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하나님과 인간의 고통(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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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10-15 06:43 조회7,920회 댓글0건본문
10월 22일 안식일
일몰 : 오후 5시 46분
기억절 :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연구 범위 : 롬 1:18~20, 욥 12:7~10, 계 4:11, 골 1:16~17, 마 6:34, 욥 10:8~12, 롬 3:1~4
성경의 다른 책과 달리 욥기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 지역과의 관련성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창 12:2)겠다는 약속을 주신 창세기로부터 “거룩한 성”(계 22:19) 새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민족 또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이라는 문맥은 직간접으로 각 책의 틀을 형성한다.
그런데 욥기에는 그런 이야기는커녕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중대한 사건인 출애굽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창세기와 욥기를 기록했을 당시 아직 출애굽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다(화잇주석, 욥 1:1 참고).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통은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욥기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이다. 그것은 어떤 백성이나 시대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우리는 모두 욥이 겪은 재앙이 어떤 것인지, 타락한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욥의 고통이 아무리 특별하다고 할지라도 그는 고통 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상징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모든 피조물이 우주를 통치하는 창조주의 존재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배운다.
➋ 느끼기 : 아들을 보내어 우리 죄를 위해 죽게 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고통이 찾아올 때 하나님께 이유가 아닌 목적을 묻기로 결심한다.
A.
❷ 천연계와 과학적인 발견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창조에 대해 어떻게 증언합니까?
※ 그분은 창조주이시면 사랑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으로 나타낸다.
❸ 신자들이 불신자보다 고통의 문제로 더 씨름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당하게 하실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❹ 우리는 고통의 이유로 씨름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 죄의 세상에서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을 사망의 세력이 더욱 강하게 공격하기 때문이다.
B.
❷ 창세기와 함께 기록된 욥기가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어떤 의미라고 생각합니까?
※ 창세 이후로 아담의 타락과 함께 고통이 왔다는 것을 드러낸다.
❸ 악의 문제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할 때에 우리는 어떤 해답을 찾게 됩니까?
※ 사망이 된 존재들이 썩어져가는 상태와 그런 구습의 생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❹ 하나님께서 악의 문제를 해결하실 때까지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 하나님은 죽은 것을 살리려고 모든 노력을 다 하셨다. 그 대답이 십자가이다.
결론 : 대쟁투의 중심에 그리고 인간이 겪는 고통의 문제 이면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자리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 개인의 생애에서 그리고 이 지구 역사의 어느 순간에 그분을 찬양할 날이 올 것입니다.
첫째 날(일) 10월 16일 천연계 속의 하나님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1. 롬 1:18~20을 읽어 보라. 여기서 바울은 무엇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롬1:18~20]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답: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하신 사실로 창조주가 계신 것을 분명히 알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천연계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계시이다.
간명하면서도 중요한 말씀이다. 창조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실체가 충분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세계든 사람이든 그것들의 불신에 대해 핑계할 수가 없다. 바울은 창조 세계만으로도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본성에 대해 충분히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심판의 날에 공정한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천연계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계시한다. 현대 과학은 3천 년 전이 아닌 3백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창조의 경이로움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일러준다. 흥미로운 사실은 과학이 생명 속의 복잡성을 발견하면 할수록 생명의 기원을 우연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의 방편들이 점점 적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모두 잘 갖춰져 있고 훌륭하게 작동하는 스마트폰은 당연히 설계된 제품이다. 그런데 신체와 정신을 모두 갖추고, 기막히게 작동하는 인간을 우리는 순전히 우연의 산물로 여긴다. 불행히도 많은 사람이 그 같은 주장에 속고 있다.
2. 욥 12:7~10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롬 1:18~20에 나타난 사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욥12:7~12]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0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1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답: 피조물들이 창조주가 계심을 분명히 증언한다고 말해서 로마서 1:18~20과 같은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창조된 세계 속에 나타난다는 증언을 듣는다. 물론 타락한 상태의 천연계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하게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그분의 창조의 능력과 선하신 성품의 여러 측면들은 밝히 드러내고 있다.
<부가설명> 조직신학은 성경의 하나님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선포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셨다고 계시하고 있는 것 같다. 로마서 1:20이 바로 그 계시이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창조로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하셨다고 분명히 기록하지 않았는가. 처녀총각이 결혼하면 부부가 된다. 그들이 부모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녀를 생산해야 한다. 생산된 자녀는 그들의 부모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가 스스로 계시기만 한다면 누가 그분이 스스로 계시는 것을 알겠는가? 그것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삼위일명 여호와만이 그들이 스스로 있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셨을 때 피조물들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마치 자녀가 부모가 계시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인 것과 같다. 천연계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가 계심을 증명하는 증명서들이다. 그 창조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성경이 계시한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안다. 그것을 믿고 안다는 증명이 제칠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생활인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을 인정하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묘한 사실이다. 속지말자.
교훈 : 천연계는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반사하고 과학은 생명의 신비로움을 더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런 증거들 때문에 우리는 불신에 대하여 핑계할 수가 없다.
둘째 날(월) 10월 17일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훌륭하고 효과적인 논증들은 많이 있다. 천연계의 증언 외에도 ‘우주론적 논증’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저절로 창조되거나 저절로 생기는 것은 없다는 개념이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그 이전에 그것을 있게 한 원인이 있고 그 원인 역시 그 이전에 그것을 있게 한 다른 원인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올라가면 우리는 다른 원인이 없는, 언제나 존재했고,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제1원인에 이르게 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1. 우리는 다음의 말씀에서 만물의 기원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계 4:11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골 1:16~17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요 1: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답: 창조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다.
이 말씀들은 창조에 대하여 가장 논리적인 설명은 다름 아닌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 자체라고 가르친다. 신의 개념을 철저히 부인하는 철학자들은 대안을 찾는다. 우주를 창조한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대신에 ‘무’에 의한 창조를 주장한다. 스티븐 호킹 같은 유명한 과학자도 한때 아이작 뉴튼이 사용했던 의자에 앉아 ‘무’가 우주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주에는 그 자체로 무로부터 창조하는 중력 같은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Stephen Hawking and Leonard Mlodinow, The Grand Design (New York: Random House, 2010), p. 180.
물론 호킹 박사가 매우 심오하고 복잡한 계산 끝에 이런 개념을 소개했다지만, 우리는 과학 혁명이 시작된 지 400년이나 지난 지금 최고의 과학자 중 한 사람이 우주와 그 안의 만물이 ‘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의 말이라도 오류는 오류이다.
<부가설명> 호킹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증명되는지 나는 과학에 무지하기 때문에 모른다. 무에 중력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되는 것일까? 호킹은 무가 무엇인지 증명했는가? 탁월한 과학자요 과학적 이론가이기 때문에 나의 이런 의문이 우문일는지 모르지만 과학에 무지한 일상적 상식으로 합당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의문이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라고 가르친다.(롬4:17)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이다. 오직 스스로 존재하는 분만이 가질 수 있는 이름이다.
사람의 상상은 경험세계에서 출발한다.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은 상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상상이 출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절대적인 무의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이미 있는 것들 중에 출생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출생했을 때에는 이미 천연계가 있고 부모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무라고 하는 막연한 생각은 있는 것들 중에서 없는 것을 생각하는 수준을 벗어난다고 할 수 없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은 계시는 분이시다. 그가 계시는 것을 창조로 증명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가장 확실한 과학이며 과학적 사실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들처럼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욥38:2)
교훈 : 하나님은 만물이 존재하게 하신 첫 번째 원인이시다. 우주가 무에서부터 저절로 생겼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은 진실이 아니다.
셋째 날(화) 10월 18일 가장 오래된 책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흑색선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그럴만한 상당한 이유들이 있다. 반면 자신들의 불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이 활용했던 케케묵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고통과 악의 문제이다. ‘그토록 선하고, 사랑이 많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참모습을 맛보고 경험한 신자일지라도 한때 그 같은 의문과 씨름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엘렌 G. 화잇은 유대교에서 전승되는 내용을 가르쳤다. 즉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욥기를 기록했다. “외로운 광야에 머물렀던 오랜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었다. 모세는 그의 앞에 있는 큰일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성령의 감화로 그는 창세기와 아울러 욥기를 기록하였다. 이 책들은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깊은 흥미를 가지고 읽을 책이다”(화잇주석, 욥 1:1).
이것은 성경에서 최초로 기록된 두 책 중 하나인 욥기가 인간의 고통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은 이것이 인간에게 매우 중대한 문제인 것을 아시기 때문에 초기부터 모세로 하여금 욥의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일찍이 우리가 고통 중에 홀로 버려진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함께 계시며, 그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마지막 때에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으시리라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1. 우리는 다음의 성경절에서 악의 문제에 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마 6:34, 요 16:33, 단 12:1, 마 24:7)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단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무릇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
[마24: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답: 이상의 성경구절들은 세상에 재난과 고통과 염려와 투쟁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씀들이다. 그러나 종국에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을 나타낸다.
악의 문제로 하나님의 존재를 반박하려는 주장이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의 빛에 비춰볼 때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성경은 전지하고, 전능하며,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지만, 악의 문제와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말한다. 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핑계가 될 수 없다. 사실 욥기를 대충 읽어만 보아도 완전히 낙담한 욥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대신 ‘왜 그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라는 바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부가설명>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이 활용했던 케케묵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고통과 악의 문제이다. ‘그토록 선하고, 사랑이 많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참모습을 맛보고 경험한 신자일지라도 한때 그 같은 의문과 씨름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는 사단의 술책이 엄청나게 성공하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소위 성경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사람들까지라고 사단의 깊은 속임수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생각에 걸리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사람의 실상을 먼저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성경은 아담의 후손인 이 지구의 사람들은 죽은 자들이라고 분명히 가르쳐준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15:22, 마8:21,22 참고) 그래서 만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롬8:21) 위에 지적한 오늘날 세상에 일어나는 문제는 죽은 자들의 썩어져가는 구습의 상태이다.(엡4:22) 그렇기 때문에 죽어서 썩어가는 사람들이 새 생명을 얻어서 살아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다. 이 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사랑이시고 가장 선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사망과 썩는 것을 폐하시고(딤후1:10)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 사람이 살아 있으면서 행하는 악과 고통과 재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사람들이 죽는 순간까지 썩어가면서 일으키는 문제들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에 말씀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망을 처리하고 썩는 것을 끝나게 하려고 대신 죽으시고 또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고, 증명하시고 예수를 믿어서 새 생명을 얻으라고 간곡히 호소하시는 것이다. 사랑이시고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하실 일이 무엇이 있는가?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겔18:32)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33:11)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겔16:6) 예수께서 대신 죽어주신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기는 재림교인도 마찬가지이고 교과저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가 성경의 대답을 여기 제시하지 못한 것을 보아 알만하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올바르게 깨닫고 성경을 올바르게 깨닫도록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올려야 할 것이다.
교훈 : 욥기는 성경 중에서 가장 오래 전에 기록된 책 중에 하나이다. 고통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은 일찍이 답을 주시고자 했다.
넷째 날(수) 10월 19일 딜레마 : 진퇴양난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욥 9:12).
1. 다음의 성경절들을 읽어 보라. 욥은 어떤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가? 그는 무엇을 묻지 않는가?(욥 6:4~8, 욥 9:1~12)
[욥6:4~8]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같이 여김이니라 8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욥9:1~12]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2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4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팍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6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 7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시며 8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9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10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답: 하나님을 믿는 욥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욥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푸념을 하나님께 하고 있다. 오늘날 일반적인 의구심과 같은 사상이다.
어제 교과에서 언급했다시피 욥기의 쟁점은 절대 하나님의 존재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왜 욥이 이러한 시련을 겪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에게 일어난 일들을 고려한다면 이는 분명히 정당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무신론자에게 시련이 닥친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해답은 그에게 상대적으로 간단명료할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상관하지 않는 무의미하고 목적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의 냉혹하며 차갑고 무정한 자연의 작용 속에서 종종 목적이 없는 시련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생명 자체가 목적이 없다면 그러한 생명에 수반되는 시련들도 그냥 무의미할 뿐이다.’
이 대답은 비록 만족스럽지 못하고 절망적일지라도, 하나님이 없다고 전제한다면 앞뒤가 맞는 말이다. 반면 욥과 같은 인물에게는 다른 딜레마가 있다.
2. 욥 10:8~12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욥이 씨름하고 있는 까다로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욥10:8~12]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 보내려 하시나이까 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것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1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답: 하나님이 지어주신 자기를 이렇게 고통으로 대하는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욥이 씨름하는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씨름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동일한 문제이다. 만약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인간이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왜 욥 같은 착한 사람들이 아무 가치 없어 보이는 재난과 시련을 겪어야 하는가?
만약 우주에 신이 없다면, 대답은 이런 식일 것이다. ‘즉 이것이 그냥 순수하게 물질적인 우주 속에서 산다는 의미이다. 그 속에서 인류는 단지 원자와 분자의 우연한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욥은 그보다 더 나은 답을 알고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딜레마이다.
<부가설명> 욥이 자기의 당면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오늘날 인류도 당면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욥이 만일 사단이 여호와 앞에 서서 한 사건을 보고 알았다면 자기의 당면한 고통의 문제를 이해했을는지 모른다. 아니 그랬다면 더욱더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단의 요청을 왜 들어주셨는지 엄청 억울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욥기를 기록하여 우리에게 준 것은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사건과 계시록 12장에 기록된 계시를 실제적 상황으로 우리가 알도록 하신 것이다. 이미 화요일 부가설명에서 말한 대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8,19) 결과로 감각 없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방탕과 방임으로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데 그것이 바로 썩어져가는 구습인 것이다.(엡4:22) 이것이 오늘날 모든 비극과 고통과 사건의 원인이다. 죽어서 썩어가는 자가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단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도록 함으로 엄청 성공하고 있으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와 이론을 들으면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생각하니까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교훈 :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고난은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왜 고난이 찾아오는지 묻게 된다.
다섯째 날(목) 10월 20일 신정론(神正論)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3:4).
1. 롬 3:1~4을 읽어 보라. 물론 이 말씀의 직접적인 문맥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불성실함이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려는 더 큰 문제는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롬3:1~4]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2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답: 하나님은 언제나 미쁘시다(신실하시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주장과 이론을 편다 해도 하나님은 미쁘시고 사람이 거짓된 것이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할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시 51:4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롬 3:4)실 것인지 말한다. 여기서 제시된 개념은 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주제인 ‘신정론’이다. 이것은 악을 대면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번 주 내내 살펴보고 있는 오래된 주제이다. 사실 대쟁투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신정론이다. 세상에는 악이 판을 치지만 하나님의 선하심이 인간, 천사 그리고 온 우주 앞에 증명될 것이다.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진리와 오류에 관련된 모든 문제는 이제 분명해졌다. 반역의 결과, 곧 하나님의 율법을 거역한 결과가 모든 지적 존재자의 눈앞에 분명해졌다. 하나님의 통치와 반대되는 사탄의 법칙이 실현된 결과가 무엇임이 온 우주에 공개되었다. 사탄 자신의 사업이 그를 정죄했다.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는 완전히 옹호되었다. 대쟁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취하신 처사가 오로지 당신의 백성들의 영원한 행복과 그분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 일임이 드러났다”(각 시대의 대쟁투, 670~671).
지금은 우리가 죄와 고통의 세상에 물들어 진실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것이 끝나면 인류와 사탄 그리고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의와 사랑과 공정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선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그것을 다루시며, 죄로 인한 끔찍한 경험이 끝날 때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부가설명> 이번 과의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은 언제나 바르고 옳고 사람이 그릇되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성경구절들만 늘어놓고 상태만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화요일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부가설명을 성경구절들과 함께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리려고 하신다. 사단인 뱀의 유혹으로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떠났다.(고후11:3) 스스로 돌아올 수 없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게 속해서 사망이 되었고 사망이 되었기 때문에 썩어져가는 구습인 죽은 행실만 나타낼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히2:14, 히6:1) 그런데 사단은 이런 사람들에게 도덕을 강조한다. 도덕적으로 선해지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도덕적으로 온전해도 고통을 당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의 마음에 속삭인다. 사람들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도덕적 선이 사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놓지 못한다. 그것은 죽은 사람에게 방부제치고 방취제 치고 향수뿌리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해놓고 그런 사람을 성인이라고 추겨 세운다. 그런 사람도 고통을 당하고 마침내 죽는다. 부활하지 못한다. 이미 그들에게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너무 선하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리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지 않게 만든다면 그 도덕적 선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장 강력하게 대적하는 사단의 도구가 된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속지 않아야 한다. 인류의 실제 상태를 정직하게 깨닫고 인정할 때 비로소 생명의 주님을 찾고 맞을 것이다.
교훈 : 신정론은 악의 존재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해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마침내 모든 문제를 그분의 자비와 공의의 성품에 따라 해결하실 것이다.
여섯째 날(금) 10월 2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기독교 작가이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는 아내의 죽음과 그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고뇌에 관하여 한 권의 책을 저술했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내 생각에) 내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단념할 위험은 크지 않았다. 진정한 위험은 그분에 대해 그와 같이 두려운 사실들을 믿게 될 위험이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결론은 ‘그래 결국 하나님은 없다.’가 아니라, ‘그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이야.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이다.”—A Grief Observed (San Francisco: Harper San Francisco, 1996), pp. 6, 7. 이것이 바로 욥이 씨름했던 문제이다. 이미 보았듯이 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가 고민했던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문제였다. 욥은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었다. 욥은 착한 사람이었다. 욥은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욥은 비극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수많은 사람이 묻는 동일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정말 어떤 분이신가?’ 바로 이것이 대쟁투의 문제 아닌가?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라 그분의 성품이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대쟁투의 해결과 관련되어 있지만 그 어느 것보다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엡 5:2)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창조주의 진정한 성품을 우주 앞에 증명하였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가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겪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앞서 보았듯이 그들은 고난 받는 신자들이 씨름하는 그 같은 문제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희망을 가지고 대답을 얻거나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모든 고통을 겪고 결국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비신자들이 생명을 경시하고 심지어 삶의 의미를 간과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삶의 허무를 찬미하는 세속적인 문학 작품이 널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믿음으로부터 희망을 찾아야 합니까?
※ 대쟁투는 도덕적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다. 생명과 사망의 싸움이다. 이 세상은 사망의 세력인 사단이 현재 주장하고 있다. 예수님은 생명을 주기 위하여 아담 대신 사망을 당하시므로 사망을 폐하시고 사망의 세력 잡은 마귀를 없이하시고(딤후1:10, 히2:14 개역판) 부활하려 생명의 능력을 드러내셨다. 이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다. 우리는 성경을 도덕교과서로 읽으면 안 된다. 그러면 우리는 보기 좋게 사단의 그물에 걸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사단의 그물에 걸려서 바벨론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신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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