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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과 만물의 회복(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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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6-25 08:11 조회8,8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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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일 안식일 

일몰 : 오후 7시 57분 

 

기억절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연구 범위  : 창 1:26~27, 신 6:5,
창 3:8~19, 약 4:4, 갈 4:19, 막 2:1~12, 요 10:10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면 주위를 둘러보라. 세상과 이웃 그리고 자신을 보라. 문제는 무엇인가?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다. 

그것은 타락 또는 죄, 아니면 반역 또는 대쟁투라고 불린다. 

다행히도 그것이 영구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세상 죄를 위해 죽으셨고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에 속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운 나라, 그분의 영원한 나라가 시작될 것이다. "이 여러 왕들의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망시키고 영원히 설 것이라"(단 2:44). 

얼마나 놀라운 회복인가! 

그러나 우리는 회복이 시작되도록 재림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기로 예정되어 있다(롬 8:29).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시고 다른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일 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신다.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죄가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켰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의 이상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 동정한다.


➌ 행하기 :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며 그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봉사하신 예수님의 모본을 따른다. 

 

A.

❷ 인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왜 훼손되었습니까?


※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생명을 일고 사망이 되었기 때문에 부패하게 된 것이다. 

❸ 인류가 겪는 불행을 되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 여자의 후손을 보내어 대속하게 하는 것이다. 

❹ 회복의 사역에 있어서 교회는 어떤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할까요? 

※ 교회는 이 회복의 기별을 증거하고 생활해야 한다. 


 

B.

❷ 죄는 인류의 삶과 지구의 환경에 어떤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까?


※ 사람을 위시해서 모든 것을 부패하게 하였다. 사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❸ 죄로 파괴된 것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는 무엇이었습니까?


※ 사망을 처리하고 생명을 드러내어 회복해야 한다. 구주가 그 일을 하셨다. 

❹ 회복의 사역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 교회가 제 기능을 다 하도록 지체된 교인들이 자기 역할을 건강하게 수행해야 한다. 

 

결론 :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속성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담과 하와는 그 선물을 오용했고 그 결과 인간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켰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이 그것을 온전히 회복시키실 날을 기다리며 그 형상을 되찾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첫째 날(일) 6월 26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성경을 보면 인류는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 1:27). 형상이란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나 사진처럼 2차원의 형태든지 동상이나 홀로그램 같은 3차원의 형태이다. 하지만 심상 또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처럼 형상은 비가시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형상’은 어떤 의미인가? 

 

1. 창 1:26~27을 읽어보라.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창 1:31, 신 6:5, 살전 5:23 참고) 

[창1:26,27]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답: 하나님의 형상은 외모나 내면이 모두를 포함한다.

 

첫 조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지구상에 '남과 여'라는 새로운 생명의 단위를 만드셨다. 그때 창조되었던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그들은 진화된 유인원이 아니었다. 인류는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과는 현격하게 달랐다. 이런 차이점을 축소시키는 모든 신학은 인류를 비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사람(아담)이라 일컬으셨"(창 5:2)다. 즉 남자와 여자 그 둘은 상이하고 구분된 존재였지만 여전히 하나였다. 그들은 온전함과 완전함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냈다. 

하나님의 형상은 본질적으로 온전하다. "아담이 창조주의 손으로 지음을 받았을 때 그의 육체와 지능과 영성(靈性)은 하나님을 매우 닮아 있었다"(교육, 15). 

히브리어로 '형상'은 '첼렘'이고, '모양'은 '데무트'이다. 이 말들은 육체적인 의미 (첼렘)와 영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을 포함하는 내적인 의미(데무트)를 함축한다. 엘렌 G. 화잇은 이런 인식하에 사람이 "외모나 품성에 있어서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하였다(부조와 선지자, 45). 

신 6:5은 마음(영적인 측면), 뜻(정신적인 측면), 힘(육체적인 측면)이 라는 인간 존재의 여러 차원을 언급한다. 살전 5:23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류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차원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부가설명> 성경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나타내는 두 단어 ‘첼렘’과 ‘데무트’가 함께 나란히 쓰인 것은 창세기 외에 없다. 26절에는 이 두 단어를 함께 썼지만 27절에는 ‘첼렘’만 썼다. 히브리 사람들이 이 두 단어를 엄격하게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도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하여 쓰지 않았음이 확실하다. 창세기 5장 1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데무트’를 썼고, 3절에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이라고 했을 때 모양은 ‘데무트’이고 형상은 ‘첼렘’이다. 교과저자는 첼렘은 외모이고 데무트는 내면이라고 한다. 절대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것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외면과 내면을 다 나타낸다. 다니엘서에 ‘인자 같은이’(단7:13)는 예수님인 것을 다 인정한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신 것은 다니엘서의 이 구절이 배경이다. 사람의 외모는 바로 말씀하나님의 모습인 것이다. 내면은 생명성(生命性)이고 그 생명이 드러내는 상태에 대한 말씀이다. 사람을 흙으로 지어놓고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을 주지 않았으면 사람에게 어떤 내면적 형상이 있겠는가. 이 생명은 하나님의 본질이다. 이것을 사람에게 불어넣어 주셨을 때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질인 사랑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여호와이시면 그 본질이 존재성과 생명성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 생명이 창조된 사람 안에 작용하면 우리가 말하기 좋아하면서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회복되는 것이다. 

 

교훈 

하나님은 사람을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 차원이 다른 존재로 만드셨다. 사람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였다. 

 

 

둘째 날(월) 6월 27일 타락과 그 여파 

 

성경에는 창조와 타락 사이가 얼마나 긴 기간이었는지에 관한 언급이 없다. 며칠, 몇 주, 몇 년이 흘렀는지 모른다. 

단지 우리는 타락이 있었고 그 영향이 즉각적이고 분명했다는 사실만을 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가장 먼저 불현듯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창 3:7).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으려 고 했다. 빛의 두루마기가 사라졌다(부조와 선지자, 57 참고). 죄와 이기심에 가까워지니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단절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의 첫째 부부에게 그들의 죄가 야기한 결과들을 알려주고자 하셨다. 

 

1. 다음의 성경절을 읽고 그 안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가 야기한 즉각적인 결과들을 찾아보라. 그와 동일한 죄의 영향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창 3:8~10]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 하나님의 낯을 보기를 두려워 피했다. 그들은 벗은 상태가 되었다. 

[창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 잘못을 남 탓으로 돌렸다.

[창 3:13]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이것도 역시 같은 사상이다.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기 싫어했다. 

[창 3:16]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 여자는 임신하는 고통을 얻었고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창 3:17~19]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환경이 변질이 되었고 마침내 창조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었다. 

 

타락은 인류에게 끔찍한 영향을 미친, 엄연한 실제의 사건이다. 오늘날의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이 길고 비극적인 인류의 이야기는 죄의 처참한 결과들을 드러낸다. 

하지만 언젠가는 죄의 비극이 끝나고 그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약속이 있다. 얼마나 감사한가! 

 

<부가설명>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타락과 죄를 도덕성으로 보고 있다. 이 교과도 그런 시각으로 쓴 것 같다. 나만이 죄와 타락을 존재와 생명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인가? 타락과 죄는 사람이 죽는 사실이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는 것이기보다는 죄가 곧 죽음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죄와 죽음을 동일시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5:17)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5:21) 이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17절은 범죄로 사망이 왕 노릇한다고 했다. 21절은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한다. 사망이 죄로 인해 왕 노릇하고 죄가 사망으로 왕 노릇하니 죄와 사망은 동일한 실상이 아닌가. 그런데 사망을 죄의 결과라고만 이해하면 그 죄가 무엇이라는 말인가? 죄를 짓지만 않으면 사망을 면할 것이 아닌가? 갓난아이는 어떤 죄를 지었는가? 태어난 것이 죄인가? 도덕과 윤리에서 그렇게 보는가? 아무리 갓태어난 아이라도 그는 이미 사망의 존재로 태어난다. 아담 안에서 썩어질 씨로 태어난다.(벧전1:23) 거듭나지 않은 것은 예외 없이 썩어질 씨로 태어난 것이다. 당연히 썩어져가는 구습을 행하게 된다.(엡4:22) 구습은 썩어질 씨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곧 사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패하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문제는 사망이 저지르는 문제이다. 사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은 삼위일체 여호와께만 있다. 이 생명은 본질이 사랑이기 때문에 도덕적 악이 나오지 않는다. 이 생명을 처음에 아담에게 주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아담이 생명을 잃자마자 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핑계하는 것이 곧 썩어져가는 구습이 나타나는 초기 단계였을 뿐이다. 

 

교훈 : 아담과 하와는 죄를 범하고 타락하였다. 그 결과는 즉각적이었고 인류의 삶과 지구의 운명에 중대하고 끔찍한 영향을 미쳤다. 

 

 

셋째 날(화) 6월 28일 원수 됨과 속죄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창 3:15). 

 

1. 창 3:14~15을 읽어보라. 하나님이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 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 

 

답: 여자의 후손이 인류를 대신하여 뱀과 싸워서 이길 것이라는 약속이다. 여자의 후손의 승리를 믿음으로 남자의 후손인 아담의 씨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t수 있는 희망이 있다. 

 

히브리어로 '원수 됨'을 뜻하는 단어는 '미워하다' 또는 '원수'를 뜻하는 단어와 어원이 같다. 인류의 첫 부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자신들뿐 아니라 인류까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게 하였다(롬 5:10, 골 1:21, 약 4:4 참고). 여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이 인류를 자신에게로 돌이켜서 그들의 적개심을 사탄에게로 옮기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인간의 적개심을 자신에게서 사탄에게로 옮기심으로 하나님은 그분의 왕국의 원칙을 어기지 않고도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방편을 수립하실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었던 것들을 궁극적으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셨고 앞으로도 행하실, 본래적인 의미의 '속죄' 사업이다. 

 

2. 다음의 말씀들은 속죄에 대하여 어떤 사실을 드러내는가?(레 1:3~4, 고전 5:7, 요일 1:9) 

[레1:3,4]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4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답: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을 상징하였고 예수께서 오셔서 그것을 성취하셨다. 

 

신학자들은 속죄가 작용하는 과정에 대해 말하면서 '죄를 갚음'이라는 뜻의 '엑스피에이션(expiation)'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이 말은 '무엇에 대하여 속죄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엑스피아레(expiare)'에서 유래했는데 거기에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배상한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행하여 법을 어기면 법원에서 잘못된 행동에 대하여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영어식 표현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그의 행위로 인해 사회에 빚을 진다'는 뜻이다. 

우리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죄를 짓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은 구원과 속죄의 계획 속에서 그릇된 행동의 법적인 결과로부터 우리를 건져낸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죄의 값을 치르셨다. 법적으로(하나님의 정부에도 당연히 법이 있음)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 그런 방법으로 공의의 요구들이 충족되었다. 오직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지만 용서를 받고 사면되었으며 그분의 시선에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다. 이것이 "만물을 회복하"(행 3:21)는 기초적이고 중요한 단계이다.

 

<부가설명>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성경을 기록하도록 성령께서 감동하셨지만 성경의 속죄는 세상의 법정에서 행하는 속죄와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유는 성경이 계시한 근본적인 죄가 세상 법정에서 취급하는 죄와 다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죄는 속전을 내고 사유함을 받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근본적인 죄는 사망 그 자체이기 때문에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들은 생명의 근원을 떠나서 생명이신분과 연결된 생명의 줄을 끊어버렸기 때문에 사망이 되어버렸다. 이 사망을 처리해야 비로소 생명으로 연결될 수 있는데 아담의 자손들은 이미 아담 안에서 생명줄이 끊어져 없어진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 생명이 끊어진 사망을 처리할 자격이 없다. 생명줄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 대신 사망을 당하고 그분이 또 사망을 이기고 생명을 얻을 때에만 아담 안에서 생명줄이 끊어진 아담의 모든 후손을 생명줄로 연결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속이다. 적개심 문제 이상이다. 사실 우리가 사단에게 적개심을 가진다고 해서 사망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일을 위해서 아담 안에서 생명줄이 끊어지지 않고 스스로 생명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와서 아담의 사망을 대신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대속과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구주 예수는 아담의 씨와 상관없이 생명이신 당신 자신이 생명의 씨가 되어서 남자를 전혀 경험한 일이 없는 동정녀에게 당신 자신의 생명으로 사람이 되어 탄생하신 것이다. 그래서 대속과 속죄가 성취되고 부활하셔서 누구든지 예수 안에 있으면 다시 생명줄이 연결되게 하신 것이다. 

 

교훈 : 인류는 죄를 짓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적개심을 사탄에게로 옮기는 계획을 수립하셨는데 그것이 속죄이다. 

 

 

넷째 날(수) 6월 29일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 

 

우리는 원래 완전하고 흠 없는 세상에서 완전하고 흠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홍수 이전에 이러한 낙원은 죄로 말미암아 유실되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사망, 폭력, 고통, 공포, 무지로 가득하게 되었다. 구원의 계획은 이러한 세상을 다시 원래의 완전함으로 되돌리기 위해 수립되었다. 그리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태초에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고상한 특성을 부여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균형이 잘 잡혀 있었고 온 몸의 능력은 모두 다 잘 조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락과 그 결과는 이 선물들을 그르쳤다. 죄는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고 거의 말살시켰다. 인류를 위한 구원의 계획이 세워지고 유예의 생명이 허락된 것은 이것을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다른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인간의 목적은 인간이 처음 창조 받았을 당시의 완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595). 비록 이러한 회복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를 때까지 완성되지는 않겠지만 그 과정은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다. 

 

1. 갈 4:19을 읽어 보라. 자신이 당면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바울이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답: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히 1:3을 보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 본체의 형상"으로 제시된다 (요 14:9, 고후 4:4, 골 1:15 비교).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기 위해 우리와 연합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동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다. 그분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그분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궁극의 경험은 재림의 날에 일어날 것이다 (고전 15:49, 요일 3:2 참고).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과정은 하늘의 이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시작되면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도 회복을 약속하시는 분께 데려가기를 염원할 것이다. 

 

<부가설명> 유치한 예를 들어보자. 늑대에게 사슴의 DNA를 심어서 사슴이 되도록 했다면 그 늑대는 더 이상 늑대가 아니고 사슴이다. 요즘은 DNA 유전자 이런 말을 많이 쓰지만 성경을 기록할 당시에는 그런 단어가 없었다. 그것을 종합해서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생명이다. 이 표현은 요즘도 전혀 뒤떨어진 표현이 아니고 최첨단표현이다. 생명, 이 말은 예나 지금이나 미래에나 항상 최첨단표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은 거듭나야 하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겠다고 한다. 해산은 아기를 낳는 것이다. 바울을 그의 전도를 받는 사람들이 아기로 태어나도록 수고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 태어나는 아기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난다. 이것은 바로 거듭남에 대한 말이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생명인 것이다. 요한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1,12)고 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을 때 우리가 진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 생명이 우리 생명이 되면 우리의 의식과 감정과 태도가 다 이 생명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예수님의 형상이다. 예수님의 형상의 본질은 예수님을 예수님 되게 한 그 생명이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이 본질인 생명이다. 이 생명을 얻으면 모든 것이 회복되게 되어 있다. 

 

교훈 : 죄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시켰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의 계획을 통해 그것은 회복되며 그 과정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섯째 날(목) 6월 30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회복의 역할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막 2:3). 

알다시피 이 세계는 완벽하게 창조되었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심하게 파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멸망이라는 운명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구원의 계획이 수립되었다(벧전 1:20 참고). 그리고 예수님은 개인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며, 이제는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신다. 모든 것이 끝나고 죄가 사라지면 파괴되었던 세상은 온전하게 회복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교회로 부르셔서 이러한 회복 사업에 참여하게 하신다. 

 

1. 막 2:1~12에서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려오기 위해서 끈기 있게 협력하는 자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라. 이 이야기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야 할 교회의 역할을 어떻게 예증하고 있는가? 

[막2:1~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답: 이 환자를 침상에 누워있는 대로 네 사람이 메고 와서 그 상을 줄에 달아 내렸다. 네 귀퉁이에 줄을 매었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교회가 균형진 협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으므로 그 집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에 이끌렸다. 그때 네 사람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병든 친구를 예수님 앞에 옮겨놓기 위해 지붕에 엄청 큰 구멍을 뚫었다. 예수님은 그의 죄를 사하시고 그의 마음에 평화를 주셨다. 그리고 일어나 걸으라고 명령하심으로 그를 회복시키셨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든지 전인적으로 회복되지 않으면 진정으로 치유될 수 없음을 보여주셨다. 

 

2.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나타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이러한 약속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소망을 얻을 수 있는가?(요 10:10, 요일 3:8)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일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답: 마귀의 일을 멸하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별을 압축한다면 요 10:10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진술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부가설명> 내가 교과 부가설명을 쓸 때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한 생명 이야기가 여기 나왔다. 우리에게 생명을 얻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 없는 죽은 자라는 사실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개념이다. 이 지구에 사는 인류는 아담 이후로 오직 예수님만 제외하고 다 생명 없는 죽은 자들이다. 그래서 생명이신 말씀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그 죽음을 대신 당하시고 당신의 생명으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생명과 썩지 않는 것을 드러내셨다.(딤후1:10) 이 생명이 예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이 생명을 얻는다. 그것이 영생의 생명이다. 예수님은 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기 위하여 사람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서 사망을 처리하시므로 사단의 일을 멸하시고 종내에는 사단 자체를 멸하신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들은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다. 이 생명이 있는 자들만 첫째 부활에 참여할 것이다. 우리가 이 생명을 얻으면 하나님은 무한히 기뻐하신다. 그것이 예수님이 사람 되어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 때문에 목적을 이룬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생명이 우리 안에 있는가? 이 생명의 작용이 우리 생활인가?

 

교훈 :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친구들은 오늘날 회복의 사역에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하도록 부름을 받은 교회의 역할을 잘 예증한다.

 

 

여섯째 날(금) 7월 1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사역에 대한 다른 성경절들을 읽어 보라(롬 8:29, 골 1:15, 3:9~11, 고후 3:18, 5:17). <부조와 선지자>, 44~70 "창조", "유혹과 타락", "구속의 경륜"을 읽어 보라.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할 때에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허락된 소망과 회복의 약속을 주목하게 하신다. 이런 일을 하도록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떤 교회들은 건강 프로그램과 봉사를 활용하여 지역 주민들에게 육체적인 회복을 제공한다. 교회 병원과 요양원들도 이와 동일한 목적을 위해 일한다. 생활의 필요를 돌볼 수 있도록 지역 주민들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는 정신적인 회복과 질적인 향상 이 일어난다. 교회는 학교를 세우고, 직업 교육을 제공하며, 읽고 쓰기를 가르치고, 학습을 지도하며, 심리 상담 등을 제공할 수도 있다.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회복과 풍성한 삶을 계속 추구하는 동안 점차 그들에게 영적, 도덕적인 회복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사실 이런 순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중요한 국면이다(엡 4:22~24참고). 교회는 세속의 어떤 사회 또는 보건 단체보다 이러한 영적 필요를 잘 채울 수 있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그대의 교회는 지역 주민들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회복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지 역 사회를 위해 교회의 회복 사역을 확장시키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 함께 나눠보십시오. 

※ 많은 경우 뉴스타트 집회를 한다.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열매를 맺도록 온 교회가 중풍병자 침상을 들 듯이 협력해서 후속초지를 잘해야 할 것이다. 

 

➋ 우리는 육체적인 회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건강을 되찾을지라도 생애 중 에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는다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온전한 회복이 오직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더욱 잘 증명하고 있습니까?  

※ 육체의 회복은 그 회복되어 건강하게 지내는 기간 동안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일시적으로 생조할 뿐이다. 

 

➌ '지금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 시작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토의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그러한 과정이 시작됐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한 회복이 일어나려면 왜 우리에게 분명한 하나님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까? 그런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한 마디로 진정으로 거듭나면 이 일이 다 이루어진다.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성경으로 분명히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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