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과 예수님은 동정을 보이셨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8/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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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8-13 08:00 조회7,734회 댓글0건본문
8월 20일 안식일
일몰 : 오후 7시 18분
기억절 :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4).
연구 범위 : 왕하 13:23, 출 2:23~25, 눅 7:11~16, 요일 3:17, 요 11:35, 롬 12:15, 고후 1:3~4
이보다 더 비극적 일 수는 없었다. 17세의 소녀가 그 나이의 소녀들이 으레 하는 고민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부모들의 심경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교회 담임목사가 그 가정을 방문했다. 그는 그들 곁에 앉았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단지 그들의 슬픔에 동참할 뿐이었다. 그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자리를 떴다.
나중에 그 아버지는 목사에게 그때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그때 그들에게는 어떤 말도, 어떤 약속도, 어떤 권면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 그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꾸미지 않은 동정이었다.
그는 목사에게 "목사님의 동정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동정'이란 말은 '연민을 느끼다'라는 의미이며 '연민'은 측은함, 애처로움 또는 슬픔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깊이 있는 방식으로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동정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들과 섞이는 문제를 아주 새로운 차원의 문제로 발전시킨다. 동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접근하셨던 또 다른 중요한 방법이었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다른 사람에게 동정을 보이는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곤경에 빠진 자들에게 이타적인 친절과 동정을 보임으로 보람을 느낀다.
➌ 행하기 : 실질적인 단계를 통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그리스도의 동정과 사랑을 나타낸다.
A.
❷ 예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시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를 들어 보십시오.
※ 그들의 상태를 받아들이시고 도움을 베푸셨다.(나인성 과부의 아들, 야이로의 딸, 많은 환자들을 고치심 등등 많다.)
❸ 진정한 동정과 긍휼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들의 처지에 서는 것이다. 체휼하는 것이다.
❹ 이웃의 불행에 실질적인 동정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 소그룹이 함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서 채워주려고 하는 정신으로 대하는 것이다.
B.
❷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탕자의 비유는 진정한 긍휼을 어떻게 묘사합니까?
※ 내가 도우면 내게 무슨 일이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우지 않으면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다.
❸ 예수님이 세상 모든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 우리의 고통에도 공감하시고 우리도 같은 공감을 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❹ 지금 주변에 슬픔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힘을 주는 위로를 전할 수 있을까요?
※ 조용히 그를 위해 기도하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결론 : 이 세상은 지치고, 외롭고, 절망에 빠진 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때로 동정하는 마 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 사역을 통해 다정하고 친절하게 백성들의 요구를 경청하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동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날(일) 8월 14일 신음하는 소리를 들음
우주는 매우 무시무시한 공간처럼 보인다. 너무 광활하고 차갑고 거대하다 보니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스스로 보잘것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런 공포감은 근대 과학이 도래하면서 더 확대되었다. 천체망원경을 통해 우리는 우주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크고 광활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진화론의 과장된 주장은 창조주의 개념을 부인하고 있는 터라 사람들은 우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절망감으로 씨름한다.
물론 성경은 세상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해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1. 우리는 다음 성경절들에서 타락하고 훼손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삿 2:16~18] "...그들이...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거늘"
[왕하 13:23] "여호와께서...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사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고..."
[사 54:7~8, 10]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답: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이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대하신다.
일반적으로 구약성경의 하나님은 신약성경이 묘사하는 예수님의 모습에 비해 엄격하며, 심술궂고, 용서하지 않으며, 냉정하다는 견해가 흔하다. 그러나 구약 성경도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긍휼을 자주 계시한다. 위의 말씀들은 그러한 구약 성경절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2. 출 2:23~25에 따르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출2:23~25]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답: 관심을 기울이시고 선한 조치를 취하신다.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신다(약 5:11).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런 주제를 볼 수 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된 세상에 생명의 빛을 비추시고 사망해서 부패하고 심히 마른 해골 같이 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서 창조주 안에서 영원한 행복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의 동정은 단순히 세상적으로 소외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하시는 동정이 아니었다. 아담의 후손이 된 사람들이 생명의 빛을 거절한 상태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서 따뜻하게 하고 빛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하려는 동정이었다. 바울은 내게 있는 것을 다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다. 사람이 보기에는 가장 지극한 사랑인데 그렇게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했으니 성경의 사랑과 동정과 구제는 그 정신과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님의 사랑과 동정은 유익이 있는 사랑과 동정이었다. 그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사랑이다. 이것만이 진짜 사랑이고 예수님의 사랑이고 교회가 세상에 베풀어야 하는 사랑이다. 진정으로 유익한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세상은 절망과 신음의 소리로 가득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고통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시며 절대로 모른 체 하지 않으신다.
둘째 날(월) 8월 15일 동정심이 많으신 우리 구주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눅 7:13~14).
예수님이 지상 봉사 기간 동안 백성들과 섞이셨을 때에 그분은 그들에게 동정과 긍휼을 보여야 했던 상황과 마주하곤 하셨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마 14:14).
1. 마 9:35~36과 눅 7:11~16을 읽어 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진실한 동정과 긍휼이 증명되는 과정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마9:35,36]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눅7:11~16]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답: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일에 동정을 나타내셨다. 그분의 동정은 생명을 주는 것이 결론이었다. 죽은 자를 살려주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있겠는가.
동정이라는 말은 공감과 연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러 사전에 따르면 긍휼은 연민, 동정, 공감이다. 연민은 어떤 사람의 고통에 대한 동정어린 슬픔이다. 공감은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함께 나누는 능력이다.
긍휼과 동정은 타인이 겪는 고통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을 경감시키며 치유하고 싶은 바람을 나타낸다.
그대의 지역 주민들에게 일어난 화재나 사망과 같은 불행에 대하여 들을 때에 그대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참 안 됐군!'이라고 중얼거리며 그냥 넘어가는가? 아니면 동정심이 생기고 긍휼의 마음에 이끌리는가? 진정한 동정심은 친구뿐 아니라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실질적인 방법으로 위로하고 적극적으로 돕도록 그대를 이끌 것이다. 위로의 엽서를 보내고 당사자를 방문하여 눈앞의 필요를 돌봄으로 더 깊은 동정을 보이는 등의 실질적인 사랑의 행위야말로 밝히 드러나는 진정한 동정의 결과이다.
사람들과 구호단체들은 큰 재난에는 뜨겁게 반응한다. 반면 상대적으로 '작은' 불행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는 재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예수님은 동정을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음 단계, 즉 긍휼의 행동으로 나아가셨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 슬픔과 동정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그 동정심이 우리로 하여금 무슨 행동을 취하게 하느냐?'이다.
<부가설명> 구호단체들이나 공공기관들은 큰 재난을 돕고 해결하는 데는 관심을 나타낸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고민하고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관심을 나타내지 못한다. 교회는 지역에 이런 사람들을 알아서 동정과 긍휼을 나타낸다면 예수께서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도와주신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은 생명을 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지라도 그것을 은근히 젖어들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정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상대에게 생색내는 것으로 비치는 것은 동정을 거절하게 하는 태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교회의 목적과 진정한 기능에 전혀 반응하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봉사해야 할 것이다. 결론은 성령께서 담당하시는 것이다.
교훈 : 진정한 긍휼과 동정은 고통을 겪는 자들의 아픔에 공감할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셋째 날(화) 8월 16일 그들의 입장에 섬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벧전 3:8).
1. 골 3:12, 벧전 3:8, 요일 3:17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들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동정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가?
[골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벧전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요일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답: 동정의 대상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긍휼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 'compassion(컴패션)'은 '(고통을) 함께 겪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compati(콤파티)'에서 유래했다. 우리 스스로도 고통을 겪어봤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우리도 고통 중에서 긍휼과 동정을 바라는 것처럼 곤궁한 처지에 있는 타인에게 기꺼이 긍휼과 동정을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이전 과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보았다. 그 사마리아인의 모본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눅 10:33)겼다고 말씀하셨다. 연민과 긍휼의 마음이 그 사마리아 여행자로 하여금 상처를 입은 피해자를 위해 행동하도록 몰아갔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내가 이 사람을 도우면 내게 무슨 일이 생길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은 "내가 이 사람을 돕지 않으면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라고 자신에게 물었을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의 관점에서 행동했다. 그는 낯선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안전과 물질의 손실을 양보했다. 즉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때로 위험을 감수하고 잠재적으로는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일 수 있다.
탕자의 비유를 이런 관점으로 보라(눅 15:20~32). 탕자의 아버지는 비난과 갈등의 소지가 있는 어떤 일을 했는가? 긍휼의 포옹, 소속감의 겉옷, 신뢰의 반지, 자유의 신발 그리고 잔치로의 초청은 탕자의 회복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할 마음이 있는 아버지의 이타적인 기쁨을 반영한다.
방탕하다는 것은 낭비하고, 무모하며, 사치스럽고, 절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표현들은 이야기 속의 아들의 행적과 분명히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모든 체면을 버리고 거지 행색의 아들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푼다. 큰아들의 눈에 아버지는 낭비가 심하고 사치스러우며 절제하지 않는다. 회개한 아들의 눈에도 아버지가 방탕해 보였다. 아버지의 긍휼의 마음이 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을 쏟아 붓도록 부추긴다. 이런 수준의 동정과 긍휼은 자아를 내던진다. 어떤 사람의 고통을 함께 겪고 그를 회복의 차원으로 옮기고자 노력할 때에 우리도 무엇엔가에 취약해질 위험성이 있다. 간추리자면 진정한 긍휼과 동정은 대가를 동반한다.
<부가설명> 긍휼이라는 영어가 라틴어에서 왔다고 설명하면서 뜻이 ‘함께 고통을 겪다.’라고 설명했다. 헬라어로 ‘스팔랑크논’이라고 썼는데 이것은 ‘내장, 심장’을 뜻하는 말에서 왔다. ‘너무 불쌍해서 내 가슴이 아프다’라는 표현을 하는 경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성경에 이런 상태를 ‘체휼’이라고 번역했다. 체휼이라는 말은 ‘쉼파데스’인데 히브리서 4:15과 벧전 3:8에 체휼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냥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체험하는 상태로 불쌍히 여기는 것을 뜻한다. ‘쉼파데스’에서 나온 영어가 ‘sympathy'이다. 이것은 동정, 조화, 일치, 교감 등 여러 뜻이 있다. 이 말은 단순히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것은 같이 아픔을 느끼는 상태로 동정하는 것을 나타낸다. 체험적 동정이라고 하면 체휼이라는 말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일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그렇게 체험하셨다. 십자가에서 사망을 당하심으로 아담 안에서 사망이 된 사람들의 상태를 체휼하신 것이다. 이런 심정으로 십자가를 지기 전에 사람들을 만나시고 동정하시고 치료하시고 생명을 회복해 주셨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체휼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참 어렵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에 체휼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하고 성령께서 이끄시면 감당할 수 있다.
교훈 : 우리는 타인의 관점에서 행동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그를 긍휼히 여길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긍휼은 희생과 대가, 때로는 낭비를 감수한다.
넷째 날(수) 8월 17일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심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1.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분이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셨는지에 대해서 무엇을 알게 되는가?(롬 12:15 참고)
[롬12: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답: 타인의 고통에 친히 동참하신 사실을 알 수 있다.
요 11:35을 보면 예수님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공감과 연민을 나타내셨다. 물론 그분은 이제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실 것이었다. 그런데 그분과 가까웠던 한 가족의 슬픔이 그분의 신체와 감정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예수님이 사랑하는 친구의 죽음 때문에 우신 것만은 아니었다. 그분은 더 큰 그림, 즉 죄가 빚은 온 인류의 고통을 보셨다.
"무거운 각 시대의 모든 슬픔의 짐이 그의 위에 놓였다. 그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했을 때의 무서운 결과를 보셨다. 예수께서는 아벨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세상 역사에 선과 악의 투쟁이 끊임없이 지속되어 왔음을 보셨다.... 그는 고통과 슬픔, 눈물과 죽음이 사람들의 운명임을 보셨다. 각 시대와 각 나라에 사는 인간 가족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하였다. 죄 많은 인간의 재난은 예수의 심령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가 그들의 모든 고통을 덜어 주시려고 하실 때에 그의 눈물의 샘이 터졌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534).
예수님이 아무도 겪어 보지 못한 방법으로 "각 시대와 각 나라에 사는 인간 가족들의 고통"을보셨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람 또는 우리와 가까운 이들이 겪는 고통을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신문에도 타인이 겪는 고통의 소식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신다. 그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인류의 모든 고통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다. 하나님만이 인류의 저주와 슬픔의 규모를 아신다. 때로 우리는 큰 슬픔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주님이 보신 슬픔의 희미한 모습에 불과하다. 그럴 때마다 무엇이 주님의 마음을 휘저었을지 생각해 보라.
구세군의 설립자, 윌리엄 부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그 도시를 위해 울 수 없다면, 우리는 그대와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Roger S. Greenway and Timothy M. Monsma, Cities : Missions' New Frontier (Grand Rapids, Mich.: Baker Pub. Group, 2000), p. 246.
2. 이 말이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답: 이 말은 비록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말이 아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 대한 말이다.
<부가설명> 우리가 사망의 진정한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과 같은 체휼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만이 아니다. 진정한 생명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진정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다 체휼의 대상들이다. 굳이 생활현장에서 가난하고 병들도 고통 받는 사람들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수님과 성경의 생명의 복음을 모르는 모든 사람이 다 체휼의 대상이다. 나환자촌이나 기타 빈민촌 등등에서 그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헌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정말 그들은 자아를 희생하며 예수님의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갸륵한 일이다. 영원을 생각하면 봉사하는 사람들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멀쩡한 육신을 가지고 정신도 온전하고 일상생활에 바쁘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보다 더 행복한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들은 병들고 가난하기 때문에 복음의 용사들이 투신하여 돌보고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고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희생적으로 최선을 다하지만 건강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에게 그렇게 헌신하여 돌보는 사람들이 없지 않는가. 그들은 건강하고 평안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복음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여 생명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영생을 잃어버린다면, 병들고 가난한 중에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희생적인 복음전도자들의 봉사로 영생을 받은 사람보다 훨씬 불쌍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 특별한 경우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택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맡기지만 일상적인 사람들에게 희생적 봉사를 하는 것은 교회가 담당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쉽지 않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체휼하는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반응을 하지만 일상적이고 생활을 그런대로 유지하는 사람들은 체휼하는 사람들에게 기쁘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훨씬 더 어려운 상대인 것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인류가 겪는 모든 고통과 슬픔의 무게를 아신다. 그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차원에서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시며 눈물을 흘리신다.
다섯째 날(목) 8월 18일 또 다른 종류의 위로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1. 바울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경험을 통해서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가? 그대는 이 말씀을 그대의 삶에서 어떻게 경험해 보았는가?
답: 우리도 세상에서 고통을 당한다. 이런 체험을 통하여 체휼할 수 있는 마음과 자격을 가진다고 가르친다. 경험 문제는 각자가 대답해보자.
위로라는 뜻의 영어 단어 'comfort(컴포트)'는 '함께'라는 뜻의 라틴어 'com(콤)'과 '강하다'라는 뜻의 'fortis(포르티스)'에서 유래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러한 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슬픔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는 고통을 당하는 신자와 위로를 주는 신자들이 함께 있다. 이러한 조합은 그대의 교회를 '안전한 집'에서 '도피성'으로 그리고 지역사회로 넘쳐흐르는 치료의 강물로 변화시킨다(민 35장, 겔 47:1~12 참고).
공감과 위로를 나타내는 것은 일종의 기술이다. 다음의 제안을 참고하라.
(1) 진실하게 하라. 말하기보다 들으라. 그대의 몸짓이 공감하고 위로하려는 그대의 노력을 강화시킴을 잊지 말라. (2) 그대의 개성에 맞는 공감을 드러내라. 어떤 사람은 곤란을 겪은 사람과 조용히 함께 울어줌으로 공감을 표시한다. 반면 어떤 사람은 유족들에게 위로가 될 일들을 계획함으로 공감을 표시할 수 있다. (3) 말이나 행동보다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4)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방식대로 애도하도록 하라. (5)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슬픔의 단계를 알아두라. (6) "당신의 마음을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대가 모를 가능성이 많다. (7) 전문적인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다. (8) 정말 기도할 생각이 아니라면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말라. 가능할 때에 충분한 시간을 들여 방문하고 함께 기도하며 용기가 되는 성경의 약속을 함께 읽으라. (9) 가능하면 교회나 지역 사회 내에 지원그룹들을 조직하라.
<부가설명> 다윗은 “4:1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시4:1) 다윗은 곤란을 당하면서 너그럽게 되는 인격을 형성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 되었다고 감사한다. 그가 고난당하기 전에는 이런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 같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우리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그것이 믿음을 더 성숙시키는 경험이 되도록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시켜야 할 것이다. 원망은 멀리 버리고 감사와 순복으로 현재를 하늘을 향한 디딤돌로 삼을 수 있는 지혜와 인내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당한 고난의 경험으로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체휼할 수 있게 되도록 예수께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 위로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받은 사람들은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눌 수 있다.
교훈 : 위로는 힘을 주는 것이다. 주님의 위로를 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그것은 말보다 진실한 마음과 행동으로 할 때에 더욱 효과적이다.
여섯째 날(금) 8월 1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신 24:10~22, 욘 3장, 말 3:17, 마 15:32~38, 막 6:34~44, 갈 6:2, 히 10:32~34을 읽어 보라. <정로의 계단>, 100 "기도의 특권", <구호봉사>, 4~5장 "순수한 종교"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어 보라.
몇 가정들이 명절에 모여서 어린 자녀들과 함께 그 도시의 수많은 노숙자들에게 나눠줄 음식과 세면도구가 담긴 선물꾸러미를 만들었다. 몇 시간 뒤에 그들은 차를 타고 도심으로 향했다. 그리고 약 삼십 분 안에 선물을 모두 나눠주었다. 그리고 박물관을 관람한 후 함께 외식을 했다. 그들이 주차장으로 갈 때에 누군가 말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이 기뻐요.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음식을 받은 분들이 대부분 다시 배고파지지 않았을까요?" 그렇다. 위로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겁이 난다. 그래서 이런 생각에 이를 수도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만약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무도 누군가를 도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모든 사람이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해지지 않을 것이다. 둘째, 성경은 인간의 고통과 아픔과 죄악이 하늘 아래에서 제거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정반대로 말한다. 심지어 예수님이 계셨을 때에도 인간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고 동정을 표시해야 한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그대의 교회는 어떻게 마음이 상한 자들을 위한 안전한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을까요?
※ 교회가 잘 의논하여 이 문제를 신충하게 계획해야 한다. 교회는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는 거룩한 장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을 복음으로 살리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개방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➋ “많은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행동하시지 않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왜 수많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의 문제에 상관하지 않는지 의아해하신다.”‐Dwight Nelson, Pursuing the Passion of Jesus (Nampa, Idaho: 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 2005). 이 인용문을 가지고 교 과반에서 토의해 보십시오. 그대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합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행동을 해야 한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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