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예수님은 사람들과 섞이셨다(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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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7-30 06:11 조회7,353회 댓글0건본문
8월 6일 안식일
일몰 : 오후 7시 35분
기억절 :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
연구 범위 : 마 1:22~23, 요 1:14, 눅 15:3~24, 마 9:10~13, 시 51:17, 요일 2:16, 빌 2:13~15
어느 지역교회 집사는 한 달에 한 번씩 청년들을 데리고 한 양로원을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다. 첫째 주에 청년들이 예배를 진행하는 동안 휠체어를 탄 한 노인은 그 집사의 손을 잡고 예배 시간 내내 놓지 않았다. 그런 일은 매달 반복되었다. 한 번은 청년들 이 도착했을 때에 그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양로원 직원은 그 노인이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집사는 그 노인의 방을 찾아갔다. 그는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 그 집사는 노인의 손을 붙잡고 주께서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기도드렸다. 노인은 의식이 없었지만 그의 손을 꽉 잡는 것 같았다. 그 집사는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고 확신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방안을 둘러 본 그는 한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제 아버지세요. 선생님을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씩 예수님이 오셔서 내 손을 잡아 주셨단다. 죽기 전에 꼭 그분의 손을 한 번 더 잡았으면 좋겠구나!'라고 말씀하셨어요."― The Least of These, a video produced by Old Fashioned Pictures (2004)에서 인용함.
기독교 신앙은 누군가에게 '예수'가 되어 주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몇 주 동안 예수님의 사역 방법과 교회가 그것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지역과 분리되어 고립된 영적 거품 속에 살아서는 안 됨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비신자들과의 교제에 참여하기를 갈망한다.
➌ 행하기 : 배타적인 교제의 벽 밖으로 나가서 비신자들과 사귀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다.
A.
❷ 예수님은 왜 비난을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죄인들과 어울리셨습니까?
※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❸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 어떤 생각과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요?
※ 긍휼히 여기는 정신과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❹ 그대는 교회가 아닌 밖에서 비신자와 사귀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떤 노력을 하겠습니까?
※ 각자가 대답해보자.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면 어떨까?
B.
❷ 예수님이 죄악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을 구원하셨던 성공적인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 동정하는 마음으로 그들과 섞이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기 때문이다.
❸ 예수님이 죄인들과 사귀기 위해서 선택하신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동정하는 마음으로 함께 먹고 사귀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❹ 우리 교회가 지역 사회에 접촉하고 그들과 교류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각 교회와 교인들이 연구할 문제이다.
결론 : 교회 안에서 신자들과의 교제에 만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경고 신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가족과의 사귐도 누려야 하지만 비신자들과 사귀어야 할 사명도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 방법을 실천하는 첫 번째 필수적인 단계입니다.
첫째 날(일) 7월 31일 그리스도의 방법만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 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자주 인용되는 엘렌 G. 화잇의 글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사람에게 다가가 그들을 구원으로 인도하셨는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마 9:35~36 참고). "오직 그리스도의 방법을 사용함으로써만 사람들을 접촉할 때 참 성공을 거둘 것이다. 구주께서는 사람들의 유익을 소원하는 분으로서 그들과 섞이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에 대한 당신의 동정심을 보여 주시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봉사하시고, 그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그 후에 그분께서는 '나를 따라 오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다"(치료봉사, 143).
우리는 위의 글을 이렇게 분석할 수 있다.
1단계. 예수님은 그들의 유익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섞이셨다. (그는 관계망을 형성하셨다.) 2단계. 그분은 사람들을 동정하셨다. (그분은 친밀감을 형성하셨다.) 3단계. 예수님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봉사하셨다. (다시 친밀감을 형성하셨다.) 4단계. 1단계, 2단계, 3단계 요소들을 갖추셨을 때 그분은 사람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5단계. 그다음에 "나를 따라오라(제자가 돼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전인적인 형태의 복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역 방식을 통해서 복음을 더욱 온전하게 선포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라는 초청(5단계)을 사회적인 측면(1~4단계)과 분리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우리도 그것들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과정들이 협력할 때 '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이번 과는 예수님의 방식의 첫 단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제7~11과는 다음 단계들을 다룰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하여 심각한 상처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전인적인 사역을 통해 인류와 화목하신다. 그리고 죄 때문에 잘못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화목 안에서 다루어진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섞이시며 각인의 전인적인 행복뿐 아니라 전 인류의 유익을 바라셨다. 그리고 심지어 그 사회 속에 사는 '가장 가능성이 없는' 자들에게도 봉사하셨다.
1. 다음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와 섞이시는 아들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는가?(마 1:22~23, 요 1:14)
[마1:22,23]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답: 하나님께서 신성에서 인성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사람들과 함께 섞이셨다.
<부가설명> 예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며 봉사하셨다. 그는 소외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봉사하셨다. 예수께서는 전인적이셨기 때문에 이렇게 전인적인 봉사를 하실 수 있으셨다. 그런데 교인 개개인은 예수님처럼 전인적이 아니다. 전인적인 봉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할 수 있다. 그런 봉사를 위하여 은사를 주셨다. 교인들에게 주신 은사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전인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교인들이 자기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가 무엇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 은사를 교회 사업을 위하여 협력하여 활용해야 한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롬12:3~9) 이렇게 하여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예수께서 하신 것같이 전인적 봉사로 섞일 수 있는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의 방법만이 참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그분은 사람들과 섞여 그들의 필요에 따라 섬기셨고 그들의 신임을 얻은 뒤에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셨다.
둘째 날(월) 8월 1일 잃었다가 다시 찾은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예수님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 15:2)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으로 세 개의 비유를 제시하신다.
1. 다음의 성경절을 읽고 비난에 대해 예수님이 주신 답변의 진의를 파악해 보라.
1)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3~7).
2)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8~10).
3)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11~24).
답: 예수님의 사명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고 하늘 잔치로 즐거운 결과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각 비유는 무엇인가를 잃은 이야기로 시작해서 잔치로 끝나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그분의 지극한 관심을 나타낸다.
한 목회자가 '예언의 소리' 방송을 듣고 반응을 보인 어느 가정을 방문했다. 한 명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성경 공부에 관심이 있었다. 부부와 딸은 이미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에 정규적인 방문을 바랐다. 그러나 아들은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성경공부에 함께하기를 원치 않았다. 목사가 방문하는 저녁 시간이 되면 아들은 공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했다. 6개월 동안 성경을 공부한 후 어느 날 그 목사는 성경공부에 참여한 3명에게 침례를 권했다. 하지만 그들은 침례를 결심하기까지는 몇 개월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들이 성경공부자리에 와서 목사님이 준비되는 대로 침례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연구 첫날에 중고서점에서 성경을 한 권 구입해서 그때까지 읽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고백할 필요를 느낄 만큼 확신이 들었다. 그 아들은 2주후에 침례를 받았고, 다른 가족들도 한 달 후에 신자의 대열에 섰다. 비유에서 읽은 것처럼 이런 결심을 보고 하늘에서는 큰 기쁨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 로마 백부장, 그분의 발에 일 년 봉급에 해당하는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 그리고 심지어 그런 자들과 함께하기에는 자신들이 너무도 거룩하다고 여겼던 수많은 '무가치한' 사람들과 의도적으로 접촉하셨다.
<부가설명> 자녀를 잃은 경험이 있는가?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경험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있다면 그 잃은 자녀를 찾기 위하여 얼마나 간절하고 얼마나 희생하는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지구에 대한 심정이 잃은 것을 찾는 세 가지 비유에서 나타내셨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하늘에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명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친히 사람이 되어 오셔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하면서 잃은 자녀를 찾으셨겠는가! 성경은 교회와 교인이 이런 심정을 가지기를 권고한다. 문제는 교인들이 자신을 잃어버린 존재로 여기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 다니지만 예수님을 참으로 만나지 못했으면 아직도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다. 교인들이 자기는 찾아진 존재로 확신하고 찾아주신 예수님을 확실히 신뢰하고 예수님을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 교인들 속에서 사시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께서 하신 것 같은 봉사를 하게 될 것이다.
교훈 : 예수님은 죄인들과 사귄다는 비난을 받으셨지만 잃은 자들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중요한 관심사이며 죄인이 돌아올 때마다 하늘에는 큰 기쁨이 있다.
셋째 날(화) 8월 2일 죄인들과 식사하심
1. 마 9:10~13을 읽어 보라. 비난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서 우리 각자가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기별은 무엇인가?(호 6:6 참고)
[마9:10~13]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답: 필요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데, 먼저는 필요를 느끼는 사람이 바로 필요로 하는 자이다. 예식보다는 불쌍히 여기는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식탁에 비스듬히 앉아 사회적으로 달갑지 않은 자들과 교제하며 음식을 나누셨다. 그대의 사회에서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달갑지 않은 부류에 속하는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제사와 대비되는 긍휼의 의미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사람들을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믿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를 배우라고 말씀하셔야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의 문제보다 종교 형식과 의식을 더 중요하게 여긴 구약시대의 잘못된 신앙의 문제와 동일한 문제를 본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분의 요점을 밝히기 위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셨다(호 6:6).
"허다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마태의 잔치에서 책망하셨던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그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품은 어떤 생각을 버리거나 혹은 어떤 우상과 같은 의견을 버리기보다는 오히려 빛 되시는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진리를 거절한다. 그들은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며 영적 빈곤을 깨닫지 못한다....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정신에 의해 행해지는 금식이나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시대의 소망, 280).
우리는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기 쉽다.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을 내려놓고 긍휼이 우리의 믿음이 되도록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이 지역사회나 세상 사람들과 섞이는 것은 그들과 같이 세상적인 즐거움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되도록 도우는 것이 목적이다. 섞이는 것이 이런 목적이 없으면 일반적 친교나 사교회에 참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신앙인이 되어서 생명 없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줄을 이어주는 간절한 정신으로 섞여야 한다. 이렇게 하려는데 제시한 복음을 짓밟고 그것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을 잘 판단해서 만나고 전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께서 하신 것을 다 기록하면 세상이라고 그것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안다고 했다.(요21:25) 기록된 것은 신자들이 꼭 깨달아야 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그들을 위하는 간절한 정신이 있는 것을 느꼈다.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만나서 천국복음을 적극적으로 전한 기록은 복음서에 별로 기록되지 않았다. 어쩌면 니고데모가 유일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유는 듣는 자들이 그 전한 복음을 공격의 도구로 삼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긍휼히 여기셨지만 그 긍휼을 거절하고 오히려 공격하려는 자들에게는 비유로 우회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7:6) 이런 문제에 우리는 확실한 능력이 없다. 기도하고 지혜를 구하여 임해야 할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자신을 의롭게 여기면서 타인을 업신여기는 사람의 신앙을 가증히 여기신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공허한 예배보다 긍휼의 태도를 바라신다.
넷째 날(수) 8월 3일 지혜롭게 섞임
어느 설교자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비재림교인 친구가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뒷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자신 있게 말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의 말은 좋은 의미였겠지만 자신이 세상에 어떤 종류의 빛이 되고 있는지에 대하여 많은 것을 시사했다.
앞서 보았듯이 마 5:13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지만 맛을 잃을 수 있는 소금이다. 어느 시돈의 상인이 헛간 맨땅에 소금을 많이 쌓아두었는데 땅에 닿아 있던 소금은 맛을 잃었다. 그래서 그 소금은 밖에 버려졌고 길을 까는 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상과 섞일 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의 고유한 맛을 빼앗아가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가?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가치와 같은가?
1. 우리는 다음의 말씀에서 세상과 섞여서는 안 되는 모습에 대해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창 13:5~13, 19:12~26, 민 25:1~3, 요일 2:16)
[창13:3~1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창19:12~26]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 13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15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18 롯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주여 그리 마옵소서 19 종이 주께 은혜를 얻었고 주께서 큰 인자를 내게 베푸사 내 생명을 구원하시오나 내가 도망하여 산까지 갈 수 없나이다 두렵건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나이다 20 보소서 저 성은 도망하기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로 그 곳에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 21 그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에도 네 소원을 들었은즉 너의 말하는 성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 하였더라 그러므로 그 성 이름을 소알이라 불렀더라 23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에 해가 돋았더라 24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25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민25: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답: 하나님의 사상과 적대적 상태에 있는 것과 사귀는 것은 위험하다.
이러한 성경의 예를 보면 우리는 요일 2:16에 열거된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자들과 어울릴 때 조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세상의 타락한 원칙에 빠진다고 해서 위험할 게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나쁜 감화를 받지 않으려고 우리 자신을 감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착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다음의 현명하고 균형 잡힌 권면을 들어보라.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은 거듭나지 않은 자들과 사귀기를 거절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과 교제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세상에 처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으며 그들의 길에 참여하지 않으며 그들에 의하여 감화를 받지 않고 그들의 습관과 행위에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의 사귐은 다른 이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목적이 있어야 한다"(가려 뽑은 기별 3권, 231).
<부가설명>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려운 것이다. 살아가는 환경은 모두 세상적인데 그곳에서 그들과 섞이고 어울리면서 하늘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예수께서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로워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그리스도인은 사귀는데 선별하게 되고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이 전도하기 위하여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났지만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가진 신앙의 원칙을 굳게 지킨 사실을 고전 9장에서 이야기한다. 신앙생활에는 원칙이 있다. 이 원칙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같은 원칙으로 살아가자고 권하는 것이 전도인데 전도하기 위하여 자기 신앙원칙을 희생하면서 전도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하고 기도하고 선별하고 섞여야 하는 것이다. 말은 쉬운데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만나야 하고 전해야 한다. 전하기 위하여서는 만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어울리기 위하여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나눠주기 위하여 만나야 한다. 우리가 만나고 섞이는 목적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교훈 : 우리는 세상의 죄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세상의 친구들과의 교제를 끊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날(목) 8월 4일 어그러진 세대 가운데서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세상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 한 것이 중요한 이유는 원래 우리 안에 있는 것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리스도께 받은 것들 덕택이다. 따라서 우리가 많은 것을 받았으므로 그것을 받지 못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부름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1. 빌 2:13~15을 읽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어떤 권면을 듣는가? 그러한 권면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멀리하지 않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부름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빌2:13~15]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답: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이루게 하실 것을 믿고 우리의 소원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흠 없는 자녀로 생활하면서 섞이고 만나면서 빛을 비춰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나머지 세상의 영혼들과 전혀 접촉하지 않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안전한 지대에 머물면서 영적으로 내향적인 인물이 되기 쉽다. 그러한 내향성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으로 전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죽어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문제보다 예배 형식과 교리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가?
로버트 리디컴은 그의 책(Empowering the Poor, 21~30)에서 교회를 3종류로 설명했다. (1) 도시(지역사회) 안에 있는 교회. 그러나 실제로 지역 사회에 접촉하지 않는다. 교회가 집중하는 일들은 대부분 신자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2) 도시(지역 사회)로 가는 교회. 이 교회는 교회가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지역 사회를 조사하지 않은 채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추측한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역에 지역주민들의 주인의식이 배제될 위험성이 있다. (3) 도시(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 이 교회는 그들이 섬기는 지역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구 통계를 분석한다. 신자들은 지역 주민과 지도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묻는다. 그들의 봉사는 연관성이 높고 호응이 좋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지역사회가 이미 그 교회를 인지하고 그 과정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그 지역이 어떤 사회를 이루어야 할지에 대하여 함께 고민하며 목표를 실현하는 일에 지역사회의 협력자가 된다. 그와 같은 교회는 지역 단체들에 관여하여 필요시 지역사회를 도와 부족한 면을 채운다. 그러면 양쪽 사이에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주인의식과 동반자 관계가 성립된다.
<부가설명> 참 이상과 현실이 부딪히는 장면이다. 그래도 이 일은 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세밀한 프로그램을 짜야 한다. 지역사회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언젠가 말한 것처럼 필요의 대부분은 사회가 수행하고 있다. 교회가 아니면 그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가장 분명한 것은 영생의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교회가 아니면 결코 채워줄 수 없는 필요이다. 문제는 그들이 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섞이면서 만나면서 이 필요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이 필요를 느끼도록 하는 것이 성도의 빛이 되는 생활이다. 성도들은 진정으로 빛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그 빛을 원하도록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전적으로 성령의 주장을 받아야 한다. 참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교훈 : 우리는 예수님께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에 아직 그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여섯째 날(금) 8월 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치료봉사>, 17~28 "우리의 모본"과 <시대의 소망>, 272~280 "레위 마태"를 읽어 보라.
교회의 사명은 그 자신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것이다. 교회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어느 다른 교단의 교회에는 지역사회와 연결되는 출입로에 이런 표시가 있다고 한다. "종들의 입구." 참 시사하는 바가 많다.
예수님은 이웃과 정말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엘렌 G. 화잇은 오늘날의 교회도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신자들은 소금으로서 지역사회에 스며들어야 한다.
"재림교회는 너무도 오랫동안 마치 세상에 다른 곳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만의 안전한 피난처와 사회 안에서 스스로를 고립시켜왔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변절한 상태에 머물러서도 머물 수도 없다. 이제는 신자 각자 그리고 교회가 지역사회로 들어가야 할 때이다."―Russell Burrill, How to Grow an Adventist Church (Fallbrook, Calif. : Hart Books, 2009), p. 5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위에서 표현한 대로 우리가 스스로를 고립시키므로 변절한 상태에 있다는 개념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그런 표현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대의 대답을 뒷받침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입니까?
※ 이 표현은 맞는 표현이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서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둔 상태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➋ 지역사회를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들 속에 섞여야 하지만, 우리가 지원을 얻어 내고 또 책임감을 부여해야 하는 대상은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얼마나 중요한 자원입니까? 우리는 세상을 섬기되 그것에 붙들리지 않도록 교회의 지체로서 어떻게 서로를 도와야 합니까?
※ 설명이 필요하지 않는 질문이 아닌가.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해야 한다.
➌ 교회가 봉사에 힘을 쏟기보다 내부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소비한다는 사실에 대해 토의해 보십시오. 이런 치명적인 덫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사회봉사 계획을 잘 세우고 교우들이 연합해서 지역사회를 섬기러 나가면 덫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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