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예수님의 마지막 나날(질문과 대답과 부가설명)06/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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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명호 작성일16-06-11 04:26 조회8,393회 댓글0건본문
6월 18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56분
기억절 :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
연구 범위 : 마 26:1~16, 눅 12:48, 마 26:17~19, 고전 5:7, 마 26:36~46, 마 26:51~75
이번 과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직전의 시점에 진입하신다. 이 세계뿐 아니라 우주도 창조 이후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한 순간을 마주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번 주에 살펴볼 사건에서 수많은 교훈을 끄집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주제, 즉 자유와 자유의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우리는 각 인물들이 자유라는 그 크고 값진 선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볼 것이다. 그리고 이 선물이 사용되는 방식에 따라 어떻게 엄청나고 영원한 결과들이 발생했는지 볼 것이다.
베드로, 유다 그리고 옥합을 가지고 온 여인도 모두 어떤 선택을 해야 했다. 심지어 예수님도 선택을 하셔야 했다. 그분의 인간 본성은 십자가 앞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절규하였지만 가장 위대한 분께서는 십자가로 가셔야 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남용했던 자유의지의 선물 때문에 예수님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셔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남용한 결과 다가올 멸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할 순간에 이르셨다.
➊ 깨닫기 : 우리가 충성하는 것과 충성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적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너무도 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우리의 변덕스러움을 자각하고 사탄의 계략에 말려들지 않는다.
➌ 행하기 : 제자들의 실수로부터 배우고 성경연구와 기도를 통해 연약함을 극복한다.
A.
❷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일화처럼 성경에서 ‘사랑의 낭비’라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 예수님의 희생이다.
❸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겪으신 고뇌는 십자가의 고통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줍니까?
※ 십자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분리를 나타낸다. 그것이 예수님의 고통이었다.
❹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들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사랑과 감사의 반응을 할 수 있을까요?
※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고 말씀에 굴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B.
❷ 유다는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예수님을 은화 삼십에 팔았을까요?
※ 아마도 자기의 욕망과 포부를 생각하고 그랬을 것이다.
❸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 인간이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 가장 약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❹ 우리가 마음을 온전히 주께 바치기를 원한다면 어떤 태도와 생각을 버려야 합니까?
※ 자기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진정으로 바라야 한다.
결론 : 예수님이 지상에서 보내셨던 마지막 시간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자기본위와 이기심으로 뭉쳐진 우리의 심령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구원과 우정을 영접하도록 강권함을 받습니다.
첫째날(일) 아름다운 일
6월 12일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 26:10).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살펴볼 것이다. 그분은 아직 십자가에 달리시지도, 부활하시지도,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구세주로 온전히 드러내시지도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아무리 그분을 사랑하고 흠모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그분이 누구시며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실지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 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기록과 특별히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바울의 강력한 논증을 통해 과거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실지에 대하여 당시의 제자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1.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마 26:1~16을 읽어 보라. 이런 값비싼 선물은 왜 중요하며 우리는 그것을 통해 예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마26:1~16]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4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 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9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답: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과 예수님께 가장 값비싼 향유를 붓는 사람을 대조하여 예수께서 장사를 위하여 예비하는 좋은 일을 했다고 하셨는데, 예수님을 죽이는 사람들이 결국 예수님의 향기를 온 세상에 흩날리도록 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며 성도들이 값비싼 헌신으로 주님의 생명의 향기를 온 세상에 전파하는 좋은 일을 해야 할 것을 암시하였다.
마태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아마도 예루살렘 입성 전에 발생했던)을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무르익고 있는 상황 속에 배치한 것이다. 그분의 친백성의 일부는 그분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어떤 이들은 마리아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마 26:7)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것처럼 주님께 주체할 수 없는 애정과 충절의 마음을 드렸다.
제자들이 그러한 낭비를 개탄할 때에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를 “좋은 일”로 일컬으셨다. 표면적으로는 지나친 낭비처럼 비춰지는 행동을 통해서 그녀는 예수님을 향한 내면의 깊고 진실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이 닥칠지 또는 자신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겠지만 예수님께 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 만큼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답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마도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눅 12:48)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보다 예수님의 행적을 훨씬 많이 목격했던 제자들은 아직도 그러한 요점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다.
<부가설명> 예수께서는 나드향을 부은 여자(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한 일을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며칠 있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다. 그것은 마치 여자 깨뜨린 옥합 같이 예수님의 몸이 깨뜨려질 것이다. 옥합이 깨뜨려지고 그 향내가 온 집에 가득하게 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영원한 생명의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 향기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향기가 될 것이고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향기가 될 것이다. 죽이려는 사람과 옥합을 깨뜨린 사람을 대조하여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마치 옥합을 깨뜨리는 것과 같지만 결과는 온 집에 향이 가득하게 될 것임을 상징한다. 아울러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암시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형기가 될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해야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향기를 풍기는가? 우리는 우리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도록 깨뜨리는가?
교훈 : 우리가 주의 사랑에 반응하여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베푸신 은혜에 비하면 결코 낭비일 수 없다.
둘째날(월) 새 언약
6월 13일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 26:26~27).
1. 마 26:17~19을 읽어 보라. 이때가 유월절이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출 12:1~17, 고전 5:7 참고)
[마26:17~19]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가라사대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19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출12:1~17]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2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3 너희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이 달 열흘에 너희 매인이 어린 양을 취할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되 4 그 어린 양에 대하여 식구가 너무 적으면 그 집의 이웃과 함께 인수를 따라서 하나를 취하면 각 사람의 식량을 따라서 너희 어린 양을 계산할 것이며 5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6 이 달 십사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7 그 피로 양을 먹을 집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8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9 날로나 물에 삶아서나 먹지 말고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10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하라 11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지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 15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16 너희에게 첫날에도 성회요 제 칠 일에도 성회가 되리니 이 두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각인의 식물만 너희가 갖출 것이니라 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니라.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답: 예수께서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실 예언이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출애굽의 이야기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속량과 구원을 베푸신 이야기이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해 행하실 일에 대한 얼마나 적절한 상징인가!
2. 마 26:26~29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그분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마26:26~29]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답: 유월절 떡과 포도즙은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하셨다. 언약의 피라고 하셨다. 우리가 이 예식을 행하여 예수님의 언약에 참여하게 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유월절의 깊은 의미를 가르치셨다. 애굽으로부터의 속량은 하나님의 능력과 왕권을 드러낸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히브리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정말 필요한 것은 그러한 속량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 곧 영생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예수님은 그들로 하여금 떡과 잔의 진정한 의미를 주목하게 하셨다. 그것들은 모두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장래에 있을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켰던 동물의 희생과 달리 이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을 돌이켜 보게 한다. 두 경우 모두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예수님을 주목하게 한다.
그러나 십자가가 끝이 아니다. 예수님이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마 26:29)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먹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분은 그들에게 미래와 재림 그리고 그 너머를 가리키고 계셨다.
<부가설명> 성경에는 실제로 미래에 있을 사건을 말하면서 과거형 동사를 쓰거나 완료형 동사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런 단어들을 강조해서 이미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 해석하고 완료된 사건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창세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13:8 구역)이라고 할 때 ‘죽임을 당한’이 완료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미 창세 때에 죽었다고 해석하려고 한다. 에베소 2:5,6에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했는데 ‘앉히시니’가 과거형 동사이다. 이 단어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다 하늘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 세상에 있다. 이런 완료형이나 과거형을 약속적 확신적 과거형 또는 완료형이라고 이해한다. 아직 현실은 이 세상에 있지만 이렇게 되는 것은 너무나 확실하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 확실한 사실을 이미 신자 개인에게 성취된 사건으로 과거형이나 완료형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미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하늘에 있는 것과 같다는 확신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창세함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다고 한 것은 때가 될 때에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에 완료형으로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은 기원 31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다. 그것은 이미 창세전에 삼위일명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그러게 하도록 의논 된 것이고 미리 정하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함으로부터라고 말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월절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잡수실 때 그때야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확실히 가르치시고 유월절에 유월절 양으로 죽으신 것이다. 창세전에 죽임을 당하기로 예정되었는데 예수께서 실제로 기원 31년에 죽지 않으셨다면 창세전에 예정은 빗나가게 되도 헛것이 된다. 약속과 성취는 한 꾸러미로 있는 것이지 하나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올바르게 보아야 할 것이다.
교훈 : 유월절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실 예수님을 가리켰으나 이제 성만찬은 그분의 죽음을 되돌아 보게 할 뿐 아니라 그 너머까지 가리킨다.
셋째날(화) 겟세마네
6월 14일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유월절 주간에 제사장들은 기드론 계곡 위의 언덕에 위치한 성전에서 수많은 양들을 제물로 바쳤다. 양들의 피는 제단에서 넘쳐 수로를 따라 기드론 계곡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시냇물은 양들의 피 때문에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길에 붉게 물든 이 냇물을 건넜을 것이다.
1. 마 26:36~46을 읽어 보라. 왜 겟세마네의 경험이 예수님께 그토록 어려웠는가? 실제로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마26:36~4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답: 예수님은 아버지와 영원히 분리 될 것을 염려하셨다고 예언의 신의 증언이 말한다. 사단은 예수님께 그렇게 충동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그 잔을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을 때 그분이 두려워하셨던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그분이 몹시도 무서워하셨던 잔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고, 우리를 대신해 죽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짊어지려면 아버지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범한 죄는 죽음이 요구될 만큼 매우 심각하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정확히 우리를 그 형벌에서 건지기 위해 그 죽음을 대신 당하시는 것이었다.
“당신 앞에 놓인 투쟁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사탄은 그리스도에게 만일 그가 죄악이 가득 찬 이 세상을 위하여 보증인이 된다면 하나님과는 영원히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분은 사탄의 왕국에 동화될 것이며 다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두려운 순간, 세계의 운명이 결정되려고 하는 순간이 이르렀다. 온 인류의 운명이 저울 위에서 떨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687, 690).
“그리스도께서는 지금이라도 범죄한 인류가 마셔야 할 잔을 거절하실 수도 있으셨다. 지금도 이 일은 너무 늦지 않았다. 그분은 이마에서 흐르는 피땀을 씻어버리고 죄 가운데 인류가 멸망하도록 버려두고 떠나가실 수도 있었다. 예수께서는 ‘범죄자로 하여금 그의 죄의 형벌을 받게 하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멸시와 고통의 쓴 잔을 마실 것인가? 무죄한 그분이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의 저주의 결과를 맛볼 것인가?”(시대의 소망, 690).
<부가설명> “예수님은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아시는데 십자가가 그렇게 두려워서 피땀을 흘리면서 이 잔을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 나 같으면 3일 만에 부활할 것이 확실하다면 죽음을 유쾌하게 맞을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은 일이 있는가? 나는 이런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시대의 소망에서는 위에 참고로 기록된 687, 690페이지에 있는 말씀으로 두려워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선지자의 영감으로 쓴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는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을 숙고하는 중에 루시퍼와 예수님의 투쟁과 관련하여 이해할 면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루시퍼는 자신이 여호와 집회의 산에 보좌를 놓으려고 하다가 예수님과 전쟁을 하게 되었다.(사14:12-14, 계12:7-9) 예수께서 루시퍼는 여호와 회의(렘23:18) 장소인 집회의 산에 앉을 수 없다고 선언하셨다. 미가엘 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 선언이다.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이름이 루시퍼의 도전에 응전하신 이름이다. 루시퍼는 말씀하나님을 여호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하나님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루시퍼는 예수님께 여호와인데 여호와의 권능을 행사하도록 충동하였다. 시험의 광야에서부터 그렇게 충동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그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삼위여호와 사이에 약속,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기로 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여호와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사단은 그것을 사용하라고 충동한다. 이것이 그분이 마실 잔의 핵심이 아닐까? 사단의 충동이 아무리 집요하고 친히 그 잔을 마시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권이 있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잔을 마셔야 한다.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이지 않았을까? 독자들이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교훈 :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그토록 죽음의 잔을 꺼려하셨던 이유는 그것이 단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분리였기 때문이다.
넷째날(수) 유다가 자신의 영혼을 팔다
6월 15일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마 26:48).
유다는 정말 비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그가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정 전에 죽었더라면 거룩한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영웅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그의 이름을 딴 교회들도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배신과 반역의 대명사가 되었다.
1. 요 6:70과 눅 22:3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유다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요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눅22:3]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답: 유다의 행동은 자신을 사단에게 팔았기 때문에 나타난 행동이다. 유다 속에서 사단이 작용한 것이다.
물론 유다를 배후에서 조종한 사탄을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문의 여지가 있다. 유다는 어떤 문제로 마귀가 자신을 그 같은 반역으로 이끌도록 허용했던 것인가? 물론 사탄은 베드로까지 앗아가기를 원했다(눅 22:31).
그러나 유다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바치기를 거절함으로써 버리지 못했던 몇 가지 죄와 품성적인 결함을 통해 사탄이 들어와서 그의 행동을 조종하도록 빌미를 제공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자유의지의 엄청난 결과를 목격한다.
2. 마 26:47~50과 27:1~10을 읽어 보라. 우리는 유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마26:47~50]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27:1~10]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말씀이 이루었나니 일렀으되 저희가 그 정가된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정가한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답: 유다는 자기의 계획을 실천하려고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신앙이 예수를 통하여 자기의 어떤 계획을 이루려는 의도라면 유다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 26:47~50에서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대동하고 약 6백 명의 검거부대를 이끌고 있는 모습을 본다. 얼마나 기세등등한 모습인가! 만약 그대가 사람들이 정말 바라는 것을 가졌다면 그대는 유다처럼 대단한 권력을 소유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그대가 그들이 바라는 것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그대가 소유한 것 때문에 그대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대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몇 시간 안에 유다는 손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홀로 남게 될 것이었다.
유다가 자신의 영혼을 무엇에 빼앗겼느냐에 초점을 맞추면 또 다른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은화 30냥? 어떤 은화이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 가치는 오늘날로 치면 1~4개월의 임금에 해당된다. 설령 액수가 그 보다 열 배, 백 배가 된들 그것이 그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지 생각해 보라. 심지어 그는 그마저도 잃게 된다. 그는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처음 준 자들의 발 앞에 던졌다. 이는 유다의 돈처럼 우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했던 것들, 우리의 영혼을 잃게 했던 것들이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유다는 영생에 매우 근접했었다. 그러나 그는 허망한 것을 위해 그것을 버리기로 선택했다.
<부가설명> 가룟 유다는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실 때 군중들 사이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할 것을 은근히 부추겼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군중들을 흩어 보내셨다.(요6:15) 다음 날 가버나움 회당에서 5천명을 먹이신 영적 복음적 의미를 강론했을 때 군중은 예수님을 떠났다. 아마도 그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왕이 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로마를 대항해서 왕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기로 작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중심으로 예수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자리를 마련하려고 엿보다가 겟세마네 동산에 군사들을 데리고 가서 예수를 잡으려고 하면 잡히지 않기 위하여 큰 권능을 사용할 것이고 그것을 신호로 혁명을 일으켜 예수의 능력으로 로마를 몰아내고 예수를 왕위에 옹위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계획이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면 이런 시도를 한다. 장사하면서 교회의 직함을 명함에 박아 선전하는 것이나, 예수를 믿는다는 신분을 내세우고 정직성을 그것을 증명하려는 태도나, 예수님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은 바로 가룟 유다의 정신이다.
교훈 :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지 않은 유다는 마귀가 틈을 타도록 허용함으로 결국 아무 가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
다섯째날(목) 베드로의 부인
6월 16일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예수님은 유다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분을 배신하리라는 사실을 사전에 아셨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가 인간 선택의 자유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성경의 여러 예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뿐 아니라 잔뜩 허세를 부리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달아나서 그분을 부인할 베드로의 모습도 아셨다.
1. 마 26:51~75을 읽어 보라.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부인했다고 생각하는가?
[마26:51~75]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69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답: 베드로 자신이 기대하던 예수가 아니라고 마음을 닫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가룟 유다처럼 예수가 유대의 왕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 기대가 어긋나자 예수는 그의 마음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리는 종종 베드로가 단지 두려워서 예수님을 부인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 군병들에 맞서 검을 빼들 만큼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요 18:10 참고). 예수님이 제지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기꺼이 명예롭게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고 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검을 휘두르던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을 때 과연 그의 마음속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왜 그는 자신이 그분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했을까? 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마 26:72)고 했을까?
그는 자신이 그를 잘못 알아봤고, 그가 오신 목적과 그의 체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공황상태에 빠진 그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다. 어쩌면 예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분을 부인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포기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 그도 포기했다. 베드로는 그가 목격했던 수많은 기적들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신의 대범한 고백에도 불구하고(마 16:16) 여전히 그분 자체를 온전히 신뢰하기보다는 그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더 많이 신뢰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주를 부인했던 경험은 우리가 온전히 그분께 마음을 드리지 않는 이상 세상에 어떤 기적과 징조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누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세 번째 부인했을 때에 예수님은 친히 “돌이켜 베드로를 보”(눅 22:61)셨다. 여기서 ‘보다’라는 뜻의 헬라어 ‘엠블레포’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에 예수님이 베드로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셨던 방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단어이다(요 1:42 참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베드로처럼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얻는다.
<부가설명>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 대하여 자기가 기대했던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 곧 마음을 거두고 그를 모르는 사람으로 대한다. 베드로가 군사들이 왔을 때 검으로 대항하는 용기를 보인 것은 예수께서 권능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혁명을 일으키기를 내심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냥 순순히 잡히실 때 그의 마음이 예수님에게서 돌아서게 되었다. 그가 예수님 뒤를 따라간 것은 어쩌면 혹시나 이제라도 하는 생각으로 갔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끝까지 그의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상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 여자 종이 베드로에게 예수와 한 당이라고 하자 거의 무의식적으로 예수를 부인했을 수도 있다. 자기가 기대하는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모른다고 대답한 것은 당연한 대답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도 오늘날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떤 인간적인 기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철저히 주님의 뜻이 되도록 기도하고 자아를 굴복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룟 유다나 베드로와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기 위하여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한다면 위험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교훈 : 우리가 아무리 많은 증거를 보고 스스로 굳게 다짐할지라도 온전히 마음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유지될 수 없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6월 17일
1959년 두 명의 불량배가 캔자스의 한 가정에 난입하여 부모와 두 십대 자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들이 발견되기 전에 피해자의 형제는 지역 신문에 다음과 같이 기고했다. “우리 고장은 큰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범인이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나무에 목을 매달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미 일은 저질러졌고, 또 다른 생명을 해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대신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용서합시다. 마음에 앙심을 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 일을 저지른 자도 앞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할 때에만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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