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과 원인 모를 저주?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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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범 작성일16-10-31 11:50 조회3,38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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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과 원인 모를 저주?
기억절 :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깨끗하겠느냐”(욥 4:17)
첫째 날(일) 중요한 질문들
*도입질문: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시련과 고통이 때때로 유익이 될 수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이 지구에서의 삶은 하나님을 떠난 선택한 결과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희망과 기쁨도 있지만 크게 보면 사망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떠나는 선택을 한 그 순간부터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아담과 함께 하나님 보시기에 죽었습니다.(고전15:22) 죽은 자의 삶은 그 모든 과정이 병듦이고 아픔이고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우리가 겪는 삶의 시련과 고통은 그러므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나 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분리의 결과들이 나타날 뿐입니다. 사람들의 삶의 운명이 사망이고 그 사망을 살아가는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시련과 고통은 매우 힘든 모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절망의 운명 때문에 새로운 희망의 기대를 찾게 합니다.
건강이 좋지 못할 때,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고 그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기회가 됩니다. 사업이 망했을 때, 나의 한계와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의 기회가 됩니다.
친구로부터의 배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이기적 특성을 이해하게 되고 언제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의 편이 되어주시는 분은 나의 창조주 하나님 밖에 없음을 깨닫고 확신하는 기회가 됩니다.
아픔과 고통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벌을 주기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결과들이 바로 아픔과 고통들입니다. 아담의 선택의 결과이며,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인류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런 불안정하고 고통스런 현실을 통해 새로운 돌파구로서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것은 고통처럼 보이지만 곧 다가오는 숨겨진 복이 됩니다.(고후12:7-10)
둘째 날(월) 언제 무죄한 이들이 망했던가?
*도입질문: 엘리바스의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욥 4:7)라는 질문은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품성을 어떻게 알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나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엘리바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은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엘리바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정직한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사랑과 복을 주시고, 죄의 행위를 하는 자에게는 벌을 주시고 멸망케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 관으로 욥의 고난을 바라볼때, 욥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했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습니다.
조건적 사랑으로 인해 욥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인한 고통이므로, 고통의 원인을 생각해보고,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회복하실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엘리바스의 하나님 관은 성경에 보여 지는 하나님의 모습과는 다르게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조건에 따라 복과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복과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행17:25)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택의 자유로 하나님을 거절하고 떠나는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사람에게 물으셔서 벌을 주시거나 고통을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요12:47)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의 결과가 하나님과의 분리로 인해 사망이 됨으로 하나님은 그를 벌주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다시 옴으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롬5:20)
사랑의 감동만이 자신이 사망의 선택을 바꾸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선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날(화) 한 사람과 그의 창조주
*도입질문: 엘리바스의 사상은 한 사람의 창조주는 그 한 사람에게 어떤 존재로 보았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엘리바스가 생각하는 창조주는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조건적으로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창조한 사람이 창조주의 뜻에 맞춘 삶을 살면 복을 주지만, 창조주의 뜻과 다른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의 전능함으로 그 사람에게 벌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욥의 고통을 소문 듣고 찾아온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이 의인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지금 욥이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니 욥은 의인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는 판단에 의하면 죄인이고,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엘리바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은 창조된 존재들을 섬기고자 하는 사랑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랑을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창조주의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만드셔서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런 하나님 관은 성경에서 보여 지는 하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마20:28, 롬5:8, 요일4:8 등)
넷째 날(수) 미련한 자들이 뿌리를 내림
*도입질문: 엘리바스의 논증이 성경의 지지를 받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엘리바스의 논증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요5:39) 예수님은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이 아니라 무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엘리바스의 논증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품성으로 생각해보면 엘리바스의 논증은 성경적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글자로만 이해하면 맞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바스는 ‘불행은 오직 악한 백성에게 임한다.’라고 얘기 했고, 호세아 선지자도 같은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호세아의 글을 글자로만 이해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조건에 맞지 않은 선택과 행동을 했을 때 우리를 찢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조건에 맞는 선택과 행동으로 돌이켰을 때 다시 낫게 하신다는 것이고, 우리의 행위와 선택에 따라 우리를 치셨지만, 우리가 행위와 선택을 새롭게 하면 다시 싸매어 주신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글자의 내용대로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롬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서로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때는 벌을 주시고 어떤 때는 묻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았는데 대신 돌아가셔서 구원하시는 것 같고...
호세아의 글은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다시 읽을 때 성경 전체와 모순되지 않고 조화됩니다.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택의 자유로 하나님을 거절하는 선택을 하였다고 우리를 찢으시거나 치시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의 선택의 결과를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자유를 준다는 것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서도 선택의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서 대신 처리하실 때 온전히 선택의 자유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되셨고(계13:8), 평화의 의논은 창조 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슥6:13)
선택의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하나님 자신이 지시기 때문에 표현에 있어서도 우리가 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분리를 선택한 결과가 고통이며 찢어짐입니다.(렘2:19, 하나님을 떠나는 선택이 악이고, 그 선택으로 인해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선택이 자신을 고통 속에 몰아 넣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선택의 결과가 고통인데 하나님은 마치 그것을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셔서 찢어졌다고 말씀하시고, 치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품성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말씀 그대로가 아닌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품성 속에서 말씀을 해석할 때 성경 전체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책임지시는 표현법으로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눅15:24에 표현된 “이 내 아들을 잃었다가 얻었다”는 표현도 사실이 아닌 표현입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들이 유산을 받아서 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의 선택을 사실대로 표현하지 않고 마치 하나님께서 잘 못하여 아들을 잃어버린 것처럼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을 품성으로 보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는, 틀린 것 같은 표현입니다.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품성의 입장에서 기록되었으므로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글들을 바라볼 때 전체적으로 모순되지 않고 완벽하게 조화됩니다.
다섯째 날(목) 성급한 결론
*도입질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현상들에 대하여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런 성급한 결론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어떤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을 하게 됩니다. 엘리바스나 욥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같은 하나님 관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논쟁일 뿐입니다. 욥이나 엘리바스가 믿고 있는 하나님 관은 조건적 사랑을 하시는 분입니다. 욥은 자신의 행실을 따져 볼 때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고통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엘리바스는 욥 자신도 알지 못하지만 무언가 하나님께 잘 못을 범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원인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둘 다 확신 속에서 논쟁하고 있습니다. 이 논쟁에 끝은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잘 못된 것이지만 확신 속에서 하는 논쟁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품성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하나님으로 알게 되고 믿게 될 때, 바른 결론을 내리게 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흔들리지 않은 믿음 속에서 사단이 행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을 소망하여 서로에게 힘을 주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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