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제3기 13과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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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진 작성일16-09-18 22:27 조회4,046회 댓글1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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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제3기 13과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교사가 명심할 주요 사항>
질문, 핵심, 적용
<핵심>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는 이타적인 모습을 통해서 바벨론에 속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쓴다.
*핵심어 : 이타적인
<토의 및 탐구를 위한 질문>
☆도입 : 당신에게 재림이란 무엇인가?
⇒
재림으로 이어지는 천국은 기다리는 자들의 권리이다. 그러나 재림의 의미가 무엇이든지, 권리에는 의무가 있다. 그것은 지금 이 땅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일~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모습
1. 마 24:36~25:46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로부터,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송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들은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보여주는가?
2. 벧후 3:11~12에서, 하나님의 날을 사모하는 자들의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이를 교과에 있는 다른 말로 한다면?
2-1. 부흥과 개혁은 영혼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는가?
화~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의 모습
3. 행함이 있는 믿음을 교회 차원에서 적용한다면?
4. 농사를 짓는 일에는 어떤 정신이 필요한가?
4-1. 농사를 짓는 일에는 몇 사람의 수고가 필요한가?(고전 3:6~8)
목. 기다림이 끝남
5. 새하늘과 새땅에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의 눈물을 씻겨주신다(계 21:4). 이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5-1. 나는 바밸론에 속한 누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가? 혹은 흘리겠는가?
<답을 위한 도움>
1. 「그들은 기다리며 서로에게 사랑과 관심과 존중을 나타내야 하고, 깨어 준비하며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위임 받은 자원을 배가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재능과 재물을 투자하며, 사랑의 하나님이 보여주신 진정한 성품을 흠모하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종은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때를 따라 일꾼들에게 양식을 나눠줬다. 이는 세상에 영적인 양식을 나눠줘야 한다는 것이다. 열 처녀 중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다. 그것은 성령에 의한 품성의 변화를 말한다. 달란트의 비유는 받은 재능을 활용하여 영혼을 구원하라는 것이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은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사랑을 실천한 자들을 말한다.
우리가 천국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변화된 품성과 우리가 구원한 영혼이다. 그런데 품성계발은 혼자 구원받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봉사할 때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참된 제자라면 주님 오시는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대신, 온 세상에 천국복음을 전파하며 봉사하기를 즐겨할 것이다.
2. 거룩한 행실=경건함⇒부흥과 개혁
2-1. 「부흥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이타적인 관심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열정적으로 선교와 봉사에 투철한 제자로 개혁될 것이다.」
경건이란 엄숙하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같은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약 1:27), 곧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지극히 작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위에 부흥과 개혁이 필요하다. 이것들이 이번 기 교과의 초점이다.」
예컨대 경건이란 자기 중심에서 타인 중심으로 관심이 바뀌는 것이다.
3.「일요일 교과에서 제자들은 성전 건물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그러나 예수님
은 그들의 관심을 교회의 내부 상태와 종말로 치닫는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
으로 이끌기 원하셨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사명이 있기 때문이지 다른 것 때
문이 아니다.」
마 24장에서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고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말씀하셨다. 왜인가? 이는 유대인들이 종교적 열성은 있었지만, 정작 종교의 핵심인 자비의 실천에는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제자는 자기만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함으로 그들도 믿고 함께 재림을 준비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마 24~25장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는 「지역 사회의 전인적인 회복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전인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단지 교리적인 차원에서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는 육체적, 사회적 필요를 채워주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는 말이다.
안식일 준수의 바른 정신도 자선사업의 실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회복의 사명 - “나는 참된 선교사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이사야 58장의 기별을 깊이 생각하라고 더 이상 강조할 수 없을 정도로 강조하는 바이다. 이 장에서 명령한 자선 사업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이 시대에 행하도록 요구하시는 사업이다.… 안식일의 준수는 인류에게
하나님의 도덕적 형상을 회복시켜 주는 사업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시대에 추진해야 할 봉사 사업이다”(증언보감 2권, 503).」
4.「알다시피 농업은 일회적인 행사가 아니라 인내의 과정이다... 우리는 토양을 준비하고, 씨를 심으며, 수확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우리가 주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을지에 관하여 성령의 지도와 하나님의 섭리에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영혼구원은 기도했다고 단 시간에 이루어지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영혼의 수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실망과 장애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다만 상대방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을 다할 뿐이다.
4-1. 혼자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개는 여러 사람이 협력해서 농사를 짓는다. 어떤 사람은 밭을 갈고,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고, 어떤 사람은 가꾸고, 어떤 사람은 수확을 한다.
영혼구원사업도 한 사람의 일이 아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 영혼을 교회에 많이 데리고 와서 침례를 받게했다고 그 사람만 수고했다고 할 수 없다.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다른 교인들의 관심과 사랑과 돌봄, 양육과정 등 각자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영혼구원은 교회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5. 첫째는 회개의 눈물이다. 죄를 애통하며 흘렸던 수많은 눈물을 주님이 닦아주신다. 다시는 죄가 그를 유혹하지 못한다. 둘째는 의를 위한 눈물이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말씀대로 살기 위해 투쟁하며 흘린 눈물이다. 셋째는 영혼구원을 위해 흘린 눈물이다. 멸망할 바벨론에 속한, 지극히 작은 영혼들을 보고 흘린 긍휼과 사랑의 눈물이다. 이 눈물이야말로 가장 값진 눈물이다. 주님은 이런 눈물을 흘린 자들을 위로해주실 것이다.
새예루살렘에는 회개의 눈물과 의를 위한 눈물만 가지고는 갈 수 없다. 반드시 영혼구원을 위한 눈물이 있어야 한다. 바벨론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눈물로 기도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다. 참된 회개의 눈물은 반드시 영혼구원을 위한 눈물을 가져온다. 참된 종교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생명을 받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도시(새 예루살렘)는 어린 양을 신랑으로 선택하고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의 이기심과 영적 간음을 거부한 자들이 사는 곳이다. 속량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믿음을 반사한다(계 14:12). 그들의 인내심과 예수님의 사역을 수용하려는 열의는 지상에서 천국의 맛을 제공한다. ‘지극히 작은 자들’(마 25:40)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구원하는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다.」
<적용, 결심>
☆이번 기 교과를 통해서 어떤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는가?
댓글목록
이광진님의 댓글
이광진 작성일
영혼구원이 합작품이라는 사례-
어느 교회에 '영혼구원챔피언' 집사가 봉사자로 오셨다.
그런데 그분은 가는 교회마다 영혼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그분이 떠난 뒤에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교회는 그 집사가 떠난 십여년 뒤에까지
여전히 많은 영혼들이 오랫동안 남아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교회들은 그 집사에게 영혼구원사업을 전적으로 맡겨버렸다.
그러나 이 교회는 한 장로가 계속 함께 동행하며 그들과 사귀었다.
그러므로 그 집사가 떠난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과 친밀한 교인들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계속 나오는 것이 즐거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