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구약성경에 나타난 정의와 자비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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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7-09 06:02 조회8,646회 댓글2건본문
7월 16일 안식일
일몰 : 오후 7시 52분
기억절 :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시 146:7~9).
연구 범위 : 출 22:21~23, 출 23:2~9, 암 8:4~7, 사 1:13~17, 사 58:1~14, 행 20:35
몇 년 전, 뉴욕 시의 어느 겨울날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맨발의 아이가 추위에 떨며 유리창 너머로 신발 가게 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 여인이 그 아이에게 다가와 왜 창문 안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지 물었다. 그 아이는 신발 한 켤레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직원에게 양말 여섯 켤레를 주문했다. 그리고 한 대야의 물과 수건도 부탁했다. 그녀는 그 친구를 점포 뒤로 데리고 가서 장갑을 벗고 아이의 발을 씻겨준 다음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점원이 양말 여섯 켤레를 가져왔다. 그녀는 아이의 발에 양말을 신겨주고 신발 한 켤레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제 좀 평온해졌냐고 물었다. 그녀가 가려고 돌아서자 놀란 아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줌마가 하나님의 부인이신가요?"― www.inspirationalstories.com/1/198.html.
그 소년은 얼떨결에 진리를 말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분의 신부 곧 그분의 아내이다. 이번 기억절은 그분의 성품을 묘사한다. 그분이 세운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도 그분의 성품을 반사해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의 백성이라면 빈민과 약자를 열심히 돌봐야 한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일이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지역 주민들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➌ 행하기 : 말이 아닌 행동으로 절박한 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비를 보여준다.
A.
❶ 만약 그대가 세상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아담 안에서 죽은 모든 사람들의 썩어져가는 구습 때문이다.
❷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사회의 정의를 얼마나 중요하게 취급하실까요?
※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수단으로 나타내셨다.
❸ 선지자들은 왜 자기중심적인 예배를 심각하게 비판했다고 생각합니까?
※ 예배는 생활로 증거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❹ 우리가 지역 사회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예수님의 정신을 최대한 실현하는 것이다.
B.
❶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진리와 신자 생활의 불일치 현상이다.
❷ 안식일제도는 어떻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관심사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 날들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보편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❸ 우리가 소위 '끔찍한 증인'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어야 한다.
❹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사회 정의를 고민하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할까요?
※ 전도와 구제를 잘 실천하도록 운영해야 한다.
결론 : 인류가 당하는 가난, 소외, 슬픔과 아픔의 고통은 절대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직면하여서 하나님은 그분을 따르는 우리를 부르시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게 하셨다.
첫째 날(일) 7월 10일 자비와 정의 : 하나님 백성의 기호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
율법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을 보면 사회 정의는 초기 역사에서부터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사회 정의는 기본적인 필요 충족, 백성들의 번영, 평화가 지배하는 인간 사회 구현을 위한 하나님의 본래적인 계획이었다.
1. 다음의 성경절들을 읽고 자비와 정의 또는 종종 '사회 정의'라고 불리는 것들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요약해 보라(출 22:21~23, 23:2~9, 레 19:10, 잠 14:31, 29:7).
[출22:21~23]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 22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23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
[출23:2~9]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6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9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
[레19:10]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잠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잠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
답: 이방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잘 돌봐주라고 권하였다.
자비와 정의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안식일 율법에도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은 세 종류의 안식일을 열거하셨다.
2. 자비와 정의라는 개념은 각각의 안식일에 어떻게 적용되어 있는가?(출 20:8~10, 23:10~11, 레 25:8~55)
[출20:8~10]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제 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23:10,11] 너는 육 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11 제 칠 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레25:8~55]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답: 안식일에 모든 사람과 가축을 쉬게 하고 그것은 안식년으로 확장되면서 토지를 쉬게 하고 다시 희년으로 나아가서 모든 것을 제자리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의 정신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성경구절에 대한 설명들이 아래 있다.
1. 안식일 준수의 지침은 종이든, 가축이든, 외국인이든 모든 이에게 쉴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제공하라는 내용을 포함한다.
2. 매 칠 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은 부채를 탕감하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며, 노예들을 해방하는 기간이었다. 하나님은 가축들도 안식년의 혜택을 누리도록 백성들에게 지시하셨다(레 25:6~7 참고).
3. 희년은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난 뒤 오십년 째에 왔다. 타인에게 양도되었던 부동산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갔고 빚은 탕감되었으며 수감자들과 노예들은 해방되었다. 희년은 사회를 균등하게 하는 조정자였고, 모든 사람이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재작동 장치였다. 그것은 "빈부의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도록"(치료봉사, 185)하는 보호장치였다. 이러한 히브리 사회 구조 속에서 우리는 정의와 자비가 어떻게 약자에게 우호적으로 함께 작동했는지를 볼 수 있다.
<부가설명> 하나님께서는 죄가 망쳐놓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신다. 자비와 정의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생명의 하나님의 생명의 성질이 나타나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회복했으면 그 생명의 작용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창조주시며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소속된 존재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제7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데는 남종과 여종과 나그네를 돌보는 것과 짐승들을 쉬게 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평소 생활에서 이런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고 안식일에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찬양과 감사를 올리고 다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또 한 주일을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한 것이다.(요일3:8) 예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나타내신 일상생활의 모습은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자비와 정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교훈 :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상 속에서 사회 정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안식일 관련 제도들은 자비와 정의라는 개념과 관계가 깊다.
둘째 날(월) 7월 11일 보편적인 관심사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내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절대로 잊지 아니하리라..."(암 8:4~7).
1. 창 2:1~3을 읽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의 보편성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는가?
[창2:1~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답: 안식일을 창조 주일의 끝 날에 제정하셨다. 그것은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참된 쉼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만약 우리가 진정한 안식일 준수자라면, 우리는 자신의 휴식(출 23:12)과 속량(신 5:12~15) 그리고 새 땅에서 얻게 될 궁극적인 회복(사 66:22~23)에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이 땅에 살 고 있는 모든 자에게 쉼을 제공하는 분이심을 말해 준다. 안식일 휴식의 보편성 은 부자든지 빈민이든지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공통성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보편적인 부성애는 인류 속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평등성과 관심사를 의미한다.
어제 보았듯이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사는 제칠일 안식일에서 안식년으로 그리고 희년으로 확장된다. 레위기 23장과 25장에서 설명하는 세 가지 안식일 제도에 관한 원칙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확장되었다. 제칠일 안식일은 과거를 향해서는 영원한 창조를 가리키며 미래를 향해서는 십자가와 새 땅을 가리킨다. 그 것은 자비로운 창조주이자 구세주이신 분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강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너무도 사랑하시는 자들, 곧 절박한 필요를 느끼며 가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한다.
물론 안식년과 희년이 우리에게 변치 않는 원칙을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 절기를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타락 이전의 세계에서 창조시에 제정된 제칠일 안식일과 다르게 이 제도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로서 예수님의 사역과 희생을 가리켰으나 그분의 십자가 죽음으로 종결된 제의적인 안식일에 해당한다(골 2:16~17).
대신 이 제의적인 안식일 제도는 우리가 다른 이들 특히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관한 원칙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은 속량함을 입은 백성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고 치우침 없이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 보여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그분의 성품을 나타내야 했다.
<부가설명> 안식일은 일주일 중에 일곱째 날에만 지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안식일을 너무 좁게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 계명에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하라는 말씀이 있다.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하지 않고 일곱째 날에 교회당에 가서 예배하는 것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안식일을 올바르게 지키지 않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 대한 말씀만이 아니다. 일상생활 하는 동안 십계명의 모든 정신으로 힘써 생활하라는 것이다. 곧 예수님의 사랑을 힘써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제칠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에 포함되어 있다. 넷째 계명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안식일은 한 주일 내내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 계명의 사상이다. 한 주일 내내 창조주와 바른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다가 창조주와 특별히 만나는 시간인 안식일에 예배당에 가서 안식일을 그와 같이 지키는 모든 사람과 한 마음 한 뜻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정의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교훈 : 비록 안식년과 희년의 제도는 종결되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원칙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편적인 자비를 나타낼 의무를 배워야 한다.
셋째 날(화) 7월 12일 선지자들의 음성 1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1. 우리는 위의 말씀의 원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현재의 삶에 적용해야 하는가?
답: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든지 공평하게 판결을 받도록 도울 수 있는 한 도우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고 가르친다.
이번 주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해야 할 이상적인 행위의 일환으로써 자비와 정의라는 그분의 품성을 표현하는 것이 그분의 바람이라는 사실을 살펴보고 있다. 히브리 선지자들은 종종 궁핍한 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잘못 대변하고 있음을 회개하라고 호소하였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타적인 구원 행위를 진정한 예배와 동등하게 여기신다.
2. 사 1:13~17을 읽어 보라. 이 선언은 진실한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이 말씀의 뜻을 우리는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즉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사1:13~17]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답: 이 말씀의 원칙은 일상생활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활이 예배가 되지 않으면서 성전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고 가르친다. 지금도 동일한 원칙이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된다.
물론 많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그들의 생애를 초월한 미래의 사건들을 예언했지만, 그들은 현재의 영적, 도덕적 개혁과 이타적인 봉사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배에는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정작 주변에 고통당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동정을 나타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종이었던 선지자들의 음성은 크게 울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바빠서 곤궁한 자들을 도울 시간이 없는 사람보다 더 끔찍한 증인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봉사함으로 진정한 예배의 형태가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부가설명> 신약성경은 두 가지 예배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와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하는 진정한 예배가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하나는 예식을 갖추어서 드리는 예배이다. 다른 하나는 생활예배이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인데 예루살렘에서나 그리심 산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식을 갖추어서 엄숙하고 경건한 모양으로 예배해도 예배하는 사람이 영적 사람이 되어서 진리대로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활예배는 로마서 12장 1,2절에 있는 말씀이다.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했는데 여기 예배는 봉사를 뜻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생활이 예수님의 정신이 구현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둘이 잘 조화될 때에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특히 생활예배는 예식예배를 참 예배가 되게 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자비와 정의를 구현하는 생활인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소외된 자들에 대한 그분의 관심사를 잘못 나타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회개의 기별을 전하게 하셨다.
넷째 날(수) 7월 13일 선지자들의 음성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사 58:2).
이사야 58장은 그 당시와 현재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책망과 희망을 주는 특별한 기별을 전한다.
1. 하나님이 그 백성들 때문에 분개하신다(사 58:1 참고)는 선언이 있은 후에 그들에 대한 그분의 묘사는 어떠한가?
답: 금식하고 하나님을 찾기를 부지런히 하는 모양을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완전히 이기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지적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 없다고 지적하셨다.
이 성경절에서 하나님의 정확한 '어조'를 알 수는 없지만, 여호와께서는 분명히 그들의 외형적인 경건과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아시고 그들의 행위를 견책하신다. <현대인의 성경>은 사 58:2을 이렇게 번역했다. "그들은 마치 옳은 일을 행하며 내 명령을 저버리지 않은 것처럼 날마다 나를 찾고 내 법도를 알기 원한다. 그들은 또 나의 공정한 판단을 요구하고 나를 가까이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처럼 하며"
2. 사 58:3~14을 읽어 보라. 또 하나님은 그들의 잘못된 신앙 형태(이 경우에 금식)에 대해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여기서 큰 쟁점은 무엇인가?
[사58:3~14]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5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13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답: 금식의 진정한 의미와 참된 예배의 진실을 가르쳐주신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의 배려가 예배에 정신이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대한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예배는 너무도 자주 '주여, 저를 위해 이것을 해 주십시오.'라는 식의 자기중심적인 측면이 강하다. 물론 우리 각자의 개인적인 필요를 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은 진정한 예배란 굶주리고 고통 받고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려고 한다. 놀랍게도 남을 위한 이런 봉사는 도움을 받는 자들뿐 아니라 도움을 주는 자들에게도 복이 된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들에게 베푸는 봉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복을 받는다. 삶의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러한 복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3. 행 20:35을 읽고 여기서 약속하는 복을 어떻게 경험해 보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답: 다른 사람의 진정한 필요를 도우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다.(잠19:17) 하늘에 복을 쌓는 삶이다.
또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자들을 돕는 자들에게 어떤 기쁨과 만족과 희망이 넘치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보다 세상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반사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 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부가설명> 하나님은 주시고 돌보시는 분이시다. 생명을 주신 분은 생명을 받은 자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이 본능이다. 창조주께서는 그의 피조물들을 그렇게 돌보신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죄가 들어와서 이 형상이 깨어지고 사단의 본질인 사망이 되어서 썩어져가는 구습을 행하는 자들이 되었을 때 생명이시고 주시는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친히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와 부활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것이 사회정의를 세우도록 봉사하라는 것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3:12) 우리가 진정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런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우리 생명의 본질로 나타나게 된다.
교훈 : 하나님은 사회 정의 실현에 협력하지 않고 자기중심적인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신앙을 매우 심각하게 평가하시며 '주는 삶'을 실천하라고 호소하신다.
다섯째 날(목) 7월 14일 선을 위한 군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사야 58장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교적인 형식과 관습에는 열정적이었으나 그들의 신앙을 실질적인 방법으로 적용하는 데는 취약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성품과 진리를 드러내라는 구약 선지자들의 호소를 상기시키면서 오늘날의 교회에게 선을 위한 군대가 되라고 부르신다.
1. 아래의 성경절들을 읽어 보라. 우리는 지역 교회 그리고 세계 교회로서 이 영역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실행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 여야 하는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시 82:3).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답: 이렇게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회와 교인 개개인이 협력해서 일해야 한다.
어떤 도심 교회는 총기 사건으로 얼룩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2011년 어느 대 도시에서 개최된 '도시 선교 대회'에서 그 교회 목사의 선지자적인 음성이 또렷이 울려퍼졌다. 그는 '신자들이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해야 한다!'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나인성 과부 아들의 장례 행렬을 멈추셨던 예수님의 일화를 언급 하면서(눅 7:11~17), 그는 거리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동안 교회가 한가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던 사연을 설명했다. 그는 "우리가 그냥 찬미나 부르려고 세워진 교회입니까?"라고 회중에게 물었다. 우리가 이웃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일하는 교회인지 아닌지 우리도 스스로 물을 필요가 있다.
이 교회는 또한 지역 사회 발전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그 교회 찬양대는 7년 동안 지역 사회의 거리를 누볐다. 그들은 노래하며 전도지를 전하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봉사하였다.
지역 사회와의 이런 접촉을 통해서 그들은 곤궁한 자들에게 큰 용기가 되는 여러 방식으로 이웃에게 도움을 주었고 각양각색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그 지역의 큰 변화를 이끌었다. 이것은 교회가 지역 사회를 위한 섬김과 치유의 군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이다.
<부가설명> 현대는 정부가 치안을 담당하고 공공기관이 공식적인 입장으로 민생을 돌보지만 옛날에는 요즘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이다. 요즘 정부와 공공기관이 이런 일을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돌보는 일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진 구석들이 있다. 교회는 이들에게 봉사하는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정부와 공공기관이 하는 일에 함께 엮이는 것은 교회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길은 아닐 것이다. 이런 모든 일을 통해서 교회가 진짜로 하는 것은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이 말씀은 그냥 구제하는 것은 유익이 없다고 했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구제하고 동정하는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생명을 나누어주는 것이 빠진 구제와 돌봄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교훈 : 하나님은 오늘날의 교회가 선을 위한 군대가 되어서 악이 판치는 사회에서 사랑과 봉사의 행위로 변화를 일으키기를 기대하신다.
여섯째 날(금) 7월 15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부조와 선지자>, 307~314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 530~536 "가난한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을 읽어 보라.
정의와 자비의 개념은 구약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신 24:10~22을 보라. 여기에서 주어진 구체적인 지시에 주목하라. 우리는 이곳에서 빈민과 노동자 그리고 빚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볼 수 있다. 그분의 관심은 불운한 자들에 대한 추상적이고 고상한 언어가 아닌 부채가 있는 자들이나 가난한 노동자들과 같이 특정한 사례를 들어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명령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은 정의와 박애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과거에 처했던 상황과 불운했던 시절을 돌이켜 보라고 하신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22).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경제적 여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분에 넘치는 호의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부요함과 충만함으로부터 우리의 봉사와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섬기고 도울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종들도 안식일에 쉬어야 한다는 넷째 계명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개념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를 위해 일하거나 우리의 통제 아래 있는 자들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지를 보여줍니까?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보편성은 하나님 앞에 모든 인류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얼마나 극명하게 드러냅니까?
※ 죄의 세상에 사는 인간의 상태에서 안식일은 신분과 지위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쉼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지시한다. 가축되 함께 포함되었다.
➋ “그리스도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고 그분의 사역이 우리의 사역이 될 때에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설명한 금식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 엘렌 G. 화잇, Pacific Union Recorder, 1904. 7. 21.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을까요?
※ 가까이 있는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본을 따라야 한다.
댓글목록
성영주님의 댓글
성영주 작성일
목사님의 설명을 감동깊게 보고있습니다
감사의 글을 이제사 올립니다.
특히 생명에 대한 한결같은 설명은 새생명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늦었지만 이번주 교과내용중 안식일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갖게됩니다
개념을 좀더 구체화 하고 싶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사58장 에서 안식일에 오락을 금했는데 오락의 정의를 어떻게 하시는 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나를 즐겁게 하는 일체의 놀이(스포츠,게임,문화 등등)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문을 용서해 주시고 현답을 바랍니다
김명호님의 댓글
김명호 작성일성영주 성도님, 교과해설을 참고하신다니 감사합니다. 문의한 사실을 잠깐 살펴봅니다. 참고가 되기 바랍니다. ‘오락’은 히브리어로 ‘헤페츠’입니다. ‘쾌락’을 뜻합니다. ‘네 오락’은 자기의 육신적 쾌락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세상적 쾌락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13절에 ‘즐거운 날’의 ‘즐거운’은 ‘오네그’인데 ‘고상하고 격렬한 즐거움’을 뜻한다고 했네요.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헤페츠’보다 더욱 고상하고 격렬한 즐거움이 되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고상한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엿새 동안 계명의 원칙을 따라 생활한 결과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기쁨이 일상생활의 능력의 동력이 되고 그렇게 날마다 존재와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찬송이 되도록 살다가(엡1:12) 안식일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안방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감사하고 경배하며 찬양하고 말씀 듣는 기쁨이 헤페츠보다 고상한 즐거움이 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