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10/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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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10-08 07:05 조회9,095회 댓글0건본문
10월 15일 안식일
일몰 : 오후 5시 55분
기억절 :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욥 2:10).
연구 범위 : 욥 1~2장, 고전 4:9, 창 3:1~8, 빌 4:11~13, 마 4:1~11, 빌 2:5~8
욥기는 우리에게 아주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공개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벌어지는 대쟁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대쟁투는 우리의 길을 뒤흔들어서 간혹 우리를 당혹스럽고 질색하게 하며 심지어 공포로 몰아넣는 이 세상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의 관점의 틀을 제공한다. 욥기는 대쟁투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누군가의 투쟁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럴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 사탄이 땅과 바다로 내려왔다. 우리는 그가 크게 분노했음을 안다. 육신을 가진 우리 중에 그 분노를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계속하여 욥기 1~2장을 살펴보면서 이어지는 대쟁투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적응해야 할지를 더 분명하게 깨닫고자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욥이 경험한 대쟁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삶을 예표하는지 살펴본다.
➋ 느끼기 : 상황을 수용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욥의 신앙적인 반응을 이해한다.
➌ 행하기 : 비극과 고통을 다루는 욥의 진실함을 본받기로 결심한다.
A.
❷ 사탄은 욥의 신앙과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어떤 의문을 제기했습니까?
※ 하나님이 욥과 거래한다고 대들었다.
❸ 욥은 사탄의 문제 제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했습니까?
※ 지독한 파산과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순전함을 지켰다.
❹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순전한 마음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을까요?
※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섬기는 순전한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B.
❷ 욥은 어떻게 자신에게 베풀어진 복들이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까?
※ 사단의 공격으로.
❸ 시련을 대하는 욥의 태도는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반사합니까?
※ 사단의 공격에도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의 삶을 산 것으로.
❹ 힘든 일을 당하는 사람이 믿음으로 그 상황을 이길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 기도와 신앙적 격려를 통하여.
결론 : 욥이 대쟁투에 개입된 것은 신학적인 차원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이었습니다. 욥에게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는 강력한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의 신실함은 우리로 하여금 역경 중에도 용기를 얻게 합니다. 시험을 이기고 고난을 견디신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희망을 주십니다.
첫째 날(일) 10월 9일 하나님의 종, 욥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1:11).
1. 욥기 1장을 읽어 보라. 특히 욥에 대한 사탄의 고소를 주목하라. 사탄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그의 공격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사탄이 공격하려는 대상은 누구인가?
[욥1:(1~22), 6~11]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답: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하시기 때문에 욥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불공평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공격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다.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욥 1:10). 욥기의 서두에는 욥의 의로움과 훌륭한 성품뿐 아니라 그의 물질적 복과 풍요로운 가정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것들은 욥으로 하여금 동방에서 “가장 큰 훌륭한 자”(욥 1:3)로 존경을 받게 하는 요소였을 뿐 아니라 사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를 위해 이렇게 해 주시니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얼굴에 비난을 퍼붓게 하는 구실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것들을 욥에게서 거두시면, 그가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는 사탄의 힐난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것이 언제나 대쟁투의 쟁점이다. ‘하나님이 정말 훌륭하고 선하시다면, 욥은 그분의 사랑과 인정만으로도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경외하여 섬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위해 많은 것을 해 주셨다. 누가 이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사탄은 하나님이 욥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그를 매수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즉 그는 욥이 하나님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상에서 가장 역겹고 혐오스러운 통치자들에게 은혜를 받고 그에게 죽도록 충성하는 신하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만약 하나님이 정말 자상하고 사랑이 많으시며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면 욥은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그분을 여전히 섬길 것이었다. 그러나 욥이 믿음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탄의 주장은 욥이 그분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들 때문에 충성하고 있음을 암시하였다. 즉 사탄의 말에 따르면 욥의 충성심은 그것이 자신에게 훌륭한 거래가 될지 말지에 상당히 좌우된다는 뜻이었다.
<부가설명> 주고받는 것은 세상의 일상적 상식이고 상태이다. 그것을 거래라고 한다. 성경의 신앙은 거래가 아니다. 사단은 세상 사람들을 철저히 그런 사상으로 이끌었다. 온 세상은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주기만하고 받는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대단히 칭찬받을 사람으로 추켜세운다. 그렇게 하여 세상을 권선징악의 사상으로 물들이고 그런 종교를 양산(量産)했다. 모든 종교가 권선징악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교리로 채워져 있다. 욥기는 이런 사상으로 채워진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낸다. 사단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그런 하나님이라고 공격한다. 그것은 사단이 만들어놓은 사상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떠넘기며 공격한다. 사람들은 사단의 이런 술수에 말려들어가서 사단과 같은 사상으로 성경의 하나님을 생각하고 공격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런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심지어 예수를 믿는 종교도 이런 사상을 전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종교연합의 밑바탕을 잘 놓았다. 우리는 성경을 올바른 성경적 시각으로 살펴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요하고 바른 신앙이 필요하다. 욥기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는다면 복되지 않겠는가.
교훈 : 하나님이 주신 복 때문에 욥이 그분께 충성하는 것이니 그의 복을 거두면 하나님을 욕할 것이라는 사탄의 주장은 사실상 하나님에 대한 공격이었다.
둘째 날(월) 10월 10일 계속되는 쟁투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욥 2:1~3은 거의 욥 1:6~8의 반복이다. 그런데 욥 2:3 끝부분에 큰 변화가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욥에게 임한 재앙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음을 지킨다고 말씀하신다. 즉 욥 2:3까지는 사탄의 고소가 거짓으로 밝혀진 것처럼 보인다. 욥은 사탄의 주장과 달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고 그분을 저주하지 않았다.
1. 욥기 2장을 읽어 보라.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또한 욥기 1~2장에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담화를 지켜보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가?
[욥2:1~13]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4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6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7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11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칠 일, 칠 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답: 사단이 다시 여호와께 참소함으로 욥이 몸에 질병을 얻어 고통을 당하며 아내까지 그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런 투쟁을 하늘 거민들이 다 보고 있는 것은 이 투쟁이 우주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가죽으로 가죽을”이라는 표현은 주석가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다시 말해 욥의 몸에 직접 뭔가 일어나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충성심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욥의 몸과 건강을 파괴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우리에게 발생하는 일들은 공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욥기에서 공개된 것처럼 하늘에서 벌어지는 두 번의 대쟁투는 하늘의 지적 존재들과 하나님의 만남이 이뤄지는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 사탄은 ‘공개적으로’ 고소하였다. 즉 그는 하늘의 이 존재들 앞에서 이 일을 감행했다. 이런 장면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쟁투의 개념에 딱 들어맞는다. 대쟁투는 온 우주 앞에서 펼쳐지는 사건이다(고전 4:9, 단 7:10, 계 12:7~9).
“구속의 경륜에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광범위하고 깊은 목적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만을 위하여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오신 것은…온 우주 앞에 하나님의 품성을 옹호하시기 위해서였다”(부조와 선지자, 68).
<부가설명> 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소굴이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실제로 하나님을 공격하는 그런 전장(戰場)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사단과 싸우는 최전방 전투병이다. 전투를 하면 전사할 수도 있고 전상(戰傷)을 입을 수도 있다. 전사해도 부활의 소망이 있고 전상을 입어도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전능하신 의사이시다. 이것을 확신하고 전투에 임해야 한다. 전사하는 것을 순교라 하지 않는가. 전사하기까지는 않아도 날마다 상처를 입을 입는다.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한다. 누구든지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다. 그렇게 되면 수고가 그친다. 호흡이 끊어지는 죽음을 당할 수도 있지만 날마다 자아가 죽는 경험으로 이 전투를 이기게 될 것인데 승리는 예수께서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수혜(受惠)를 입는 사람들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인 사단과 그의 천사들인 악의 영들은 순간마다 성도들을 공격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후10:3,4)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실세에 대한 인식을 올바르게 하고 보이지 않는 능력이신 성령을 철저히 의지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기쁨을 누려야 할 것이다.
교훈 : 사탄은 욥이 첫 번째 시련에도 죄를 범하지 않자, 그의 몸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을 둘러싼 이러한 고소는 온 우주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뤄진다.
셋째 날(화) 10월 11일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리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사탄이 욥을 처음으로 공격하고 자신에게 임한 재앙의 소식을 들은 뒤에 그는 어떻게 반응했는가?(욥 1:20~22)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욥이 범죄하지 않고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욥1: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답: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의 처사에 대하여 찬송하고 원망하지 않았다. 욥의 신앙이 거래가 아니고 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임을 입증한다.
선택의 자유는 사랑에 기초한 하나님 정부의 핵심 가치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요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섬기기를 바라신다. “사탄은 욥이 이기적인 동기(로)…그분을 섬긴다고 빗대어 말했다. 참된 종교는 하나님의 성품을 사랑하고 지성적으로 인식할 때 생겨나며 참된 경배자는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 자체를 사랑하며 그들은 그러한 섬김 자체가 옳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단지 하늘에 영광이 충만하기 때문은 아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분이 자기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애정과 신임을 받으실 만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탄은 이런 사실들을 부인하고자 했다”(성경주석 5권, 639~640).
욥은 사탄의 비난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했다. 하나님은 일이 어떻게 전개되실지 아셨지만, 욥은 여전히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죄를 범할 수도,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욥의 선택을 강제하지 않으셨다. 상황을 고려해 볼 때에 욥의 변함없는 충실함은 사람과 천사들 앞에서 하나의 놀라운 증거였다.
2. 욥에게 있었던 일과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던 일을 비교해 보라(욥 1장, 창 3:1~8). 이러한 차이점은 그들의 죄가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답: 아담부부는 죄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세상에서 사단의 말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다. 욥은 죄의 세상이 된 후에 오히려 하나님 편에 굳게 섰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낙원에서 죄가 없는 상태였는데 사탄의 공격을 받고 범죄하여 타락하였다. 반면 욥은 사탄의 공격으로 말미암은 심각한 고통과 재앙과 파멸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다. 우리는 두 경우를 통해서 자유의지가 우리의 성패를 좌우하는 매우 중대한 문제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부가설명> 우리는 아담부부의 처지를 성경에 기록한 만큼밖에 아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쉽게 욥과 비교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록된 사실로 보면 욥이 더 강하게 하나님 앞에 순복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사단은 집요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한다. 사단은 가룟유다에게 예수 팔 생각을 넣어주었다.(요13:2) 그처럼 신자들에게 순간마다 예수를 팔 생각을 넣어준다. 가룟유다는 그 생각을 자기의 이기심으로 얼른 받아들였다. 우리는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의 믿음이 이기심에 근거한 거래인지 진정한 신앙인지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 우리가 잘 믿는 줄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 믿음이 이기심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막상 그 순간에 자기가 의지한 것은 자신감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진정으로 깊은 회개를 하고 진정한 제자가 되었다. 우리도 순간순간 나의 참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교훈 : 욥은 사탄의 비난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했다. 욥은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지만 자유의지로 믿음을 지켰다.
넷째 날(수) 10월 12일 욥의 아내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쯤 되면 욥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피해자 곧 그의 아내를 다룰 때가 된 것 같다. 그녀는 욥 2:9~10에만 나타난다. 그 후로 그녀는 이야기 그리고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녀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는 없다. 그러나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볼 때 이 불운한 여인이 겪은 비애를 누가 상상이나 해 보았겠는가? 욥기 1장에서 그의 자녀들과 종들에게 발생한 일로 말미암아 그녀가 겪는 비극은 고통의 보편성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가 대쟁투에 개입되어 있고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1. 욥 2:3과 2:9을 비교해 보라. 하나님과 욥의 부인은 모두 어떤 비슷한 구절을 사용했는가? 그들이 그 구절을 사용한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가?
[욥2: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2: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답: 순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실을 하나님이 지적하였고 욥의 아내는 이런 순전을 두고 욥을 핍박했다.
두 성경절에서 자신의 온전함을 굳게 지킨 욥에 대하여 동일한 구절을 사용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온전’이라고 번역된 말은 욥 1:1, 1:8에서 ‘흠이 없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동일한 말에서 유래했다. 그 말의 어근은 ‘완전함’과 ‘순전함’의 의미를 내포한다.
욥의 아내는 매우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칭찬하는 점을 가지고 욥을 비난하는 자가 되었다. 그녀는 너무나 슬프고 애석한 나머지 욥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욥에게 그렇게 하도록 압박했다. 우리는 분명히 그녀를 정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의 사례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다(눅 17:2 참고).
2. 욥 2:10을 읽어 보라. 욥은 그녀에게 어떤 놀라운 간증을 들려주었는가?(빌 4:11~13)
[욥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답: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 이것은 빌립보의 바울의 간증과 흡사하다.
욥은 믿음의 진실성을 증명했다. 그는 좋은 때나 나쁜 때나 하나님을 섬길 것이었다. 통쾌하게도 사탄은 이제 이야기 속에서 사라져서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성경에 아무 언급이 없지만 우리는 욥의 반응을 보고 사탄이 얼마나 분개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사탄이 얼마나 쉽게 아담과 하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렸는지 보라.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계 12:10)는 욥 대신 비난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다.
<부가설명> 욥의 신앙은 굳세었다. 아내가 옆에서 조롱해도 아내를 나무라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욥의 경우는 신자들이 이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사단의 개입으로 삽시간에 망하는 것 같은 경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런 경우에도 욥처럼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깨닫도록 한다. 그리스도인이 인내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아내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조롱하고 핍박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아야 한다. 욥의 아내가 다시는 적극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아내는 욥을 떠나지는 않았다. 욥은 아내가 자기의 숨을 싫어한다고 독백한다.(욥19:17) 욥이 회복되었을 때에 다시 열 남매를 낳는 수고도 했다. 이런 경험을 통하여 욥은 인내의 본과 회복의 본을 보여주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5:11) 그러나 이 결말은 표상적이다. 이것은 영원한 회복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욥은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 재림하실 때 완전히 회복되는 결말을 볼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교훈 : 고통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욥의 아내는 하나님이 욥에게 가졌던 기대와 정반대로 그분을 욕하고 죽으라는 절망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다섯째 날(목) 10월 13일 죽을 때까지 순종함
욥 1:22은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한다. 욥 2:10에서는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두 경우 모두 욥은 공격을 받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다. 두 성경절 모두 욥이 행동으로나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욥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가르친다.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요일 1:10). “온전하고 정직하여…악에서 떠”(욥 1:1)났다는 것은 그에게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욥도 죄 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했다.
그러나 욥은 그가 당한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켰다. 그런 의미에서 욥은 어렴풋이 예수님을 상징한다(제14과 참고). 그분은 끔찍한 시험과 유혹 중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죄에 빠지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 대한 사탄의 비난을 물리치셨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들이 욥이 한 일들보다 훨씬 크고 중요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비슷한 점들이 있다.
1. 마 4:1~11을 읽어 보라. 욥의 경험은 여기서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반사하고 있는가?
[마4:1~1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답: 마귀가 예수님을 직접 시험한 것처럼 사단이 여호와 앞에서 욥을 참소하고 욥을 직접 시험했다. 그러나 욥은 자기를 시험하는 사단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면하여 투쟁하셨다.
인성을 입고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신 그분의 육체는 음식을 드시지 못하여 연약해졌다. 그러나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은 마귀가 바라는 대로 행하지 않으셨다. 욥도 마찬가지였다. 욥이 믿음을 지켰을 때에 사탄은 그의 장면에서 사라졌다. 그와 같이 예수님이 사탄의 끈질긴 노력을 거부했을 때에 성경은 마귀가 그분을 떠났다고 기록한다(마 4:11; 약 4:7 참고).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십자가에서 진짜 시험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분에게 임한 모든 재앙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셨다.
<부가설명> 욥은 인내로 이 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증인이 되었다. 그가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증인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증인이다. 그들이 어떠한가에 따라 세상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된다.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할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욥의 순전하고 순종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세상을 향해 재림성도 아무개를 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셔서 진정한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살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로 그렇게 살도록 능력으로 이끌어주셔야 한다. 날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도록 살아야 한다.(롬8:2) 욥의 생애를 통하여 재림성도들이 그런 삶의 모본이 제시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재림하실 때 우리도 아름다운 결말을 볼 것이다.
교훈 : 욥의 경험은 마귀의 유혹을 거절하고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심으로 인류에게 구원의 소망을 선사하셨던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을 어렴풋이 반사한다.
여섯째 날(금) 10월 14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까지 철저하게 살펴보는 욥기 연구자들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욥의 아내가 그에게 던진 말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고 번역되었다. 욥 1:5에서는 욥이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걱정한다. 그리고 욥 1:11에서는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라고 번역되었다. 그런데 ‘욕’ 또는 ‘저주’라고 번역된 말들은 모두 ‘복’을 의미하는 한 단어에서 유래했다. ‘바라크’라는 어근을 가진 그 말은 성경 전체에서 ‘복’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창 1:22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복 주셨다고 하신 말씀에서도 동일한 어근이 사용되었다. 또 그 어근은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라고 했던 시 66:8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을 뜻하는 말이 어떤 구절에서는 ‘욕’이라고 번역되었는가? 만약 욥기에서 그 말이 ‘복’이라고 번역되었다면 앞뒤가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욥기의 저자는 ‘욕’을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학자들은 그것을 완곡한 표현법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님을 욕한다는 개념이 저자의 종교적인 감수성에 부담이 되었다는 것이다. (동일한 현상이 왕상 21:10, 13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욥기의 저자인 모세는 ‘욕’ 또는 ‘저주’가 명백한 상황에서 그 말 대신 ‘복’을 사용했던 것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기의 때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존재 또는 그분의 성품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쟁투가 벌어지고 있는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현실 속에서 왜 우리는 십자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까?
※ 이미 앞에 어디에서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은 전장(戰場)이고 그리스도인은 전투병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승리하셨다.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은 어떤 면으로든지 사단의 공격이다. 예수님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음으로 극복해야 한다.
➋ 욥은 우리처럼 이야기의 결말을 알지 못했고 큰 그림도 볼 수 없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왜 시련이 닥칠 때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큰 그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 우리 배후에 보이지 않는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대쟁투에 하나님 편에 참여한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배후에 예수님이 계시고 선한 천사들이 있음을 항상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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