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구원과 종말(질문, 대답, 부가설명)04/2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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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8-04-20 22:38 조회8,561회 댓글0건본문
4월 2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9분
● 연구 범위 : 요 14:9, 습 3:17, 요 1:1~3, 롬 8:38~39, 시 91:15~16, 계 14:6~7, 엡 1:4~5
● 기억절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는 그 설립자들이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강조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행하였는지는 강조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설립자들이 어떤 것을 행하였든지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지도자들은 고작 어떻게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그분이 무엇을 행하셨는지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편들을 제공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롬 8:3), 그분의 십자가 죽음(롬 5:8), 부활(벧전 1:3) 그리고 하늘 봉사(히 7:25), 그분의 이런 행위가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편이다. 그것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될 수 없다. “만일 그대가 사람에게 있는 선하고 거룩하고 고상하고 사랑스런 모든 것을 함께 모아서 그것들이 인간의 영혼의 구원이나 공로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천사들에게 제시한다면 그 제안은 반역으로 간주되어 배격당할 것이다”(믿음과 행함, 24). 위험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마지막 시대에는 이런 진리가 특별히 중요하다.
※ 학습 목표
깨닫기 : 죽음과 죄악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다시 발견한다.
느끼기 :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한다.
행하기 : 하나님을 사랑하며 즉각적인 반응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이웃을 사랑한다.
➋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언제부터 대책을 세우셨을까요? 그 사실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 창세전에 세웠다. 그것은 아담 안에서 창조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것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다.
➌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봉사를 통하여 넉넉히 알 수 있다.
➍ 그대는 성경으로부터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배웠습니까?
※ 예수를 진정으로 믿을 때 구원받는다.
➎ 마지막 때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 영원한 복음으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된다.
➏ 우리가 구원을 확신한다면 어떻게 그런 확신을 바탕으로 매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 구원은 재창조이기 때문에 새로운 피조물의 생명력으로 성령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결론 :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4월 22일(일) 아버지의 사랑
십자가 사건이 있기 얼마 전 예수님은 핵심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이 어떻게 그분을 통해 아버지에게 나아올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다. 그때 빌립이 이렇게 말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1. 예수님은 빌립에게 어떻게 대답하셨는가?(요 14:9) 우리는 그분의 대답을 통해 아버지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그분의 대답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오해를 해소했는가?
[요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답: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버지를 보는 것과 동일하다고 대답하셨다.
어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자비와 은혜와 용서가 많으신 분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그 둘을 구별하려고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든지 신약에서든지 동일한 성품을 가진 같은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계시하기 위해서였다. 오랜 세월 동안 그분과 그분의 성품에 대한 그릇된 개념들이 이방인들뿐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 중에도 확산되었다.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다. 음울한 그늘이 밝아지고 세상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탄의 기만적 세력이 깨어져야 했다”(시대의 소망, 22).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 만약 우리가 구약의 사건들을 둘러싼 모든 사실을 안다면 신약에서와 똑같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요일 4:8)이며 변치 않으시는 분이라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바로 구약성경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시다(시 145:8). 그분은 신실하고(시 143:8)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신다(시 147:11). 하나님은 사람들을 풍요롭게 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를 바라신다(렘 29:11). 그분은 자기 백성을 더 이상 견책하지 않으시고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신다(습 3:17). 하나님 아버지는 진실로 그같이, 아니 그보다 더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부가설명>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바로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표현은 맞는 말이지만 착각과 오해를 일으킨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 하나님’이라는 말과 ‘세 분 개체’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성경적이지만 이 신학적 단어 때문에 오해가 많은 것 같다. 확실한 성경의 기초하여 삼위일체 진리를 이해하지 않고 신학적 용어(用語)에 성경을 맞추는 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면 당연히 성경과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학문은 용어를 만드는데 처음 만들 때는 의미를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처음 의도했던 개념이 용어자체의 의미로 변질하게 되고 내용을 용어에 맞추어 이해하도록 유혹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내가 알기로는 그 대표적인 것이 ‘삼위일체’라는 용어이다. 사람들은 ‘일체(一體)’라는 말에 중점을 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성경이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분 하나님이 바로 아버지, 아들, 성령의 세 개체로 계신다. ‘한 분’이라고 말할 때에는 세 개체를 각각 말할 때에도 그렇게 표현한다.(엡4:4~6) 그러나 통합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할 때에는 ‘한 몸뚱이’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럴 때 표현은 ‘한 가족’이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한 가족이 5명이면 한 가족 다섯 개체이다. 그처럼 성경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 세 개체이다.’ 예수께서 사람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 하늘 보좌에는 말씀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와, 성령은 거기 계셨다. 예수님은 사람과 같은 몸을 가지셨기 때문에 개체로 거기 계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이라고 할 때에는 ‘신성의 본질’에 대한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각각 개체로 계시지만 그 세 개체는 같은 신성=하나님 되심이 동일하다는 뜻이다. 그것을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라는 말로 가르쳐주셨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셋이기 때문에 복수(複數)이다. 그러면 당연히 ‘이름’도 복수가 되어야 문법에 맞다. 그러나 여기 ‘이름’은 단수(單數)이다.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은 하나뿐이라는 말이다.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그러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다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 존재성이 동일한 것이다. 성경대로 표현하면 삼위일명(三位一名)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모두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 이름이 여호와이시다. 구약이나 신약을 유의하여 읽으면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에게 주로 말씀하시고 나타나신 여호와는 말씀하나님이셨다. 그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라는 이름으로 봉사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성경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를 ‘하나님의 피’라고 계시하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이 사실을 깨닫고 교과 저자가 한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교훈 : 우리가 아는 구약의 하나님이 바로 신약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4월 23일(월) 그리스도의 사랑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죄는 인류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켰다. 둘 사이에 커다란 틈이 생겼는데 그 틈을 메우지 않는다면 인류는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 구렁은 깊고 위험했다. 그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 많은 인류를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다시 연합시키려면 매우 엄청난 일이 필요했는데 그 일이란 바로 하나님같이 영원하시고 하나님같이 거룩하신 분께서 인간이 되셔서 인성을 입으신 채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1. 요 1:1~3, 14과 빌 2:5~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요1:1~3,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답: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사람이 되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도록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분이며 그분의 존재는 세상의 그 어떤 누구와 무엇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분은 단지 신의 모양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근본적인 속성은 거룩하며 영원하다. 예수님은 그러한 신성을 간직하신 채로 인간이 되셔서 육체 안에서 율법을 지키시고 그 법을 범한 우리 모두를 위해 대속물로 죽으셨다(롬 3:23).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어떤 특혜도 없는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그분 안에 있는 신성의 힘이 아닌 모든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동일한 능력 곧 하늘에서 제공하는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법을 지키셨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셨다. 이는 “말씀의 능력으로 만물을 붙드시”(히 1:3)는 분이 “구유에 누인 아기”(눅 2:16)로 오셨다는 뜻이고,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서”(골 1:17) 세움을 입는 분이 인간 아기로 오셔서 “지혜와 키”(눅 2:52)가 성장하는 경험을 하셨다는 뜻이며,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요 1:3)는데 그런 분이 나무에 달려 죽으셨다는 뜻이다(행 5:30).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이라면 우리에게는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가 너무도 많은 것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부가설명> 일요일 부가설명에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말씀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사9:6)이셨다. 그 본질적 이름은 여호와이시다. 출애굽기 3장을 읽으면 호렙산 기슭 가시떨기나무 불꽃 중에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말라크=천사)’가 바로 여호와시오 하나님이시라고 설명한다. 모세가 이름을 가르쳐달라고 한 분이 바로 이 여호와의 사자였다. 그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시고 ‘나의 영원한 이름은 여호와’라고 대답하신 분이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그분이 바로 ‘가시떨기나무 불꽃’에 나타나신 ‘여호와의 사자’ 그분이시다. 출애굽기 3장 1~15을 자세히 읽어보라.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신 그분이 바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라고 하신 그분이신데 신약에서 예수님으로 오신 말씀하나님 그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이사야를 통하여 계시하신 대로 본질적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또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다. 그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분은 구속사적으로는 영원하신 아들이라고 하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셨다. 그분이 아들의 신분을 취하신 그 자체가 자기를 비우신 겸손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기 비하이다. 우리가 그분 앞에 어떻게 목을 곧게 하겠는가.
교훈 :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인간으로 오셔서 완전한 대속물이 되셨다.
4월 24일(화) 성령의 사랑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롬 8:26).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만큼이나 오해를 받으신다. 어떤 신학자들은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으로 간주한다. 즉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단순한 감정이라는 말이다. 이는 성령이 신격의 일원이 아니라 두 존재 사이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인격성을 증명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다(마 28:19).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요 16:14), 세상을 책망한다(요 16:8). 그분은 근심하시며(엡 4:30), 위로자와 돕는 자, 변호인이 되시며(요 14:16), 우리를 가르치고(눅 12:12), 중재하며(롬 8:26), 거룩하게 하신다(벧전 1:2). 그리스도는 성령이 백성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요 16:13).
요컨대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하나님이다. 그분들 모두가 한 하나님이시다.
1. 성령이 행하시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은 무엇인가?(눅 12:12, 요 16:8~13, 행 13:2)
[눅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요16:8~13]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행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답: 신자들이 증거 할 말을 가르쳐주시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며 신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곧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신자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하여 거듭나서 살게 하는 사랑의 봉사를 하신다.
성령이 하나님이시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다(마 1:20). 오직 하나님만이 그와 같이 ‘창조’하실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해 두 가지 상반된 기적을 행하셨다. 첫째, 그분은 무소부재하셨던 그리스도를 마리아의 자궁에 옮겨 놓으셨다. 둘째, 성령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인성 안에 제한하셨는데 설명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적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하게 하신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삼위 하나님의 마음에 인류에 대한 동정의 감정이 일어났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는 구원의 계획에 속한 사역에 자신들을 바치셨다”(엘렌 G. 화잇, Counsels on Health, 222).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데려가기 위해서 일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구원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부가설명> 세 사람이 서로 기울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친교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사람 사이에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면 당연히 서로 사랑할 것이니까 서로 기울어지지 않는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이면 셋이 완전히 똑같은 균형진 사랑으로 사랑을 나누기 아주 어려울 것이다. 사랑이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삼위가 계신다. 그 삼위 간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다. 결코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균형진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신다. 사랑은 홀로 있을 땐 나타날 수 없다.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사랑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사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 단일 존재일 수 없다. 당연히 하나님은 복수로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두 분이어도 안 된다. 그러면 사랑이 완전하지 않다. 세분이 기울어지지 않는 균형진 사랑으로 사랑을 할 때 그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다. 아버지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 성령의 사랑은 동등한 사랑이고 완전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완전히 나타났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완전한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신다. 바울은 성령의 사랑으로 우리를 권고한다고 했다.(롬15:30)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완전한 사랑으로 구원을 위하여 봉사하신다. 지금은 성령께서 교회를 지도하시며 다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도우시고 일하신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가!
교훈 :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일하시며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4월 25일(수) 구원의 확신
일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신자들은 자신들이 구원을 받게 될지 아닐지 궁금해 한다. 확신이 부족한 탓에 그들은 영생에 관하여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아도 신앙생활에 용기가 될 만한 것을 거의 찾지 못한다.
우리는 저마다 예수님의 성품과 자신의 성품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보거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4)고 하신 말씀을 읽고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마지막 때에 준비된 자가 되려면 지금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두려움 없이 미래를 맞이하려면 구원은 지금 우리의 현실이 되어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살아계신 삼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며 살고 또한 그래야 한다.
1. 다음의 말씀들을 읽어 보라. 우리는 여기서 구원에 관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들과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에 관하여 어떤 소망과 확신을 얻을 수 있는가?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시 91:15~16).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31~32).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13).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1~13).
답: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삶을 살고 또 그렇게 살려고 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데 자기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사업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부름과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죽도록 충성해야겠지만 우리는 항상 구원의 유일한 소망이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지막 때에 신실하게 순종하며 살 것이다. 그러한 신실함과 순종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이루신 일들에 대한 확신에서 생긴다.
<부가설명> 구원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행위이다.(사45:8) 구원받는데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에 자기도 한 몫 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려고 한 루시퍼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셨기 때문이다. 존재하게 한 다음에 생활하라고 하셨다. 구원도 동일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형상대로 재창조해주셨다.(고후5:17, 엡4:23,24) 재창조를 받은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새로운 피조물이었던 아담을 유혹해서 생명에서 사망으로 떨어지게 한 것과 같이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구원받은 사람을 유혹해서 다시 사망으로 떨어지게 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한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사탄의 이런 노력과 맞서서 싸우는 것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다. 그것은 복음을 도덕으로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림성도들이 부디 구원의 복음을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했으면 좋겠다.
교훈 : 우리 스스로는 절대 구원을 확신할 수 없지만 우리를 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주시는 영생의 약속을 통해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4월 26일(목) 영원한 복음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계 14:6).
1. 계 14:6~7을 보라. ‘영원한 복음’이란 무엇인가?
[계14:6,7]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답: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동일한 복음이라는 뜻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과 같이 영원한 복음이다.
복음에 ‘영원하다’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는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또 다른 증거이다. 변하지 않는 하나님께 변하지 않는 복음이 있다. 이 영원한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확신을 준다. 복음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계시하며 이것이 세상에 전해져야 할 기별이다. 누구에게든지 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
2.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이 말씀에 따르면 복음은 얼마나 영원합니까?
답: 창세전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복음이다. 이 종말의 때에 이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창세 전에 예수님 안에서 선택을 받았다. 그래서 “영원한 복음”이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계획하셨다.
“택하사”, “예정하사”, “기쁘신 뜻대로”, “아들들이 되게” 등의 말에 주목하라. 이 두 성경절이 자신 안에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바람을 얼마나 절절하게 나타내고 있는지 보라(살후 2:13, 딤후 1:9 참고).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영원 전에 행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은혜가 어떠한지를 말하며 구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나 어떤 피조물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서 발현하는 행위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존재하기도 전에 그분 안에서 그러한 구원을 받도록 택함을 받았다면 어떻게 구원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겠는가? 단지 그것을 받을지 거부할지의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이러한 택함은 어떻게 선택을 받은 백성의 삶 속에 나타나는가?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엡 1:4) 됨으로 나타난다. 이것 또한 우리가 택함을 받은 이유이다.
<부가설명>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이 지구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자기의 형상과 같이 창조하셨을 때 이 지구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충만하도록 계획하신 것이다. 또 이 창조는 삼위 여호와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계획하신 사랑의 사업이었다. 생명과 사랑은 생산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속성이다. 사탄이 여기 끼어들어서 자기도 창조에 동참하려고 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등하려고 한 사탄의 속셈이었다.(사14:12~14) 결국 사탄은 자기와 자기에게 유혹당한 천사들과 이 지구의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이 창조되지 않은 상태에 빠지게 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사업 중에 한 부분이 무너지는 것 같이 만들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시면 재창조를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새로운 피조물의 샘플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세상에 사람 되어 오시고 아담의 후손들도 예수 안에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구원은 삼위 여호와 하나님의 재창조인 것이다. 예수를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 된 것이다. 이제는 선악과를 먹지 않아야 한다. 생명과실과 다른 과일들만 먹어야 한다. 사탄은 태초에 유혹했듯이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들에게 선악과를 먹게 하려고 최대의 노력을 한다. 이것과 맞서 싸우는 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싸움이 없다. 우리의 상태를 잘 살펴보자. 날마다 이런 싸움이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능히 서서 악한 자를 대적하여 승리하는가? 성령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아멘. 마지막 때에 이런 확신을 말씀에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자.
교훈 :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증언하며 구원이 우리의 행위가 아닌 영원 전부터 그것을 계획하신 분의 사랑과 은혜에서 비롯됨을 보여준다.
4월 2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뻔뻔해져서는 안 된다. 세상에 거짓 구원에도 확신이 있을까? 물론이다. 예수님도 그것에 대해 경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이 사람들은 두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첫째,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행하든지 주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그분의 뜻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죄가 없지 않은 자, 실수가 없지 않은 자 또는 완전하지 않은 자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 곧 ‘무법한’ 또는 ‘법이 없는’ 자들로 묘사하셨다. 둘째, 그들은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이 행한 일들을 강조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한 것 아닙니까? 이게 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행한 일이 아닙니까?’ 저런! 얼마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졌으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로워지기 위해 자신들이 행한 일들을 주목했겠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행위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행위뿐이다. 우리의 확신이란 우리 자신 또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 속에 있다. 확신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공로에만 의지하라. 그러면 그대에게 필요한 확신이 생길 것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루터는 “내 자신을 보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어떻게 멸망을 당할 수 있을지 모르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왜 우리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아담 안에서 죽어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자신만 보인다.(고전15:22, 에14:22)
➋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고 해도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토의해 보십시오.
※ 영원 전부터 예정한 것은 구원하시겠다는 사실 자체이다. 개별적으로 구원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를 예정한 것이 아니다. 구원하시겠다는 그 예정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되었다. 누구든지 예정이 성취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는 예정 안에 들어오는 사람이고 그것을 믿지 않고 받지 않으면 구원의 예정에서 스스로 떠나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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