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그릇 교과묵상] 제 8과 예수님은 동정을 보이셨다(8월 19일 교과묵상/일~금 매일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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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진 작성일16-08-14 09:49 조회3,031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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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9일(금) 8과 전체 요약 / 예수님은 동정을 보이셨다
이번 주 교과는 사람들 곁에서 때로는 눈물 흘리시며, 그들을 위로하심으로 그들에게 접근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활한 우주에서 한 개인은 매우 작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은 이러한 우리의 신음을 듣고 뜻을 돌이키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영원한 자비로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소개합니다. 폭염 속에서 울부짖던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물을 허락하신 것도, 노예 생활 속에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의 신음에 구원자 모세로 응답하신 것도, 인간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힘없는 이들의 외침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지극히 작은 자의 어떠한 재난도, 어떠한 기도도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우주 한 쪽에 방치된 가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큰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보시는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과 ‘긍휼’의 정신으로, 고쳐주심을 바라며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순간적인 ‘동정’의 감정만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실제적인 행동으로 그들을 도우셨던 것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안타깝고 비극적인 상황들에 대해, 우리는 순간적인 동정과 관심을 갖다가도 금새 잊어버리는 일을 반복합니다. 소외된 이들의 불행은 이러한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일도 허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불행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을 가짐과 동시에, 이러한 관심을 구체적인 ‘긍휼의 행동’으로 옮기길 바라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동정’이 행동으로 옮겨질 때에만,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위로’라는 영향력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형제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자신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본 두 사람과 강도만난 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본 사마리아인을 대조하면서 진정한 긍휼은 상대의 편에 서서 상황을 바라볼 때 생겨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베푼 아버지와, 이 사실에 대해 불평을 쏟아낸 탕자의 형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도 이러한 시선 차이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긍휼’은 이처럼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공감’을 바탕으로,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를 회복하려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정신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받아들이신 이유이며,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주님께서는 ‘비통함’과 ‘불쌍함’으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단지 인간적으로 정을 나눈 나사로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 놓인 인류의 슬픔의 짐이 주님을 짓눌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은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을 보시며 흘리신, 나를 위한 눈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슬픔의 단편만을 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슬픔을 보고 계십니다. 주님의 눈이 항상 젖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눈물에 우리가 동참하길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라면, 내 곁에서 일어나는 아픔과 슬픔만으로도 울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위로’라는 말의 영어 단어는 ‘자신의 힘을 이용해 다른 사람에게 힘을 주는 행위’라는 뜻에서 유래되었고, 그 헬라어 표현이 ‘곁으로 부르다’라는 뜻과 ‘보혜사’라는 표현의 기원인 것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위로는 곁에 계시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며, 그 위로의 힘으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세상을 위로하는 자들로서의 우리의 사명임을 알게 됩니다. 성경 또한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심으로, 그 위로를 통해, 우리 또한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신자들의 존재로 인해 ‘도피성’의 역할을 해야 하며, 지역사회를 위해 치료의 강물을 흘려보내야 할 근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를 동정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입장에 서서,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며, 십자가라는 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우리를 치유하시기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러한 큰 위로를 경험한 자들로서 그 힘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 ‘위로의 사역’을 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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