째 날이었지만 신약시대에는 첫째 날로 변경되었다고 믿는다. 이 성경절들을 읽을 때에 우리는 이것이 정말 요일의 변경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변경을 규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당시에 일어난 사건을 묘사하는 것에 불과한지 솔직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1. 요 20:19~2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제자들이 그 방에 모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정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한 예배였는가? 그렇지 않은가?
[요20:19~23]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답: 제자들이 당국자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장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방문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그날 저녁에 모인 것이다. 이것은 부활하신 일요일 저녁이다. 안식 후 첫날이라고 표현한 것은 로마식 날짜 계산법에 따른 것이다. 유대인의 날짜 계산법으로 하면 안식 후 둘째 날 저녁이다. 이것이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된 증거가 될 수 없다. 예배로 모인 것도 아니고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숨어 있는 장소였을 뿐이다.
2. 행 20:6~7을 읽어 보라. 여기서 안식일이 일주일의 첫째 날인 일요일로 변경되었음을 가리키는 내용은 무엇인가? 행 2:46도 참고하라.
[행20:6,7] 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 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답: 이것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안식일 집회를 마치고 그 이튿날 일요일 일찍 떠나기 위하여 토요일 밤에 늦도록 강론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일요일에 바울은 떠났다. 예배일이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3. 고전 16:1~4을 읽어 보라. 일주일 중 첫째 날에 그들이 가정마다 헌금을 적립해 두어야 한다는 사실 외에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되었다고 볼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있는가?
[고전16:1~4]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 내가 이를 때에 너희의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4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저희가 나와 함께 가리라.
답: 매주일(每週日) 첫날은 일요일이다. 그날에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였다가 바울이 그들에게 갈 때에 특별연보 한다고 부산떨지 말라는 것이다. 일요일에 예배할 때 연보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저축해 둘 이유가 없다. 이것이 일요일에 정기 예배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결코 될 수 없다.
첫째 날이 제칠일 안식일을 대체했다는 교리를 확산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근거 성경절들의 본질은 이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신자들이 모였던 몇 번의 사례를 봤을 때 제칠일 안식일을 대신해서 일요일에 열리는 예배를 암시하는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이러한 주장은 수백 년 동안 일요일을 준수해온 기독교 전통을 정당화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그들은 본래 없던 개념을 그 성경절에 주입하고 있다.
<부가설명> 위에 적은 성경구절들은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했다는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 이제 살펴본 대로 이것은 그 당시 그들의 상황을 따라 있었던 일이었을 뿐이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제자들은 다 흩어졌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제자들이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요한만 그곳에 있었다. 모두 두려워서 숨어 있었다. 부활하신 아침에 여자들이 부활 사실을 보고 듣고 제자들 중에 베드로에게 알렸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달려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확신하지 못하고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한데 모여 숨어있었다. 그날 밤에 예수께서 그들을 방문하였다. 그 시간은 일요일 밤이다. 무슨 안식일 대신에 예배하러 모였다는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사도행전 유두고 사건도 같은 이야기이다. Good News Bible에는 이 날을 토요일 저녁(On Saturday evening)이라고 번역했다.
이날은 토요일 밤이다. 바울이 일요일에 떠나기 위하여 토요일 밤, 곧 안식후 첫날 저녁에 모인 것이다. 어떻게 안식일을 일요일로 변경한 사건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고전 16:1~3은 신도들이 엿새 동안 일한 수입을 계산하고 연보해야 하는데 금요일 저녁부터 안식일이 시작하게 때문에 이를 얻은 것을 계산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안식일이 지난 다음 밤에 즉 토요일 밤에 엿새 동안 일해서 얻는 돈의 이익을 계산해서 연보를 떼어놓으라는 것이다. 일요일에 정기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이 전혀 아니다. 교과 저자의 말대로 “그들은 본래 없던 개념을 그 성경절에 주입하고 있다.” 우리는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한다.
교훈 : 안식일이 일요일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제자들이 안식일 대신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다는 증거는 신약 성경 어디에도 없다.
5월 9일(수) 신약 성경에 나오는 제칠일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행 16:13).
어제 보았듯이 일요일이 안식일을 대체했다는 주장을 확산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성경절들은 모두 그러한 주장과 관계가 없다. 오히려 신약 성경에 나오는 안식일 관련 성경절들은 모두 그것이 하나님의 십계명 중 하나로 준수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1. 눅 4:14~16, 23:55~56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그리스도의 죽음 전후에 제칠일 안식일에 대해서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알려 주는가?
[눅4:14~16]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23:55,56]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
답: 예수께서도 공생애 중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회당집회에 참석하셨고, 예수님 돌아가신 날 다음 날이 안식일이어서 여자들이 향품 준비하고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여인들이 어떻게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눅 23:56)었는지 보라. 그 계명은 분명히 시내산에서 돌비에 새겨진 넷째 계명이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 안식일 계명을 포함하는 십계명의 준수 외에 다른 명령을 받았다는 암시는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친히 준수하신 제칠일 안식일도 포함된다. 안식일이 일요일로 대체될 것인지에 대해 여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2. 행 13:14, 42~44과 16:12~13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은 제칠일 안식일 준수에 대해 또는 첫째 날의 준수에 대해 어떤 증거를 제시하는가?
[행13:14,42~44] 저희는 버가로부터 지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42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행16:12,13]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답: 바울과 그 일행은 전도 여행을 하는 중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예배에 참석했다. 또 로마의 영토인 빌립보에 가서도 안식일에 예배를 위하여 기도처를 찾아 나아갔다.
여기에는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되었다는 아무 증거가 없다. 오히려 이 말씀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초기 신자들 중에 제칠일 안식일 준수의 관습이 있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행 16:13이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회당 이외의 공간에서 발생한 일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관례대로 기도하기 위해 강가에 갔다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안식일을 준수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되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암시하지 않는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마5:17,1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신4:2) 선지자들을 감동하여 기록하게 한 하나님의 말씀도 가감하지 말라고 분명히 명령하셨고, 또 예수께서 친히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감히 여호와께서 손수 기록한 10계명을 인간이 고칠 수 있을까? 성경에 체7일 안식일을 제1일 일요일로 변경한다는 일언반구의 암시도 없는데 사람이 감히 이상에서 찾아본 구절들을 인용하여 안식일을 폐했다고 하거나 율법이 변경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성경의 하나님 여호와를 무시하는 사상과 행위가 아니겠는가? 두려운 일이다. 나도 장로교회에 다니던 사람이다. 3대째 장로교회 교인이었다. 그런데 성경을 바르게 깨닫게 해 주신 은혜로 제7일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 안식일은 단순히 일주일 일곱 날 중에 다른 날과 똑 같은 하루가 아니다. 이 날은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거룩하게 하신 날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조물인 사람들은 그 날을 창조주의 말씀을 따라 기억하고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그것은 곧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는 신앙행위이다.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니 않으면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눈을 가리워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겔22:16)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진리대로 신앙해야 한다.
교훈 : 신약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안식일 관련 성경절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계없이 여전히 안식일을 준수했음을 보여준다.
5월 10일(목) 안식일을 변경하려는 시도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
하나님의 법 곧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며(약 2:10~12 참고) 제칠일 안식일을 포함한다. 그런데 왜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일요일을 지키는가?
다니엘서 7장은 4개의 제국 곧 바벨론,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수립에 대해 언급한다. 로마 시대의 마지막 단계에서 작은 뿔 세력이 그 제국으로부터 나온다(단 7:8). 그러나 그 세력은 여전히 로마제국의 일부이다. 로마에서 비롯되었고 오늘날 여전히 그것의 일부인 세력은 교황권 외에 없다. 1600년대에 토머스 홉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만약 누구든지 이 거대한 교회 지배권의 근원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교황권이 다름 아닌 왕관을 쓰고 무덤 위에 앉은 사멸한 로마 제국의 유령이라는 사실을 쉽게 간파할 것이다.”—Thomas Hobbes, Leviatha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p. 463.
1. 단 7:23~25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일요일 준수의 기원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단7:23~25] 모신 자가 이처럼 이르되 넷째 짐승은 곧 땅의 넷째 나라인데 이는 모든 나라보다 달라서 천하를 삼키고 밟아 부숴뜨릴 것이며 24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25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답: 넷째 짐승으로 표상된 로마에서 일어난 작은 뿔이 하나님의 법을 변경하려고 하는데 특히 때에 대한 법을 변경하려고 했다.
25절을 원어(아람어)로 보면, 작은 뿔 세력은 고의로 법을 변경시키려고 했다. 어떤 지상 권력이 실제로 하나님의 법을 바꿀 수 있을까?
비록 확실한 세부 사항들은 역사 속에 희미해져 가지만 교황 로마에 의해 제칠일 안식일이 일요일 준수로 대체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 전통이 너무도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나머지 종교 개혁조차 그것을 유지해서 21세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개신교는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성경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주일 중 첫째 날을 지키고 있다.
계 13:1~17을 읽고 단 7:1~8, 21, 24~25과 비교해 보라. 마지막 사건들과 관련하여 어떤 공통적인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가?
[계13:1~17]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 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0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에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12 저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6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단7:1~8,21,24,25]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2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4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 5 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편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에게 말하는 자가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으며 6 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또 권세를 받았으며 7 내가 밤 이상 가운데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극히 강하며 또 큰 철 이가 있어서 먹고 부숴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으므로 8 내가 그 뿔을 유심히 보는 중 다른 작은 뿔이 그 사이에서 나더니 먼저 뿔 중에 셋이 그 앞에 뿌리까지 뽑혔으며 이 작은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입이 있어 큰 말을 하였느니라. /21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24 그 열 뿔은 이 나라에서 일어날 열 왕이요 그 후에 또 하나가 일어나리니 그는 먼저 있던 자들과 다르고 또 세 왕을 복종시킬 것이며 25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답: 고통적인 말들은 짐승, 바다, 뿔, 성도와 싸워 이김 등등 같은 단어가 많다. 이것은 동일한 세력이 말세에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할 것임을 잘 가르쳐주는 계시이다.
계시록은 로마 제국의 후기 국면 곧 교황권 시대를 묘사하는 다니엘서의 표현들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면서 그 세력의 명령에 따라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닥칠 마지막 시대의 박해를 공개한다.
<부가설명> 다니엘서를 이해하지 못하면 계시록을 깨달을 수 없다. 이 두 책은 같은 사실을 가르치는 상하권의 책과 같다. 다니엘서는 제국들의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음 사업을 방해하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 전할 임무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맡기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이 복음 전할 임무를 교회에 맡기셨다. 그래서 계시록은 교회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의 활동과 교회가 대처해야 할 것을 가르쳐준다. 그런데 다니엘서 7장부터는 나라들에서 나라와 교회를 겸한 세력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보여주시며 그 세력이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 이름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왜곡시켜서 진리를 바르게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은 동일 세력이다. 그 배후는 루시퍼 사탄이다. 사탄이 교회에 들어와서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과 교회가 다 속고 있다. 이것을 밝히고 복음을 바르게 전할 책임이 재림교회에 있다. 이 사실을 잘 깨닫고 임무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안식일을 변경한 세력은 로마교황권이고 개신교조차 그 전통을 따르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이 전통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큰 박해가 임할 것이다.
5월 11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늘에서 하나님과 전쟁을 벌인 용(계 12:7), 사탄이 바로 지상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분의 백성과 전쟁을 벌이는 존재이다(계 12:17, 13:2, 4 참고). 사실 사탄은 스스로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계 13:4). 그래서 하늘의 전쟁을 일으켰고 지상에서도 그 전쟁을 지속시키려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공격은 그분의 율법에 집중되어 있다.
“넷째 계명에서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로 계시되며 그런 까닭에 다른 거짓 신들과 구별되신다. 그리고 제칠일이 인류의 안식일로 거룩히 구별된 것은 한편으로 창조 사업을 기념하는 동시에 인류의 마음에 살아 계신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존경과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는 사실을 언제나 생각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율법의 준수를 가로막으려는 사탄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주목하게 하는 계명을 특별히 공격하고자 애쓴다”(각 시대의 대쟁투, 53~54).
우리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경배하며 안식일은 그분의 창조주 되심을 보여주는 표증으로서 그 기원은 창조 주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창 2:1~3 참고). 따라서 사탄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그 권위의 최고의 근원적인 표증인 제칠일 안식일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그분에게 충성을 다하며 변함없이 굳게 남아 있을 백성들을 그분 곁에 두실 것이고 그들의 충성은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그들의 순종을 통해 나타날 것인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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